19세기 런던의 연구자이자 탐험가 아치볼드 레오폴드 루트모어, 어느 날 부두를 산책하다가 늙은 선원에게서 이상한 그림이 조각되어 있는 아주 커다란 이를 사들인다. 서재에 틀어박혀 몇 달 간 연구한 끝에 이 뿌리 안쪽에 새겨진 미세한 지도를 발견하고 옛 책에서 보았던 ‘거인족의 나라’를 확신한 그는 1849년 9월 29일, 동인도회사 무역선에 올라 인도를 거쳐 미얀마의 마르타방이라는 지역에 도착한다.
티벳에서 시작해 미얀마를 거쳐 인도양으로 향하는 살윈강과 흑해를 거슬러 올라가며 거인국에 닿을 생각이었던 그는 스무 명가량의 장정들과 두 척의 보트를 마련해 항해를 시작하고 두 달 만에 흑해에 도착하지만 상류로 갈수록 탐험은 고행이 된다. 거친 물살과 험한 절벽, 울창하고 위험한 삼림을 통과하며 선원 중 두 명이 실종되고 지쳐버린 사람들을 되돌려보내고 후한 보수에 남기로 한 용감한 원정대원들과 탐험을 계속하지만 사람의 머리를 절단 내는 와족의 침입에 모두 죽고 혼자만 남게 된다.
식물과 동물 표본을 채집하고 수첩에 그리고 기록하고 외롭고 힘든 탐험을 견뎠던 그는 혼자 남아 되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피로와 허기와 추위에 지친 채 나아가다가 절벽 사이로 비추는 빛줄기와 거인의 발자국을 발견한다. 정신을 잃은 듯 깊은 잠에 빠졌다 깨어난 그가 발견한 것은 계곡 곳곳에 큰 바위처럼 흩어져 있는 거대한 뼈들, 사투 끝에 도달한 거인의 나라를 확신하며 눈앞의 뼈들을 그리고 기록하고 일대를 탐험하며 꼬박 한 달을 보내면서 기력이 다해 쓰러진 그에게 거대한 돌기둥 같은 거인이 다가온다.
온몸에 미로 같은 금박 문신이 새겨진 남자 다섯, 여자 넷의 거인들은 감미롭게 노래하며 자신들이 만난 세계를 감응케한다. 주인공이 거쳐온 난관과 투쟁이 무색하게, 신비롭고 아름다운 낯선 존재들의 출현. 하지만 인간은 그만큼 지혜롭지 못하다. 비밀스럽게 간직하면 평화롭게 지속될 수 있는 다른 우주를 절멸로 내모는 것은 인간의 오만, 그들은 나지막하게 말할 뿐이다. “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니?” 책 말미 최재천 선생의 글 중 “자연에게 길은 곧 죽음입니다.”와 함께 책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은 두 문장이었다.
프랑수아 플라스•윤정임 옮김 2002.2.20.1판1쇄 2010.3.10.1판27쇄, 디자인하우스
잠수종과 독 _ 공과 현우, 진보적인 신문사 방화 후 자살시도했으나 의식 잃고 병원으로 후송된 용의자를 맡게 된 공 / 현우의 교통사고와 죽음 / 집중치료실, 현우를 잃고 오히려 잠수종처럼 심연으로 가라앉는 공이 용의자를 대면하는 공간 / 인간은 물리적 존재이며 모든 것은 변질된다는 믿음을 가진 공, 감정적이고 극단적인 선택에 충실했던 그것이 단점이자 매력이었던 현우
귀 이야기 _ 잠수종 다음에 잠수부, 서너 번의 만남 후 파도 속으로 사라진 십여 년 전의 연인 / 친척과 예수와의 강원도 여행 / 기능적이고 물리적인 귀의 면모와 함께 펼쳐지는 예수와 나의 다양하고 쌩뚱맞은 언쟁들, 닫을 수 없는 귀여서 들을 수밖에 없는 세상의 소음들처럼 느껴지기도 / '이승복기념관' / 같은 문장의 반복이 반복되며 만들어내는 리듬이 특이한, 첫 번째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문체
트로츠키와 야생란 _ 바이칼호 안의 섬, 연인이자 동거인이었던 이와 함께였던 시간을 회상하는 주인공 / 연인을 몰락시킨 자에게 복수를 (했다고 생각)하고 함께였던 과거로 도피 / 멕시코시티에서 암살당한 트로츠키, 바이칼호의 섬에서 빙상차를 운영하는 트로츠키 / 소련 체제 몰락 후 섬에서 살며 온실 속의 식물을 돌보는 트로츠키와 류다, 환경단체 내부고발로 일주일 만에 모든 것을 정리한 후 외부와의 단절과 고립 속에 식물에 탐닉하고 마침내 식물에 갇혀버린, 고원지대의 바위에서 추락해 식물인간이 된 그 / 복수(했다고 생각)한 이의 복귀 소식을 접하고 어둠 속 바이칼호를 걸어 집으로 돌아가려는 나, 식물들의 환상과 환영
•• _ 떠오르려고 올라간 옥상에서 마주친 까만 길고양이 토니를 바라보다 만나게 된 경찰, 그에게 마지막 인사로 녹음을 하는 나(은영), 토니가 가버리는 모습을 보다가 / 토니가 간 쪽의 길에서 애인과 이야기하던 동네 대학생이 편의점 앞 혼자 중얼거리는 알코올중독자와 검은 고양이 앨런 목격, 앨런이 편의점 쪽으로 향하자 언젠가 자신을 천사라고 말하는 과거 도장장이였던 알코올중독자와 나눈 대화 / 알코올중독자의 이야기가 계속되다가 깜장이가 부동산 쪽으로 향하자 부동산중개인의 말들, 그속에 등장하는 길냥이 밥 주다가 해고되고 길냥이 밥 주지 말라고 중개인이 동네에 붙인 벽보를 페북에 올리고 중개인의 꿈에 나타나 복수한 아가씨 그리고 과거 군대 시절 사회에서 도장파다가 와서 뭐든 반대로 하던 고문관 이야기 / 원한감정이 쌓인 천사들이 꿈에 나타나 멱살을 잡고 하늘로 올라가고 구름 위에서 막 패는 복수 / 떠드는 중개인 바라보던 길냥이가 중개인의 쫓음에 파출소 쪽으로, 층간소음 항의한다고 위층 가택침입 피의자로 온 칠십대 노인과 김순경의 대화. 자신이 사는 미래빌라 언급하다 언젠가 마주친 옆집의 아가씨가 곧 여기를 뜬다고 세상을 뜬다고 말한 걸 듣고 옥상에 가보라고 신고했던, 이야기하던 중 눈에 띈 길냥이를 나비라고 부르는 / 몸에서 떠오른 귀만 있는 존재가 되어 토니이자 앨런이자 깜둥이/깜장이자 나비인 까만 고양이가 이끄는 대로 동네 곳곳의 이야기를 만나게 되고, 어딘가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으로 동네를 배회한 고양이는 실은 자신을 챙겨주던 은영의 떠오름을 알리려던 것. 김순경이 걱정되어 찾아가지만 영물인 늙은 고양이와 천사(장)인 알코올중독자에게만 보이는, 실은 천사 은영의 떠오름? 그리고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눈앞에서 사라진 토니
