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에 해당되는 글 400건

  1. 2023.09.03 [곁을 만드는 사람]
  2. 2023.08.20 [인간의 흑역사]
  3. 2023.07.31 [슬픔의 방문]
  4. 2023.07.28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5. 2023.07.24 [기적의 도시 메데진]
  6. 2023.07.10 [0원으로 사는 삶]
  7. 2023.06.24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8. 2023.06.18 [신부의 딸]
  9. 2023.06.12 [버마의 나날]
  10. 2023.05.14 [보통 일베들의 시대]
비밀같은바람2023. 9. 3. 15:57

 

 

베트남, 방글라데시, 네팔, 미얀마, 스리랑카, 필리핀 출신 이주활동가들을 인터뷰한 구술 기록을 엮은 책이다. ‘차별에 맞서 삶을 일궈내는 이주활동가들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대표 저자격인 이은주는 책 출간의 계기와 문제의식 등을 서술한 서문에서 “부끄러움과 반성으로 시작한” 작업이었다고 고백한다. 

 

이주노동자의 한국 이입 역사가 30년을 넘었고 그사이 차별적인 정책과 제도에 저항하는 당사자들의 조직과 투쟁이 명멸했으며 지금도 곳곳에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한 세대가 성장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주노동자의 온전한 자리는 없고, 그들의 존재감이 가장 크게 드러나는 때는 혹독한 노동과 극심한 차별의 피해자로서 부각될 때다. 그럼에도 많은 제약을 감내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권리 침해에 취약한 이주노동자들의 곁을 지키는 이주활동가들이 도처에 존재하고 있다.

 

책에는 그들 중 여섯 명의 사연이 담겨 있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에 두 페이지 정도의 간략한 소개글, 후에는 한국에 오게 된 사연과 한국 사회에서의 노동과 삶, 현재의 활동에 대한 구술이 입말로 기록되어 있다. 인터뷰이 대부분 20대 초반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에 와서 지금보다 전반적으로 열악했던 현장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했다. 20년 이상 한국에서 생활하며 이주활동가로 성장한 과정은 다르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 성공한 이주노동자로서의 모국 귀환 대신 자신과 동료들이 처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삶의 방향을 전환한 인물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인과 결혼하고 국적 취득에 개명도 했지만 끝나지 않은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며 후배 이주민들과 함께하는 활동에 매진하는 김나현.  
기회를 찾아 온 한국에서 고된 노동과 모든 것을 건 투쟁으로 청춘을 보내고, 노동조합 활동과 영화 작업을 통해 이주노동의 현실을 기록하고 질문을 던지는 마문.  
한국에서 10년간 체류하며 미등록 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요구하는 투쟁에 앞장서다가 2004년 강제 출국된 이후 네팔노총에서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이주노동을 떠나지 않아도 되는 네팔을 만들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샤말 타파.  
미래가 보이지 않는 고향을 떠나온 한국에서 위험한 노동 환경을 경험하며 오랜 미등록 생활을 견디고, 단체 활동을 통해 이주노동자 조직과 지원 및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헌신하는 또뚜야.  
산업연수생 체류를 마친 후 미등록으로 일하기 시작한 대구 성서공단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노동조합의 4년차 전임 활동가로 살아가는 차민다.  
모국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중 신변의 위협을 피해 입국한 한국에서 필리핀 이주노동자 공동체를 조직하고 권리를 위해 투쟁하며 자신의 신념을 따르는 놀리. 

 

이주노동이 사회경제적 성취와 안정된 미래를 위한 가장 유력한 선택지인 아시아 국가의 현실을 배경으로 이들은 오래 전 한국에 왔다. 제도의 세부가 바뀌어도 이주노동자를 값싼 노동력으로만 인식하는 점은 변치 않은 한국 사회가, 이들을 이주활동가로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한 사람이 성인으로 성장할 만큼의 기간 동안 일하며 살아도 안정적 정주의 방법은 한국인과의 결혼뿐인 배타적인 조건에서, 여러 어려움을 딛고 정착한 이들의 경험과 삶이 성공이 아닌 연대의 서사로 기록될 수 있었다는 점이 소중한 것 같다.    


이은주 ․ 박희정 ․ 홍세미
초판1쇄펴낸날 2023.4.3, 도서출판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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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8. 20. 00:30

 


“인간의 흑역사”라는 주제와 범주가 너무 방대하고, 특정 시대나 지역이 아니라 그야말로 전 지구적 인류사 전체에서 장별 테마에 해당하는 사례들을 임의적으로 기술하는 식이어서, 그런대로 흥미롭기는 하지만 무척 산만한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인간이 바보짓을 반복하는 원인으로 든 것은 대체로 뇌 활동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데, 깊이 생각하지 않고 손쉬운 판단을 내리는 편법이라고 할 수 있는 '휴리스틱', 그와 관련된 '확증 편향', 이들이 누적되고 집적되어 일어나는 '집단 사고' 등의 인지적 편향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복합적 작용으로 인간은 자만심과 탐욕에 기반해 미래에 대한 '소망적 사고'를 하고 '현실 회피' 또한 곁들여진 의사 결정을 하기 때문에 분별력을 잃고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반복된다는 것. 그렇게 다 함께 망하는 사례가 도처에 비일비재한 '공유지의 비극'이며 기후위기로 대표될 수 있을 것 같다.

 

서양 백인 남성이 중심인 기술의 한계를 프롤로그에서 밝혔지만, 예로 든 사례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서구에 치우치지 않은 점이 좋았다. 농경이 인류가 위계와 탐욕에 눈뜨고 전쟁을 일삼으며 공멸을 향해가게 되었다는 관점은, 저자의 독보적 견해는 아니고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를 참조한 것이었지만 과문한 독자의 마음에 느낌표를 남겼다. 농경과 가축 사육을 통한 정착 생활을 인류가 문명을 일구기 시작하는 초석으로 교육받았고 계급 지배와 전쟁은 그로 인한 것이라기보다 인간의 역사에서 당연한 듯 별개로 인식했던 점을 새삼 깨달았달까. 17세기 초 오스만 제국의 무스타파 등 황제들의 이야기는 영화 [3천 년의 기다림]을 떠오르게 했고 찾아보니 정말 그 에피소드가 맞아서 반가웠고, 유럽에서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배경에 흑사병 창궐과 오스만 제국의 부상으로 육로가 막혔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 것 역시 반가웠다. 물론 당시 과학 기술의 발전과 미지의 땅에 대한 인간의 모험심과 정복욕이 맞아 떨어진 것이겠지만 말이다.   

 

언급했던 내용들을 같은 맥락과 선상에서 비교하며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는 인간의 특징을 강조하는 몇몇 부분은 억지스럽게 느껴졌고(216p 1998년 NASA의 화성기후궤도선 추락과 1492년 콜럼버스의 계산 실수 비교 등), 각 장의 말미에 덧붙인 '탑 랭킹'은 마주할 때마다 의아했다. 객관적 위상이나 공신력 있는(그런 게 있을 리도 없겠지만) 자료도 아닌 듯하고 그냥 저자가 임의로 정한 걸로 보이는 내용을 서너 줄의 정보로 가볍게 다루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고, 특히 9장의 “과학 연구로 죽은 과학자 Top 6”은 이게 농담조로 언급할 이야기일까 싶어 읽으며 매우 불편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1888년 시카고의 한 감리교 선교단체의 ‘순회형 헌금함’이 ‘행운의 편지’의 탄생이었다는(255p) 부분이었는데, 영국이 아니었다니, 진심 놀랐다. 나름 흥미로웠던 부분은  우생학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음을 알려주는 프랜시스 골턴에 대한 일화들, 지금도 이어지는 메탄올 중독을 떠올리게 만든 유연휘발유 발명과 확산에 기여한 토머스 미즐리의 이야기,20세기 전후 많은 과학자와 발명가들이 자신들의 발명품(다이너마이트, 기관총, 자동발사기관총, 비행기, 무선통신 등)이 전쟁 종식에 기여할 거라고 믿었다는 사실 같은 부분이었다.

