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가 작가 초년 시절을 보냈던 1920년대 파리에서의 생활을 담은 에세이다. 29편의 글이 1부 “움직이는 축제”와 2부 “파리 스케치”로 나뉘어져 있다. 각부의 마지막 한두 편을 제외하면 두 부분에 실린 글들의 배경 시간대나 다루는 인물들에서 큰 변별성이 없는데 굳이 나눠 묶은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 찾아보니, 1부는 1961년 사망 후 1964년에 출간된 에세이집에 수록된 글들이고 2부는 2010년에 추가된 초고 상태의 글들이라고 한다.
거두절미하고 파리의 어느 날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대체로 시간순으로 흘러가지만 파리 생활이 시작된 계기나 과정 등에 대한 설명은 없다. 시인 베를렌이 숨을 거둔 호텔 꼭대기 층의 작업실에서 단편 작업에 몰두하는 헤밍웨이는 이제 막 문단에 발을 들인 신참이다. 아내 해들리와 함께 사는 작은 아파트는 계단참에 공동 화장실이 있고 염소떼를 몰고 다니며 젖을 파는 상인을 흔히 볼 수 있는 가난한 동네에 있다. 캐나다 언론사의 특파원으로 생계를 해결하는 빠듯한 살림으로 자주 허기에 시달리는 생활이지만, 부부는 함께 산책하고 때때로 경마장을 찾는다. 겨울이 오면 추위를 피해 스위스며 스페인 등지로 떠나 집필을 하고 스키를 타며 여유를 즐기기도 한다.
책에는 이름을 알릴만한 대표작이 아직 없는 헤밍웨이의 문학적 재능을 알아보고 기꺼이 친구가 되는 많은 지인들이 등장한다. 당시 파리 문화예술계의 중심 인물이었던 거트루드 스타인를 비롯해 시인이자 문학계 마당발이었던 에즈라 파운드, 소설가이자 문학잡지 발행인 폭스 매덕스 폭스, [위대한 개츠비]로 떠오른 소설가 스콧 피츠제랄드와 젤다 부부, 대여문고를 운영하는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의 실비아 비치 등이다. 글쓰기에 대한 야망과 열정 가득한 20대 청년 헤밍웨이는 그들의 격려와 호의로 친분을 쌓고 문학과 예술에 대한 고민과 의견을 나눈다. 이외에도 내게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의 많은 작가들 그리고 특별한 교류의 에피소드는 없지만 제임스 조이스와 피카소 등도 언급되며 당시 파리 문화예술계의 분위기를 더한다.
특히 거투르드 스타인과 스콧 피츠제랄드와 관련된 일화들이 꽤 비중을 차지한다.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잃어버린 세대’라는 타이틀을 붙인 거트루드 스타인의 직설적인 독설과 명예남성 같은 캐릭터 묘사, 방문할 때마다 헤밍웨이와 독대하며 둘만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여자들의 구역에서 수를 놓는 앨리스와 함께였던 해들리의 처지, 결국은 ‘이상하기 짝이 없는 결별’로 마무리된 기울어진 권력장 속에서의 관계. 견디지 못하는 술을 과음하고 취해 기절하곤 했던 스콧과 누구보다 사교계에 열심이었던 젤다 부부의 기묘한 사랑과 질투, 악천후 때문에 두고 온 차를 가지고 오기 위한 스콧과의 엉망진창 리옹 여행 등등. [미드나잇 인 파리]가 연상되기도 했던 이런 부분들은 전체적으로 대사로 처리한 구절이 많아 생생하고 흥미로웠고, 짧은 소설처럼 읽히기도 했다.
초반부에서는 미지의 미래인 소설가로서의 성공을 위해 분투하는 자로서 이미 성공한 이들과의 만남과 교류에서 느끼는 거리감과 괴리 등이 어느 정도 드러나는데 비해, 그들과의 만남이 빈번해지고 친밀도가 높아진 후반부에서는 은은한 풍자와 비판적인 시선이 더해진다. ‘예술가가 아닌’ 해들리를 진지한 대화 상대로 여기지 않은 건 마찬가지지만 헤밍웨이를 지지하는 문학계 인사로서 보인 실비아 비치와 거트루드 스타인의 태도, 자유롭고 제멋대로인 질다와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해들리의 성격과 언행에 대한 묘사가 대비적으로 느껴진다.
카페에서의 글쓰기로부터 시작되는 글이지만, 핫한 카페를 전전하며 건들거리는 뭇 작가들과 달리 아는 사람들의 방해를 피해 조용한 카페를 찾아서 진지하게 글쓰기에 몰두한 후 홀로 센강변을 걸으며 사색하고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함께하는 ‘건전한’ 일상을 영위하던 헤밍웨이 자신의 변화도 책에는 드러난다. 유명 인사들과의 친분으로 알게 모르게 삶에 침투한 허풍과 화려함 그리고 일상이 된 ‘카페 생활’, 그러나 마침내는 모든 이들의 부재를 말하며 덧없음으로 마무리되는 글의 흐름이 인상적이다.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압도적인 비중은 아내 해들리가 차지한다. 만남과 결혼에 대해서도, 헤밍웨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도 생략하지만 화려한 도시에서 꿈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두 사람의 가난하지만 애틋한 일상은, 수십 년 후의 회고담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생동감 넘치게 기록되어 있다. 헤밍웨이의 스위스 출장 후 이어질 여행에 합류하기 위해 그간의 모든 원고를 사본까지 챙겨 리옹역을 출발한 해들리가 가방을 도둑맞은 엄청난 일도 발생하지만, 운명공동체처럼 굳건한 부부의 신뢰는 변함이 없다. 다양한 개성과 분방한 행태의 예술가들과 함께하는 생활에서 해들리의 소박함과 수수함은 헤밍웨이가 초심을 잃지 않고 나아가는 원동력이자 안정감의 토대처럼 느껴진다.
사망 50년이 지나 출간된 2부의 마지막 두 글에서는 앞선 글들에 비해 내밀한 사정과 사적인 소회가 깊이 묻어난다. 다소 우회적으로 서술되지만 “파일럿 피시와 부자들”에는 해들리와의 파경과 파리 생활의 끝에 대한 이야기가 직접 나오고, 마지막 글인 “허무 그리고 허무”는 아예 이렇게 시작된다. “이것은 해들리와 내가 우리는 안전하다고 믿었던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과 갔던 장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는 안전하지 않았고 첫 번째 파리 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첫 번째 아내 해들리와의 사랑이 건재한 가운데 시작된 또 다른 사랑, 변명 같기도 하지만 당사자의 회한이 너무 극심해 보여 어쩌면 그가 네 번이나 결혼했던 건 첫 번째의 실패로 인한 거였을까, 그럼에도 생의 허무를 떨쳐내지 못하고 그런 최후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싶기도 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 함께였던 사랑을 스스로 저버린 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선명히 남은 아름다운 기억과 그만큼의 고통이 이 글들을 쓰게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찡해지기도 했다. 나이 든 작가의 아픈 회상을 읽으며 나이 들어가는 자로서 느끼는 공감 지점이 적지 않았고, 어쩌면 사람은 가장 사랑했던 기억을 마지막까지 갖고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등장했던 모든 이들이 고인이 된지 이미 한참 지났고, 그게 누구나의 삶이라는 당연한 사실 때문인지 마지막에는 진한 여운이 남았다. 헤밍웨이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걸 책날개에서 먼저 보았는데, 게다가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소가 아이다호라니.
완전히 다른 맥락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유럽 기행]을 읽고 나니 유럽의 도시 이야기를 읽고 싶어져 선택한 책이었다. 어떤 부분은 많이 달라졌을 파리의 거리와 건물들이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어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을 것 같고, 지금까지도 이름이 남은 많은 문화예술인들의 알려지지 않은 모습들이 출간과 함께 꽤 화제가 되었을 것 같다. 작가의 이름과 대표작 몇 권의 제목만 아는 무식함이 책을 재미있게 읽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 글이 아니라 사람으로 겪게 된다면 불감당일 뜨거움과 마초 기질과 왕성하고 열정적인 성향, 동시에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성정 등이 책을 읽은 후 찾아본 그의 인생사와 더불어 꽤 매력적으로 느껴져 민망하기도 했다. 명성 때문인지 거의 동시대인처럼 느껴지는 작가의 야성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삶과 글의 독보성에 약간 반해서 이참에 그의 대표작들을 읽어볼까 싶어지기도 한데, 실행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냉전 시기였던 1957년, 동유럽 여러 나라와 러시아를 여행한 기록이다. 작가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접경이자 최전선인 베를린에서 시작해 사회주의의 심장부 소비에트 연방을 거쳐, 반소련 혁명에 실패했지만 그 맹아는 살아 있는 헝가리에서 여정을 마무리한다.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품고 충동적으로 결행한 여행이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를 거쳐 러시아에 닿을 때쯤 마침 모스크바에서는 ‘세계청년축전’이 열린다. 조국의 군사독재로 유럽에 머물며 사회주의에 대해 호의적 궁금증을 가졌던 작가는 그들이 보여주고 싶은 현실과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의 긴장과 괴리를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한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출신의 언론계 동료들과 함께 ‘철의 장막’을 통과해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으로 넘어가는 장면이 시작이다. 어렵사리 검문을 통과한 그들이 마주하는 것은 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외부의 힘으로 부자연스럽게 복구된 도시 풍경이다. 급조된 자본주의의 활력이 넘치는 서베를린과 조잡하고 압도적인 러시아풍으로 단장된 동베를린의 겉모습은 대조적이지만 재건의 방식과 목적은 다르지 않다. 인민의 삶을 통해 사회주의의 민낯을 보고자 했던 작가는 사회주의 수립 후 해외로 도피하지 못하고 체제를 혐오하며 살아가는 재산을 몰수당한 사람들, 소비에트가 이식한 동독의 혁명을 부정하는 마르크스주의 학생들, 독일의 통일과 외국 주둔군의 철수를 바라는 평범한 사람들,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기계적이고 지루한 일상을 보내는 러시아 주둔군들 등 장막 뒤에 가려진 다양한 군상을 통해 편린의 진실을 전한다.
동서 유럽의 여러 나라는 물론 소비에트 연방에도 기계류를 수출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경 넘기는 유연하고, 기차에서 만난 시민들은 정치에 초연한 듯 보인다. 작가는 프라하를 ‘가장 소화하기 힘든 영향들을 너무 살찌지도 않고 위궤양에 걸리지도 않고서 잘 흡수한 도시’라 칭하며 고대와 현대의 균형, 군과 시민의 통합이 유지되는 현상을 인상적으로 기록한다. 괴멸된 바르샤바에 우뚝한 소비에트 연방의 선물 문화궁전에 대한 위화감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주민들의 공산주의와 가톨릭에 대한 열정이 공존하는 폴란드에서는, 아우슈비츠 희생자의 사진들 속에서 자신을 안내하던 젊은 통역사의 아버지를 마주하기도 한다. 기차가 국경을 지날 때마다 제각각인 관세와 환율, 출입국 정책이 만들어내는 에피소드들은 전쟁이 끝난 후 거대한 두 우산 아래 복속된 작은 나라들의 격차와 혼란을 보여준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후 나는 돋보기 너머에 있다는 인상을 받아요.” 라는 세계학생축전 영국 대표단원을 인용하며 작가는 모스크바를 ‘세계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고 표현한다. 오차 없이 운행되는 정확한 시간표와 버튼이 하나뿐인 라디오 수신기가 장착된 러시아의 기차는, 다양한 인종과 언어와 문화가 존재하지만 독특한 획일성을 보여주는 광활한 대국의 첫인상이다. 러시아에 진입한 후 며칠간 기차가 정차할 때마다 각지의 주민들은 놀랄 만한 환영 의례를 선보이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듯 선물과 인사를 참가단에게 전하는데, 그 격렬함은 모스크바에서 절정에 달한다. 광기라고도 할 만한 반응을 작가는 오랫동안 고립되어 살아온 이들이 발하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해석하면서도 그 모든 것이 자발적인 것인지 배후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한다. 고도로 조직된 거대한 축제의 한복판에서 그 어떤 것도 분명히 알아낼 수 없었다고 인정하지만, 잠시 열린 러시아에서 만난 내부인과 외부인 모두가 서로와 세계에 대해 열렬히 알고 싶어 하는 상태였다고 생각한다. 축전에 참가하고 싶어 6개월간 스페인어를 공부한 30년 경력의 푸주한 남성이 증인이 될 수 있겠다.