유명한 정희 _ 어릴 적 살았던 셋집의 주인집 아들이었던 단짝친구 정희,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며 묵념을 하고 청소를 하다가 빨간 물통에 머리를 박는 잠수놀이를 하던. 어느 날 대통령이 서거하고, 도통 이기지 못하는 잠수놀이에서 오래오래 버티는 정희에게 알 수 없는 적의를 느낀 후 멀어진 / 아버지의 권고에 따라 의대에 진학하고 동아리에서 만난 정희의 조카이자 친구에게서 그의 소식을 듣고, 군복무하던 사관학교에서 그를 목격하지만 알은 체하지 않고 관찰만. 노선도처럼 정해진 인생 경로를 따라 결혼하고 개업하고 예의 바른 외계인들 같은 부부 생활이 끝난, 빼돌린 약물을 스스로에게 투약하며 운영하던 변두리의 작은 신경정신과병원에 찾아온 정희의 고백. 무엇에 대한 것인지 알 수 없이 살의를 느낀다는, 이후 광화문 보수집회 연단에 선 정희를 목격하고 얼마 후 청와대 앞에서의 분신사망 소식 / 병원을 정리하고 내려간 고향에서 엄마가 꺼낸 말, 대통령의 죽음 후 이름을 따라갈 운명을 걱정해 정희라는 이름을 바꿨던 주인공 / “기연가미연가”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됨, [其然-未然-]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분명하지 않은 모양을 나타내는 말, 긴가민가(동의어)
혹자가 말하길 _ 어린 시절 집성촌 비슷한 고향에서 이웃해 살았던 김지우와 염과 혹자 / 어른이 되어 도시에서 지우와 염이 결혼하고 혹자를 만나게 되는, 딱히 정답고 반가워보이지는 않지만 어릴 적 고향 친구랄 수 있는 관계로 집을 오가고 먹자골목에서 술자리도 갖던 염과 혹자 / 혹자는 죽은 건가, 살아 있는 건가? 혹자는 은연중 저어하는 마음이 있는 누군가를 상징하는 건가? / 솔직히 뭔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_ 왼쪽 면과 오른쪽 면이 나뉘어 두 개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은희를 클레오라고 부르는 K, 둘은 야녜스 바르다의 영화를 함께 보았고 은희가 사랑했던 사람은 영화의 배경이자 주인공이었던 파리로 떠났다. 사랑과 우울을 반복하던 클레오는 세상을 떠났고 K는 그가 뼛가루로 존재하는 춘천의 한 성당을 찾아간다. 함께하던 시절의 기억과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과 자신의 반응과 사유가 뒤범벅되어 안소니 홉킨스와 부르노 간츠를 닮은 머리를 잘라준 미용사와 성당 관리인이, 개구리를 삼킨 남자와 전철에 머물던 비둘기가, 삼켜졌던 개구리와 전철에서 벗어난 비둘기가, 클레오의 뼛가루와 혼령이... K의 의식의 흐름처럼 이어진다. 문구나 문장이 반복되는 리듬은 비슷했는데 자동기술처럼 이어지는 내용과 주절주절하는 듯 느껴지는 문체가 솔직히 갑갑하고 답답하게 느껴졌고, 만약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앞에 있다면 외면하게 될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작가의 시그니처 같은 문체라는 생각도 드는데,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내게는 인내심이 요구되는 스타일이었다. 유명한 영화지만 dvd만 사두고 보지는 못했는데 [도시를 걷는 여자들]에서 자세히 다룬 챕터를 읽어서 괜히 친숙한 덕인지 제목을 보고 가장 기대한 수록작이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살짝 낭패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코끼리 고구마 그리고 오조의 발목을 잡은 손들 _ 광장의 문화사를 연구하는 사회학과 대학원생 김수, 오래된 빌라의 버려진 화단을 오래 가꿔온 대장암을 앓는 80대 노인 명, 일찌기 돈의 흐름을 파악해 재테크와 부동산 투자에 능한 오조, 그들을 연결하는 소도시 도심권의 광장맨션과 프라자맨션 / 코끼리로 고구마로 또 무엇으로 변하며 보는 자가 보고 싶은 대로 보여주는 구름, 예나 지금이나 요구를 주장하고 관철하기 위해 광장에 모이는 사람들 그리고 법과 제도 소송을 이용하는 사람들
노보 아모르 _ 최근작으로 대(소)중의 비난을 받고 애인에게 이별 통보를 받고 의사에게 요양을 권고 받고 지방 소도시로 내려온 나, 희소성으로 단골 주점이 된 가게의 사장 자코메티와 바에 마주앉아 나누는 이야기. 혼자만의 상상에 빠지는 게 특기인 나는 홀에 앉은 세 사람의 상황을 누아르로 상상하고 암 환자 빙의 등의 행복 연습을 권하며 영화에도 훈수를 두는 자코메티를 고까워하지만, 그가 2차 항암을 앞두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주점을 나와 홀에 있던 청년의 접근으로 마무리되는 마지막, “노보 아모르”는 즐겨듣는 노래의 밴드명이기도 대중의 비난을 받은 작품명이기도 했지만, 그에게 나타난 새로운 인연일 수도. 여러 뮤지션과 영화감독이 언급되는데 예람과 생각의 여름은 좀 의외였고 하덕규는 정말 반가웠다.
소설을, 실은 이제 책 자체를 많이 읽지 않지만 때로 전혀 존재를 몰랐던 한국 작가의 소설을 읽으며 세계의 너름을 새삼 실감하곤 한다. 제목에 약간 끌렸고 수록작 제목들을 훑어보다가 영화를 좋아하는 듯한 작가가 궁금해져 선택. 우연 같은 언급을 통해 연결되는 서사와 인물, 내세울 것 없고 거창한 의미 부여를 할 만한 것이 전혀 주인공들, 사색적이고 현실적인 분위기에서 갑자기 혹은 자연스럽게 진입하는 신비와 초자연적인 현상의 세계. 흡사 환상문학 같은 느낌도 들었지만 어느 부분은 또 무척 현실의 디테일을 재현하고 있어 한 작가의 소설집이 맞나 싶기도 했다. 지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느낌을 주는 흥미로운 소설들이어서 신선했고 기회가 되면 다른 작품들도 읽어볼까 싶어졌다.