 

단편적 요약의 사례들이 새롭고 흥미로운 경우도 많았지만 그야말로 단편적이고 너무나 많은 사례가 등장해 수박 겉핥기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책의 성격상 불가피한 부분이라고 느꼈다. 그보다 더욱 불가피한 점은 크게 위트 있게 느껴지지도 않는 사견들, 에피소드 하나 나올 때마다 따라붙는 “여기서 우리가 건질 교훈은...”, 본문 서술 중 ( )로 부연한 실없는 농담 등으로 인한 몰입의 방해였다.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면 저자가 자신의 필력에 과도한 자신감을 가진 듯 느껴졌는데, 나름 참으며 읽다가 “미안하지만 이 장은 이 책에서 그리 재미난 부분이 아니다.”(162p)에서 실소와 함께 짜증이 폭발하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희한하게도 그 이후부터는 내용 집중에 방해가 되는 의미없는 유머와 ‘교훈질’이 확 줄어든 느낌이어서 혹시 번역자나 편집자도 비슷하게 느꼈던 걸까 싶기도 했다.

 

마지막 '감사의 글'에서 비욘세, 케이트 블란쳇에 데이비드 보위의 유령까지 언급한 걸 보면서, 썰렁한 유머의 내면화는 저자 자체였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강력한 독후감은 이런 류의 책이 계속 출간되고 뒤표지에 따르면 엄청난 화제와 인기를 구가하는 이유가 뭘까 하는 점이었는데, 누구나 무언가를 깊이 알고 싶어하지는 않고 그야말로 너르고 얕은 지식이 선호되는 시류가 전 세계적이기 때문일까? 8월의 모임 책이어서 읽기는 했는데, 단편적으로 몰랐다 인상적이었다 식으로 언급하는 정도 말고는 나눌 이야기가 별로 없었다. '인간의 흑역사'가 궁금한 이들을 위한 마중물 같은 책을 염두했다면 그렇구나 하겠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대부분의 사례들을 가십처럼 다뤄야 했을까 의아하기도 하다.   
 

톰 필립스•홍한결 옮김
2019.10.10초판1쇄, (주)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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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7. 31. 05:34



글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인용 구절과 작가의 이름과 책의 제목이 등장한다. "책은 내가 들고 온 슬픔이 쉴 자리를 반드시 만들어 주었다"고 적은 저자가 살아오는 동안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문장들일 텐데, 그 글을 쓴 이들에게도 이 책은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 많이 무겁고 충격적이기도 한 이야기를 부담스럽지 않은 밀도와 온도에 유머까지 곁들여 써낸 문장가는 이전에 무척 독실한 독자였겠구나, 책 말고는 기댈 데 없는 절박한 시간들이 길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싶었다. 

 

결과적으로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다시 곱씹게 되는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가족과 성장기, 학교와 직장 생활, 짝꿍과의 만남과 결혼 생활, 투병 등 온통 저자의 개인적이고 내밀한 사연들로 가득한 책이다. "들어가며"를 집중해 읽었음에도 본문 첫 번째 글의 첫 문장을 마주하고는 나도 모르게 취재 내용인가 생각했는데, 간명한 선언처럼 시작된 개인사에 담긴 희로애락의 파고는 상당했다. 출판된 책이니 기록된 만큼은 언급해도 괜찮겠지만, 읽었답시고 인상적이었던 내용들을 내 말로 옮겨 적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느끼는 것 자체가 대상화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30대를 전후해 몇 년간 판이하게 다른 두 지역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며, 이 다른 세계가 동시대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나 다른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서로를 마주칠 기회가 있을까 생각하면 새삼스럽고 막막할 때가 있었다. 몇 달 전 [쇳밥일지]를 읽으면서도,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 시절에 느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가난과 결핍은 시기나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은연중에 과거 혹은 옛날의 어떤 상태로 간주하는 무신경함. 세계는 당연히 늘 수많은 다름들로 구성되는데, 내가 둘러싸인 물리적 조건과 작은 범위의 경험 속에 갇히고 마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무척이나 두터운 인식의 벽인 것 같다.   

 

저자의 많은 인용구들을 읽으면서 글이란, 책이란 참 신기한 것이란 사실과 다시 만났다. 무수히 쏟아져나오는 책들 중 어떤 구절은 누군가의 마음에 각인되고 한 시절 생의 무게를 나눠지는 거대한 공감의 우주가 되기도 하는, 잊고 지냈던 마법을 기억해낸 기분. 어쩔 줄 모르는 헛헛한 마음을 달래주던 어린 날의 책들 그리고 서울 떠날 결심을 굳히고 딴에는 용기와 위로를 되새기며 자주 읽었던 백석 시인의 "선우사"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어떤 책도 읽기만 하면 지금의 나를 비춰주고 무언가를 건네주는데, 갖은 자극으로 산만해진 나태한 마음과 정신이 무의식 중에 그런 만남을 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많은 책들이 쏟아져나오고 단기간의 요란한 추천과 홍보에 이어 무화되어 버리는 듯한 신간에 심드렁한 마음이 될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 특별한 호기심의 상대가 아닌 이의 개인적인 에세이들을, 단기간의 집중적인 홍보에 혹해 샀다가 읽으며 피로하다고 느끼는 경우도 있었다. 트위터 타임라인에서 작가의 계정과 신간 소식을 본 기억이 있는데 트위터에 잘 들어가지도 않게 되면서, 사뒀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출간 직후의 소란스러움은 출판사로서는 불가피한 것이겠지만, 온라인에서 두어 번만 마주쳐도 시끄러운 거리감을 느끼는 내게는 적정한 시기의 독서였던 것 같다.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떠올리며 딴에는 용기와 위로를 되새기던 머지 않은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고, 헛헛한 마음을 달래주던 지난 시절의 책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한 사람의 마음에 각인되고 어떤 시기에는 생의 무게를 나눠지기도 하는 많은 인용구들이 처음이면 처음인 대로, 이전에 책에서 읽었을 텐데도 새로우면 새로운 대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누구나 많은 일을 겪으며 살아가지만, 이 책은 더욱 '살아가는' 중인 당사자만이 직접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었다. 어떻게든 길을 만드는 사람,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의 글이 주는 힘을 오랜만에 느꼈다. 

 

 

장일호
2022.12.4.처음찍음 2023.2.6.네번찍음, 도서출판 낮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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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7. 28. 00:33

 

 

앞서 읽은 두 권의 책이 복잡한 마음을 안겨준 부분이 있었는데, 언뜻 실용서 같은 이 책을 읽으며 조금 편안해졌다. 무슨 주제와 연결되든 ‘상담’에는 관심이 없고 별로 신뢰하지 않는 편인데 이 책을 산 이유는 올초까지도 이어진 매월 책 구입 중독과 작가에 대한 어렴풋한 기대 때문일 것이다. 그의 책을 읽은 건 [쓰기의 말들]뿐이지만 말이다. 나는 글을 열심히 쓰거나 작가의 꿈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지만,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마음까지 부정할 수 없음을 책을 읽으며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잘 쓰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잘 듣고 잘 읽고 잘 생각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당장은 모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냥 사는 사람은 없다", 아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마 잊고 살고 있었던 것 같고, 강력하고도 새롭게 다가왔다.   


은유
2023.1.2.1판1쇄인쇄 1.9. 발행,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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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7. 24. 02:30

 

예전에 다큐멘터리 [보테로]를 인상 깊게 보고 그에 관한 책을 찾아 읽었었다. 마약 카르텔의 중심에서 환골탈태했다는 그의 고향 메데진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마침 신간이 눈에 띄어 반가웠다. 개인적으로 '마약왕 에스코바르'는 이름 정도나 들어봤을 뿐이지만 "마약의 수도는 어떻게 전 세계 도시의 롤모델이 되었나?"라는 부제가 붙은 걸 보면 무지한 내가 느끼는 그의 영향력과 위상은 생각보다 대단한 것인 것 같았다. 꽤 기대하며 선택한 것에 비하면, 책은 보고서 형식의 무미건조한 서술로 채워져서 별로 재미가 없었고 생각지도 못했던 방해 요소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터라 때로 불쾌했고 결국엔 씁쓸한 느낌이었다. 하여 250쪽밖에 안 되는 책을 지루함과 불퉁한 마음을 다스려가며 끝까지 읽어내느라 다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무려나-

 

메데진은 보고타에 이어 콜롬비아에서 두 번째 큰 도시로, 안데스 산맥 중부 아부라 계곡에 들어선 안티오키아주의 주도라고 한다. 2020년 기준 약 257만 명이 살고 있고 아부라 계곡 대도시권으로 확장하면 인구는 약 373만 명. 커피 등 농업 생산 중심이었던 도시의 주력 산업이 20세기 중반 이후 제조업으로 바뀌면서 인구가 늘기 시작해 대도시화되었고 콜롬비아 최초의 메트로폴리탄 건설 계획인 '메데진 마스터플랜(MMP)'를 통한 개발이 이루어졌지만 급격한 인구 폭발과 비공식 정착지의 무분별한 확장을 행정력이 따라가지 못했다고 한다. 하여 도시 인프라 부족으로 아부라 계곡 인근의 자연재해가 대형 참사로 이어지는 일이 많았고, 특히 1980년대 전후부터는 산업 기반이 붕괴한 도시에 빈곤과 실업, 폭력이 만연하면서 지역 자체가 마약 카르텔과 반군의 온상이 되었다고.

