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에 해당되는 글 400건

  1. 2023.05.09 [여자 아이 기억]
  2. 2023.05.08 [사건]
  3. 2023.04.22 [에이징 솔로]
  4. 2023.02.21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5. 2023.02.16 [뾰족한 마음]
  6. 2023.02.06 [헤어질 결심 각본]
  7. 2023.01.28 [입 없는 아이]
  8. 2023.01.27 [마지막 거인]
  9. 2023.01.26 [트로츠키와 야생란]
  10. 2023.01.17 [시인 아저씨, 국수 드세요]
비밀같은바람2023. 5. 9. 23:42

 


누구나 자신의 경험에 거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감정을 분석할 수 있지만 아니 에르노야 말로 그 극단에 이르는 글쓰기를 하는 것 같다. 시골 잡화점집 고명딸로 태어나 애지중지 성장하며 공부 능력과 문화적 취향으로 주변의 이웃 혹은 어른들과 차별화되며 높은 자존감을 갖게 되었지만 출신 계급에 대한 컴플렉스와 수녀들이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다니며 내면화한 고루한 가톨릭 신앙의 문화와 관습에 대한 양가감정이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이행하는 열여덟 시기 그녀의 원형질이었던 것 같다. 집과 기숙사를 벗어나 처음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된 여름 캠프에서, 이러한 복합적이고 혼란스러운 정체성에 성적 호기심과 욕망까지 더해져 일어난 사건과 관련한 후일담이 서늘하게 담겼다. 

 

자신의 감정과 삶을 활자화해야만 하는 집요한 강박이 작가에게는 구원이자 형벌인 것처럼 느껴지는데, 이니셜로 등장하지만 반세기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반복적으로 인터넷 전화번호부에 검색되고 마침내 구글에서 당사자는 전혀 모르는 채 금혼식 가족사진으로 현재의 정체가 드러나지는 H가 오히려 가여울 지경이었다. “나는 그가 부럽지 않다. 글을 쓰고 있는 건 나니까.”(131p)에서는 약간 망연자실했는데, 내가 이상한 걸까. 저자는 비상한 감각적 예민함과 타고난 작가적 기억력과 기록 강박으로 자신의 삶을 구성한 수많은 사건과 그를 구성한 인물들을 끊임없이 사유하고 해체하고 소환하며 자신의 삶의 과거와 현재에의 의미와 영향을 자문하는데, 솔직히 읽으며 질리는 느낌이었다. 


아니 에르노•백수린 옮김
2022.11.30초판1쇄발행, 레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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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5. 8. 21:51



원작을 영화화한 [레벤느망]을 본 탓에 기본적인 내용은 알고 읽었다. 임신 중단이 법으로 금지된 시절에 23살의 대학생이 홀로 겪는 다중의, 다단계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영화로 보았기에 활자를 통해 다시 보면서 나도 모르게 영화와 소설의 싱크로율을 확인하는 데에도 신경이 많이 갔던 것 같다. 각색 때문인지 기억하고 있는 영화의 내용과 소소한 차이는 있었지만, 가장 큰 차이는 영화보다 확연히 비대하고 지배적인 작가 자신의 사유와 자아의 비중이었다.

 

1999년의 작가가 1963년의 사건을 서술하는 내용과 동시에, 중간중간 ( ) 안의 단락들에는 1963년을 기억하고 추적하고 회상하며 기록하기 위해 애쓰는 1999년의 작가의 결의와 단상과 부연과 후일담 등이 배치되어 있는 글은, 흡사 27년의 세월을 건너 마주한 하나의 자아의 대화 같기도 하지만 지극히 자신에게 몰두하는 기록자의 내면을 그대로 옮긴 과잉 담화처럼 느껴졌다. 작가의 기록이 당혹스러울 만큼 솔직하고 모두에게 거리를 둔 것이기 때문에, 또 책이 나온 지 이미 20년이 넘게 흘렀고 그가 지독할 만큼 자신의 이야기에 천착하는 작가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일어난 사건이면서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 맥락과 의미를 환기하게 되지만 말이다.