작가는 스탈린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생각이 특히 궁금했고 수없이 질문했지만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했는데, 통역사를 자청하며 고리키 극장에 동행한 중년의 연극 무대 디자이너에게서만은 명확한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공포 정치 하에서 수많은 예술가 동료를 잃은 그녀는 극장에 이르러 “우리는 이곳을 ‘감자 극장’이라고 불러요. 이곳에서 연기한 최고의 배우들은 모두 땅 밑에 있거든요.” 라고 말한다.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와 최악의 전체주의 국가를 이끈 두 인물, 레닌과 스탈린의 영묘를 둘러보고 떠나기까지 공식적으로 전시되지 않은 현실을 열심히 탐색한 작가에게 가장 강력하게 다가온 러시아의 현재는 만연한 관료주의의 폐해다. 체제 경쟁과 공포 정치, 극심한 불균형 발전과 양극화 등은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열광한 축전의 화려함에도 감춰지지 않았고, ‘관료주의자’라는 말이 새로운 욕설로 통한다는 그곳에서 프라하에서도 등장하지 않았던 프란츠 카프카가 소환된다. 이어 계엄령 하의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넘어간 작가가 여행기를 마무리하는 지점은 10개월 전 소련의 종속에 반대하는 혁명의 시발점이 된 장소다. 이름의 무게가 주는 이미지 때문에 내가 모르는 시대의 비밀과 인문학적인 깊이가 상당할 거라는 피상적인 기대와 우려가 있었는데, 모르는 사실이 많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쉽게 잘 읽혔다. 극심한 냉전과 체제 경쟁이 가른 세상 저 편을 탐험하며 제한되고 차단된 정보의 조각들로 그곳과 그들을 그려내는 작가의 솜씨 덕인 것 같다. 여행 당시에도 글을 쓰는 순간에도 이유를 알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차이를 그대로 남겨두는 선택이 마음에 들었고, 멀지 않은 과거지만 완전히 사라져버린 감각과 세계를 엿보는 아련함을 느꼈다. 유명한 몇 작품의 제목을 알고 있을 뿐 책을 읽어본 적은 없고 작가가 콜롬비아 출신이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야 제대로 알았는데, 거장 이전의 한 사람으로서의 작가의 면모도 조금은 알게 된 기분이다.
전체적으로 인상기에 가깝지만 당시의 정치사회적 격변이 주효한 글이어서 관련된 해설이 있었다면 이해에 좀 더 도움이 됐을 텐데 책에는 옮긴 이의 말도 따로 없다. 온라인 서점에서 게시된 출판사 제공 책 소개를 읽으면서 모호하게 느껴졌던 부분이 좀은 선명해지는 듯했는데, 콜롬비아 문화부의 지원으로 출간되었다고 책 서두에 적혀 있기는 하지만 출판사의 위상을 생각하면 해설이 없는 점은 아쉽다.
책에서 다룬 열 편의 영화 중 고작 두 편을 봤을 뿐인데도 재미있게 읽었다. ‘영화는 줄거리’ 주의자로서 엄청난 스타일리스트인 웨스 앤더슨의 존재와 영화는 오랫동안 관심 밖이었다. 뒤늦게 기획전인지 재개봉이었는지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고 왜 이제서야? 생각했고 이후 반가운 마음으로, 게다가 티모시 샬라메까지 출연한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고는 솔직히 뭔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듯 말 듯했다. 지난해 개봉한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내려놓은 마음으로 즐겁게 감상하다가 무방비상태에서 훅 들어온 에디 아놀드의 “캐틀 콜”에 무장해제, [아이다호]가 아닌 영화에 흐르는 그 노래가 썩 잘 어울려서 고마워졌다.
책은 웨스 앤더슨이 발표한 장편 영화를 순서대로 따라가며, 그야말로 영화와 삶을 아우른다. “아이코닉 필름 메이커” 시리즈의 하나라고 하는데, 인터뷰 출처만 7쪽에 이를 만큼(페이지 여백이 많긴 하지만) 저자가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성실하게 집필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읽기 전 깐깐하고 편집증적인 외곬수일 거라고 막연히 상상했던 웨스 앤더슨의 여러 면모들과 대략적이지만 영화 작업의 과정들을 알 수 있어 흥미로웠다. 데뷔작부터 헐리우드의 기성 스튜디오와 함께했지만 커다란 흥행 수익을 얻는 경우는 없었음에도 자신만의 개성과 색깔을 고수하며 영화 작업을 지속한 비결은 물론 독보적인 재능과 노력에 기인하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열광하던 문화적 요소와 영웅 들을 차례차례 영화로 풀어낸 이력은 순정의 승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대학 시절부터 오랫동안 따로 또 같이 작업을 이어가는 오웰 윌슨을 비롯해, ‘사단’이라고 불릴 만큼 그와 반복적으로 작업하는 혹은 새로 합류한 영화인들과 관련한 에피소드도 재미있었고 특히 빌 머레이의 에피소드는 좀 감동이었다. 오랜 시간 꾸준히 작업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물론 웨스 앤더슨 영화의 독특한 개성과 매력과 완성도 등 영화적인 부분도 크겠지만, 인간으로서의 다정함 같은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의 영화들이 지향하는 가족, 낭만, 동심 등이 단순한 과거 지향이나 향수를 넘어 정제되고 세련된 스타일을 통해 새로운 감성과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도, 어쩌면 그런 인간미에도 기인하는 게 아닐까 싶고 말이다. 그의 오랜 작업 파트너인 로만 코폴라가 했다는 “웨스 앤더슨은 사회적 동물입니다”에서 빵 터졌다가, [다즐링 주식회사] 부분에 등장하는 그의 말 “감독은 혼란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며 영화를 만들지 않습니다.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생겨나는 새로운 혼란을 창조하는 겁니다.”라는 말에서 다시 존경스러워졌다.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영화 관련 책들 중에 문체나 편집의 문제로 가독성이 떨어지는 경우를 좀 경험했었는데, 이 책은 독보적으로 잘 읽히고 사진들도 훌륭하고 전반적으로 신경 많이 썼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트로’를 제외하면 목차 자체가 작업한 장편 영화의 제목이자 순서로 구성되어 있는데 발표 시기가 1990년대 중반부터 25년에 이르고, 그 영화들이 착안된 시점과 개인사적인 부분들 그리고 당대의 감독들과 작품들, 당시의 헐리우드 분위기와 상황 등까지 자칫 장황해질 수 있는 스토리가 정말 읽기 쉽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덕분에 어릴 적 좋아했지만 잊고 있었던 이름들을 마주하며 반가웠고,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비주얼 모티브 가이드, 핵심 배우들, 독특한 장치들, 영향을 준 예술가들의 목록’ 등 한 쪽의 요약 박스도 성의 있게 느껴졌다. 그렇게 즐겁게 읽다가 막바지로 갈수록 눈에 띄는 표기 실수가 살짝 반복되고 179쪽에서는 사진 설명 위치 오류까지 발견되어 아쉬웠지만, 책의 완성도를 생각하면 그래도 좀은 아쉽다.
몇 년간 여기저기서 마주쳐 궁금했던 [스토너]를 올해의 첫 책으로 읽었다. 제목이자 이름의 주인공인 인물의 부고와 함께 시작되는 이야기는, 격동하는 시대를 고요하고 담담하게 살다간 한 사람의 생을 따라간다. 스토너는 삶의 방향을 극적으로 바꾸는 현란한 빛과 같은 계기도 희열보다는 혼란으로 느끼며, 자신에게 주어지고 선택한 길을 답답하리만큼 우직하게 감내하며 걸어간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부잣집 딸과 결혼하고 영문과 교수로 삶을 마친 그의 일생은 외적으로는 사회경제적 상승곡선을 그리지만, 그 과정의 일상은 지극히 소시민적으로 그려진다. 영웅도 반영웅도 아닌 ‘보통의 삶’에 연루되는 무수한 관계와 그만큼의 의미,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구의 삶에나 깃든 기쁨과 슬픔과 장엄함을 생생히 그려낸 소설이었다.
당대의 기대수명만큼은 살다간 스토너의 일생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많지 않다. 어려서는 부모, 대학 시절에는 한 사람의 은사와 두 친구, 결혼하며 생긴 아내와 장인장모 그리고 딸 그레이스, 대학에 자리잡은 후 만난 몇몇 동료들과 학생들, 그중 인상적인 관계로 등장하는 로맥스 교수와 찰스 워커과 캐서린 드리스콜. 전 생애를 통틀어 열 명쯤의 인물들과 맺는 다양한 관계들에 무엇보다 그에게 큰 의미를 갖는 것은 학문과 가르침의 세계다. 물론 소설의 전개상 집중할 수밖에 없는 주요 인물들이 설정된 것이겠지만, 일생을 살아가는 데에 그렇게 많은 관계가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로도 읽혀졌다.
스토너를 곤경과 사랑에 빠뜨리는 계기를 제공한 세미나의 주제였던 ‘르네상스 시대까지 살아남은 중세 전통’은, 세계의 근본적인 변화에도 사라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지는 요소들에 대한 천착이라는 점에서 그의 삶과도 이 소설과도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당대는 언제나 가장 복잡하고 치열한 현실일 것이다. 의식하든 못하든 사람은 살아가는 한 동시대 역사의 모든 국면을 통과하며 변화를 흡수하지만, 와중에도 부지불식간 자신이 선택하는 가치와 잃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다. 스토너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공부와 사랑은 쓸쓸하기도 했지만, 결국 혼자이고 끝내는 공허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어느 순간을 반짝이게 만든 선물이었던 것 같다. 작가가 내향적이고 보수적이고 진중한 스토너에게 첫 번째 용기를 부여한 시점은 이디스에게 첫눈에 반해 다가갈 때였다. 그때의 이디스는 여느 문학 작품의 여주인공과 다름없이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아가씨다. 대략의 분위기만으로 짐작 가능한 외로움 속에 성장한 이디스는 결혼 이후 돌변한다. 처음에는 자신의 내면과 잠으로 침잠하지만 아이를 낳고 아버지가 죽은 후부터는 극단적인 변신을 거듭하고, 작가는 그런 이디스의 행태를 공격과 선전포고라고 서술한다. 차분한 호흡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여서 차분히 따라 읽으면서도 작가의 관점은 이디스에게 부당한 ‘중립적’ 관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디스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서술된다면 스토너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상황은 완전히 다른 것으로 그려질 수 있겠다 싶었다.