 

그 시기 코카인 거래 시장을 장악하고 전 세계적인 마약왕으로 등극한 에스코바르는 메데진에서 복지와 자선 사업을 펼치고 가톨릭교회 재정에도 기여하며 '빈민들의 로빈 후드'라는 별명을 얻고 1982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인물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범죄 사실을 폭로하고 비난한 법무부장관을 암살하고 테러를 일삼던 중 정부에 부채 탕감과 사면을 거래하다 실패하자 스스로 수감되었고, 이후 탈주해 은신하다가 1993년 최후를 맞은 곳 역시 메데진이었다. 마약왕에서 정치인으로, 희대의 대형 범죄를 일으키고 극적인 최후를 맞은 안티 히어로로서 에스코바르의 존재감은 사후에도 건재했다. 드라마 등 대중문화 콘텐츠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낭만적으로 미화되기도 하고, 메데진 곳곳에 남은 그의 흔적은 다크투어리즘으로 관광객을 끄는 자원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에스코바르가 활동할 당시까지도 주민들에게 마약 밀매는 범죄라기보다 사업의 하나로 여겨졌다고 하는데, 무정부 상태의 빈곤 속에서 생존이 최우선 과제가 된 이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2000년대 이후 시작된 메데진의 변화를 이끈 이들은 주로 정치인과 전문가 들이었다. 책에서 첫손에 꼽는 이들은 수학자 출신으로 2004년부터 시장과 안티오키아 주지사를 역임하고 2022년 대통령 선거에 도전한(1차 투표에서 4.18% 득표로 8인의 후보 중 4위, 궁금해서 찾아봄) 세르히오 파하르도와 건축가 알레한드로 에체베리. 파하르도는 사회적 불평등과 폭력의 해결책을 개인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공간 즉, 공공 장소에서 찾고 도시의 물리적 구조 개선을 주장했다. 그는 "도시가 가장 가난한 지역사회에 빚진 사회적 부채를 해소할 방법으로 '교육'을 내세우고"(45p) 재임 시기 투자 예산의 52%를 교육 관련 프로그램에 할당했고, 새로운 인프라와 건축 사업을 교육의 일환으로 간주했다. 이 내용은 '통합 도시 프로젝트'를 위한 시 정부의 개입 부분에서 다시 한 번 유사한 표현으로 등장하는데, 기억하고 싶은 문구여서 옮겨둔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도시의 '사회적 부채'인 사회적 불평등"(132p)

 

사회적 격차를 해소하고 주민의 존엄성 회복을 꾀하는 구상의 실행을 담당한 건축가들 중 대표격인 알레한드로 에체베리는 파하르도가 시정의 핵심 철학으로 삼은 '사회적 도시계획' 전략의 창안자였다. 그는 "도시의 변화가 사람과 함께 그리고 사람을 위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49p)하고, "존엄성과 자부심의 문제는 개입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도시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 최고의 품질을 지닌 건축물을 세우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문제죠."라고 말하는 건축가다. 저자는 이에 더해 메데진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로 "지역 사회에 자극을 줘 주변 지역을 되살리고 생기가 돌게 하는"(53p) '도시침술'을 강조한다. 메데진의 '사회적 도시계획'과 도시개발 프로젝트는 이후 시정 권력 이동에 따른 여러 가지 부침을 겪지만, 메데진은 201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도시 계획과 정책 분야에서 혁신적인 사례로 손꼽히는 '셀럽시티'로서 지속적인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메데진의 변화를 교통, 주거, 교육, 공공장소, 문화, 지식, 테크놀로지 등 여러 측면에서 살펴본다. 전체적으로 낙후하고 불균등 발전을 보이는 도시의 교통 정책에서 우선순위는 걷기, 자전거, 대중교통, 택시, 자가용 순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세계 최초로 메트로케이블이라 불리는 케이블카를 대중교통 수단으로 만든 것인데, 2004년 K라인 개통을 시작으로 현재 6개 노선이 완공되었다고 한다. 계곡에 위치한 도시 지형과 고지대에 밀집해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의 이동성을 고려한 케이블카의 대중교통화는, 빈민가 지역의 낙인 효과를 줄이고 소득을 창출하며 지역 중심부와의 연결성을 높이는 효과도 가져왔다. 수용 인원의 제한성과 러시아워의 과밀 등 한계도 지적되지만, 수력 발전을 이용한 전기를 활용하고 인근 건물들의 차량 접근을 제한해 오염을 줄인 친환경적인 시스템으로 평가받는다. 애초 구상 단계에서는 정치적 냉소와 위험을 감수할 보험 계약자 확보의 어려움에 직면했던 프로젝트가 도시의 변화를 이끌며 꾸준히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메데진 대중교통의 인프라는 메트로, 가선 트램, 트란비아라 불리는 노면전차, 전기버스, 간선급행버스, 메트로케이블 등 다양한 수단의 유기적 연결로 '통합 이동성 네트워크'를 구성해 생태적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이에 '보편적 기본교통' 시스템으로서의 공공 자전거 엔시클라 그리고 산자락 마을들이 분포한 산하비에르 지역에 2011년 설치된 6개의 야외형 에스컬레이터는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상징적인 교통수단으로 거론된다. 교통 혼잡과 대기오염이 심각한 도시 중심부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차 없는 날', 부제 운영 시스템 '피코 이 플리카', 정기적으로 도로를 폐쇄해 임시적으로 주민들의 신체 활동 공간으로 전용하는 '시클로비아' 등 다양한 정책들이 활용되고 있고, 장기적으로 2030년까지 자전거가 대도시권 전체 교통량의 10%를 담당할 수 있도록 하는 목표도 설정하고 있다고 한다. 문외한 입장에서도 획기적으로 느껴지는 정책들인데, 무엇보다 대도시의 정책 입안이 신속성과 효율성이 아닌 생태와 취약자 친화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메데진의 변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공공 공간은 주민의 교육과 만남, 문화예술과 여가와 체육 활동 등을 위한 다양한 공간이다. 도서관 공원, 교육 공원, 문화센터, 맨발의 공원, 생태공원, 연결형 생활공원(우바) 등으로 소개되는 곳들 중에는 과거 감옥이나 갱단의 거점 등 부정적인 역사를 품은 건물을 개조하거나 그 부지에 들어선 경우도 있어 공간의 의미에 포용성을 더한다. 산크리스토발 지역 서쪽 외곽에 위치해있다는 페르난도 보테로 도서관 공원은 개인적으로 관심이 더 갔는데, 브로셔 수준의 짧은 설명이 아쉬웠다. 저자는 최근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도시에 대한 권리'를 처음 제창한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의 "도시 거주자는 국가 단위의 멤버십인 국적에 기초한 권리와 무관하게,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125p)는 말을 인용하는데, 여전히 기본권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또다른 권리의 이름으로 배척되고 호도되는 현실과 '새롭게 주목받는' 권리 목록과의 거리와 긴장에 대해 생각이 미치기도 했다.