작가의 말 마지막 부분도 인상적이었는데, "아무도 진실을 소유하지 않지만 모두가 이해받을 권리가 있는, 매혹적인 상상력의 영토"라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의에 이어 그는 이렇게 쓴다. "그렇겠습니다. 세상에는 살아 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다보면 일상사에 바쁘다가도 어이없이 한가해지고, 차가운 마음이다가도 세상 모든 것이 문득 사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겠습니다."(297쪽)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겠다. 내게는 낯선 이름이었는데 찾아봤더니, 작가는 내게만 낯설 뿐인 이미 중견이었네. 몰라 뵈어서 미안합니다.
서양사 관련 책들을 읽으며 간혹 마주쳤던 제목이어서 궁금했었는데 '국내 최초 중세 프랑스어 원전 완역본'이라는 소개를 달고 지난해에 출간됐다. 반가워서 사두고는 살짝 엄두가 안 나서 묵혀뒀지만, 책장을 펼치자 생각보다 훨씬 쉽고 편안하게 다가오는 이야기였다. 원전은 총 291연 4,002행의 서사시인데, 첫 장부터 빼곡히 달린 413개의 각주가 내용과 번역, 당대 서사시의 관례와 올바른(?) 이해의 관점은 물론 일개 독자로서는 알 수 없는 운율과 자모 사용 등 형식에 대한 부분까지 그야말로 하나하나 짚어주듯 친절히 설명해준 덕분이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보면서 당시의 세계관이나 생활상, 기사도에 근거한 모험과 전투 등 많은 부분에서 거리감과 막연함을 느꼈었는데, 책을 읽으며 어느 정도는 알게 되고 때로는 감정 이입이 되어 즐거웠다. 처음 목차를 살펴보며 제목에 등장하는 주인공 롤랑이 너무 일찍 죽음을 맞이하는 게 의아했는데, 중반 이후 펼쳐지는 샤를마뉴의 복수와 마르실과 발리강이 합작한 이교도의 패배 그리고 롤랑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계략을 꾸민 배신자 가늘롱의 처단까지가 롤랑의 삶을 완결하는 사건인 것 같았다.
중세 무훈시라는 장르는 낯설었지만, 음유시인의 박진감 넘치는 낭독에 귀기울이며 희노애락에 빠져들었을 옛 청중들을 상상하면서 나도 그중 하나가 된 듯한 마음이 되어 읽었다. 활자뿐인 페이지를 읽으면서도 그런 상상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에는 전투가 벌어지는 벌판에, 음유시인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어느 극장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전기도 영화도 인터넷도 없던 세계에서 대중의 마음을 들었다놨다 했을, 천 년의 시간을 건너 살아남아 전해진 이야기라는 사실이 주는 어떤 고양감과 옅은 흥분도 은은히 감돌았던 것 같다.
과거의 사람들이라고 감정이나 인지 면에서 지금보다 둔하고 무딜 리만은 없지만, 기술과 문명의 발전과 함께 감응과 표현의 디테일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다단해졌을 거라는 내맘대로의 오해를 깔고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야기가 꽤 유치할 거라는 선입견을 품고 있었던 건데, 읽으며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몰입했던 걸 보면 현대인의 오만이었지 싶다. 명예와 신앙과 의리로 집약되는 정복자들의 서사는 때로 머나먼 이동과 행군을 과감히 생략하고 때로 같은 말을 몇 번씩 반복하며 메시지를 강조하는 형식으로 전개되었다. 아군의 전투와 승리를 위해 바람대로 해가 멈추고 대천사가 몇 번씩 내려오는 판타지가 당연한듯 섞여들고,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갑자기 이만이 기절하는 식의 귀엽고도 민망한 상황도 벌어지지만...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다른 조건과 환경, 지금 익숙한 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의 서술에서도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투쟁하는 삶은 시대를 막론하고 깊은 감흥을 선사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작품 자체도 재미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다가온 부분은 해제였다. 중세 프랑스어를 전공하며 오랫동안 이 작품의 완역에 공들였다는 번역자가 들려주는 프랑스어와 프랑스문학, 최고의 무훈시로 자리잡은 작품의 위상과 독일과 프랑스에서의 수용과 연구, 작품 속 큰 반전인 '샤를마뉴의 큰죄'에 대한 설명, 배경이 되는 중세 기사 시대의 여러 면모 및 발흥과 몰락 등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담겨 있다. 한 번 읽는 것으로 모두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천 년을 이어온 작품의 역사와 그속에 담긴 여러 요소들이 어떻게 현재에까지 의미를 갖게 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독자 북펀딩의 결과라는 걸 읽은 후에 알게 되었는데, 출간에 큰 힘이 되었다는 게임 마니아들과 천 년 전 이야기를 친절히 건네준 번역자에게 고맙다.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해버린 존재의 세계와 운명을 일인칭으로 그려내는 작가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어릴 적부터 익숙했던 이야기여서 그 기발하고 파격적인 상상력에 대해 무감했었던 것 같은데, 읽으면서 작가 자신의 가족 관계와 생활상이 투영된 자전적인 이야기 같아서 소설을 쓸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많이 궁금해졌다. 작가는 변태를 통해 가족들의 진심과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그레고르처럼 그렇게 사라지고 싶었던 걸까.
"선고"는 급격한 분위기의 반전과 전개가 당황스러웠고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을 읽으면서는 작가가 이야기의 모티브를 어디에서 얻은 것일지 많이 궁금해졌다. 역자의 해설에는 절반쯤 수긍할 수 있었는데, 거두절미 생의 아이러니에서는 약간 갸우뚱해졌고, 유대민족과 결부된 문제의식에서는 나의 아는 바가 너무 없어 막연해졌다.