 

자신의 경험은 물론 내밀한 욕망, 속물성, 일방적이고 주관적인 기분 등을 포함한 다양한 감정을 자기검열 없이 거의 투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실은 다들 그렇게들 살아가지만 타인의 시선 안에서는 ‘문제없는 삶’을 살아가는 듯 보이고 싶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한 사람의 지평을 사회적으로 확장하는 느낌이었다. 단지 씀으로써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하나의 세계가 구축되는 것이 기록의 당연한 속성이겠지만, 책을 읽으며 유독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아주 오래 전 선물 받아 [단순한 열정]을 큰 감흥없이 읽은 후 오랜만에 작가의 책을 읽었는데, 몇몇 문장들(41쪽 “나는 이렇게 쓰기를 망설인다.”, 75쪽 “나는 말로 표현 못 하는 지성에 취해 있었다.” 등)이 반짝이며 다가왔지만(이런 느낌을 받을 때마다 번역본의 한계, 원문을 읽지 못하는 나의 한계를 새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문장은, 어쨌든 번역자의 문장이니까.), 전반적으로 나와 잘 맞는 작가는 아닌 것 같다고 느꼈다. 짧은 책이지만 미주가 적지 않았는데, [원주]로 표기한 걸 제외하면 옮긴 이의 노력인 것 같고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작가가 중의적인 의미로 사용했거나 ‘파사주 카르디네’처럼 함의를 담은 단어에 대한 설명은 고마웠다. 

 

노벨문학상 수상보다는 작년 부국제에서 본 그의 다큐가 꽤 좋았어서 읽어보려 사둔 [여자 아이 기억]이 엄청나게 좋지 않는 한 나와 그의 책 인연은 세 권으로 마무리될 것 같다. 자전적인 기록의 외연이 확장되고 독자에게 전달되는 반향과 세계와의 화학작용을 인정하지만, 엄청나게 좋아하는 게 아닌 한 누군가의 온갖 경험과 머리와 마음 속 갖은 필터 없는 사유와 표현들을 이렇게까지 섭렵하듯 접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개인적으로 시기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실은 가끔 스스로에 도취된 듯한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어떤 표현들에서는 뜨악함이 느껴졌고 두어 번 반복되면서는 좀 피곤하다고 느꼈다. 


아니 에르노•윤석헌 옮김
2019.10.18.1판1쇄 222.10.11.1판4쇄펴냄, (주)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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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4. 22. 19:51



삼사십대를 소위 사회단체에서 일하며 보냈다. 그만둔 후엔 사회적 관계 없이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 비혼 여성 중년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피부로 별로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이주해 혼자 지내며 나만의 일상에 침잠한 탓에 사회에 팽배한 시선과 멀어지기도 했을 것이고. 많이 공감하며 읽으면서도 인터뷰이들의 말을 옮기며 해설하는 저자의 반복적인 방어적 태도가 좀 불편하기는 했다. 에필로그에서 밝히는 한계는 초반부터 느껴졌는데, 한 사람이 19명이나 인터뷰해서 책을 내는 일만도 쉽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지만 본문이 시작되기도 전에 핫한 여성 작가들의 추천사를 싣기보다 프롤로그에서 먼저 인터뷰이 선정의 현실적 한계를 언급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 솔직히 읽기도 전부터 지금의 나는 이 책의 한 ‘반례’가 아닐까 싶은 저어하는 마음과 궁금한 마음이 교차했다.

 

'던바의 수'의 다섯 친구 중 덕질 대상도 포함되는 데에서는 민망하지만 안도감을 느꼈고, 친구를 만들기 위한 노력에 대한 부분에서는 그런 거 하기 귀찮다는 마음이 지배적인 시기라 느끼는 저항감이 만만치 않았다. 민폐기피자로서, 흔쾌히 도움 받는 연습도 필요하다는 걸 인정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몇 년 전 교통사고로 입원한 주말, 멀리서 찾아오겠다고 거듭 말하는 지인의 말이 고마웠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읽으며 한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는 참으로 준비해야 하는 것도 필요한 것도 많구나 싶었고, 가부장 중심 가족주의 한국 사회에서 자리잡은 제도와 관습 그리고 변화하는 인간의 욕망과 사회의식의 성장으로 현실과 불화하는 시스템의 문제들이 새삼 크게 다가왔다.