 

이 책이 관심이 간 이유는 보테로 때문이었는데,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많지 않다. 다큐에서도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서술되어 있어 기념으로(?) 옮겨보자면 "콜롬비아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조각가인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의 청동 조각상 <새>를 둘러싼 일화도 흥미롭다. 1995년 6월 야외 콘서트 도중 산안토니오 광장의 조각상 아래에서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해 230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참사가 발생했다. 좌파 게릴라 그룹인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이 평화 협상에 응하지 않던 당시 국방장관 페르난도 보테로 제아Fernando Botero Zea를 응징하는 대신 그의 아버지인 보테로의 작품을 파괴하면서 벌어진 테러였다. 보테로는 폭력에 저항하면서도 메데진 시민들이 이 사건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작품을 파괴된 채로 보존해 광장에 두기를 원했다. 그리고 몇 년 후인 2000년, 같은 형태의 작품을 다시 제작해 시에 기증했다. 오늘날 산안토니오 광장에는 테러 희생자 명단이 바닥에 새겨져 있고, 두 마리의 청동 새가 <평화의 새들>이란 이름으로 나란히 서 있다. 그는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그림에 정치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걸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런 예술가들의 힘과 열정 덕분에 메데진이 오늘날 마약과 폭력, 살인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151p)

 

메데진의 변화에는 정치와 행정, 전문가들의 역할 못지 않게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인 지역에서 살아가는 예술가와 주민들의 기여 역시 컸다. 일상적인 폭력에 지역의 아티스트들은 예술을 통해 저항했고, 메데진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의 10% 이상이 발생하는 곳이었던 산하비에르 지역에서는 야외형 에스컬레이터 설치로 물리적 환경이 개선되기 이전부터 지역의 젊은이들이 주축이 되어 지역사회를 바꾸기 위한 벽화 활동이 활발했다. 특히 힙합 활동가들은 빈민가의 청소년들에게 랩과 춤, 그래피티를 가르치는 비폭력 저항의 메신저였는데, 그러한 파급효과 때문인지 2009년 이후 산하비에르 지역의 힙합 아티스트 10명이 갱단에 살해되는 비극도 있었다고 한다. 현재 메데진에는 5개의 힙합 학교가 있고, 그중 아랑훼즈 지역에서 콜롬비아의 가장 유명한 그룹 중 하나인 크루 펠리그로소스가 운영하는 학교의 학생 600명 중 40%가 십대 소녀들이라고 한다. 힙합 학교가 운영되면서 이 지역의 살인율이 80%나 감소했다는 사실도, '삶을 향한 힙합'이라는 모토로 교육과 평화를 위해 빈민가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존재도 놀랍고 감동적이다. "지역 주민들은 우리를 히트맨(암살자), 마약 중독자, 방랑자의 동의어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길을 건넙니다. 거리를 건너와 우리를 맞이하고 우리를 이곳의 변화에 도움이 되는 주체로 생각합니다."(164p) 당연하게, 하루아침에 그리 된 것이 아니라니 더욱.

 

이외에도 콜롬비아의 대표적인 볼거리 중 하나인 메데진 꽃 축제와 여러 이벤트, 대안 노벨상이라 불린다는 '바른 생활상The Right Livelihood Award'("세계 문제의 근본 원인에 대한 비전과 모범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용감한 사람들과 조직을 존중하고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 175p)을 수상한 40년 이상 지속된 '메데진 국제 시 축제' 그리고 기술과 산업을 선도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혁신지구와 교육센터 등이 메데진의 변화를 이끄는 요소들로 소개된다. 현재진행형 이슈 중 하나인 팬데믹과 기후위기 관련한 도시 계획 및 현황, 보고타에서 시작되어 메데진에서도 정책화한 시클로비아 운영에 대한 설명으로 책은 마무리된다. 에필로그에서는 도시학자의 입장에서 "메데진의 그늘과 남은 과제"를 살피며 현장의 목소리를 세세히 듣지 못한 한계와 더불어, 본문에서도 한 차례 언급했던 2019년 세계시장포럼 참석자들과 산하비에르에 방문했을 때 1인 시위자가 들고 있던 팻말 속 "시장은 현실을 보여달라" "현실을 숨기지 말라" "집도, 먹을 것도, 직장도 없다" "시장은 이런 사람들이 오면 우리를 숨겨두려고만 한다"는 내용을 환기한다.

 

몰랐던 내용이 많았지만, 그 어떤 정책에도 사각지대 그리고 탁상과 현장의 괴리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며 읽었다. 두어 차례의 방문과 정부 및 관계기관이 발간한 보고서와 홈페이지의 내용 등이 주요 자료였을 테고, 그러한 정책 수행 과정에서 메데진에 수여된 각종 도시와 혁신 관련 상과 헌사 들은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근거로 기능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러 프로젝트들에 대한 많은 설명에서 '주민 참여' 항목이 강조되지만 '일반 주민'의 목소리는 별로 접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읽으면서도 들었는데, 도시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보고서에 가까운 책이었으니 그러려니. 전체적으로는 기술과 자본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쓰이는, 이러한 결정과 실행이 가능한 정치와 행정이 어느 정도는 지속가능한 동시대의 시공간을 확인하는 신기함이 가장 컸다. 실질적 무정부 상태를 경험한 적 없는 시민으로서, 살인과 폭력이 횡행하며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지역의 주민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일일지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그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나서는 이들이 꾸준히 있고 잠정적으로 권력을 획득하는 게 가능했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반가웠던 것 같다.

 

그러나 머리말에서부터 언급되어 마음이 불편했는데 중간중간 거듭되다 후반부에는 사진에까지 등장해 불쾌함으로 책을 덧씌운 전 서울시장의 존재감이 너무 컸다. 도시학자로서 저자의 활동 이력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점은 알겠으나 책을 펼치자마자 헌사의 대상으로 이름이 거론되는 건 무방비상태에서의 충격이었다. 사회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서의 치적이나 개인적 친분을 감안하더라도, 불특정다수의 독자들을 전제한다면 이 자체가 2차 가해가 될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책을 다 읽은 후 실제로 불쾌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책 소개 하단에 간단히 안내 문구라도 넣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고, 저자나 출판사의 성범죄에 대한 민감성 수준에 실망스러웠는데 혹시 자살한 그의 성범죄 사실을 부정하고 생전 공적인 행보를 부각해 명예 회복을 꾀하는 측이라면 더욱 문제적이라고 느꼈다. 한편, 성범죄와 같은 파렴치를 저지른 유력 인물의 영향력 혹은 추종의 자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난감하고도 어려운 자문도 생겨났고 말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목에서 그의 이름과 그를 향한 존경과 심지어 사진을 대면했을 때의 당혹감과 불쾌감과 별개로, 그러한 존재들을 무조건 배척하고 무시하면 되는 것인가 하는. 물론 이는 나로서는 매우 사적인 수용의 문제이지만, 사회적으로 확장하면 여전히 지난한 투쟁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정리하며 짚어보니 책은 나쁘지 않았지만, 사소한 것이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걸 강력하게 확인했다.

 


박용남
2023.1.13초판1쇄인쇄 1.20발행,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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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7. 10. 15:45

 


단순하고 직관적인 제목이 눈에 들어왔고 가능한 이야기인가 궁금해졌다. 저자는 워킹홀리데이로 간 런던에서 어렵사리 취업에 성공하지만 혹사당하며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낸다. 더는 견디지 못하고 악덕 상사에게 저항한 대가는 해고 통보, 살인적인 물가의 런던에서 두 달치 월세 정도의 은행 잔고를 떠올리며 생존을 고민하던 중 숨만 쉬는데도 돈 걱정을 해야 하는 삶에 대한 의구심에 다다른다. 행복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경쟁하고 일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숙명 역시 근본적인 의심의 대상이 된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아등바등하는가 고심하던 저자는 불필요한 소비를 하나씩 삭제하며 잠잘 곳과 먹을 것, 교통수단 등 세 가지를 삶의 필수적인 요소로 정리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만 해결할 수 있다면 살아가는 데에 더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마저도 돈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해결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소비하지 않는 삶을 계획한다. 

 

돈 없이 사는 삶을 위해 주변을 수소문하고 정보를 찾던 저자가 런던을 떠나 처음 도착한 곳은 우프(WWOOF, World Wide Opportunities on Organics Fams "자원봉사자와 유기농 농장을 연결하는 상호 교환의 네트워크") 중 하나인 웨일스의 '올드 채플 팜'이다. 조상의 지혜를 빌어 석기시대 마을 같은 농장을 일군 프란은 흙집을 짓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농사 지으며 자연과 호흡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무료로 숙식을 제공받으며 일하고 머무를 수 있는 이곳에서 저자는 텃밭과 양들을 돌보며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처음으로 경험하고, 아주 작은 일에도 매번 고맙다고 말하는 이들을 통해 사랑받는다는 느낌에 감격한다. 심신을 갈아넣으며 일했지만 결국은 시스템에서 밀려난 도시와는 다른 관계와 질서 안에서, 자신이 그 자체로 쓸모 있는 존재라는 확신을 얻은 소중한 경험이다. 생존의 필수요소를 정하고, 자신의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망에 대해 궁구하던 저자는 우핑을 통해 무소비의 삶에 더해 사랑의 욕구에 대해서도 성찰하기 시작한다.  