오래 좋아한 것에 비해 읽은 게 별로 없는 작가. 어린 날 그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책과 [오드라덱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실린 산문들을 읽고 그 우울과, 거리감이 느껴지는 이상한 유머를 좋아했었다. 막스 브로트의 [나의 카프카]를 침대맡에서 몇 장씩 들춰보기도 했었는데 결심 없는 일상처럼 시작한 일이어선지 스르르 중단되고 말았다. 올해는 제대로 읽어보아야지, 가벼운 버전의 책을 마련했는데 이렇게 시작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프란츠 카프카•권세훈 옮김•이우창 그림 2007.1.5초판1쇄 2018.3.10초판10쇄발행, 해와나무
팬데믹의 시기를 통과하는 주인공들이 시간의 바통을 이어받으며 차례로 화자가 되어 펼쳐지는 이야기가 네 편의 작품에 담겼다. "요즘 애들", "보름 이후의 사랑", "우리가 되는 순간", "믿음에 대하여". 각 작품의 제목 아래에는 김남준, 고찬호, 유한영과 황은채, 임철우라는 이름이 병기되어 있다. 얼키고 설킨 다섯 사람의 사연들과 함께 한때는 모두에게 가장 극렬하고 자극적인 뉴스였던 팬데믹의 디테일, 아물지 않았지만 딱지가 앉은 채 익숙해져 잊고 살던 속살들을 다시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요즘 애들"의 김남준과 황은채는 20대에 첫 직장 동료로 만나 불합리한 허드렛일과 납득하기 어려운 비난을 함께 견뎠던 사이다. 5년이 지나 유튜브 방송 출연과 제작을 계기로 다시 만난 둘은 어눌하고 억울했던 사회초년생의 티를 확연히 벗었다. 남준은 파업 기간 대체인력 비정규직 중 유일한 정규직 전환자로 방송사에서 주목받는 신입 앵커가 되었고, 그 방송사의 협력업체에서 뉴미디어팀장으로 일하는 은채는 한때 자신들을 싸잡아 이르는 멸칭이었던 "요즘 애들"을 자신도 모르게 입에 올리는 선배가 되었다.
"보름 이후의 사랑"의 고찬호와 유한영은 동갑이지만 직급은 다른 동료로 만나 '이쪽'의 성적 지향을 공감대로 친구가 된다. 안정감 있는 관계를 유지하며 동거하는 애인이 있는 한영과 달리 찬호는 흑역사와 다를 바 없는 연애 이력으로 누군가에 대한 기대도 없어진 터다. 하지만 '성격이 곧 운명'이라는 말에 꽂혀 오랜만에 접속한 데이트앱에서 자신에게 접근한 김남준을 만나 연인이 된다. 나름 알려진 앵커로서 둘의 관계를 비밀에 부치려는 남준과의 관계에서 고민하던 찬호는 이별을 택하지만, 의외의 계획을 갖고 다시 찾아온 남준과 찬호는 함께 집을 사고 동거를 시작한다.
"우리가 되는 순간"에서 한영은 이직해 온 은채를 보며 리나 이모를 떠올린다. 귀춘이라는 본명 대신 원하는 대로 리나라는 이름을 불렀던 한영의 성장기에 이모는 큰 영향을 끼쳤다. 은채의 이직과 함께 한영도 회사 내에서 부서와 직급, 업무의 내용 등 많은 변화를 겪는다. 은채와 한영의 컨트롤타워는 사내 유일한 여성 임원 진연희다. 세대 차이를 실감하면서도 조금씩 그를 이해하며 '어른'의 세계에 진입하는 은채와 한영은 맡겨진 업무에서 괜찮은 실적을 달성하지만, 각자의 삶도 팬데믹이 휩쓴 세계의 상황도 헤쳐나가기 녹록지 않다.
"믿음에 대하여"는 투병 사실을 숨겼던 리나 이모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장례식장을 지키는 한영에게 불현듯 찾아온 기시감은 8년 전으로 이어진다. 동거하는 연인이었지만 갑작스러운 죽음 뒤 모든 게 거짓으로 밝혀진 Y. 그의 장례식장에서 한영은 또 다른 애인 철우를 만났고, 조심스러운 만남에 예를 갖추기 위해 빈소를 찾은 남준도 그곳에 있었다. 거짓으로 점철된 공동의 애인을 잃은 배신감과 상실감을 이따금 만나 나누던 한영과 철우는 연인이 되었다. 사랑하는 리나 이모가 세상을 떠난 뒤 한영이 변했듯, Y의 죽음은 잘 나가던 사진작가였던 철우의 삶을 뒤흔들고 변화시켰다. 이태원 이자카야를 운영하는 철우에게 팬데믹은 직접적으로 강력하게 작용했고, 한영의 강권으로 개인 회생 절차를 밟으며 두 사람은 정든 오랜 집을 떠난다. 한영의 도움으로 사진 작업을 시작한 철우의 이자카야 폐업 파티로 긴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너무 오래 임계점에 머물며 관성이 되어버린 이슈, 코로나 시대의 보고서 같기도 한 어른들의 성장소설이었다. 아련한 플래시백처럼 복기되는 찬호와 남준의 하우스워밍 파티, 과거 현장에서 마주친 적 있던 남준과 철우가 그 사실을 침묵하고 우연히 베란다로 숨어들어 나눈 키스. 마지막 몇 쪽은 거의 스릴러 같은 느낌이었는데, 얼핏 평범한 어깨동무의 뒷모습 같지만 팔 하나가 궁금증을 자아냈던 표지 그림의 의미를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작가가 털어놓은 두 사람과 독자들만의 비밀로 끝맺는 이야기가 거기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 같다는 느낌도. 작가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광신적인 엄마'가 이번에도 등장하는데 어느 정도의 자전성을 넘어 하나의 인장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그러한 영향을 지혜롭게 비껴나 괜찮은 어른으로 살아가는 철우가 작가의 바람을 반영한 캐릭터일까 싶기도 했다.
예전 부산국제영화제 가는 길에 첫 번째 소설집을 챙겨 기차에서 펼쳐들었다가 수록작 중 “부산국제영화제”가 있어 신기했었고, 일을 그만둔 뒤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를 아무 정보 없이 읽다가 ‘퇴사’라는 공통분모를 밭견하고 확 이입이 됐었다. 맥락은 완전히 다르지만 이번에는 ‘동거’ 그리고 며칠 전 부고 문자를 받고 생각했던 ‘본인 상’ 같은 것들에 잠시 마음이 멈췄는데, 갖다 붙이기 민망하지만 책을 펴들면 희한하게 개인적인 시의성과 마주하게 되어 작가의 이야기를 조금 더 각별하게 여기게 된다. 인물의 얼굴은 지워진 채 장면이 그려지는 묘사들이 많아서 영상화를 염두에 둔 걸까 싶을 때가 많았고, 별 차이 없다고 은연중 생각하지만 실은 '다른' 세대인 젊은이들의 생활상 그리고 함께 겪은 팬데믹 시대의 민낯들이 환기되어 흥미롭게 읽었다.