그레이스는 캐서린을 만나기 전 스토너가 가장 사랑한 사람일 것이다. 자신의 손길로 키우고 서재에서 함께하는 시간 동안 스토너는 난생처음 사람으로 인한 행복감을 느꼈을 것 같다. 이디스의 개입으로 멀어지고 사춘기를 겪으며 급변하고 혼전 임신과 출산에 알콜 중독의 싱글맘으로 나이 들어가는 사랑하는 딸에게, 스토너는 다시 다가가지 못한다. 내가 경험한 부모 자식 관계를 대입하기에는 시공의 조건이 완전히 다르지만, 스토너와 그레이스의 관계와 변화를 따라가는 흐름이 인생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아무리 사랑해도 어떤 관계라도 상대의 불행과 전락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누구나 가족을 비롯한 타인의 영향 속에 살아가지만 지금의 삶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라는 것.
스토너와 캐서린의 사랑이 시작되었을 때, 기뻤다. 마침내 온전한 짝을 만난 듯 심신의 충만감을 만끽하는 두 사람의 방이 그려지는 것 같았고, 결혼반지를 간직하는 대신 오두막에 남겨 놓는 캐서린의 결정에 마음이 아팠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흔한 불륜일 뿐인 사랑이지만, 현존을 내버리고 사랑만을 위해 도피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두 사람의 합의는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장면이라고 느꼈다. 로맥스의 보복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사랑은 거기까지였을까. 캐서린이 떠날 준비를 이미 하고 있었다는 것을 미처 몰랐고, 마지막 편지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에 스토너가 감사했다는 부분은 솔직하지만 너무 냉정한 진실을 담은 문장이어서 놀라웠고 지극히 평범하지만 전형적이지 않은 스토너 캐릭터의 정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토너와 가장 극적인 대립 지점에 선 로맥스 그리고 찰스를 장애인으로 그린 작가의 의도도 궁금했다. 로맥스 캐릭터는 등장부터 심상치 않았지만, 그가 스토너를 제소하겠다며 학칙을 거론하는 부분을 읽으며 마음이 복잡했고 적잖은 양가감정을 느꼈다. 소설이 발표된 1965년 즈음 장애에 대한 인식은 당연히 지금과 비교할 수 없겠지만, 주인공과 대척점에 서게 되는 두 인물의 공감대를 장애라는 신체적 특징으로 설정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소수자에 대한 연대와 연민이라는 당위적 사고가 당시에 얼마나 인정되는 것이었는지, 단지 복잡한 조건을 통해 대체로 잔잔한 소설에 극적인 장치를 추가하고 싶은 것이었는지, 혹은 스토너의 신념과 로맥스의 복수가 빚어내는 현실에서의 충돌을 통해 독자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싶었는지. 로맥스 부분을 읽을 때마다 여러 생각들이 뇌리에 맴돌았는데, 오히려 그렇게 특별히 의식하는 것이 독자가 성찰해야 할 부분인가 싶어지기도 했다.
책의 띠지와 말미에 실린 신형철 평론가의 글에는 “이 소설에 대해선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나는 제대로 시작조차 할 수 없다.”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읽고 나니 나 역시 그런 마음이 되었다. 책날개와 옮긴 이의 말에 실린 “나는 그가 진짜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작가의 말에는, 그 영웅이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의미의 단어라면 동의가 되지 않는다. 스토너의 삶의 외형은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었지만 그 내면은 언제나 외롭고 공허하고 혼란스러웠다. 그것이 한 인생을 가까이서 들여다보았을 때, 나의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느끼는 평균적인 감정이 아닐까. 그래서 좋은 책이라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는 책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이디스에 대한 묘사와 서술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아서 나는 이 책을 감히, 대단히 사려 깊은 남성 서사라고 말하고 싶다.
존 윌리엄스•김승욱 옮김 2020.6.24.1판1쇄 2022.9.15.1판10쇄 발행, (주)알에이치코리아
책날개에 실린 짧은 저자 소개의 첫 문장은 ‘전문 부랑자이자 히치하이커, 사회부적응자.’ 그리고 저자는 동물 해방을 위해 활동하는 아나키 예술가로 현재 한국에 임시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책에는 2014년 12월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나 6년 동안 수많은 나라를 방랑하며 경험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로서 세계를 유랑하며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동료들을 만나고 낯설고 아름다운 자연에 감탄하는 순간도 있지만, 어디에든 존재하는 모순과 폭력을 마주하고 고민하며 행동했던 내용이 주를 이룬다.
수중의 물건들을 처분하고 몇 년간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 500만 원이 떠날 때 가진 전부. 그러나 오랫동안 세계를 유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본주의 시스템 밖의 네트워크와 그에 참여하는 이들의 연대와 호의 덕분이었다. 침낭과 텐트로 숙박을 해결하기도 하지만 가난한 여행자에게 자신의 공간을 내어주는 ‘카우치서핑’, 살림이나 아이 돌보기 등 일정 시간 노동을 제공하고 숙식을 제공받는 ‘워커웨이’, 과거의 낭만이거나 영화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흔히 여겨지는 ‘히치하이킹’, 대형 마트나 상점에서 버려지는 쓰레기통 속에서 음식을 구하는 ‘덤스터다이빙’ 등을 새롭게 알게 되거나 직접 체험하면서 유랑은 좀 더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해진다.
저자는 수많은 타인들에게서 갖가지 생존의 기술을 공유 받으며 그들과 친구가 된다. 특별한 인연이 더해진 이들과는 기꺼이 가족이 되기도 한다. 유럽의 곳곳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목도하고 그들을 돕는 활동가들과 함께한다. 안전할 거라는 믿음으로 입국한 런던 공항에서 영문을 모른 채 억류되면서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곧 잘못이 되는 세계를 직접 경험하기도 한다. 각종 워크숍에 참여해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음악을 연주하며 거리 공연을 하고, 직접 촬영한 영상들을 편집해 영화를 만든다. 여러 레인보우 개더링에서 문명을 벗어나 자유로움을 만끽하지만, 내부의 성폭력에 침묵하는 방관이 곧 가해자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스라엘의 레인보우 개더링에서 만난 길라드의 매직하우스에서 일어난 성폭력을 온라인에서 공론화해 미래의 위험을 예방하는 활동을 주도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저자의 여행은 수많은 생명들을 만나 감응하고 변화하는 과정이다. 국적과 성별, 권력 여부에 따라 타인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문화와 제도가 동물을 고기로만 대상화하는 축산업과 연결되고, 축산 동물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깨달으며 저자는 동물의 살, 젖, 알을 먹지 않음은 물론, 동물 해방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포틀랜드, 유타주의 솔트레이크, 캘리포니아 등 미국 각지에서 저자는 여러 동물권 활동가들과 함께 시위와 집중행동 그리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동물의 존재를 기록하는 ‘비질’ 등에 참여한다. 거대 축산업의 폭력성뿐 아니라 낙농과 양봉 등 ‘인도적인 착취’와 육식에 대해서도 뚜렷한 문제의식을 갖게 된 저자의 이후 여정은 이전보다 조금 더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한 스쾃 캠프에서 비건식을 기본으로 선택적으로 제공되는 치즈를 문제 삼았다가 묵살당하고, 동물의 가축화에 대해 강간과 홀로코스트 등의 단어를 사용한 신문을 제작하려 했다가 제지당하기도 한다. (저자가 반례로 서술한 ‘토끼몰이’나 ‘새우꺾기’ 등 인간의 억압을 동물에 비유한 표현은 인권운동 진영에서도 무비판적으로 사용되던 것들이어서, 읽으며 뜨끔했다.) 동물과 인간이 다를 바 없는 권리의 주체라는 인식, 인간중심주의를 탈피한 시선과 심정으로 여행하면서 저자는 예기치 못했던 반발과 충돌을 겪게 되지만, 여성이자 외국인이며 약자이고 피해자인 자신의 ‘당사자의 경험권력’을 인식하고 그 ‘특권’을 통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저자의 ‘특권’은 인간이 정한 생명의 위계 말단에 놓인, 산업이라는 명목으로 고통과 학살이 당연시되는 축산 동물의 해방을 위한 활동으로 더욱 집중된다. 한국에 입국해 축산업 관련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동물권 직접행동에 참여하며 방문한 외딴 곳들에서 저자는 참기 어려운 죽음의 냄새를 호흡하고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새롭게 주목한다. 대만 공동체에서는 생추어리에서 생활하면서 세심하게 돌보지 못해 떠나보낸 동물 친구를, 불의의 사고를 당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인간 친구 안드레아를 추모하며 죽음에 대해 성찰한다. “만약 언젠가 본인의 육체가 작동을 멈춘다면 그것은 영혼의 해방이니 부디 슬퍼하지 말라는, 모닥불을 피우고 춤추고 노래하며 각자의 삶을 축복하는 자리를 가졌으면 한다.” 고인이 언젠가 유언처럼 남겼다는 말이, 이 깊은 여행기가 닿고자 하는 삶의 이유처럼 느껴졌다.
[0원으로 사는 삶]의 양가적인 여운이 아직 남아 있을 때 이 책을 알게 되었다. 흥미롭게 따라가다가 영적인 부분이 유독 강조되어 중반부 이후 거부감을 감출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가끔 떠올랐고, 어쩌면 유사한 여행을 경험했을 다른 이의 이야기가 살짝 궁금해졌다. 내 인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질문을 던지는 책 읽기를 감당하기 어려울 거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읽은 것보다 더 많은 믿음을 주는 고병권의 추천사에 결정적으로 혹하고 말았다. 본문에 앞서 추천사들이 나오는 책을 좋아하지 않는데, 고병권과 홍은전이어서, [사회적응 거부선언]이라는 단호한 제목에 “학살의 시대를 사는 법”이라는 더 강경한 부제가 붙은 책으로 들어가는 마중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미리 살펴본 책 소개만으로도 독특한 개성과 엄청난 감수성의 소유자로 짐작됐던 저자의 문체는 간결하고 담담했다. 자신의 깨달음과 변화를 강조하거나 그에 대한 주장을 펼치기보다, 지금과는 달랐던 이전의 모습을 포함한 실수와 미진함까지 진솔하게 기록하면서 점진적으로 독자를 설득하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동물의 고유성과 개별성을 인식하게 된 특별한 경험 이후 ‘마리’가 아닌 ‘명’이라는 단위를 쓰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졌고, 포틀랜드에서의 피임기구 시술과 관련한 저자의 감정과 서술에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었다. 미국의 동물권 활동과 사회적 진전 지점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동물과 인간을 수평선상에 놓고 일률적인 기준을 적용하는 인식에 대한 거리감을 희석시켜주는 측면도 있었다.