 

사회적 발언권과 문화 자본을 가진 세대가 돌봄에 직면한 시점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었는데 각종 통계와 사례, 여러 이론 들을 근거로 한 실증적인 서술에 인터뷰이와 저자 자신의 이야기까지, 방대하고 복잡한 서사를 일반화하지 않고 잘 정리한 책이었다. 다 읽고는 조금 쓸쓸한 마음이 되었는데 그 무엇으로든 살아가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어서인 것 같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지금의 내 상태를 비추었기 때문인 것도 같고, 자주 언급된 전주의 공동체나 꽤 괜찮다고 느낀 여주의 공동체 역시 생각하면 너무나 바쁘게 무언가를 계속 해야만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냥 무위도식 무임승차로 현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을 들킨 것 같은 기분. 이번 달 모임 책이었는데 동시대의 동년배로서 대체로 공감이 되고 사회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들이었지만 지금의 내게는 조금 피곤하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내용이었다.

  

김희경
2023.3.15초판1쇄찍은날 3.22초판1쇄펴낸날, 도서출판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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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2. 21. 13:24

 


대중문화 콘텐츠와 소비 문화가 대다수의 관심사를 지배하는 현실, 어느 때보다 많은 양의 콘텐츠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현실에서 시간을 아끼고 또래와의 소통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한 선택이자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자리잡게 된 '빨리 감기'에 대한 꼼꼼하고 다각적인 분석이 담긴 책이다. 

 

'들어가며'와 '마치며' 사이 5장의 본문(제1장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제2장 대사로 전부 설명해주길 바라는 사람들', '제3장 실패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 '제4장 좋아하는 것을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 '제5장 무관심한 고객들')으로 구성된 책은 빨리 감기에 익숙해진 독자들을 배려한(?) 듯, 평균 한두 쪽의 절 제목까지 빽빽하게 명기해 목차만으로도 책을 읽은 듯한 느낌을 준다.

 

본문에 사용한 그린 컬러와 편집디자인이 약간 조야한 느낌은 들었지만 절 제목과 함께 빨리 감기 표시(⏩), 하단의 쪽수 표기와 나란히 영상 플레잉 스크롤바와 조작 버튼(▶️⏩⏯) 및 현재 장의 재생지점을 달리 표시한 이미지는 참신하게 느껴졌다. 전반적인 내용은 비판적인 톤이면서도 이러한 트렌드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인정하는 느낌이랄까.

 

이전보다 한층 빨라진 일상의 호흡 속에서 수용자들은 드라마나 영화를 작품이 아닌 콘텐츠로 받아들이고, 감상하기보다 소비하는 경향이 강하다. 소비는 감성적 영역이기보다 정보 수집의 역할을 하는 측면이 강하고, 이러한 변화를 추동하는 힘은 개인이 속도를 제어할 수 있는 기기와 기술의 발전에 근거한다. 시간 가성비가 중요한 이들일수록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으로 빨리 감기와 건너뛰기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고, 이러한 추세는 영상 제작 과정에도 영향을 미쳐 빨리 감고 건너뛰어도 전체적인 내용 이해에는 큰 지장이 없는 콘텐츠들이 활성화된다.

 

저자가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한 표(218쪽)에는 영화의 발명으로부터 다섯 번의 변곡점을 거친 영상 시청 행태의 변화가 드러난다. 영화관에서만 영상을 볼 수 있었던 19세기 말, 가정의 tv를 통해 '장소적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1950년대, 비디오와 dvd를 통해 '시간적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1980년대, 영상 배급을 통해 '물리적, 금전적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2000년대 후반 그리고 2010년대 후반부터 빨리 감기 시청과 건너뛰기 기능 추가를 통해 '시간적 제약으로부터 거듭 해방'. 제약으로부터 수차례 해방되며 이른 오늘날의 시청 행태가 진전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본문의 말미에서 저자는 라이브 연주가 음악의 본령이었던 시대에 등장한 레코드가 '통조림 음악'이라 폄훼되었던, pc와 인터넷의 등장으로 컴퓨터를 통한 글 읽기가 우려의 대상이 되었던 사례를 거론한다. 내용의 온전성 훼손이 불가피한 빨리 감기와 건너 뛰기가 이와 같은 선상에서 다뤄질 현상인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대세의 역행은 어려워 보인다. 필자는 불가역성을 인정하고 변화된 현실에서의 전망을 상상하고 제안하면서도 “마치며”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맺는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본다니 대체 어찌 된 일일까?” 

 

빨리 감기를 새로운 현상으로 짚으며 논의를 풀어나가는 초반부에서 저자는, 돌이켜보니 자신 역시 '일'을 해야 할 때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빨리 감기와 건너뛰기는 영상 시청의 목적에 따른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문제는 편의와 효율을 추구하며 급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세계에서 전면화되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빨리 감기와 건너뛰기라는 현상이 가능해진 직접적인 원인은 기술적인 부분이겠지만 그 기저에는 긴 호흡과 여백, 느림의 미학과 성찰의 여유 같은 것이 용인되지 않는 세계의 현실이 있다. 분석은 흥미로웠고 대안 같은 것은 없다. 