과학이라는 '걸림돌'에 잔뜩 긴장했는데, 각 작품에서 키워드로 삼는 원리와 이론에 대한 이해에의 욕심을 내려놓는 방식으로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다섯 편의 작품은 20세기를 배경으로 이전부터 이어져온 과학적 발견이 인류사에 미친 영향, 우주의 비밀에 다가가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과 경합, 세계의 심연을 보고 만 비범한 천재의 운명, 문명과 인류의 진보를 만들어낸 과학의 양면성과 그를 이끌어온 과학자들의 광기와 고투 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감사의 글'에서 작가는 "이 책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허구다. 뒤로 갈수록 허구의 비중이 커진다"(255쪽)고 밝히는데, 초반의 두 작품이 에세이처럼 느껴졌던 이유였던 것 같다.
첫 번째 수록작인 "프러시안블루"는 2차세계대전 이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선 헤르만 괴링의 손톱과 발톱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1782년에 최초의 현대적 합성 안료 프러시안블루에서 분리된 부산물"(16쪽)이었던 시안화물(청산)이 근대에는 성스러움을 표현하는 안료로 2차세계대전에서는 수많은 이들을 중독에 빠트리고 자살과 학살 물질로 쓰였던 역사를 전방위로 살핀다. 더불어 1차세계대전 당시 독가스를 사용한 화학전의 기수였고 질소 비료를 개발해 "공기에서 빵을 끄집어낸"(36쪽) 화학자 프리츠 하버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과학의 빛과 명암을 에세이처럼 기술한다.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에서 주인공은 1차세계대전 중 참호에서 "항성의 질량이 주변의 시공간을 구부리는 방식을 완벽하게 기술"(46쪽)한 아인슈타인의 방정식 해를 구해 편지를 보낸다. 독일의 저명한 천문대장이었던 슈바르츠실트는 명예심과 애국심으로 자원입대한 전장에서 과학적 열정을 발휘하며 복무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전쟁의 맹목성에 회의하며 자신의 발견에 매달리다가 아인슈타인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의 발견에서 중요한 것은 "항성이 짜부라들어 밀도가 계속 커지다보면 중력이 너무 세지는 바람에 공간이 무한히 휘어져 스스로를 감싸고 만다. 그 결과는 우주의 나머지 부분과 영영 단절되어 빠져나갈 수 없는 심연"(48쪽)이라는 것이었다. 이 '특이점'은 기존 물리학의 토대를 위협하는 것이었으며 그가 목격하는 참상의 곳곳에 겹쳐져 그를 매료시키며 공포로 몰아갔다.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블랙홀' 현상을 예언한 천재는 아인슈타인이 편지를 받았을 때 이미 전쟁의 여파로 만신창이가 되어 숨진 상태였다.
"심장의 심장"에는 수학자 모치즈키 신이치와 알렉산더 그로텐디크가 등장한다. 모치즈키가 스승으로 여겼다는 그로텐디크는 무정부주의 운동가였던 아버지와 좌파 일간지 기자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페인전쟁 시기 전장으로 떠났던 부부는 공화군이 패배한 후 프랑스로 피신해 아들과 함께 살았지만 정부에 의해 추방되었고, 아버지는 1942년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하고 어머니는 1957년 결핵으로 사망한다. 무국적자로 태어나 청소년기에 어머니를 잃은 그로텐디크는 일찍이 수학 천재로 명성을 얻었고 "수학적 대상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에 빛을 비출 수 있는 광선"(95쪽)인 모티브라는 관념을 탐구하며, "수학적 우주의 핵심에 자리잡은 이 기이한 실체를 '심장의 심장'"(95쪽)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연구에 정진하던 그는 1960년대 후반 베트남전쟁과 세계적인 저항운동에 뛰어들고 40대에는 '거대한 전환점'이라 부른 방향 전환을 통해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는 공동체를 꾸렸으며 이후에는 '생존과 삶'이라는 단체를 창설해 자급자족과 환경 보호, 평화를 위한 활동에 매진했으나 공동체는 변질되고 결국 해산한다. 후에는 명상과 집필을 하며 은거하면서 신비주의자의 삶을 살았고 2010년에는 자신의 모든 저작물과 기록에 대한 회수와 미래 판매 금지를 요구했고, 개봉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모교인 몽펠리에대학교에 문서 상자 네 개를 기증했다. 2014년 11월 13일 사망한 그로텐디크를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모치즈키, 정수론의 중요한 증명을 발표하고도 어떤 대외 활동도 하지 않았던 그가 2014년 몽펠리에대학교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여하기 위해 프랑스에 갔다가 강연 전날 불미스러운 일로 경비에게 쫓겨난 이유는 마지막에 드러난다. 실존했던 두 사람을 향한 작가의 애틋한 상상력이 찡한 결말이었다.
표제작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1920년대 중반부터 입자의 파동과 관련한 이론으로 경합을 벌인 에르빈 슈뢰딩거와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 드 브로이 공작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기본 입자들의 실체를 알고 싶었으며 모든 자연 현상의 공통된 뿌리를 파헤치고 싶었"(122쪽)던 하이젠베르크의 주장은 당시 과학계의 슈퍼스타로 등극한 슈뢰딩거의 이론에 밀려 무시되었고, 자신의 연구에 대한 확신이 강박과 중독으로 이어진 하이젠베르크는 요양차 떠난 헬골란트 섬에서 기이한 환각 체험과 함께 양자계를 모형화한 정합적인 행렬을 완성한다. 읽을 때는 흥미로웠지만 읽고 나니 사라져버린 양자역학을 둘러싼 이들의 주장 내용을 다시 톺아볼 엄두는 안 나지만, 책의 절반 분량을 차지하는 긴 이야기는 의외로 유머러스하고 주인공 세 사람의 개성이 잘 드러나서 재미있었다. 특히 슈뢰딩거가 성탄절을 앞두고 찾아간 빌라 헤어비히 요양원에서 겪는 원장의 딸 헤어비히 양과의 일화들이나 일방적으로 그에게 품는 욕망과 좌절과 자기혐오 같은 것들에 대한 묘사는, 넌픽션이 상당하겠지만 역사적 인물로 박제된 사람의 생동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양자역학도 파동함수도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들어만 봤을 뿐인 단어들이고 최대한 쉽게 기술했겠지만 이렇게 한 번 읽는 것으로 내가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개념들이라 아쉬웠지만, 하이젠베르크가 술집에서 만나 위협을 받은 사내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이 어마어마한 지옥이 당신 탓이 아니라면, 당신 같은 사람들 탓이라면 누구 탓이겠습니까? 말해봐요, 교수 양반. 이 모든 광기는 어디서 시작됐지요? 언제부터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춘 겁니까?"라는 거친 말이 관통하는 메시지를 통해서 불확정성과 우연이 지배하는 세계와 과학과 인류의 결정이 만든 지옥의 현실을 살짝 곱씹어볼 수는 있었다. 물론 이렇게 단세포같은 결론을 위해 쓰여진 작품은 아닐 거라는 생각도 함께.