본문이 끝난 후 마지막 두 쪽에 걸쳐 단호한 선언이 새겨져 있다. “현재 우리가 가담하고 있는 대학살을 돌아보며 / 후회하고 부끄러워할 날은, 반드시 온다.” 생각보다 부드럽게 넘어간 책장의 끝에서, 저자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을지 모르겠다. 작고 하얀데 크고 센 책, 솔직히 이런 책을 읽으면 괴롭다. 일차원적으로 말하자면, 당장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고기를 특별히 좋아하는 편은 아님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당장 결심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부끄럽기 때문에. 그럼에도 새해에는 적어도 내가 직접 육류를 사먹는 일은 없도록 하자는 얍씰하고 은은한 마음은 먹었다. 같은 세계의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전언을 이따금 읽으며 마음이 복잡해지는 이유를, 언젠가는 용기 있게 직면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여행기를 기대하며 책장을 펼쳤는데 프롤로그부터 시작해 몇 편의 글로 채워진 1부는 작가가 몇몇 절친들과 어디론가 떠나 함께했던 지난 시간을 추억하는 우정의 회고담에 가까웠다. 스무 살의 유럽 5개국 배낭여행 중 어떤 날들, 십년지기 작가의 문학상 수상에 함께한 강릉, 방황하던 대학 신입생 때 고등학교 시절 절친과 함께한 뉴욕 생활과 작가가 된 후 행사로 찾게 된 광주에 자리잡은 그 친구와의 이야기 등. 여행은 여행이되 새로운 곳에 당도해 보고 듣고 느낀 점보다는 함께한 이들과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도드라졌고 시간이 지난 후에 더 반짝이는 기억으로 남은 의미들이 크게 다가왔다. 둘이든 서넛이든 함께하면 어지간히 시끌벅적할 것만 같은 작가와 친구들은 서로 갈구기 바쁘고 자기 말하기 바쁜 만남 아래에 깊은 마음과 배려를 깔아두고, 시간이 지나며 함께하는 시간이 잦아들어도 무르익는 우정을 쌓아가는 느낌이었다.
2부는 2021년 9월부터 석 달 간 제주 남쪽 가파도의 예술인 레지던시에 머무를 때의 이야기. 어디에선가 김연수 작가와의 에피소드를 담은 글을 본 적이 있어 알고는 있었는데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가, 김연수 작가의 책에 이어 이 책을 읽게 되어 그 우연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좋아하는 작가가, 좋아하는 작가의 말을 처음으로 경청해준 ‘어른’이라는 부분을 읽으며 괜히 뭉클해지기도 했고 적잖은 지분으로 등장하는 김연수 작가의 여러 면모를 새롭게 알게 되는 재미도 쏠쏠했다. 작가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게시물을 가끔 마주했던 터라 얼굴까지는 아니지만 함께 여행하는 친구들과의 사진과 글을 본 기억이 났고, 같은 인물들이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덕에 읽으며 조금씩 아는 사람이 되는 듯한 친밀감이 들기도 했다. 3부에서는 언젠가 신간이 나온 후에 함께하는 유튜브를 본 기억이 있는 이금희 아나운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중년 이상의 한국인 대다수가 아는 그를 나 역시 알고 있었지만, 글을 읽으며 사람 자체가 주는 감동에 젖어들었고 나 역시 작가처럼 그의 ‘감정의 경제성’과 너그러운 마음씀씀이가 부러워졌다.
작가만큼 많은 여행을 하지는 못했지만 20대에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오고 30대 이후 1년에 한두 번은 짧은 국내 여행을 잊지 않으며 살아왔는데, 나의 여행은 9할이 혼자였다. 함께 일하며 친하게 지내던 지인과 같이 갔던 몇 번의 여행이 있었지만, 작가가 풀어놓은 명랑 여행기 같은 에피소드는 기억나지 않는다. 많이 떠들고 많이 마시고 많이 웃고 많이 우는 정력적인 캐릭터 그리고 기꺼이 눈썹을 정리해주고 편도 사진을 찍어줄 정도로 허물없는 친구들 조합의 여행. 만약 내가 그런 분위기에 함께였다면 마냥 즐거울 수 있었을지 자신할 수 없지만, 성향과 세월로 무장한 절친들끼리의 여행 이야기는 읽는 것만으로도 유쾌했다. 결혼과 육아 여부를 막론하고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함께 여행을 갈 수 있는 오랜 친구들, 게다가 무한 긍정과 치밀한 계획과 섬세한 챙김 등 타인과 함께하는 시간을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을 두루 나눠가진 멤버 구성이라니.
글을 읽다 보면 작가는 결핍도 불안도 욕망도 열정도 차고 넘치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내면에 들끓는 많은 것들을 마음껏 글로 풀어낼 수 있게 되기까지 그에게는 좋은 친구들이 있었구나 싶어졌다. 실은 겁이 많고 소심하다지만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부계유전’과 ‘큰 목소리와 연극적인 성격의 모계유전’을 장전한 채 말로든 글로든 다른 사람을 웃기는 것에 필사적인 작가도 괜찮은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고 말이다. 대체로 부담 없이 낄낄거리며 읽다가 유머와 위트 가득한 행간에서 오랫동안 달고 사는 우울증과 불면증이 아무렇지 않게 언급될 때면 그제서야 약간 미안해지고 대단하다 싶어지기도 하는데... 뭔가 고-기복의 삶이 발생시키는 엄청난 낙차를 감당하는 존재의 고뇌와 무게에 새삼 생각이 미치기도 하고, 그럼에도 아무튼 써냄으로써 한때의 즐거운 독서를 선사하는 작가의 노력과 본능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을 작가가 마침내 쟁취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상이든 여행이든 찐으로 웃음과 눈물콧물까지 나눌 수 있는 이들과의 인연이 그 자체로 휴식이라면 그들에게도 나지막이 땡큐.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이 책 속에 담긴 글들은 내 삶의 각별한 순간들을 기억하기 위해, 또 나와 나를 둘러싼 친구들과의 순간들을 정리하기 위해 쓰였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썼다. 솔직히는 읽으며 간혹 ‘이렇게 시시콜콜한 것까지? 역시 어떤 반열에 오르면 그 존재감과 위상으로 무엇이든 쓸 수 있게 되는 것이군’ 싶기도 했기에 고개가 끄덕여졌는데, 한편 그의 친구들과의 여행이 40대에도 50대에도 계속 이어져 기록으로 엿볼 수 있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들썩하고 질펀한 시간을 즐기는 부류는 아니지만 나이를 먹으며 함께 나눌 추억을 꾸준히 쌓아온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다 보니, 대리만족이라도 즐거울 것 같다. 순도 무한대의 휴식을 일상으로 보내면서도 참 책 안 읽은 한 해였는데, 확인해 보니 올해 첫 책이 [믿음에 대하여]였더라. 작가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한 해의 첫 책과 마지막 책으로 삼을 만큼의 열혈은 아니므로, 남은 올해 동안 한두 권의 책은 더 읽어야겠다. 무채색의 마음으로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다가도 책 한 권 펼쳐들면 잠시나마 다른 삶, 다른 세상을 기웃거릴 수 있으니 다행이다.
밤마다 침대에서 느릿느릿, 한참 동안 띄엄띄엄 읽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어서 깊이 음미하며 잘 읽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이런저런 영상과 음향에 중독된 하루의 잔상이 남은 밤이어선지 쉬이 집중이 되지 않았다. 어디인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배경에서 적군의 미사일과 방공호와 포격이 난무하는 첫 소설 “두 번째 밤”이 약간 난감하게 다가왔지만, 그럼에도 ““이제 우리는 모두 죽을 거야.” 아빠가 말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희망은 그것뿐이었다.”는 문장에 이상하게 수긍하는 마음이 되었다.
책에는 스무 편 가까운 길고 짧은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제목 덕인지 여름의 느낌을 풍기는 작품들이 많았지만, 표지 컬러 덕인지 찌는 듯한 더위보다는 여름 저녁의 서늘함과 어떤 그리움의 여운을 짙게 남겨주는 작품들이 많았던 것 같다. 오래 살았던 아파트가 재개발된다는 소식에 그곳을 함께 산책했던 강아지와의 다정한 시간을 떠올리고 의미 없이 뿌리 뽑힐 수많은 나무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사람들이 있었다(“나 혼자만 웃는 사람일 수는 없어서”). 원치 않는 싸움과 폭력이 난무하던 학창 시절을 채워준 음악과 친구와 고향의 기억,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변해갈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한 아련함에 마음이 공명했다(“여름의 마지막 숨결”).
언젠가부터, 내게 각인된 것은 아마도 [눈먼 자들의 국가]에 수록된 “그러니 다시 한번 말해보시오, 테이레시아스여”가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까지는 과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면, 앞으로는 미래가 지금의 나를 만들 수 있도록 말이야.” 같은 작가 특유의 조용히 진취적인 삶의 태도와 세계관이 “첫 여름”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 일관되게 드러나서 약간의 친근감이 들었다. 처음에는 다소 의아하게 다가왔었지만, 믿음으로써 사실이 되고 삶이 되고 운명이 되는 말의 힘 같은 것. 신비주의나 주술은 아니지만, 마음에 품고 잘 살아가다 보면 어느 날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 같은 말을 마주하며 잠시나마 고양감을 느끼곤 했다. 이상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우리들의 섀도잉”은 오래 전 작가를 처음 만난 “꾿빠이, 이상”을 떠올리게 해줘서 반가웠다.
최근 자주 생각했던 참이라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에서 언급되는 조지 오웰 그리고 “우리의 발밑에 광부들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광부들을 존재하게 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을 기억하고 싶어졌다. 수학 여행 간 딸이 목숨을 잃은 경주에 작은 서점을 내고 오래 된 무덤이 즐비한 길을 걷는 이의 이야기인 “저녁이면 마냥 걸었다” 그리고 뭐라도 하고픈 책임감에 안산 지역 과학경시대회 입상자 수련회 참가자 명단에서 숨진 아이들을 찾아 편지를 남긴 주희와 시진 엄마의 이야기 “거기 까만 부분에”(근데, 도입부 시진 엄마는 이주희라고 하고 서술이 진행되면서 김주희라고 써져 있다. 오기일까, 다른 의미가 있는 걸까?)를 읽으면서는 영화 [너와 나]가 떠올랐다. 압도적인 슬픔의 시간이 지나간 후에도 없었던 일이 되지 않을 수 있도록 환기하는 기록들을 마주할 때면, 다정하고 사려 깊은 예술가들이 고마워진다.
“토키도키 유키”는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하코다테가 나와서 인덱스를 붙였는데 “언젠가, 봄이 되자 어른들의 키보다 더 높이 쌓였던 눈더미가 녹아내리면서 젊은이의 시체가 나왔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사람들이 늘 지나다니던 대로의 한복판에서, 머리는 검고 얼굴은 하얀, 여전히 아름다운 젊은이가.”에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됐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하는지,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를 담은 두 문장에 소설 속의 소설이 자리한 느낌이었다. “나와 같은 빛을 보니?”는 일본에서 엄마의 장례를 치른 손녀가 제주의 할머니에게 보낸 서툰 한국어 편지의 일부다. 작가의 제주 레지던시 생활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인 듯한데 동료 예술가의 노래를 듣고 이어지는 서술에 눈길이 멎었다. “벨 에포크를 살아가는 사람은 그 시절이 벨 에포크인지 어떤지 알지 못한다. 한 번의 인생이란 살아보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죽은 뒤에야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잘 살고 싶다면 이미 살아본 인생인 양 살아가면 된다.”
수록작 중 가장 분량이 긴 표제작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서 화자는 어머니의 임종을 앞두고 어린 날의 다양한 기억과 사연 들을 회상한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전복적인 현실에 직면해 삶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며, 소로(“1854년 2월 19일, 소로의 일기는 다음과 같다. 지금 이 시기는 여름철에는 걷기 어려운 늪지, 강, 호수를 걸어야 할 때다.”)와 아우구스티누스(“다음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우리에게 남긴 지침이다.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좋아하는 것을 하라.”)를 사유하고 암 판정 이후 모임에서 단 한 번 만났던 이소노와 편지를 주고 받은 미야노를 인용한다. 1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단속적으로 과거와 더 먼 과거, 현재를 오가고 무수한 생략을 거쳐 2063에 이르는데, 이 때는 화자의 아이가 지금 자신의 나이쯤 될 40년 후의 미래이며 첫 번째 수록작 “두 번째 밤”(“왜 이 전쟁이 시작됐는지 누구도 알지 못하기에 언제 끝날지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안다고 믿고 행한 일들로 다다른 미래다.”)의 시기이기도 하다. 읽고 나니, 첫 소설에서 마지막 소설까지의 이야기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삶들의 순환을 보여주는 느낌이 들었다.