 

'올드 채플 팜'에서의 시간을 통해 다양한 방식의 대안적 삶을 경험해 자신만의 방식을 찾기로 한 저자는, 한 장소에 머무르는 기간을 1개월 내외로 정하고 이동 방법을 고민하다가 자전거를 떠올린다. 0원으로 가능한 방법은 자신의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하는 일, 기적처럼 런던의 한 자전거 카페에서 답이 오고 주인 캐서린은 자전거는 물론 필요한 다른 장비들과 인류애 가득한 '선행 베풀기'를 선사한다. 5개월 동안 여러 농장에서의 우핑 생활을 거치며 저자는 웜 샤워즈(Warm Showers)를 비롯한 여행자를 위한 전 세계적 무료 숙박 네트워크를 알게 되어 도움을 받고, 캐서린의 감동적인 호의를 통해 '0원살이'를 더욱 확신하게 된다. 2014년 10월 31일, 급작스러운 준비를 마친 저자는 '헤이 메도우 팜' 친구들의 긍정 에너지와 응원을 가득 받으며 1년간의 '0원살이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프로젝트의 규칙 중 마지막 8번은 "죽지 않는다." 무모하고 의아하게도 느껴지는 프로젝트가 저자에게는 그야말로 생사를 건 모험이었던 것이다.

 

'0원살이 프로젝트'의 첫 번째 목적지는 영국 남서부 서머싯에 위치한 '팅커스 버블', 화석연료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에너지를 자급자족하며 전동공구 대신 손노동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엄격한 친환경 공동체다. 모닥불을 지펴 준비하는 식사, 재래색 화장식, 3시간은 불을 지펴야 가능한 목욕, 비바람이 몰아쳐도 이어지는 노동 속에서 저자는 약속한 2주를 채우며 자신만 불편함을 느끼는 이곳의 '미개한' 생활 방식에 대한 의문과 회의에 휩싸인다. 팅커들은 땅에서 나는 것만으로 생계를 해결하는데, 일례로 사탕수수 재배가 야기하는 열대림과 동물 서식지 파괴 그리고 가공 과정에서의 자연 오염과 노동 착취, 불공정한 무역 시스템 등을 이유로 설탕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자연을 해하지 않는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들에게 문명 사회에 익숙한 생활의 불편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심각한 기후위기에 봉착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최소한의 인터넷과 대중교통은 이용하지만 환경을 위해 자동차와 비행기를 타지 않고, 허름한 차림과 손노동의 삶에서 자유를 느끼며 자연을 섬기는 삶. 팅커들의 고결한 신념과 실천에 대한 경외감과 쾌적한 문명에 대한 갈증을 동시에 느끼며, 저자는 다음 여정을 이어간다.

 

짐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자전거를 교체하고 여러 도시를 이동하는 일 역시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해결하면서 저자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즈음 적극적인 지지를 표하며 경고를 담은 초대장을 보냈던 크리스와 소통해 12월 방문 약속을 잡는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노동하고 살아가며 사람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는 그는 "세상을 다른 관점으로 보는" 이상한 사람, '지극히 정상적이었던' 저자의 세계관에 변화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인 듯하다. 파트너 모락과 함께 사는 크리스의 집에 도착한 후 메일과 달리 냉랭하고 예민한 태도에 당황하지만, 소지품을 검사하며 대체할 천연 제품을 건네고 음식 생산 과정을 비롯한 현대적 삶의 병폐에 대해 세뇌하듯 늘어놓는 크리스의 '철학'에 저자는 어느 정도 감화된다. 현대적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업, 축산업, 어업 및 가공식품과 패스트푸드의 문제점 그리고 인간의 존재 양식에 대한 그의 철학에 나름의 해석을 덧붙인 적잖은 내용이 본문에 정리되어 있다. 더불어 사회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연의 일부로서 알몸을 사랑하는 나체주의자이자 다자사랑주의자인 크리스와 모락을 통해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과 사랑에 대해서도 새롭게 사유하며, 다자사랑과 영적수행의 목적이 같은 것이라고 적는다.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친구와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도시에서의 '0원살이'를 위해 런던으로 향한 저자는 런던 운하에서 살아가는 보트 피플, '급진적 주거 네트워크'의 멤버들과 만난다. 프로젝트의 취지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크레이그의 호화 보트에서 2주를 생활하고 버려진 집을 빌려 살아가는 스퀏팅 멤버가 되어 예술가들인 제이-메이 아지트에서도 생활한다. 그러는 동안 최소 소비를 지향하는 청년과 만나 무소비 데이트를 즐기기도 하고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먹거리 해결 방법인 스킵 다이빙(덤스터 다이빙)에 도전해 성공적인 '0원살이'를 이어간다. 그러는 사이 저자는 친구로부터 정통 프리건(Freegun, "자본주의 시스템에 저항하는 총체적인 구매 거부 운동인 프리거니즘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라는 말까지 들으며, 소비하지 않는 삶의 방식이 지닌 의도치 않은 급진성을 깨닫는다. 어느 날 갑자기 해고를 당하고 침대에 누워 앞날의 생존에 대해 번민하다 시작된 '0원살이'는 저자가 생각한 것보다 넓고 깊은 변화로 확장되고 있었다.

 

'0원살이'의 절반을 지날 즈음 봄을 맞아 저자는 다시 '올드 채플 팜'을 방문하고, 외부의 자극 없이 정적인 농장에서 갑작스러운 생활의 격변이 불러온 내면의 소란과 마주한다. 프로젝트를 통해 만난 많은 자연인들과 달리 여전히 일상에서 지루함을 느끼고 홀로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연과의 연결감을 느끼지 못하며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던 저자는 프란과의 대화를 통해 7일간의 홀로 단식을 결행한다. 그리고 블루벨 계곡에서 홀로 캠핑하며 단식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몸이 "빛으로 가득 차올라", "대지와 나를 연결하는 생명의 끈"을 통해 자연이 몸에 들어와 피와 함께 전신에 흐르는 느낌과 함께, "자연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연결된" 경험을 한다. 자신의 생명과 자연이 온전히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은 저자는 "자연을 섬기는 삶"이라는 강렬한 변화를 맞는다.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생존의 필수 요소를 마련하는" 퍼머컬처(Permaculture)와 생태건축에 대한 관심으로 웨일스의 '라마스 생태 마을'로 향한 저자는, 자스민과 사이먼이 각종 실험을 통해 자립 생활을 구현 중인 이곳에서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삶과 그를 위한 여러 기술을 배우고 경험하며 문명 사회의 노동과 소비가 아닌 자연과의 연결 회복 그리고 자립과 자족을 통해 생존과 사랑이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프로젝트 10개월이 지날 즈음, 비자 만료일 이전에 영국을 떠나야 하는 저자는 산책길에 우연히 만난 리투아니아인에게서 '레인보우 개더링'에 대해 알게 된다. 런던의 친구집에 남겨둔 짐을 정리하며 1년 10개월의 영국살이를 정리하고, 히치하이킹으로 함께 발트 지역으로 떠나기로 한 친구의 사정으로 혼자가 되자 운명처럼 레인보우 개더링을 떠올리고 런던을 떠난다. 프로젝트 초기 자전거와 함께 선행 베풀기를 선사했던 캐서린의 봉고로 유럽 대륙에 당도해, 오롯이 혼자만의 히치하이킹이 시작된다. 섹스를 목적으로 차를 태워준 운전자도 있었지만 큰 난관 없이 친구가 있는 베를린에 도착하고, 레인보우 개더링에 함께 갈 동료를 페이스북으로 물색해 비슷한 여정을 진행 중인 나라를 만난다. 히치하이킹으로 만난 운전자들 중에는 자신의 젊은 날을 떠올리며 흔쾌히 차를 태워주고 필요한 것들을 선물하는 이들이 적지 않고, 인간에 대한 신뢰와 그들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레인보우 개더링' 장소에 도착한 저자는 또 다시 새로운 차원의 변화를 마주한다.

 

'레인보우'는 유목 인디언의 삶을 동경하며 자연과 결속된 삶과 사랑과 신비의 상징인 보름달을 기리는 이들, 레인보우 개더링은 1972년 미국에서 '부족들의 레인보우 개더링'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다. 레인보우라는 이름은 호비 부족의 한 예언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지구가 병들고 동물과 식물이 죽어갈 때, 모든 국가, 인종, 종교가 모인 다양한 색깔의 새로운 부족이 나타나 지구를 구할 것이다. 그들은 'The Warriors of the Rainbow', 무지개 전사다."(243쪽) 애초 레인보우 패밀리만의 비밀스러운 모임이었던 개더링은 인터넷의 발전과 함께, 찬반 속에서도 그 정신을 세상에 퍼뜨려야 한다는 추세 속에 그 폐쇄성이 완화되었다고 한다. 개더링이 열리는 시기와 장소의 경도와 위도 정도가 sns에서 공유되고, 참여자들은 준비하는 이들이 주변에 남긴 단서를 통해 찾아가 함께한다. 저자는 과거 참여 경험이 있는 동행 나라 덕분에 밤안개 자욱한 몽환적인 초원의 리투아니아 개더링에 무사히 당도한다. 