"밤의 정원사"는 열 장 정도의 짧은 분량이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소설답게 읽혔고, 앞서 나왔던 많은 복잡한 이야기들을 한 궤로 아우르는 풍부한 은유를 담은 작품이라고 느꼈다. 식물 역병으로 죽어가는 나무들을 돌보는 밤의 정원사, 그는 할머니가 늘 좋아했고 돌보았던 나무에 목을 매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자란 후에 들었다. 밤의 정원사를 만난 '나'는 유럽인 이민자들이 건설한 마을에 퇴역 육군 중위가 지은 집을 사들였고, 어린 딸과 산책하며 매년 한두 마리씩 아마도 청산가리에 중독되어 죽은 개를 발견한다. 범인을 짐작하지만 확증할 수 없고 그 죽음은 계속 이어지지만 주목되지 않는다. 수학자이고 알코올중독자인 밤의 정원사는 프리츠 하버와 그로텐디크에 대해, 양자역학에 대해 말하지만 "과학자들조차 더는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252쪽)고도 말한다. 작가가 전하는 밤의 정원사의 마지막 말은 레몬나무가 죽는 이유다. 갖은 위험에서 살아남은 나무의 말년에는 무수한 레몬이 달려 한꺼번에 익고 그 초과 중량 때문에 모든 가지가 부러지는 "죽음을 앞둔 풍요"(254쪽).
역사적 사건에 가려졌던 다양한 이야기들과 함께 인류가 만든 진보와 그의 그늘을 꼼꼼히 탐색하는 책을 읽으며 잠시나마 생각의 지평이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이야기에 담긴 위대한 과학사적 발견과 이론 같은 것들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차피 과학자들도 더는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니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면 한심한 독후감이겠지만 사실이고. 뒤로 갈수록 픽션이 많이 가미되었다는데, 그럼에도 그로텐디크라는 수학자의 이름은 기억하고 싶어졌고 그의 극단적이지만 드라마틱한 삶에 대해서는 더 읽을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들끓으면서도 그 상태가 평시성이 되어버린 듯한 오늘의 현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지금이 바로 레몬 풍년의 시기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봄에 봤던 케네스 브레너의 [벨파스트]를 떠올리며 펼친 책장 속 이야기는 "목요일, 1969년"으로부터 시작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또래 친구들과 모여 놀며 '트러블'에 대한 소식을 들은 일곱 살 어밀리아 러빗의 일상이 달라지는 시점이다. 주머니 속 애벌레들을 만지작거리며 골목에서 뛰놀던 어밀리아는 창문과 문을 널판으로 막고 불을 끈 어두운 집, 식탁 아래에 기어들어가 영문 모를 바깥 세상의 총성과 폭력을 피하는 일에 점차 익숙해진다. 동네에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 거칠고 낯선 존재들이 활보하며 이따금 현관문을 두드린다.
세계는 지옥이 되었다.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로 나뉘어진 동네에 상주한 영국군과 경찰과 IRA 모두가 경계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숨죽인 거리에서는 조용한 참극이 이어진다. 부모도 선생도 늘 화가 나있고 아이들은 당연한 일처럼 폭언과 폭행에 적응하며 그들과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 성장한다. 친구들끼리 어울려 노는 것처럼,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도 일상이 된다. 소설은 디테일한 배경 설명과 함께 등장했던 인물의 죽음을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무심하게 다룬다. "동기 없어 보이는 범죄"가 만연하는 동네에서 영국군이 되어 벨파스트에 온 사촌이 그렇게 수순처럼 죽어 사라지고, 아직 죽지 않은 이들은 제각기 미친 상태가 되어 살아간다.
폭력이 일상이 되고, 폭력의 기억이 유령처럼 휘감은 삶은 판단중지와 환각의 세계를 오간다. 극한과 보통이 뒤섞인 '평범한' 세상은 거리에서 주운 수십 개의 고무탄을 어린 아이의 보물로 만든다. 다정함이 사라진 가족 사이에는 맹목적인 적대와 무관심이 가득하고, 어려서부터 거리를 함께 뛰놀며 자란 친구들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무릎쏘기"를 당하고 영화 속 "러시안 룰렛"을 재연하며 죽어간다. 벨파스트의 젊은이들 역시 디스코와 록 음악에 열광하며 청춘을 통과하지만, 그들에게 삶과 죽음은 늘 종이 한 장 차이로 지척에 있다. 광기와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에 태어나 이를 유일의 질서로 내면화하며 성장한 이들의 일상은 극단적으로 각박하고 피폐하다.
자연스러운 환경이 된 위험은 어느 날 느닷없이 누군가의 삶을 중단시키고, 살아가는 이들의 육체와 정신을 갉아먹는다. 도덕과 윤리가 사라진 세계를 채우는 것은 본능적인 욕망과 찰라의 희열을 좇는 중독이다. 한 무리처럼 어울리며 떼로 몰려다니는 친구들 속에서도 각자 외롭고 누구에게도 진정으로 기댈 수 없는 유년기를 보낸 청년들은, 미치거나 죽거나 떠난다. 서로에 대한 혐오가 공기처럼 떠돌고 우정도 사랑도 꿈도 무용지물로 전락한 세계가 선사하는 두려움과 어둠은 무감하게 견디다가 느닷없이 사라지는 존재를 재생산한다. 강인해보였던 어밀리아의 친언니 리지는 오랫동안 모은 약을 먹고 목숨을 끊고, 마침내 런던으로 떠난 어밀리아는 뇌리에 박혀 삶을 좀먹는 고향의 기억에 잠식당해 쓰러진다.