산만한 컨디션 탓에 때로 지루하게도 느껴졌지만 잠언처럼 다가오는 문장들이 많았고, 사색적이고 정적인 이야기들에 마음이 고요해지기도 했다. 단편 소설을 잘 못 읽는 탓에 딱히 연작이랄 수 없는 짧은 소설들을 연이어 읽으며, 읽고 잊고 읽고 잊고 하는 일이 반복되는 독서이기도 했다. 같은 언어를 쓰는데, 세상 처음 보는 표현도 아닌데 이렇게 새로운 느낌일 수 있다니 싶은 부분이 종종 있었고 위에도 적잖이 인용했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문장은 “걷는 동안에는 적어도 걸어가고는 있으니까.” 그리고 “‘살아간다’는 건 우연을 내 인생의 이야기 속으로 녹여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자면 우연이란 ‘나’가 있기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행운과 불운이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게 인간의 우연한 삶이다.” 부분이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마음을 두드린 문장들을 수집하는 게 아니라, 그중 하나라도 실천하며 일상을 변화시키는 일이지만 말이다.
여러 곳에서 낭독회를 하며 발표한 소설들을 묶은 책이라는 걸 작가의 말에서 알게 되었다. 말미에는 각 소설의 제목과 연관된 스무 곡이 넘는 플레이리스트와 2021년 10월 30일부터 2023년 6월 3일까지 낭독회가 열린 서점과 도서관의 목록이 정리되어 있다. 마지막 낭독회가 열린 곳은 창원, 인스타그램의 책방 소식에서 보았던 기억이 나서 새로웠다. 작가의 첫 책부터 단독으로 낸 거의 모든 책을 읽어왔으니 좋아하는 게 분명한데, 직접 보고 싶다거나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래서 더 편안한 마음으로 신간을 마주하고, 때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를 테면 미래가 현재를 결정한다는 확고한 사유의 방향, 조금씩 익숙해지고는 있다.)은 넘어가면서 읽게 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그랬다. 참으로 다정하게 사랑의 순간들과 사랑하며 사는 일에 대해 기록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울컥 슬퍼지고 마음이 이상해기도 했지만, 자전적인 고백처럼 다가오는 이야기부터 근사한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까지 읽고 잊고 읽고 잊고 하면서 내가 보냈던 많은 여름들 그리고 오래 잊고 지낸 얼굴과 이름 들이 떠올랐다.
연대를 알 수 없는 어느 미래, 40년 전 지구에서 이주한 정착민들이 일군 심스 뱅코프 콜로니에서는 운영 주체인 컴퍼니의 사업권 상실로 재이주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한 세대 이상 피땀으로 일군 터전에서 쫓겨나는 이들에게는 선택권이 없고 극저온 캡슐에 실려 장기간 수면 상태로 우주를 이동해야 하는 여정에는 위험이 따른다. 회의의 형태를 빌린 일방적 과정을 거쳐 이주일은 한 달 뒤로 다가오고, 1세대 정착민인 70대의 오필리아는 홀로 남기를 남몰래 결정한다.
어린이고 젊은이였던 지구에서 오필리아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원하는 만큼 배우지 못했다. 일찍 결혼해 아이들을 낳아 기르며 콜로니의 정착민으로 살아온 세월은, 저항할 수 없는 컴퍼니의 지배 속에 죽은 남편과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그리고 며느리의 강압과 간섭이 늘 함께였다. 평생 무엇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 편히 할 수 없었던 오필리아는, 맨발과 맨 머리로 정원을 돌보며 자연과 교감하는 고요하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며 버려진 정착지의 단 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셔틀이 순서대로 정착민들을 싣고 출발하는 동안 숲속에 몸을 숨겼던 오필리아는 무사히 홀로 남겨지고, 전에는 상상도 못한 해방감에 젖어 두려움을 털어내며 혼자만의 삶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고 거리에 나서고 영감이 떠오르는 대로 스스로를 치장하고 정원의 식물들과 마음껏 교감하는 끝없이 자유로운 생활. 이웃들이 살던 집을 뒤지고 콜로니 센터를 살펴 식량을 챙기고, 이주 초기 정착민으로서 배워야 했던 기계 설비 조작법을 떠올리며 나름의 안전을 도모한다.
공동체의 중심이었던 콜로니의 센터에 남은 것들을 활용해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내고 기계를 가동하고 제어하면서 오필리아는 로그 파일에 접속해 자신의 기억 속 콜로니에서의 생활을 기록하는 일도 시작한다. 누가 볼 리 없지만 무의미하게 잊혀지거나 단순한 정보로 왜곡된 사건을 애써 서술하고 바로잡기도 하며 자신이 경험한 역사를 남긴다.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여러 일들을 시도하며 표현의 욕구에 사로잡혀 광기와 예술 사이 어디쯤일 행위에 몰두하기도 한다. 고독과 자유를 손에 넣은 인간에게 기록과 창작은 숙명과 같은 행태다.
무한히 혼자인 시간을 보내던 오필리아는 우연히 센터 제어실의 수신기에서 흘러나오는 인간의 소리를 듣는다. 멀리 떨어진 어느 행성에 도착한 새로운 개척민들이 그곳의 미확인 생명체들과 충돌해 모두 죽는 현장 그리고 모니터하는 우주선 인간들의 목소리다. 낯 모르는 누군가들의 떼죽음을 실시간으로 접하며 동시에 정체 모를 괴동물의 존재를 알게 된 오필리아의 마음은 죽은 이들에 대한 연민, 자신 역시 그렇게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혼란스럽다. 그리고 유난한 바다폭풍이 불어오던 날, 오필리아는 괴동물 <종족> 일부와 조우한다.
개척민들을 죽인 괴동물들과 오필리아의 만남과 나름의 소통은 의외로 평화롭게 진행된다. 말은 물론 몸짓으로 전하는 의미도 제대로 통하지 않지만 서로에게 상대를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 어느 정도 확실시되자, 오필리아가 견뎌야 할 것은 뚫어지게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하는 괴동물들의 시선 정도다. 시간이 흐르며 상호 관찰이 거듭되면서 오필리아는 괴동물들의 습성과 특징에 대해 조금씩 더 파악하게 되고, 마침내 그들은 완전히 거슬리지는 않은 존재가 된다.
즈음 지구에서는 새로운 행성을 향하던 개척민들의 죽음과 정체 불명의 생물체에 대한 대응 논의가 진행되고, 생물학자와 언어학자, 인류학자 등의 전문가로 구성된 연구팀이 군사고문단과 함께 폐콜로니가 된 심스 뱅코프에 당도한다. 셔틀에서 내리기 전 정체 불명의 자생종은 물론 한 인간의 존재도 파악하고 있던 그들을 맞은 것은 오필리아다. 모두가 떠난 폐콜로니에 홀로 남은 70대 여성은 지구인 전문가들에게 자생종 만큼이나 놀랍고 기이한 대상이자, 정상성의 범위를 벗어난 존재로 인식된다.
오필리아는 괴동물들과의 공생 과정에서 <종족>의 외교관격인 가수 파란 망토와의 교류를 통해 그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살아 있는 동물을 잡아먹고 기이한 소리로 소통하지만, 기계와 컴퓨터 등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과학기술의 원리를 꿰뚫는 놀라운 지적 능력을 가졌다. 오필리아가 겪었던 다수의 인간과 달리 타인에게 군림하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과 거리감을 존중할 줄 알며 무엇이든 배우기에 열성적이기도 하다. 오필리아는 원치 않은 인간들 속에서 속으로 삭이기만 했던 자유에의 갈망을 해소하면서도 한없이 혼자여서 때로 잠식됐던 외로움과 무력감을, 괴동물들과 함께하며 비로서 떨칠 수 있었고 편안해졌다.
하지만 전문가들에게 괴동물들은 타행성에서 인간을 공격하고 죽인 위협적인 존재로서 연구의 대상이고, 그들과 소통 가능한 유일한 인간인 오필리아는 신뢰할 수 없는 노인 여성으로 여겨진다. 오필리아 역시 그들이 죽인 인간들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맘속 한 편에 자리잡았던 경계심은, 인간들이 그들의 둥지를 파괴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해소된다. 더불어 콜로니에 셔틀이 도착하던 날 태어난 괴동물 아기들과 가까워지고 ‘둥지수호자’로 받아들여진 오필리아에게 이제 괴동물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전문가 집단은 콜로니에 머무는 동안 인류의 갖은 폐단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자신들의 기준에서 무지하고 약하고 이상한 존재를 낮잡아 보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낯선 존재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품고 복속시키려 하며,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맹신하면서 그외의 많은 것들을 무시한다. 그들의 프로세스에 따르면 괴동물들은 최초의 외계인으로서 자신들이 제안하는 협상에 동의해야 하고, 불법적으로 콜로니에 남은 오필리아는 자신들과 함께 떠나야 한다. 그 계획은 가장 경솔하고 권위적이었던 팀장이 괴동물 아기를 공격하려다 목숨을 잃은 후의 극적이고 전체적인 반전으로 모든 것이 변하지만 말이다.
이 모든 일들의 ‘현재적’ 결론은 오필리아의 선택으로 인해 결국 콜로니가 부활한다는 해피엔딩이다. 전문가 중 나름 상식적이었던 인류학자 오리와 오필리아의 관점에서 어정쩡했던 생물학자 키라는 결혼해 오필리아의 ‘인간 보조’로서 콜로니에 남아 외계인과 함께하는 새로운 문명과 생태계에 대한 연구를 지속한다. 어느 시공간에서도 쓸모와 지혜를 인정받지 못했던 출산과 양육 경험이 있는 노년 여성들이 새로운 ‘둥지수호자’로 활동하며, 마을은 서서히 사람들로 다시 채워진다. 그리고 긴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은 “그는 한때 계획했던 대로 혼자 죽지는 못했지만, 웃음 지으며 죽었다.” 그는 물론 오필리아다.
12월의 모임 책이었다. 평균치를 밑도는 상상력의 보유자로서 책을 읽을 때 시공간적 배경이 모호하게 인식되면 서사를 따라가기가 난감해지고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어디인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펼쳐지는 오필리아의 일상이 세세히 묘사되는 소설의 도입부터 흥미가 떨어졌지만, 읽어야 해서 읽다 보니 머릿속에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지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대략 이주 한 달 전부터 시작되는 오필리아와 콜로니의 상황에 대한 극세 묘사 덕에 이렇게 하루하루의 변화로만 소설이 채워지나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속도감이 붙고 낯선 존재들이 등장하며 새로운 이야기가 극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진전되는 내내 오래된 목소리와 새 목소리가 경합하는 오필리아의 내면에 공감이 됐고, <종족>과 조우하기 전 어떤 낌새를 감지한 오필리아의 공포를 묘사하는 부분을 읽으며 으스스하게 느낄 만큼 몰입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파란 망토의 등장과 오필리아와의 언어 교류, 배움 부분의 디테일이 유치하고 억지스럽게 느껴져서 등장할 때마다 흥미가 떨어졌다. 영어와 영어로 표기된 외계어, 그를 다시 한국어로 큰따옴표 안의 대화로 번역하는 일이 무척 어려웠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깨알 같은 디테일 묘사가 많은 데 반해, 정작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했던 괴동물이 인간의 언어를 배우는 과정과 이해하는 원리 같은 것들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서 맥이 빠졌다.