 

 

이나다 도요시 지음•황미숙 옮김
2022.11.10.1판1쇄 11.29.1판2쇄발행, (주)현대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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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2. 16. 14:43

 


저자가 지닌 대중문화 컨텐츠와 미디어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는 전망과 윤리라는 매우 확고한 믿음에 기인하는 것 같다. 과거 트위터의 리트윗을 통해 가끔 그의 의견을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가 속한 장에서는 꽤 '소수의견'에 속할 이야기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수긍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기억으로 신간 소식을 듣고 선택했는데,  레퍼런스로 삼은 대상 중 팔할 이상이 몰랐거나 낯선 것이어서 구체적 내용에 대한 비판적 접근에 온전히 공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정기적으로 발표했던 글에 대해 책 출간을 준비하며 새로운 코멘트를 덧붙인 점은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느껴졌다.

 

글이 재미 없지는 않았지만 꽤 계몽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내가 경험하는 것보다 세계는 훨씬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으로 기울어져 있고 그의 글이 상대하는 세계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 사람의 평론가, 한 편의 글이 세상의 변화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은 크지 않겠고, 그도 글에서 자주 언급하는 걸 보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의외로 그랬으면 하는 큰 열망이 잠재되어 있을 것 같다고도 느꼈다. 웹툰을 본 적이 없고 화제가 되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역시 본 적이 없다 보니 사례로 언급되는 대다수 작품이 초면이거나 제목만 얼핏 들어본 수준이었는데, 그의 비판과 지적을 수용한다면 놀랍도록 저열한 작품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며, 예전에 학벌없는세상에서 활동하던 하재근이 대중문화평론가라는 타이틀로 연예 프로그램에 등장한 걸 목격했을 때의 당혹감이 떠오르기도 했다. 대중문화가 곧 연예계 일련의 일들과 동의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비판적 논점 없는 그의 코멘트를 접하며 알지도 못하면서 생계의 무게를 떠올렸었다. 인기와 화제성이 모든 걸 잠식해버리는 연예산업 내에서 주류의 목소리에 편승하지 않고 '외로운' 목소리를 꾸준히 내는 듯한 저자의 태도가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책이었다. 성의 없고 뭉툭한 독후감이 미안할 지경이지만, 그의 분투가 환기하는 변화가 가끔은 발견되기를 바란다.   


위근우
2022.8.26초판1쇄, 시대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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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2. 6. 02:42

 

 

영화를 재미있게 봐서 대본이 궁금했다. 전체적으로 대사를 위한 감정 상태나 상황 설명 등은 디테일하게 제시되어 있는 데 반해 말투나 사투리 여부 등은 명시되어 있지 않아서 신기했다. 영화 초반 피씨방 알바노동자의 사투리가, 물론 부산이 배경이니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꽤 튀게 느껴졌는데 그 부분에 대한 지시사항이 각본에는 없었다. 영화를 볼 때 서래의 아파트 주차장에서 잠복하며 관찰하던 해준이 어느 순간 서래의 거실에 들어가 투명인간처럼 곁에 있는 장면, 현실과 상상이 자연스럽게 뒤섞이는 부분이 흥미로웠는데 각본에는 별다른 부연이 없었다. 감독의 머릿속에 각본-촬영-편집까지 계산이 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걸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영화에서 느꼈던 것보다 서래와 해준의 감정이 각본에서는 굉장히 진하게 전면적으로 묻어난다는 점이었다. 영화에서도 용의자와 담당형사 간의 긴장 그리고 연인으로서의 사랑의 감정이 어느 시점 이후에는 확 증폭되면서 고조되지만, 각본상으로는 두 사람이 첫 만남에서부터 거의 운명의 상대임을 직감한 사랑 영화 같은 느낌이었다. 후반으로 갈수록 그야말로 목숨을 버릴 각오까지 한 사랑의 이야기로 질주하지만, 개인적으로 초반부 두 사람의 역동에서는 경계와 의심이 더 큰 비중으로 다가왔었는데 말이다.