한 세대의 시간을 꽉 채운 '트러블'의 종료 가능성이 드러나는 1994년, 고통과 갈등이 만연한 세계를 배경으로 성장한 친구들은 "소풍"을 떠난다. 물리적인 폭력의 난무 속에 강박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며 살아남은 이들에게 난데없는 어밀리아의 제안은 낯설지만 궁금한 것이 되었다. 우발적으로 오른 배를 타고 닿은 곳은 래슬린 섬, 이방인에 대한 경계와 적대는 물론 친밀한 이들 사이에도 무관심과 혐오가 가득한 벨파스트의 축소판 같은 곳이다. 의도와 무관한 오해와 억측이 위험을 부르고 공포와 두려움 속에 무사귀환하는 어밀리아와 친구들을 확인하는 것이 책을 읽는 동안 유일하게 안도감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잔인한 현실에 냉정하게 거리를 둔 문체에 실린 이야기는 조마조마한 흡인력을 잃지 않는다. 주로 어밀리아의 시선에서 기술된 25년간의 시간 속에 제각각의 사연과 함께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필연적으로 미치거나 죽고 우연히 살아남는다. 영화 [벨파스트]에 담긴, 폭력 속에서도 살아숨쉬는 다정하고 따뜻한 기억은 케네스 브레너가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노 본스] 속 현실은 출구 없는 잔혹함과 그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며 버티다 끝내 무너져내리는 인간 군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지옥을 통과해 결국 살아남은 작가의 생존기이자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했던 이들을 향한 진혼곡처럼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2017년에 나온 [당신에게 말을 건다]가 좋았었다. 나고자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던 청년의 고민, 유년기의 요람이었던 서점의 추억과 세태 변화에 따른 쇠락, 돌아온 고향에서 서점지기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경험하고 느끼는 소회들이 담담히 담겨 있는 책이었다. 평범한 단어들의 조합이고 책의 제목으로 삼기에는 밋밋하다는 느낌이었지만, 3대째 이어온 속초의 서점 이야기라기에 집어들었다가 푹 빠져 읽었고 오래 여운이 남았다.
2019년에는 [나는 속초의 배 목수입니다]와 [속초]를 읽었고, 2020년을 시작하며 저자의 도슨트를 참고해 2박 3일 속초 여행을 다녀왔었다. 책 덕분에 찾아간 동명동성당과 조양동 선사유적지에서 호젓한 시간을 보냈고, 등대전망대와 영금정에서 속초의 바다와 만났다. 동아서점을 향할 때는 마음이 살짝 두근거렸는데, 종합서점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큰 규모에 놀랐고 서가 사이에서 책을 정리하는 저자의 뒷모습과 계산대에서 마주한 저자의 아버지를 힐긋거리며 혼자만의 속인사를 건넸던 기억이 있다.
작은 동네책방을 꿈꾸던 내게 동아서점은 재방문의 기약 없이 잘 지내길 바라는 먼 책방이 되었지만, 감정과 문장의 온도가 참 마음에 들었던 저자의 새 책이 나왔다는 소식은 반가웠다. 영업이 끝나고 작은 불빛만을 켜둔 "밤의 서점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진지하게 몰입해 책을 고르는 청소년 독자에게 "좋은 책을 고르는 법"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가라앉은 내 마음 때문인지, 예전보다 수사가 많고 문장이 화려해진 느낌도 들었지만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될 자신의 실수와 욕심 같은 것들까지 기록하고 성찰하는 솔직함은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만의 책방은 '흔한' 로망이다. 자기만의 무언가를 꿈꾸는 일은 어느 시대, 어느 세대에나 유효한 것 같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한 발 물러나 좋아하는 이야기들을 좇으며 보내는 시간의 안온함은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유혹이기도 하다. 하지만 혼자서 감당할 만한 작은 규모의 서점이 아니라면, 그 서점이 내 한 몸을 넘어 가족의 생계와 직결되는 일터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질 테다. 책에는 '그런' 서점의 지기로 살아가며 흐른 시간 만큼 쌓인 각종의 고단함과 보람이 녹아 있는데, 푸념 일색은 아니지만 읽으며 마음이 짠해지는 대목이 많았다.
나중에야 가족 회의를 통해 일요일을 휴무로 정했다지만, 휴일도 없이 하루의 절반을 서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글을 쓰는 생활을 몇 년간 지속하는 일은 대단해 보였다. 첫 책에도 서점의 일 중 책을 나르고 묶고 정리하는 과정의 큰 비중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2만 권 규모의 장서를 관리하는 물리적인 노동에 고유의 색깔을 지닌 큐레이션 서점을 운영하기 위한 정신적인 노동, '유명세'와 함께 생겨났을 부가적인 상황들을 감히 생각해보면 더 그런 느낌이다. 그것이 곧 '성장'의 과정일 수도 있겠지만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 너무 고강도의 일상이다 싶었고, 하여 온가족이 걱정한다는 저자의 건강에 대해 고개가 끄덕여졌다.
버거운 규칙 속에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는 어린 딸을 안고 놀이터로 향하고, 함께 일하는 아내와 서점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다투기도 하며, 다양한 요청을 안고 방문하는 손님들을 응대하는 하루하루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무게다. 그러나 부러 귀퉁이가 손상된 책을 사가는 속 깊은 손님, 홀로 '그림책 선생님' 삼아 배움을 건네받는 손님, 서점의 시간과 함께 청소년에서 성년이 된 손님, 서점을 배경으로 매년 '코닥 모먼트'를 남기는 손님 등 반복되는 일과를 다른 매일로 만들어주는 이들이 있었다. 읽으며 내가 다 고마운 마음이 되었다.
저자의 시선을 통과한 서점과 세상의 이야기들도 좋았지만, 글 꼭지마다 소개되는 책들의 목록도 마음에 들었다. 서점지기 이전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마음에 큰 자리를 차지한 사람의 소중한 큐레이션을 건네받는 기분이었다. 커다란 서점을 어깨에 이고 사람에 치이며 만성이 된 경계심을 품고 평정심을 바라는 이야기들을 읽을 때 느꼈던 안타까움이 상쇄되고, 이런 작가와 책 들이 있어 가끔은 무너지는 그의 한 부분을 떠받쳐주고 있었구나 싶었다. 존재를 몰랐던 작가와 책, 이름과 제목만 익숙한 채 흘려보냈던 책, 이런 책이 나왔다는 걸 왜 몰랐었지 싶은 책의 제목들을 메모하며 언젠가 읽어보리라 생각했다.
개인적인 이유로 읽으며 가장 큰 느낌표를 동반한 문구는 "한 주 동안에만 출간되는 신간이 약 1260종(<2021년 한국출판연감>에 따르면 2020년 출간된 신간 종수가 6만 5792종. 이를 주 단위로 계산해보면 일주일에 약 1260종의 신간이 출간된 셈이다.)."(78쪽)이라는 부분이었다. 큐레이션에 대해 이야기하며 언급한 내용인데, 온라인 서점의 메인페이지에 며칠씩 흐르다 사라지는 신간들과 페이지 곳곳에 각종 이벤트와 함께 명멸하는 책들이 떠올랐다. 구매에 비해 사용에 드는 노력과 시간이 현저히 많은 책이라는 독특한 상품의 운명도 그렇지만, 그렇게 쏟아져나오는 책들 중에 내 손에 닿고 끝까지 읽게 되는 책들과의 인연에 대해서도 새삼 생각이 미쳤다.