주인공 이름을 오필리아로 설정한 것이 [리어왕]에서 비극적 운명의 상징처럼 박제되었던 오필리아를 새롭게 해석하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부활시킨 것일까 싶었는데, 그렇다면 간헐적이고 단편적인 언급 속에서도 내내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죽은 남편 움베르토의 명명은 무엇에 연유한 걸까 궁금했다. 내가 아는 오필리아가 리어왕의 막내 딸 뿐이듯, 내가 아는 움베르토는 움베르토 에코 뿐이니까. 짧지 않은 분량에 가장 압도적으로 빈번히 등장하는 이름이다 보니 금세 익숙해졌는데, 모임을 하면서 누군가 오필리아라는 이름에 대해 말을 꺼내며 이야기가 풍성해졌기에 생각과 발설의 결과론적 차이가 새롭게 느껴졌던 점도 기록해둔다.
몇 년 전 김초엽의 몇몇 작품들, 작년이었나 김영하의 [작별 인사], 전통적 분류로써 조지 오웰의 [1984] 정도가 내가 평생 읽은 SF소설의 목록이다. 모임 덕분에 자의 없이 오랜만에 SF소설을 읽었고 가장 강력한 독후감은 역시 나는 SF장르에 매력을 못 느끼는 독자라는 점이었다. 서사의 기반이 되는 과학기술적 배경에 대한 거리감을 차치하더라도, 사건과 인물 등이 창작자의 자유분방한 상상에 기반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SF소설 읽기는 기꺼이 배우고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을 기르는 일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소설 속 오필리아와 괴동물들이 서로 그러했듯이.
엘리자베스 문•강선재 옮김 2021.10.29.첫판1쇄 2031.12.10.3쇄, (주)도서출판 푸른숲
[오웰의 장미]라니, 장미에는 관심 없지만 매력적인 제목이다. 유명한 몇 권의 책 제목만 알고 있을 뿐인 리베카 솔닛을 나는 이렇게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인가, 멋진 부제가 지금의 내겐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어차피 오웰도 마찬가지니까. 대체로 반가운 마음으로 출간 소식을 접하자마자 사뒀는데, 좋아하는 것에 비해 오웰의 책을 마지막으로 읽은 게 한참 전이라 적당한 시기에 읽자고 묵혀뒀다. 출간 후 1년이면 궁금했던 것에 비해 오래 묵힌 셈이지만, 그사이 출간된 현암사의 소설 전집에서 [동물농장]과 [1984]를 제외한 네 권을 여름 동안 읽었고 11월 모임 책으로 결정된 뒤 [나는 왜 쓰는가]와 [조지 오웰의 길]까지 읽고 나니, [오웰의 장미] 독서를 위한 최적의 환경이 조성됐다.
책에는 저자 자신과 조지 오웰 그리고 장미로부터 파생된 이야기가 형식적으로 대략 1:4.5:4.5 정도의 비율로 담겨 있는 것 같다. 일 때문에 런던에 가게 된 저자가 나무를 사랑하는 친구와 ‘오웰이 심은 나무’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오웰이 살았던 월링턴의 집에 찾아갔다가 사라진 나무 대신 그가 심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미를 만나는 것이 그 시작이다. 그로부터 오웰의 삶과 글, 장미가 가진 다양한 상징과 관련된 사례들, ‘오웰의 장미’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저자의 해석과 일련의 사유 등이 책에서도 언급되는 개념인 ‘리좀형’ 전개로 펼쳐진다. “1936년 한 남자가 장미를 심었다”라는 문장을 중심으로 아이스 브레이킹처럼 뻗어나가는 이야기들은 가뿐하게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때로는 흥미진진하게 때로는 과하다 싶게, 그러나 그 본령이 오웰이므로 읽을 만하게 이어진다. 게다가 본문 곳곳에 등장하는 미주 표시, 장미 모양이 귀엽다.
처음에는 솔닛의 필터를 통과한 ‘오웰의 세계’에 대한 재해석, 1936년의 오웰과 장미라는 프리즘을 통과한 2020년대 솔닛의 스펙트럼이 찬란하게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저자는 일상과 자연, 효용성 없는 것과 삶의 작은 기쁨을 소중히 한 오웰의 알려지지 않은 세부를 찾아내고, ‘오웰과 장미’와 연관시킬 수 있는 여러 키워드들을 방사형으로 진전시키며 또 하나의 독립적인 주제로 다룬다. 비가시적이고 무의미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근원적인 삶의 요소가 될 수 있는, 거대하고 중요한 것들에 가려진 사소하거나 무시되었던 것들의 재발견에 대한 저자의 사유는 현학적이지만 대체로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로부터 연원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닿는 곳은, 기존에 익숙한 오웰의 대표 이미지 혹은 상징과도 같은 사회 참여와 변혁, 운동, 혁명 등과 관련된 역사적 내용들이다. 양자를 비교하거나 우위를 따지는 차원이 아니라 그 모두가 삶에 또 세계에 필요한 것이라는, 어쩌면 유려하고 장황한 이야기를 거쳐 다시 ‘빵과 장미’에 닿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방식으로 저자가 전하는 이야기 중에는 티나 모도티와 스페인 내전, 1910년대 미국 여성 참정권 운동에서 시작된 전통적 구호 ‘빵과 장미’의 구체적 원전, 러시아 우생학에 대한 오웰의 관심(그가 죽지 않고 살아 다음 작품을 냈다면 그 역시 오늘날 오웰을 수식하는 한 권의 책 제목이 되지 않았을까?)과 스탈린 시대의 참상, 대영제국의 이중성과 오웰의 가계 탐색 등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다. 또 오웰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하던 시기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은 여성 참정권 운동가 ‘넬리 이모’의 존재 그리고 신혼 시절 “너무나 계속, 그리고 심하게 싸웠기 때문에, 살인이든 별거든 일어난 다음에 모두에게 한꺼번에 알리는 편이 시간을 절약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는 신혼 시절 아일린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부분적이지만 오웰의 평범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상상할 수 있게 만들어 재미있었다. 엄청난 자료 조사와 탐색과 연결 능력으로 미시와 거시를 아우르는 저자의 글쓰기는 감탄스러웠고, 대단한 통찰력과 혜안을 보여주는 지점도 여러 번 만났다. 석탄기와 기후 위기, 장미 공장과 콜롬비아 화훼 산업의 현실 등 의미 있는 내용이었지만 솔직히 약간 편집증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말이다.
책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강렬하고 새롭게 다가온 것은 오웰의 질병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사실로써의 그의 일대기를 어느 정도 아는 상태로 작품을 읽으면서도 병의 위중함과 일상에 미쳤을 파장을 나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논리와 의견과 주장이 가득한 에세이들, 유머와 촌철살인이 넘치는 소설들을 읽으며 그의 신체적 취약함을 전혀 떠올리지 못했었다. (반드시 그래야 하는 건 아니겠지만, 카프카의 작품을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제국 경찰 복무를 반성하며 빈민 생활을 자청하고 신념을 지키기 위해 전장으로 뛰어드는 선택과 용기에 대해서도, 이미 그런 삶을 살았기에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글을 읽었던 것 같다. 아직 치료법이 개발되지 않은 결핵의 검증되지 않은 신약을 투여하면서까지 살고자 했다는, 내용상 다른 이에게 맡길 수 없어 [1984]를 직접 타이핑하느라 더욱 위중해졌고 요양을 결정한 후 각혈로 피범벅이 된 채 홀로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고 참 무성의한 독자였구나 싶어 무색한 마음이 됐다. 평생을 호흡기 질환에 시달리면서도 생각과 글을 일치시키기 위한 삶의 행보에 주저함이 없었던, 마침내 결핵으로 50년을 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작가의 치열함과 헌신이 새삼스러웠다.
저자의 책은 처음이지만 페미니즘과 관련한 글을 많이 썼고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는 건 들은 바 있다. 오웰의 여러 에세이에 대해 자신의 사유를 덧붙이고 [1984]에 풍부한 재해석과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책 살 때 굿즈로 앞치마가 나왔었는데 [1984]의 세탁부를 주목하는 “꽃과 열매”에서 앞치마가 등장한다. 그래서였나?) 기본적으로 작가에 대한 호감이 없다면 이런 책을 쓸 리도 없었겠지만,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오웰에 대해 비판하는 지점이 거의 없는 건 약간 의아했다. 당대에 활동하던 여성 작가에 대한 논평이 전혀 없다는 지적이나 “젠더에 관해, 결혼과 가정이 어떻게 권위주의 체제의 축소판이 될 수 있는지, 진실을 탄압하고 강자를 보호하는 거짓을 선포하기에 이르는지에 관한 것”을 오웰의 가장 의미심장한 맹점 중 하나라는 지적이 나오지만, 글의 분량을 생각하면 존재감은 미미하다. 한 세기 전의 인물에 대해 지금의 잣대를 들이대는 건 억지가 되겠지만, 인물이든 현상이든 민감하고 예리하게 관찰하고 분석하는 저자의 시선이 오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아 좀 신기했다.
저자의 책을 처음 읽은 자로서 불손한 말이겠지만 글에서 생동감이나 유머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번역의 문제는 아닐 것 같고 그냥 그렇게 글을 쓰는 작가인 것 같은데, 자신의 사변과 사유를 자유분방하게 쏟아내도 되는 문화 권력을 가진 자의 여유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체감 상 절반쯤이 ‘직접적으로’ 오웰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장미나 자신의 이야기와도 뒤섞여 서술되기 때문에 나름 열심히 읽었는데, 때로는 사고의 깊이와 지적 권위를 가진 연장자가 상대의 주목 여부와 무관하게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하여 문득,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생각에도 잠겼다. 이 많은 사유와 성찰과 정보와 지식을 다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책을 읽는다는 것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무엇을 습득하는 행위는 아니지만, 나만 그런지 몰라도 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 망각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이렇게까지 많은 걸 쏟아 붓듯 채워야 했을까 싶기도 한 것이다. 내용과 소재와 주제에 우열이나 주종 관계 같은 것 없는, 무엇이 핵심이라고 말할 이유도 없는 이런 식의 글쓰기가 페미니즘적인 서술 방식인가 싶다가도 ‘우먼스플레인’이란 단어도 있을까 궁금해졌다.
이 달의 모임 책으로 내가 추천했는데, 너무 방대하고 때로 산만하게 느껴져 버겁기는 했으나 오웰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나름 흥미로웠는데 다른 이들은 어떻게 읽었을지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장미를 뺐다면 ‘오웰의 장미’일 수 없겠지만, 왠지 저자는 에세이에서 자신의 인장을 누락시킬 수 없는 캐릭터 같다고 느꼈지만, 또한 남성 작가의 평전 성격의 글을 쓰지 않을 것 같지만, 미안하지만 나로서는 저자의 빛나지만 너무 많았던 말들 대신 그 덕에 새롭게 감지한 오웰의 전기적 단편들을 취하는 것이 더 흡족했다. 아일린 사후에 그토록 결혼하고 싶어 했다는 오웰의 소망은 시대적 한계에 갇힌 남성의 모습일까,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을 지향했던 사랑 많은 한 인간의 모습일까. 죽음을 맞은 병실에 남겨진 낚시대를 떠올리면 자신의 회복과 이후의 삶을 믿었던 것 같지만, 마침내 병실에서 결혼한 그의 ‘반려’를 향한 염원의 정체가 나는 궁금해졌다. 어디에서도 정답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마지막에 이상하지만 진심으로 덧붙이자면, 책은 좋았다. 그리고 내가 깊이 사유하는 인간이 못 된다는 걸 알았다. 영영 그러고 싶진 않지만 말이다.