 

레인보우 개더링은 낯선 참여자들을 "웰컴 홈"이라는 말로 환영하고, 모두가 둥그런 원 모양으로 둘러앉아 손을 맞잡고 신비로운 태초의 소리인 "옴~~~"의 강력한 진동과 에너지를 공유하고, 매직 햇의 노래를 부르며 자발적인 기부와 동참으로 마련한 먹거리를 푸드 서클을 통해 함께 나누며, 평화 조화 자유 자연 영성 사랑 연결 등의 가치를 지향하는 시공간이다. "1960년대 미국에서 크게 유행한 히피 문화와 보헤미아니즘의 영향도 받았다. 이 대항 문화 역시 국가 시스템, 자본주의, 소비주의, 대중매체, 위계질서, 폭력 등에 저항하고 사랑과 평화를 외친다는 점에서 레인보우 정신과 많은 면이 닮았다."(243~4쪽) 레인보우 개더링에서는 촬영과 화학 제품 사용을 금지하고 "성적 의도가 없는 나체 행위"를 모든 인간의 자연스러운 권리로 여긴다. 이곳에서 문명 사회의 시간 개념은 현재의 평온을 방해하는 요소일 뿐 날짜 역시 중요하지 않고, 미래를 그리거나 무언가를 기대하는 행위로부터도 해방되는 온전한 자연스러움을 지향한다. 무언가 필요할 때면 "커넥션!"을 외쳐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누고 거짓된 인사나 표정 대신 마음으로 통하는 인연을 믿는 관계가 유지된다. 그렇게 각자가 원하는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자연과의 연결을 통해 사랑과 평화를 나누며 보름달의 절정을 함께 보내면, 각자의 가슴이 시키는 대로 다음 여정을 향하는 것이다. 

 

저자는 리투아니아 개더링에서 레인보우들과 쉽게 동화되지 못한 자신이 "구경꾼 또는 이방인의 눈으로 이들의 세계를 관찰"했다고 적지만, 이내 점차 마음의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나는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됐다."고 적는다. 그리고 다음 여정 슬로바키아의 '레인보우 집'으로 향한다. 나라와 헤어지고 히치하이킹으로 슬로바키아에 닿은 저자는 이곳에서 자신의 세계를 관찰한다. "나의 세계를 더 깊이 알아갈수록 나는 참을 수 없는 외로움에 사로잡혔다. 이 외로움은 외부가 아닌 내면 깊은 곳에서 오는 공허함이었다. 내게서 그 공허함을 꺼낸 것은 다름 아닌 레인보우였다. 레인보우 패밀리는 내가 지금껏 살면서 만난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든 온전히 '진짜'로 존재했다. 꾸밈없이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상태로 '지금'을 살았다. 그들의 얼굴은 평온했고, 몸짓은 물이 흐르는 듯했다(물론 모든 레인보우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편의상 '레인보우'로 통칭하여 부르겠다)."(263쪽)

 

여기서 만난 넵튠이라는 레인보우에게 자신이 느끼는 내면의 공허, 명상과 진리, 자연과의 연결, 평온과 해방감 등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고 대화를 나눈다. 흐름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연습이 필요하고 히치하이킹이야말로 아무것도 예측하지 않고 흐름에 순응하는 법과 인내심을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 모든 존재는 연결되어 있고 우중 우연은 없으며, 영혼이나 참자아라고 할 수도 있는 '더 높은 자신'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것, '머리'가 원하는 욕구와 갈망이 아닌 영적인 성장과 진화를 통해 자신의 참모습과 평화에 이를 수 있다는 것 등. "당신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에요. 진정한 성장을 소망한다면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해요. '지금 난 좀 이기적이었어. 음, 괜찮아. 다음엔 이기적이지 않으면 되니까. 그래, 다음엔 다르게 한 번 해보자' 이렇게 생각하고 웃어넘기세요. 자신을 비난하거나 질책해선 안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성향과 모습에 이름표를 붙이지 않아야 해요.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야'라는 정의는 강력한 에너지를 만듭니다. 생각과 말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 있어요. 당신이 믿고 말하는 모든 것이 현실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니 자신을 그렇게 규정하지 마세요. ... '나는 내가 마음에 안 들어. 노력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해'라는 판단과 자책은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지 못합니다."(276쪽)

 

넵튠과의 대화와 자기 관찰을 통해 머리보다 "저절로 일어나는 일"의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한 저자는 슬로바키아 개더링 첫날 만났던 존스 베리 가족과 다시 만난다. 앤드류와 데비와 5명의 아이들로 구성된 존스 베리 가족은 대형 트럭에서 생활하며 지구 곳곳에서 봉사와 섬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들, 그리고 숲에 남은 레인보우들과 함께한 푸드 서클에서 저자는 '레인보우 카라반'에 대해 알게 된다. "최초의 땅에서 레인보우 전사의 소명을 다하는 거예요. 자유, 사랑, 연민을 위한 일이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충분히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눠주고, 안전하지 않은 사람들을 보호학, 아프리카에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만들고, 음악을 함께하고, 사랑과 평화를 아프리카와  나누는 것. 이게 바로 레인보우 카라반의 비전이에요."(285쪽) 각자 자신이 경험한 기적의 순간을 이야기하며 아프리카로 향하는 레인보우들과 조우하게 된 저자는 저절로 일어나는 가슴의 일을 믿고 그들과 함께하기로 한다. 

 

아프리카라는 최종 목적지 외에는 아무것도 정해진 것 없는 레인보우 카라반은 존슨 베리 가족과 제각각 사랑과 평화의 열정을 마음에 품은 적잖은 히피들과 함께하는 모험이다. 십수 명 히피들의 대이동은 지나는 곳곳에서 관심과 이목을 끌며 호의를 받기도 하고 경찰서 신세를 지기도 하며, 미처 몰랐던 인연을 확인하기도 하는 여정이다. 열악한 조건과 환경에서도 소란스럽고 즐거운 분위기가 유지되기도 하지만, 아무도 보고 싶지 않다며 눈을 가리고 누구와도 말하고 싶지 않다고 입을 닫는 수행에 들어가는 히피도 있다. 직관을 믿고 흐름을 따르고자 하는 몇은 트럭을 떠나 자신의 길을 떠나고, 개중 몇몇과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된 저자는 이들과의 인터뷰를 책에 싣기도 한다. 그리고 시리아 난민 가족의 피난길과 유사한 루트를 이동하며 특별한 연민을 느끼게 된 그들과 함께하려 도착한 난민 캠프에서, 예상치 못했던 경험을 하기도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적 긍정'을 잃지 않는 태도, 관대함과 평온함으로 타인과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 그러나 계획도 질서도 없고 누구 하나 주도하는 이도 없는 여정을 함께하며 걱정은 저자의 몫이 된 것 같다. '0원살이' 생활자에서 히피 수행자로 서서히 정체성의 변화를 겪고 있는 저자의 감동과 의문과 혼란과 내적 투쟁이, 레인보우 카라반에 내내 함께한다.

 

며칠간 도심을 통과하며 찾았던 깨끗한 물가, 천상의 계곡에 도착한 이들은 맑은 물과 숲에 치유받고 함께 영화 [성 프란체스코]를 본다. "자연과의 연결과 거룩한 가난을 통해 신의 사랑을 실천"한 프란체스코의 삶은 저자에게 깊은 감동을 안겼고 "나의 가슴이 그의 진리에 반응했다"고 적은 저자는 그날 밤 "한참 지구와 회전하며 대지와의 일체감을 느꼈다. 그 이후로 며칠을 사람들과 말하지 않았다. 프란체스코로부터의 울림과 대지와의 연결 속에 고요히 머물고 싶었다."(352쪽) 천상의 계곡에서 존스 베리 가족은 일부 레인보우들과 이틀 뒤에 떠나 터키로 가는 여정을 선택한다. "사랑해!!!"라는 외침을 주고받으며 헤어진 몇 년 후 에티오피아에서 말라리아와 장티푸스에 걸려 데비는 세상을 떠났고, "우리는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궁극의 안식을 취하게 된 것이 그 어떤 죽음보다 완벽하고 아름다운 마무리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355쪽) 천상의 계곡에 남은 이들은 묵언수행과 치유 의식을 행하며 각자의 고요함에 이르는 집중 수행의 시간을 보낸다. 마지막 날의 수행에서 저자는 "우주, 의식, 신, 연결, 사랑, 위대한 정신, 더 높은 자아.... 그게 무엇으로 불리든 이제 나는 그 세계를 믿을 수 있을 것 같다."(367쪽)는 고백과 함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때가 왔다. 그리고 그 여정은 반드시 홀로 행해져야 한다."(367쪽)는 가슴의 분명한 소리를 듣는다. 