동아서점에 갔을 때 책방의 베스트셀러 목록 첫 번째에 [당신에게 말을 건다]가 적혀 있는 걸 보았었다. 몇 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제 그 자리는 이 책이 차지하고 있을 것 같다. 책을 읽은 후 저자와 가족에 대해 꽤 많은 걸 알게 된 느낌과 함께, 세상으로 나간 책들 만큼이나 불특정다수의 접촉면을 유지하며 책방 문을 연 시간에는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저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책은 생각보다 큰 용기를 들여 쓴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르셀 푸르스트가 젊은 시절 펴낸 작품집 [쾌락과 나날]의 소설 중 네 편을 추려 당시 수록 순서와 똑같이 실은 단편집이다. 파리 귀부인들의 살롱과 별장을 드나들던 이십 대 중반의 작가는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헤시오도스의 [노동과 나날]을 패러디한 제목을 붙여 고가의 호화 장정본의 작품집으로 출간했고, 당시엔 대다수 독자의 외면을 받았다고 번역가는 '옮긴이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
책에는 사교계를 배경으로 한 네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첫 번째 "실바니아 자작 발다사르 실방드의 죽음"과 마지막 "질투의 끝"은 남성이 주인공이고 사랑과 욕망, 삶과 죽음이 주요 사건이 된다는 점에서 유사한 느낌이었고, 중간에 차례로 실린 "비올랑트 혹은 사교계의 삶"과 "어느 아가씨의 고백"은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유년 시절의 순수함과 세속적 욕망을 따라가는 삶을 대비시키고 쾌락의 공허함을 성찰하는 내용이 맥을 같이하는 느낌이었다.
"실바니아 자작 발다사르 실방드의 죽음"의 주인공은 이른 나이에 죽을 병에 걸린 자작 발다사르, 열세 번째 생일을 맞은 조카 알렉시가 인사를 드리러 가기 전 갈등과 혼란에 휩싸인 장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시점을 오가며 드러나는 알렉시와 발다사르의 내면 묘사가 인상적이다. 만개한 젊음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알렉시가 다음 해 생일에 느끼는 전년과는 판이한 감정, 기복을 오가며 삶을 반추하고 죽음을 의식하던 발다사르가 극적인 쾌유의 소식을 들은 후 느끼는 죽음에의 향수 같은 것들. 이십 대 초반에 쓴 첫 소설에서 죽음을 전면에 내세우고 입체적으로 탐구하며 당사자의 아이러니한 심리를 치밀하게 그려낸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비올랑트 혹은 사교계의 삶"은 시골에서 명상적인 어린 시절을 보낸 비올랑트가 사교계에서 모두를 사로잡으며 성공한 후 음악과 사색, 고독, 들녘 같은 과거 자신이 사랑했던 것들을 잃은 채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야기다. 욕망과 쾌락이 지배하는 화려한 세계에 익숙해진 비올랑트가 한편으로 권태와 허무를 느끼며 남편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시점이 언제나 '모레'라는 것, 작가는 이를 결국 '습관의 힘'으로 규정하는데 배경과 달리 현대적으로 느껴지던 소설이 갑자기 교훈적으로 마무리되어 신기했다.
"어느 아가씨의 고백"은 부모에게는 정숙한 딸이었지만 사교계에서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젊은 여성의 회고다. 자살할 결심으로 총구를 당겼지만 빗맞아 삶의 시간이 일주일 남은 상태에서 '아가씨'는 어린 시절과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고백한다. 어머니의 권유로 결혼을 약속했지만 약혼자가 없는 파티에서 다른 남자와 무절제하게 쾌락을 탐하다가 그 순간을 목격한 어머니가 충격으로 쓰러지자, 목숨을 끊기로 했고 실행했지만 실패했다.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서정적인 묘사에 이어지는 과거의 타락, 내면의 가책과 갈등, 영혼의 소생과 환희 그리고 사랑하는 어머니가 자신의 부정을 인식하기 못했기만을 바라며 현실을 부정하는 혼란 등이 속도감 있는 스릴러처럼 읽혔다.
"질투의 끝"은 미망인인 손느 부인, 프랑수아즈를 사랑하는 오노레의 이야기다. 오노레는 쉽게 사랑이 식는 편이었지만 프랑수아즈를 향한 마음만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지극해 영원히 사랑하지는 않게 해달라고 기도할 정도다. 하지만 어느 날 증거도 없는 뷔브르의 말 한 마디에 시작된 의심은 곧 불안과 시기와 질투를 동반하고 강박으로 자리잡는다. 시간이 흘러도, 마차의 말에 채여 다리가 부러지고 죽음이 임박해도, 오노레의 마음속에는 프랑수아즈에 대한 집요한 의지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오노레의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그렇게 질투가 끝났다."
짧은 분량임에도 작품마다 장이 나뉘어 있고 시작 부분에 문학 작품에서 인용한 짧은 문구나 제목이 붙어 있어, 해당 부분에 등장하는 내용을 암시하고 있었다. 보들레르처럼 이름을 들어본 작가도 있지만 세비네 부인처럼 처음 들어본 경우도 많았는데, 인용 문구의 출처와 간략한 해설이 19세기 이전 프랑스 문학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푸르스트의 문장이라기보다 번역자의 문장이지만, 어차피 원문을 읽을 수 없을 테고) 감정을 이입할 만한 상황이 아님에도 맥락 없이 공감되는 문장이 종종 있어서, 문학이 담아내는 인간의 보편성이 이런 것일까 싶기도 했다.
얇은 책이지만 마르셀 푸르스트라는 이름의 무게 때문에 읽기 전부터 거리감이 있었는데, 서두에 실린 박상영 작가의 추천사가 적절하게 부담을 덜어주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기를 시도한 적은 없지만 잘 알려져 있는 작중 인물이 마들렌을 베어 물며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빠져드는 설정이나 즐겨 사용했다는 의식의 흐름 기법의 심리 묘사가 사용된 작품들이어서 초기작에서부터 드러난 작가 특유의 개성이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껏 내가 읽은 가장 긴 분량의 책은 [티보가의 사람들]인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그보다 30% 정도는 더 길다고 하니 읽기에 도전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저 멀리에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내는 듯한 마르셀 푸르스트의 소설을 아주 살짝 맛본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