습관처럼 사서 책장에 모셔뒀던 조지 오웰 관련 책 중 하나, [오웰의 장미] 책 모임을 앞두고 읽었다. 프랑스의 르포르타주 작가 아드리앙 졸므가 2018년 여름 <르 피가로>지에 실었던 르포를 바탕으로 집필한 책이라고 한다. 작은 판형에 170쪽밖에 안 되는 책인데, 이전에 읽었던 해설서들에서는 알 수 없었던 알찬 내용과 현재적 영향에 관한 서술이 빼곡해서 큰 기대 없이 펼쳐들었다가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마침 여름에 오웰의 소설 네 권을 읽었고, 전날까지 [나는 왜 쓰는가]를 읽은 터라 그의 삶이 어느 정도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상태여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책은 서문 그리고 조지 오웰이 삶의 한 시기를 보낸 주요 장소에 방문하고 기록한 6편의 글, 저자의 해설격인 마지막 한 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는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 그리고 조지 오웰의 삶에 대한 짤막한 개괄과 저자의 평가가 담겨 있다. 2003년 이라크, 2007년 미얀마, 2017년 카탈루냐, 2018년 중국을 언급하며 조지 오웰 작품의 현재성을 실감하던 저자는, 2018년 <르 피가로>지의 연재 소재 요청에 그를 떠올리고 흔적이 남겨진 장소를 향해 길을 떠난다. “우파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지만, 국제주의 좌파에게도 오직 나라와 문화 속에서만, 어떤 사회적 틀 안에서만 자유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이론이나 보편적인 생각에 이끌리지 않고 견해를 세우기 전에 주어진 상황을 직접 경험하고자 하는 그의 신체적 욕구가 그를 남다른 사상가로 만들었”다는 오웰의 면모에 대한 저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조지 오웰, 이 시대의 영웅”이라는 찬양조의 제목에 살짝 일었던 긴장감은 간명하고 건조한 문체 덕에 사라졌다.
“1. 이튼 칼리지 학생으로”의 배경인 이튼스쿨은 1440년 헨리 6세가 가난한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했고 지금까지도 국왕이 교장을 임명한다고 한다. 대체로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인 1,000명 이상의 교외 기숙생 ‘오피던Oppidan’과 별도로 ‘칼리저Colleger’라 불리는 70명의 학생에게 영국 왕실 장학금이 지급되는데, 1917년부터 1921년까지 재학했던 ‘왕의 장학생 에릭 블레어, KS(King's Scholar)’의 이름도 문서보관소에 남아 있다. 이튼스쿨 졸업생을 이르는 ‘올드 이토니언(Old Etonian)’이라는 단어가 있을 만큼 독보적 위상을 지닌 명문이지만, 엘리트 계급의 속물근성과 독특한 유동성을 겸비하고 학생들의 자유로운 활동도 인정되는 분위기의 학교라고 한다. 등록금 감면을 받고 입학한 세인트 시프리언스에서 어린 날 겪었던 자존감 상실과 억압적인 입시 준비, 약육강식과 차별의 경험을 긴 에세이로 남겼던 오웰은, 이튼 진학 후 학업보다 글쓰기와 토론 등 여러 특활반 활동에 매진했고 그 시절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남기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할 때 장학금을 받을 수 없었던 에릭은 여느 이튼 출신들과 달리 대학 진학 대신 식민지 제국 경찰로서 사회에 발을 내딛는다. 엘리트 양성소이자 반항아의 요람이기도 했던 이튼스쿨의 교내에는 2018년, “글을 잘 쓰지 못하면 잘 생각하지 못하게 되고, 잘 생각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이 대신 생각하게 된다.”는 오웰의 문구가 새겨진 흉상이 세워졌다고 한다.
“2. 제국의 더러운 일”에서는 1922년 11월, 열아홉의 에릭이 당도한 버마 곳곳을 탐색한다. 1903년 영국령 인도제국 벵갈의 모티하리에서 태어난 에릭의 모계는 과거 티크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던 프랑스인들로, 당시 버마에는 외가 친척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제국에 늦게 편입되고 1919년의 행정개혁에서도 배제된 버마는 영국 공무원들이 달가워하지 않는 지역이었고, 경찰청의 신입 하급 장교 신분이었던 에릭은 만달레이 경찰 훈련 학교에서 9개월간 부경감 후보생 교육을 받은 후 여러 임지를 거친다. 1925년 9월에 전근한 북부의 인세인은 “교수형”, 1926년 4월에 옮긴 모울메인(현재의 몰먀잉)은 “코끼리를 쏘다”의 배경이 되었다. 모울메인에는 외할머니와 외숙모가 살고 있었고 그 도시에서 꽤 알려진 사람들이었지만 오웰은 그에 관해 말을 아꼈다고 한다. 1926년 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발령 받은 버마 북부 이라와디강 좌안의 카타는 장편소설 [버마 시절]의 배경이자 에릭의 마지막 근무지였다.
저자는 조지 오웰의 초상화가 걸린 한 카페에서 ‘카타의 오웰 전문가’ 뇨 코 나잉을 만난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금서였던 [버마 시절]을 한참 후에 읽었고, 아마추어 역사가로 변신해 1911년 식민 시대의 지도와 소설 속 장소들을 대조하는 작업을 통해 소설에 등장한 12채의 건물을 찾아낸 당사자다. 저자는 그의 안내로, 현재 경찰서장의 관사로 쓰이는 오웰이 살던 집을 방문하고 남아 있는 주요 장소들을 확인한다. 출간 당시 ‘카타’는 소송을 피하기 위한 출판사의 요구로 ‘카우크타다’(‘돌다리’ 혹은 ‘선창’이라는 뜻의 미얀마어라고 한다.)로 바뀌었는데, 카타에 새로 문을 연 호텔 중 한 곳의 식당에 ‘카우크타다’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세계적인 작가의 한 시절과 한 작품이 오롯이 담긴 장소에서 살아가는 후세의 열정적인 발견, 명성과 기념이 가져올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지역의 움직임, 거기에 공영방송 미얀마 tv가 조지 오웰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 이후 팬데믹과 군부 쿠데타를 거치며 카타는 어떤 변화를 맞이했을지 궁금하다.
저자는 카타에 세워진 아웅산 장군의 동상을 발견하고 독립 영웅이었던 그의 이중성과 버마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오랜 가택연금 생활을 했던 그의 딸 아웅산 수치 여사 그리고 지배층 교체에 가까웠던 1948년의 독립, 1962년 군사쿠데타로 시작된 군사독재, 1988년 8월 8일 ‘8888’ 항쟁과 실패 등 버마의 현대사도 짤막하게 소개한다. 한때지만 버마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며 동향에 관심을 갖고 관련 책도 읽고 했었음에도 전혀 몰랐던 군인과 정치권이 의존한 ‘점성가’의 존재와 저항이 시작된 날에 대한 ‘점성학적 길일’이라는 표현은 새롭게 다가왔다. 개연성 없는 단어 선택은 아닐 것 같은데, 서양인의 눈으로 볼 때 유독 도드라졌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사용된 걸까. 저자는 랑군에서 오웰의 책을 미얀마어로 번역한 투레인 윈을 만난 이야기로 글을 마친다. 청소년기에 [버마 시절]을 발견하고 매료되었던 그는 오웰의 수필집 번역을 막 마쳤다. 그는 제국주의에 환멸을 느꼈지만 피식민지인들을 미화하지 않으며 당시 버마 사회의 모습을 낱낱이 기록한 오웰의 정직성과 용기를 높이 평가한다.
“3. 파리의 포도鋪道 위에서”는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경험하던 1928년 파리에서 에릭이 거했던 장소들을 찾는다. 책에 명기된 ‘코크도르 로’는 가상의 이름으로 현재는 파리 5구의 포드페르 로. 오늘날의 빈민들은 파리 외곽순환도로 건너편이나 넓은 교외 지역에 살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고 버마에서 돌아와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에릭은 가난한 이들과 매춘부, 부랑자 등이 엉켜 사는 파리 중심지 콩트르스카르프 지구에 위치한 트루아 무아노 호텔에 묵었다고 한다. 오웰은 이제는 없어진 싸구려 호텔에 묵으면서 영어 강습으로 푼돈을 벌고 프랑스어로 쓴 기고문을 발표하며, 에릭 블레어로서 작가의 삶을 시작한다. 벨 에포크의 낭만은 옛일이 된 파리에서 가난한 이들과 어울리며 사회를 탐구하던 에릭은 어느 날 가진 돈을 도둑맞아 거리로 내몰리고, 호텔 주방과 고급 식당 등에서 접시닦이로 일하며 관찰한 화려함의 이면을 기록으로 남겼다.
1929년 말 지적장애인을 보살피는 일을 제안 받아 영국으로 돌아가지만 그 사이 일자리는 사라지고, 런던과 근교를 아우르는 떠돌이 생활은 1930년대 초까지 계속된다. [신부의 딸]에서 도러시가 경험하는 홉 따기와 도심 노숙 생활의 디테일한 세부들을 오웰은 짧지 않은 기간 몸소 겪었던 것이다. 저자는 작가로서의 잠입 취재나 참여 관찰을 넘어서는 오웰의 파리와 런던 생활에 대해, “자신의 편견들을 초극하려는, 사회계급의 장벽을 부수고자 하는 거의 자학적인 시도 같은 측면도 있었”다고 쓴다. 그 결과 오웰은 극빈자들에 대해 “당신이나 나와 같은 인간이며, 그들이 당신이나 나와 똑같지 않다면 그것은 그들의 생활방식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버마 식민지 경찰 생활에 대한 죄책감과 깨달음에 더해 오웰이 이 시기에 대해 설명한, 저자의 인용 글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나 자신이 제국주의에서 벗어나야 함은 물론, 인간에 대한 인간의 모든 형태의 지배에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다. 스스로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가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어졌다. 그들 중 하나가 되어 그들 편에서 억압자들에 맞서고 싶어졌다. 모든 것을 혼자 생각해야 했기 때문에 억압에 대한 증오심을 유난히 길게 끌고 갈 수 있었다. 당시에는 실패만이 미덕처럼 보였다.” 파리와 런던에서의 경험을 담은 책은 여러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한 끝에 1933년 1월에 빅토르 골란츠의 출판사에서 출간된다.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이 세상에 등장했고, 본명을 가린 이유는 가족의 명예를 위해서였다고 한다.
“4. 노동자들 틈의 지식인”에서 저자는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의 배경이 된 맨체스터의 퇴락한 탄광 도시로 향한다. 20세기 중반까지 채탄과 철강공업으로 영국 중공업의 상징이었던 지역의 모습을 저자는 ‘사라진 문명의 풍경 같다’고 표현한다. 1936년 2월, 오웰은 ‘좌파 도서 클럽’ 총서 중 노동자 계층의 생활에 관한 책을 기획해 요청한 빅토르 골란츠의 제안으로 이곳에 온다. 거액의 선인세가 지급됐고 취재는 두 달간 이루어졌다. 책의 제목은 지역의 선착장을 해수욕장에 비유한 당시의 대중적인 농담에서 따온 것으로, 가난한 노동자 도시의 현실을 풍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오웰은 지역의 곳곳을 탐문하고 갱도에도 직접 내려가며 광부들의 노동과 삶을 관찰하고 기록한 1부에 더해, 당시 좌파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을 담은 2부로 책을 완성한다. 오웰의 작업이 못마땅했던 빅토르 골란츠는 자신의 견해를 담은 서문을 덧붙이고 개정판에서 2부를 삭제한다.