 

애초 소비하지 않는 삶, '0원살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저자의 과제였던 생존과 사랑은 레인보우들과의 만남과 수행을 통해 이제 "생존과 사랑을 초월한 세계"로, "'우주'라는 무한하고도 신비로운 진리의 세계"로 향한다. 다시 혼자가 되어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하며 "흐름을 믿는 연습"에 돌입한 저자는 세르비아에서 기적 같은 도움을 경험하지만 한편 마을 캠프에 몰려든 난민이 아니었기에 받을 수 있는 혜택이었음을 깨달으며 세계의 모순과 죄책감을 뼈아프게 경험한다. 전쟁으로 고통받고 생존을 위해 피신한 곳에서도 백안시 되는 난민의 현실과 여행자로서 특별한 호의를 누리는 상황의 대비. 2010년 연평도 포격전이 일어났을 때 여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전방의 신병교육대에서 소대장으로 교관 임무를 수행했다는 저자의 이력이 이 일화에 이어져 기록되는데, 오랜 꿈이었던 군인으로 복무하며 '평화를 위한 무력'에 대해 회의하게 된 저자의 군 생활은 3년의 의무 기간을 마친 뒤 종료되었다고 한다.

 

2015년 10월 저자는 그리스의 친환경 비건 공동체 '프리 앤 리얼'에서 '0원살이' 1주년을 맞는다. 12월에 그곳을 떠나 가능한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하고 가급적 소비하지 않는 방식으로 터키와 조지아, 이란, 인도 등을 거쳐 2016년 10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이후 "가난한 구도자로서의 삶"을 계속하면서 2018년부터는 '자연식물식'을 하는 강도 높은 비건이 되었고 2021년 봄부터는 지리산 자락의 버려진 '숲속 오두막'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400쪽이 넘는 여정을 펼치기에 앞서 저자는 "이야기를 시작하며: 세계의 확장"을 통해 한국으로 돌아온 후 6년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적었는데, 각 절의 부제는 '빈집살이' '먹고 살기' '가슴이 원하는 일' '돈이 사라진 세계'다. 나처럼 제목에 끌려 책을 선택한 이들을 위한 프롤로그는, 책을 다 읽은 후에 다시 훑어 보니 대략 10년에 이르는 한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현재 시점에서 간명하게 압축한 것이었다. 긴 여정의 에피소드, 과정에서의 깨달음과 변화, 독자에게 전하고픈 주장들까지 다양한 온도로 쓰여진 글이어서 읽으며 여러 감정이 교차했고, 때로 갸웃거리고 불편한 마음을 달래며 책장을 넘기느라 잊었던 저자의 메시지는 이미 서두에 밝혀둔 셈이었던 것 같다.

 

 

분량이 꽤 되지만 읽으며 느낌이 이렇게 많이 달라지는 책은 오랜만이었다. 2년간의 '0원살이'와 방랑 기간 동안의 기록을 토대로 이후 프로젝트보다 훨씬 근본적인 변화의 삶을 살면서 숙고하고 정리해 묶어낸 글인 것 같은데, 이미 차원이 다른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과거 어떤 시기를 거치면서 경험하고 느낀 의문과 좌충우돌과 혼란을 당시의 관점으로 생생히 설명하는 부분들에서 상당히 공들인 글쓰기라는 느낌을 받았다. 생존과 정체성의 불안과 위기라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삶의 한 국면에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소비하지 않는 삶'으로 전개되는 게 신선했고, 몇 권의 책에서 접했던 스킵다이빙과 생태 공동체에서의 구체적이고 다양한 경험이 흥미진진했다. 그런데 레인보우 개더링에 함께하며 관찰자에서 초보 수행자로 '진화'해가는 중반부터 "나가며"에 이르러 구도자로서 나름의 이론을 정립한 듯 현재 세계의 각종 위기를 언급하고 대안과 해법을 내놓는 부분은, 전혀 기대하거나 원한 바가 아니어서 당황스러웠다. 도시화와 산업화, 자본주의화를 거치며 파괴되고 파국을 향해가는 세계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진단은 새로울 것이 없는데, 변화를 위해 수반되어야 할 무수한 구체적 요소와 복잡성에 대한 고려 없이 추상 수준에서 이어지는 당위적 설명들이 반드시 저자의 몫이어야 했을까. 물론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도전을 통해 삶을 근본적으로 바꾼 당사자로서의 진정성을 충분히 느껴졌지만 말이다.

 

저자의 솔직한 기록에서 내가 더 많이 공감한 부분은 자신의 여정과 프로젝트에 대해 때로 의구심을 느끼며 자문하는 부분이었던 것 같은데, 그러한 자문들은 대체로 물리적 고생과 주변의 호의 그리고 어설픈 의미부여로 뭉뚱그려지고 마는 느낌도 들었다. 질문은 공감되는데 답변에는 공감되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수행과 신비 체험으로 다시 태어난 저자가 더 이상의 질문을 멈추고 자신의 경험과 그를 통한 깨달음의 주장을 반복하는 느낌이어서 납득을 체념하고 그저 읽는 상황이 되는 측면도 있었다. 진리를 찾기 위한 구도나 수행에 대해 책 한 권으로 알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예상치 못한 전개와 절정을 거쳐 맥락을 세심히 고려하지 않으면 일관성이 느껴지지 않거나 거칠고 나이브하게 단정적인 결말에 이르러 설파하는 주장들이 내용의 옳고 그름과 별개로 당혹스러웠다. 물론 저자가 짚어내는 대로, 지금 나의 삶의 패턴을 바꾸고 싶지 않고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겠지만, 갑자기 도드라지는 가르치려는 태도에 거부감이 일었다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저자가 그리스에서 자신을 당연히 채식주의자로 여기는 이에게 반발하는 마음과 행동을 적은 부분이 있는데, 후반부를 읽으며 내 마음이 내내 그랬던 것 같다. 못난 마음이지만 진짜 그랬고, 그런 마음이 이어져 절정이 이른 "나가며" 부분은 얼마 되지 않는 분량인데도 읽다 내려놓고 잃다 내려놓느라 정말 겨우 책을 다 읽었으니까.

 

책을 집어들 때마다 뒤표지에 적힌 세 줄의 발문에도 아쉬움의 눈길이 멎었다. "우리는 돈 없이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나 역시 궁금한 부분이었지만 그다음 대답처럼 따르는 문장이 굳이 "진짜 혁명은 화염병을 던지며 시위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지 않는 생활 습관에서 시작된다."여야만 했을까 싶어서 말이다. 어떤 행위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임의적 대립물과 비교하는 것이 책에서 저자가 수없이 동어반복하며 주장하는 '진리'와 배치된다는 느낌이기도 하고, 지금 국내에서는 잘 쓰이지도 않는 '화염병'이라는 상징물을 통해 안 그래도 언론과 지배 세력이 마녀사냥하는 시위와 물리적 투쟁의 폭력성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물리적이고 집단적인 투쟁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방식과 시도 자체를 구시대적이고 불필요한 무엇으로 단정하는 듯해서 불편하기도 했고 말이다. 작은 부분에 딴지를 거는 것 같아 민망하지만 단 세 줄의 뒤표지 발문이어서 더 눈에 띄는 탓에 꼭 이 문장이어야 했나 싶었고, 책을 읽으면서 이따금 갑작스러운 비약이나 일종의 침소봉대처럼 느껴지는 부분들을 만날 때 일었던 반발심이 환기되기도 했다. "2022년 한겨레 선정 올해의 책 10선" 중 한 권이라니 나름의 반향도 있는 책인 것 같아서, 왜 굳이? 하는 마음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아무려나, 내게는 2023년 나님 선정 오래갈 여운과 혼란의 책이 될 것 같다. 지난해 여운과 혼란의 책은 단연 [짐을 끄는 짐승들]이었는데, 못지 않은 무게감으로 공감과 당혹의 양가감정을 선사하는 읽기였다.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까칠하거나 불퉁한 느낌이 내 마음의 반영이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어지간하면 저자의 마음과 의도를 이해하고 싶은 욕심도 내려놓지 못한 독자로서, 간만에 꽤나 에너지를 들이는 독서였다. 책 모임에서 읽었더라면 누군가와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을 텐데, 혼자 읽고 혼자 소화하려니 쉽지 않아 나만 원하는 기록이 참 길어졌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주 후의 여러 경험 속에서 ‘나는 사람을 싫어한다’는 걸 새삼 느꼈고 약간 교훈처럼 환기하며 일상을 보내고 있다. 혼자서도 크게 외로워하거나 힘들어하지 않고 그럭저럭 지낼 수 있는 성정과 연륜과 체념을 다행스레 여기며, 생동하는 타인에 대한 기대 같은 것 없이, 다른 세상에 있거나 아주 멀리에 있는 이들이 전해주는 노래와 영화와 책과 이런저런 콘텐츠 들을 통해 감각과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는 일에 익숙해졌다. 때로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싶지만 그게 아니라면 또 어떻게 살 것이며, 때로 혼자 너무 안락한 것 같아 불특정다수를 향해 민망한 마음이 들지만 세계의 고통에 내 몫을 더 얹지 않는 삶도 있는 거지 자위하고 만다. 지금의 내가 이런 나여서, 이렇게 불손한 독후감이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투덜거린 것만큼 내내 나쁘지만은 않았기에, 나름 공감했거나 기억하고 싶은 본문 몇 부분을 애써 옮겨두었는데 언젠가 다시 읽게 되었을 때 달리 느껴질지 궁금하다.