 

서래가 거실에서 보던 사극 드라마가 <흰 꽃>이라고 나오는데 실제 있었던 작품인지 모르겠지만, 영화를 볼 때는 뭔가 애절한 느낌의 화면만 눈에 들어왔는데 ‘류선생/서래’ - “사랑은…… 그 외 다른 모든 것의 포기니라.” 같은 직접적인 대사의 복선도 새삼 눈에 띄었다. 각본과 상영된 영화 사이에 달라진 부분이 얼마나 있는지는 감지할 수 없었지만, 박찬욱 감독 영화의 에센스를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편견 때문이었는지 결말에 이르기 전까지 두 버전의 온도차가 꽤 크게 느껴져서 신기했다. 폭력 장면을 견디는 게 많이 힘든 편이어서 [올드 보이] 이후 오랜만에 본 박찬욱 감독의 작품이 나름 멜로여서 반가웠는데, 내가 받은 느낌보다 더 극한의 멜로 영화였음을 각본을 보고서야 알았다. 

 

 

정서경 박찬욱
2022.8.5초판1쇄 8.22초판7쇄, (주)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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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1. 28. 01:41

 


[마지막 거인]과 함께 읽은 이번 달의 모임 책이었다. 완전히 다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맥락도 다르지만 ‘말’이라는 연결고리가 이어주는 생각이 재미있었다. 누군가 무심코 내뱉은 말이 만드는 오해와 편견, 무언가 다른 사람에 대한 거리감과 불편함, 티 내지 않아도 선뜻 다가가지 않는 태도로 전이되는 저어하는 마음. 주인공의 꿈 속 여자를 구해줄 수 있는 반지는 입 없는 아이의 손에 있었고, 주인공은 어쩌면 열두 살 어린이여서 자신이 입 없는 아이를 지레 멀리하고 눈 귀 코 없는 사람을 울게 했다는 사실을 미안해하지만... “넌 내게 다가오지 못하잖아!”

 

단지 다르다는 것만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것은 선입견과 혐오 감정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모두에게 다가가야 하나?
차이와 차별은 다르겠지만, 정말로 얼마나 많이 다를까? 내게 피해를 주거나 감정적으로 어긋난 일이 없는 상태에서 외양에서 비롯된 차이만으로 느끼는 주저함조차 가책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다가가지 않는 것은 실은 인정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것일까?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교육적인 차원의 논리와 성인이 되어 실제 살면서 관계에서 겪는 역동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어른이 된다고 쉬워지는 질문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림책을 잘 읽어낼 수 있는 소양 역시 나이 먹는다고 그냥 생기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박밤
2020.8.19.초판1쇄, 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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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1. 27. 17:12



19세기 런던의 연구자이자 탐험가 아치볼드 레오폴드 루트모어, 어느 날 부두를 산책하다가 늙은 선원에게서 이상한 그림이 조각되어 있는 아주 커다란 이를 사들인다. 서재에 틀어박혀 몇 달 간 연구한 끝에 이 뿌리 안쪽에 새겨진 미세한 지도를 발견하고 옛 책에서 보았던 ‘거인족의 나라’를 확신한 그는 1849년 9월 29일, 동인도회사 무역선에 올라 인도를 거쳐 미얀마의 마르타방이라는 지역에 도착한다.

 

티벳에서 시작해 미얀마를 거쳐 인도양으로 향하는 살윈강과 흑해를 거슬러 올라가며 거인국에 닿을 생각이었던 그는 스무 명가량의 장정들과 두 척의 보트를 마련해 항해를 시작하고 두 달 만에 흑해에 도착하지만 상류로 갈수록 탐험은 고행이 된다. 거친 물살과 험한 절벽, 울창하고 위험한 삼림을 통과하며 선원 중 두 명이 실종되고 지쳐버린 사람들을 되돌려보내고 후한 보수에 남기로 한 용감한 원정대원들과 탐험을 계속하지만 사람의 머리를 절단 내는 와족의 침입에 모두 죽고 혼자만 남게 된다. 

 

식물과 동물 표본을 채집하고 수첩에 그리고 기록하고 외롭고 힘든 탐험을 견뎠던 그는 혼자 남아 되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피로와 허기와 추위에 지친 채 나아가다가 절벽 사이로 비추는 빛줄기와 거인의 발자국을 발견한다. 정신을 잃은 듯 깊은 잠에 빠졌다 깨어난 그가 발견한 것은 계곡 곳곳에 큰 바위처럼 흩어져 있는 거대한 뼈들, 사투 끝에 도달한 거인의 나라를 확신하며 눈앞의 뼈들을 그리고 기록하고 일대를 탐험하며 꼬박 한 달을 보내면서 기력이 다해 쓰러진 그에게 거대한 돌기둥 같은 거인이 다가온다.