여전히 ‘근본적으로 노동도시’의 정체성이 남아 있는, 그러나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위건을 찾은 저자는 거리와 시립도서관 등 오웰의 흔적을 좇고 주민들을 만난다. 빈곤한 노동계급의 현실과 좌파의 위선을 고발했던 오웰의 책에 불만을 느낀 건 기획자만이 아니었다. 주민들은 오웰이 위건의 긍정적인 면을 외면하고 낙후하고 취약한 부분만을 찾아 선별적으로 부각시켰다고 생각했고, 그런 기류는 현재까지도 존재한다. “오웰은 심히 부당했고, 이 도시는 지금도 그 이미지 때문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그의 이름은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오웰은 마치 우리에 갇힌 원숭이들을 보듯 노동자들을 살펴보러 온 속물이었습니다.” 저자는 당시의 오웰과 그의 책이 선사한 낙인감을 기억하는 이들과 함께 성장한 1954년생 지역 역사가 토마스 월시의 말을 그대로 전한다.
오웰이 체류하던 당시 모습 그대로라는 시립도서관을 방문한 저자는 문서보관소 직원을 통해 2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의 퇴락과 1970년대 말 대대적인 폐광 등으로 지역 경제가 오랜 하향곡선을 그렸음에도 변치 않은, 몇 세대를 걸쳐 광부로 일했던 주민들의 자부심과 외부에 대한 경계심에 대해 듣는다. 영국 북부 노동자 도시의 독특한 지역색이기도 한 이 특성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른 위상과 평가의 변화도 크다. 시 의회 행정수반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그의 시대의 책’이며 그 시대는 지나갔다고, 결과적으로 “오웰은 위건을 지도에 올려놓았고, 그건 위건 시에 득이 되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2017년 위건 시민인 뮤지션 알렉스 그레고리가 오웰의 책 내용을 가사로 노래를 만들어 오웰의 양자인 리처드 블레어가 ‘오웰 협회’와 함께 위건을 방문하고, 이를 계기로 시 차원에서 만들어진 [위건 부두를 넘어서]라는 뮤지컬이 2018년 첫 선을 보였다고 한다.
위건 부두에 자리했던 ‘더 오웰’이라는 펍은 수년 전 문을 닫았지만, 오웰의 존재감은 위건 곳곳에 적당히 남아 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작가로서 오웰에게 첫 성공을 안겨준 책이었는데, 저자는 오웰이 위건에서 얻은 중요한 또 하나로 반파시스트적 사회주의 세계관을 지적한다. 정치 이론의 권위가 아닌 직접 경험으로 자신의 견해를 세우고 움직였던 오웰이 영국 파시스트 연합 집회에 참석한 곳이 바로 위건이었고, 몇 달 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참전한다.
“5. 총구 끝의 사상”은 1936년 말부터 6개월가량 오웰이 POUM(통일노동자당)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스페인 내전의 배경지로 향한다.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와 여러 에세이를 통해 인간과 전쟁 그리고 전체주의 등에 대해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바르셀로나에 처음 도착해 느낀 해방감, 부대 생활에서 경험한 동지애, 전장의 혹독함과 권태, 적진의 군사 역시 같은 인간이라는 깨달음 같은 것이 개인적인 소회였다면, 좌파의 분열과 위선 그리고 진영을 가리지 않는 전체주의의 패악은 이후 그가 오랫동안 천착하는 주제가 되었다. 총상을 입었지만 회복하고 돌아온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반역자가 되어 있었고 수배를 피해 변장하고 프랑스로 피신하는 것으로 스페인 내전 현장을 떠났다.
저자는 스페인 내전과 관련된 당시의 국제 정세와 스페인 내부의 여러 상황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관련된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흥미롭게 전한다. 바로셀로나행 기차를 타기 위해 들른 파리에서 만난 [북회귀선]의 작가 헨리 밀러가 오웰의 참전을 말리다 실패하자 자신의 벨벳 재킷을 주었고, 오웰은 스페인 체류 내내 그 옷을 입고 지냈다. 에릭 블레어라는 식료품상으로 병적을 등록했던 오웰이 군사교육을 받을 때 신병들을 촬영했던 아구스티 센텔레스라는 사진작가는 공화파가 패배한 후 프랑스로 피신해 남부 카르카손에 필름을 숨겨두었는데, 1979년에 되찾은 덕에 오웰의 스페인 내전 시절 모습이 사진으로 남았다. 오웰이 속한 부대의 대대장 조르주 코프에 대한 소개와 다음 장에서 후세로까지 이어지는 인연,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는 아라곤의 ‘오웰 도로’와 공화파 진지에 대한 묘사, 참호를 발견하고 복원작업을 주도하며 [오웰, 우에스카에서의 커피 한 잔]이라는 책을 출간했다는 빅토르 파도르와의 인터뷰 등 많은, 나로서는 처음 접하는 이야기들을 저자는 전한다.
스페인에 가본 적이 없지만 여행이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접했던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를, 이 부분을 읽으며 무척 새롭게 느꼈다. 저자는 현재는 기능과 외관이 완전히 바뀌었지만 오웰의 체류 당시에도 있었던 도심의 여러 건물들을 당시의 상황과 함께 설명하며 격세지감 속에서도 역사의 흔적을 소환하려 애쓴다. 결국 “오웰의 국제적 명성을 고려할 때, 세계적 관광명소인 이 도시에서 오웰에게 바치는 경의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고 쓰지만 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싸워야 하고, 싸우기 위해서는 자신을 더럽혀야 한다. 전쟁은 악이지만, 대개는 최소한의 악이다.” 저자도 인용한, 스페인 내전을 회고하며 쓴 오웰의 글 일부다. 굳이 감수하지 않아도 될 위험을 자처했던 작가의 진정성과 위대함이 느껴지지만, 참 어려운 문장이다.
“6. 주라 섬의 로빈슨 크루소”에서 저자는 [동물농장] 출간으로 유명 작가 반열에 오른 오웰이 1946년부터 몇 년간 머물며 [1984]를 집필했던 스코틀랜드 이너헤브리디스 제도 주라 섬의 반힐을 찾는다. 주라는 정기적인 연락선이 없는 외진 섬으로 주변의 아일레이 섬에서 주라 섬의 크레이그하우스 마을로 가는 페리를 탄 후, 마지막 10km의 흙길을 포함해 50km를 더 가야 반힐에 닿을 수 있다고 한다. 아내 아일린이 사망한 후 어린 아들을 키우며 조용히 창작에 매진하고 싶었던 오웰은 <옵저버>지 편집장 데이비드 애스터 덕분에 이곳으로 이주했는데, 당시 런던에서는 가려면 이틀이 걸렸다고 한다.
저자가 찾은 반힐은 오웰이 체류할 당시 주인의 후손이 관리 중이었고, 농가와 주변 환경은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외진 섬에서도 외진 곳에 위치해 물자가 부족하고 편의 시설도 없었는데, 오웰은 이곳에서 직접 농사와 사냥을 하면서 생활했다. 아들과 시간을 보내고 하루의 일상을 기록하고, 스모그 가득한 런던과는 달리 오염되지 않은 공기를 마셨다. 아들과 조카들과 나간 소풍에서 물살에 휩쓸려 고립되었다가 극적으로 구조되기도 하고, 결정적으로는 [1984] 집필에 몰두하면서 건강을 해치게 되어 결국 섬을 떠나게 되지만 말이다.
접근성이 좋지 않은 곳이지만 ‘오웰 협회’는 매년 이곳을 방문해 오웰의 흔적을 둘러보고 죽을 고비를 맞았던 소용돌이를 체험하기도 한다. 저자도 이들의 순례에 동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총무는 어릴 적 이곳에 살았던 아들 리처드 블레어 그리고 주최자는 스페인 내전 시기 오웰 부대의 대대장이었던 조르주 코프의 아들 쿠엔틴 코프라는 점이 흥미롭다. 저자는 주라 섬이 오웰의 명성을 이용해 무언가 하지 않는 점을 높이 사며, 1984년에 한 증류수 제조사가 특별 위스키 양조통에 소설의 제목을 붙인 정도가 전부라고 전한다. 오지에 가까운 장소여서 더 그럴 것 같은데, 노령인 리처드 블레어와 쿠엔틴 코프 이후에도 ‘오웰 협회’의 다정하고 열정적인 방문은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튼스쿨과 미얀마, 파리 도심과 위건, 스페인과 주라 섬까지 오웰의 대표적인 장소들을 순례한 저자는 마지막으로 “7. 모든 것이 오웰적이다!”라는 짧은 글에서 세계 각국의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오웰의 현재적 영향과 좌우 진영을 막론한 다양한 재해석과 추종의 경향 등을 일별한다. 그중 2017년 11월에 오웰이 라디오 프로듀서로 근무했던 런던 BBC 건물 앞에 동상이 세워졌는데 직원들의 흡연 장소로 주로 이용되던 곳이라는 점이 재미있었고, 런던 정도면 언젠가 나도 한 번은 가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져 반가웠다. 그리고 마지막 문단에서 “오웰의 지속적인 영향력은 그가 취한 입장들보다는 언어의 명쾌함과 높은 정직성 덕분입니다. 그는 열린 태도로 사실들에 임했고 주저 없이 견해를 수정하곤 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는 보기 드문 자질이죠. 그는 자신이 취한 이념적 입장이 자신에게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눈으로 본 것을 썼습니다.”라는 쿠엔틴 코프의 말을 옮기며, “어쩌면 우리는 그저 오웰을 읽고 또 읽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지도 모른다”고 책을 끝맺는다.
짧은 책 내용을 너무 많이 옮기고 인용해서 민망하지만, 그만큼 흥미롭고 기억하고 싶은 대목이 많았다. 자신의 감상이나 소회 대신 해당 시공간과 관련된 여러 인물을 인터뷰하며 다양한 견해와 사실을 전달하는 서술 방식이 깔끔했고, 버마와 스페인 등에서는 소설만으로는 알 수 없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짤막한 역사적 설명도 추가되어 더 좋았다. 다양한 진영에서 수용하고 끌어들이는 오웰의 보편성과 현재성을 잘 느낄 수 있었고, 영국이나 유럽에서는 널리 알려졌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신선했다. [나는 왜 쓰는가]에서 아내가 사망한 뒤 입양한 아이를 버릴 것이라는 주변인들의 예상과 달리 성심껏 돌봤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어서, 오웰 사후 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했는데 책 덕분에 해소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내용도 문체도 군더더기 없이 간명하고, 저자의 감정이나 입장이 강조되지 않아 잘 읽히는 책이었다. 저자의 개성이 도드라지지 않지만 오히려 그게 장점으로 느껴졌고, “M에게”라는 헌사 그리고 6줄에 불과한 감사의 말에서도 느껴지는 일관성도 매력적이었다. 본문에 사진이 한 장도 없는 건 아쉬웠지만 책이 마음에 들다 보니 그마저 단정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