 

온몸에 미로 같은 금박 문신이 새겨진 남자 다섯, 여자 넷의 거인들은 감미롭게 노래하며 자신들이 만난 세계를 감응케한다. 주인공이 거쳐온 난관과 투쟁이 무색하게, 신비롭고 아름다운 낯선 존재들의 출현. 하지만 인간은 그만큼 지혜롭지 못하다. 비밀스럽게 간직하면 평화롭게 지속될 수 있는 다른 우주를 절멸로 내모는 것은 인간의 오만, 그들은 나지막하게 말할 뿐이다. “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니?” 책 말미 최재천 선생의 글 중 “자연에게 길은 곧 죽음입니다.”와 함께 책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은 두 문장이었다. 

 

 

프랑수아 플라스•윤정임 옮김
2002.2.20.1판1쇄 2010.3.10.1판27쇄, 디자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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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1. 26. 17:52

 


잠수종과 독 _ 공과 현우, 진보적인 신문사 방화 후 자살시도했으나 의식 잃고 병원으로 후송된 용의자를 맡게 된 공 / 현우의 교통사고와 죽음 / 집중치료실, 현우를 잃고 오히려 잠수종처럼 심연으로 가라앉는 공이 용의자를 대면하는 공간 / 인간은 물리적 존재이며 모든 것은 변질된다는 믿음을 가진 공, 감정적이고 극단적인 선택에 충실했던 그것이 단점이자 매력이었던 현우 

귀 이야기 _ 잠수종 다음에 잠수부, 서너 번의 만남 후 파도 속으로 사라진 십여 년 전의 연인 / 친척과 예수와의 강원도 여행 / 기능적이고 물리적인 귀의 면모와 함께 펼쳐지는 예수와 나의 다양하고 쌩뚱맞은 언쟁들, 닫을 수 없는 귀여서 들을 수밖에 없는 세상의 소음들처럼 느껴지기도 / '이승복기념관' / 같은 문장의 반복이 반복되며 만들어내는 리듬이 특이한, 첫 번째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문체 

트로츠키와 야생란 _ 바이칼호 안의 섬, 연인이자 동거인이었던 이와 함께였던 시간을 회상하는 주인공 / 연인을 몰락시킨 자에게 복수를 (했다고 생각)하고 함께였던 과거로 도피 / 멕시코시티에서 암살당한 트로츠키, 바이칼호의 섬에서 빙상차를 운영하는 트로츠키 / 소련 체제 몰락 후 섬에서 살며 온실 속의 식물을 돌보는 트로츠키와 류다, 환경단체 내부고발로 일주일 만에 모든 것을 정리한 후 외부와의 단절과 고립 속에 식물에 탐닉하고 마침내 식물에 갇혀버린, 고원지대의 바위에서 추락해 식물인간이 된 그 / 복수(했다고 생각)한 이의 복귀 소식을 접하고 어둠 속 바이칼호를 걸어 집으로 돌아가려는 나, 식물들의 환상과 환영 

•• _ 떠오르려고 올라간 옥상에서 마주친 까만 길고양이 토니를 바라보다 만나게 된 경찰, 그에게 마지막 인사로 녹음을 하는 나(은영), 토니가 가버리는 모습을 보다가 / 토니가 간 쪽의 길에서 애인과 이야기하던 동네 대학생이 편의점 앞 혼자 중얼거리는 알코올중독자와 검은 고양이 앨런 목격, 앨런이 편의점 쪽으로 향하자 언젠가 자신을 천사라고 말하는 과거 도장장이였던 알코올중독자와 나눈 대화 / 알코올중독자의 이야기가 계속되다가 깜장이가 부동산 쪽으로 향하자 부동산중개인의 말들, 그속에 등장하는 길냥이 밥 주다가 해고되고 길냥이 밥 주지 말라고 중개인이 동네에 붙인 벽보를 페북에 올리고 중개인의 꿈에 나타나 복수한 아가씨 그리고 과거 군대 시절 사회에서 도장파다가 와서 뭐든 반대로 하던 고문관 이야기 / 원한감정이 쌓인 천사들이 꿈에 나타나 멱살을 잡고 하늘로 올라가고 구름 위에서 막 패는 복수 / 떠드는 중개인 바라보던 길냥이가 중개인의 쫓음에 파출소 쪽으로, 층간소음 항의한다고 위층 가택침입 피의자로 온 칠십대 노인과 김순경의 대화. 자신이 사는 미래빌라 언급하다 언젠가 마주친 옆집의 아가씨가 곧 여기를 뜬다고 세상을 뜬다고 말한 걸 듣고 옥상에 가보라고 신고했던, 이야기하던 중 눈에 띈 길냥이를 나비라고 부르는 / 몸에서 떠오른 귀만 있는 존재가 되어 토니이자 앨런이자 깜둥이/깜장이자 나비인 까만 고양이가 이끄는 대로 동네 곳곳의 이야기를 만나게 되고, 어딘가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으로 동네를 배회한 고양이는 실은 자신을 챙겨주던 은영의 떠오름을 알리려던 것. 김순경이 걱정되어 찾아가지만 영물인 늙은 고양이와 천사(장)인 알코올중독자에게만 보이는, 실은 천사 은영의 떠오름? 그리고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눈앞에서 사라진 토니  

유명한 정희 _ 어릴 적 살았던 셋집의 주인집 아들이었던 단짝친구 정희,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며 묵념을 하고 청소를 하다가 빨간 물통에 머리를 박는 잠수놀이를 하던. 어느 날 대통령이 서거하고, 도통 이기지 못하는 잠수놀이에서 오래오래 버티는 정희에게 알 수 없는 적의를 느낀 후 멀어진 / 아버지의 권고에 따라 의대에 진학하고 동아리에서 만난 정희의 조카이자 친구에게서 그의 소식을 듣고, 군복무하던 사관학교에서 그를 목격하지만 알은 체하지 않고 관찰만. 노선도처럼 정해진 인생 경로를 따라 결혼하고 개업하고 예의 바른 외계인들 같은 부부 생활이 끝난, 빼돌린 약물을 스스로에게 투약하며 운영하던 변두리의 작은 신경정신과병원에 찾아온 정희의 고백. 무엇에 대한 것인지 알 수 없이 살의를 느낀다는, 이후 광화문 보수집회 연단에 선 정희를 목격하고 얼마 후 청와대 앞에서의 분신사망 소식 / 병원을 정리하고 내려간 고향에서 엄마가 꺼낸 말, 대통령의 죽음 후 이름을 따라갈 운명을 걱정해 정희라는 이름을 바꿨던 주인공 / “기연가미연가”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됨, [其然-未然-]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분명하지 않은 모양을 나타내는 말, 긴가민가(동의어)  

혹자가 말하길 _ 어린 시절 집성촌 비슷한 고향에서 이웃해 살았던 김지우와 염과 혹자 / 어른이 되어 도시에서 지우와 염이 결혼하고 혹자를 만나게 되는, 딱히 정답고 반가워보이지는 않지만 어릴 적 고향 친구랄 수 있는 관계로 집을 오가고 먹자골목에서 술자리도 갖던 염과 혹자 / 혹자는 죽은 건가, 살아 있는 건가? 혹자는 은연중 저어하는 마음이 있는 누군가를 상징하는 건가? / 솔직히 뭔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_ 왼쪽 면과 오른쪽 면이 나뉘어 두 개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은희를 클레오라고 부르는 K, 둘은 야녜스 바르다의 영화를 함께 보았고 은희가 사랑했던 사람은 영화의 배경이자 주인공이었던 파리로 떠났다. 사랑과 우울을 반복하던 클레오는 세상을 떠났고 K는 그가 뼛가루로 존재하는 춘천의 한 성당을 찾아간다. 함께하던 시절의 기억과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과 자신의 반응과 사유가 뒤범벅되어 안소니 홉킨스와 부르노 간츠를 닮은 머리를 잘라준 미용사와 성당 관리인이, 개구리를 삼킨 남자와 전철에 머물던 비둘기가, 삼켜졌던 개구리와 전철에서 벗어난 비둘기가, 클레오의 뼛가루와 혼령이... K의 의식의 흐름처럼 이어진다. 문구나 문장이 반복되는 리듬은 비슷했는데 자동기술처럼 이어지는 내용과 주절주절하는 듯 느껴지는 문체가 솔직히 갑갑하고 답답하게 느껴졌고, 만약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앞에 있다면 외면하게 될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작가의 시그니처 같은 문체라는 생각도 드는데,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내게는 인내심이 요구되는 스타일이었다. 유명한 영화지만 dvd만 사두고 보지는 못했는데 [도시를 걷는 여자들]에서 자세히 다룬 챕터를 읽어서 괜히 친숙한 덕인지 제목을 보고 가장 기대한 수록작이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살짝 낭패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코끼리 고구마 그리고 오조의 발목을 잡은 손들 _ 광장의 문화사를 연구하는 사회학과 대학원생 김수, 오래된 빌라의 버려진 화단을 오래 가꿔온 대장암을 앓는 80대 노인 명, 일찌기 돈의 흐름을 파악해 재테크와 부동산 투자에 능한 오조, 그들을 연결하는 소도시 도심권의 광장맨션과 프라자맨션 / 코끼리로 고구마로 또 무엇으로 변하며 보는 자가 보고 싶은 대로 보여주는 구름, 예나 지금이나 요구를 주장하고 관철하기 위해 광장에 모이는 사람들 그리고 법과 제도 소송을 이용하는 사람들  


노보 아모르 _ 최근작으로 대(소)중의 비난을 받고 애인에게 이별 통보를 받고 의사에게 요양을 권고 받고 지방 소도시로 내려온 나, 희소성으로 단골 주점이 된 가게의 사장 자코메티와 바에 마주앉아 나누는 이야기. 혼자만의 상상에 빠지는 게 특기인 나는 홀에 앉은 세 사람의 상황을 누아르로 상상하고 암 환자 빙의 등의 행복 연습을 권하며 영화에도 훈수를 두는 자코메티를 고까워하지만, 그가 2차 항암을 앞두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주점을 나와 홀에 있던 청년의 접근으로 마무리되는 마지막, “노보 아모르”는 즐겨듣는 노래의 밴드명이기도 대중의 비난을 받은 작품명이기도 했지만, 그에게 나타난 새로운 인연일 수도. 여러 뮤지션과 영화감독이 언급되는데 예람과 생각의 여름은 좀 의외였고 하덕규는 정말 반가웠다.  

소설을, 실은 이제 책 자체를 많이 읽지 않지만 때로 전혀 존재를 몰랐던 한국 작가의 소설을 읽으며 세계의 너름을 새삼 실감하곤 한다. 제목에 약간 끌렸고 수록작 제목들을 훑어보다가 영화를 좋아하는 듯한 작가가 궁금해져 선택. 우연 같은 언급을 통해 연결되는 서사와 인물, 내세울 것 없고 거창한 의미 부여를 할 만한 것이 전혀 주인공들, 사색적이고 현실적인 분위기에서 갑자기 혹은 자연스럽게 진입하는 신비와 초자연적인 현상의 세계. 흡사 환상문학 같은 느낌도 들었지만 어느 부분은 또 무척 현실의 디테일을 재현하고 있어 한 작가의 소설집이 맞나 싶기도 했다. 지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느낌을 주는 흥미로운 소설들이어서 신선했고 기회가 되면 다른 작품들도 읽어볼까 싶어졌다.

 

작가의 말 마지막 부분도 인상적이었는데, "아무도 진실을 소유하지 않지만 모두가 이해받을 권리가 있는, 매혹적인 상상력의 영토"라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의에 이어 그는 이렇게 쓴다. "그렇겠습니다. 세상에는 살아 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다보면 일상사에 바쁘다가도 어이없이 한가해지고, 차가운 마음이다가도 세상 모든 것이 문득 사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겠습니다."(297쪽)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겠다. 내게는 낯선 이름이었는데 찾아봤더니, 작가는 내게만 낯설 뿐인 이미 중견이었네. 몰라 뵈어서 미안합니다.  


이장욱
2022.5.20초판1쇄 발행, (주)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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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1. 17. 23:51

 

 

“나라를 빼앗기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떠돌던 시인을 불러다가 그 좋아하던 메밀국수 한 그릇 먹이고 싶은 마음”으로 기획했다는 그림책, 덕분에 오랜만에 시인을 만났다. 

현실이 되지 않아도 충만한, 상상의 위로를 잊어버린 채 지내고 있었다. 마음이 춥고 막막할 때면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따뜻함을 선사하는 상상을 해보아도 좋겠다. 어차피 마음이 팔할이니까.  


신순재 글•오승민 그림
2022.1.24초판1쇄, 천개의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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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