박정미
2022.10.28초판1쇄 2023.2.13초판3쇄, 도서출판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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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6. 24. 23:23

 


과학자였고 저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아버지에게 헌정된 이 책은 혼돈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프롤로그로 시작된다. 일찍이 아버지가 강조했다는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는 증가하기만 할 뿐,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줄어드는 일은 없다")이 언급된 부분을 읽으며 살짝 긴장이 되었지만, 다행히 과학 전문 기자라는 저자는 이후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풀어간다. 혼돈과 함께 소환된 인물은 인류에게 알려진 어류의 20%를 발견하고 이름 붙였다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평생 노고를 바친 어류 표본들이 모두 파괴된 현장에서 식별 가능한 물고기의 살에 바늘을 찔러 넣어 이름표를 꿰맸다는 일화와 더불어 그는 "혼돈에 반격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자신의 삶에 닥친 깊은 혼돈에 빠져 있던 저자는 모든 게 박살난 잔해 속에서 바늘을 든 그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낀다. 그에 대해 검색하고 한 세기 전 출판된 두 권짜리 회고록 <한 남자의 나날들The Days of a Man>의 절판본을 손에 넣은 저자는, 혼돈에 맞선 한 인간에 대해 파헤칠 준비를 마치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1851년 뉴욕주 북부에서 태어난 "별에 머리를 담근 소년"(1장의 제목) 데이비드는 어린 시절 밤하늘의 별들과 지상의 식물들을 관찰하며 이름과 질서를 부여하고 자신이 경험하는 장소들을 지도로 정리하는 일에 열중했다.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에 매료된 소년이 몰두하는 일들은 청교도인 부모에게는 쓸모 없는 짓이었지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존경스러운 형 루퍼트는 든든한 지지자이자 동료였다.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루퍼트가 북부연방군에 자원해 떠났다가 훗날 발진티푸스로 명명된 '군대열병'으로 사망한 뒤, 데이비드는 필사적으로 일기장에 자신이 관찰한 식물들과 라틴어 학명들을 새겨 넣는다. 깊은 상실감을 열정적인 수집벽으로 잊으려는 강박은 당사자에게 도취감을 선사하는 현상이라는 심리학자들의 지적을 저자는 덧붙인다.

 

어린 시절 5년 정도 동안 밤하늘 전체의 별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을 마친 후 스스로에 대한 상으로 '스타(Starr)'라는 미들네임을 붙였던 데이비드의 수집과 분류 강박은 "어느 섬의 선지자"(2장의 제목)와 만나면서 강화되고 발전된다. 코넬대에 입학해 3년 만에 과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일리노이주 게일스버그의 롬바드칼리지라는 작은 기독교 대학에서 과학을 가르치던 데이비드는, 당시 유명한 박물학자이자 지질학자인 루이 아가시가 매사추세츠 해안에서 22킬로미터 떨어진 페니키스 섬에 마련한 여름 캠프에 합류한다. 빙하기 가설로 명성을 얻고 40대에 하버드대 교수가 된 스위스 출신의 루이 아가시는 논문과 책에 의존하는 과학 교육의 실상을 우려했고, 직접 관찰을 통한 자연의 이해와 분류(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로 구상한, 모든 생물을 하등한 생물부터 신성한 생물까지 차례로 배열할 수 있다는 "자연의 사다리"(라틴어로는 "스칼라 나투라이Scala Naturae" 개념으로부터 시작된)를 통해 숨겨져 있는 창조주의 계획은 물론 진보의 실마리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었다. 

 

루이 아가시에 따르면 "충격적이라고 느낄 만큼 인간과 유사한 어류의 골격 구조(작은 머리, 척추골, 갈비뼈를 닮은 돌출 가시)는 '인간'에 대한 경고였다. 어류는 인간이 자신의 저열한 충동들에 저항하지 못하면 어디까지 미끄러져 내려갈 수 있는지를 상기시키는 비늘 덮인 존재였다."(45~46쪽) 페니키스 섬에서의 활동은 아가시에게 ""가장 높은 수준의 선교 활동"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신의 계획, 생명의 의미, 어쩌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길까지 해독해내는 작업이었다."(47쪽) 루이 아가시의 신앙과 학문적 소명이 담긴 페니키스 섬 여름 캠프에서 데이비드는 엄격하고 진지한 자연 관찰과 연구에 대해, 오랫동안 외롭게 골몰해온 작업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확신하게 된다. 훗날 첫 번째 아내가 되는 식물학자 수전 보웬을 만나게 된 것도 이곳이었다.

 

3장("신이 없는 막간극")에서 이야기는 저자 자신과 가족으로 향한다. 어린 시절 휴가차 떠난 매사추세츠주 웰플리트의 너른 습지를 함께 바라보며 문득 인생의 의미를 묻는 일곱 살 아이에게, 아버지는 "의미는 없어!"라고 단언하고 "혼돈만이 우리의 유일한 지배자"라고 알려준다. 거대한 우주와 다양한 생물들의 활동을 설명하고 "넌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던 아버지는 자신만의 도덕률을 지키며 쾌락주의적인 일상을 영위했지만, 저자는 아버지처럼 대담하고 활력에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한다. 심한 괴롭힘으로 고등학교를 자퇴한 언니의 복도는 이후 저자를 겨냥했고, 수면제 과다 복용의 자살 기도가 실패한 뒤에도 죽음의 유혹은 강하게 따라붙었다. 그 시절 아버지의 책상 위에는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어떤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는 다윈의 [종의 기원] 마지막 문장의 글귀가 걸려 있었는데, 저자에게는 때로 "네가 그 장엄함을 보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처럼"(61쪽) 비난으로 느껴졌다고 적고 있다.

 

청소년기의 터널을 지나 입학한 대학에서 저자는 빛나는 존재를 발견하고 몇 년의 노력 끝에 연인이 된다. 대학을 졸업한 뒤 "차갑고 가혹한 세상에 웃음의 잔물결을 일으킬 수 있는"(63쪽) 곱슬머리 남자와 동거하기 시작한 브루클린의 작은 아파트는 둘만의 안식처가 되지만, 각자의 일과 다정함을 공유하며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는 시간은 7년에 그쳤다. 저자는 어느 밤 해변에서 만난 금발 소녀에게 매력을 느끼고 사랑을 나눴고, 그 일을 고백하며 곱슬머리 남자와의 관계도 끝난 것이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무너진 상황에서 저자는 다시 죽음의 유혹에 시달림과 동시에, 곱슬머리 남자의 회심이라는 망상 같은 희망에 매달린다. 3년 넘게 편지와 이메일을 보내며, 자신을 속이면서 점점 더 깊은 혼돈에 빠져들던 그 시기에, "아무 약속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희망을 품는 비결, 가장 암울한 날에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비결, 신앙 없이도 믿음을 갖는 비결"(66쪽)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폐허 위에서 바늘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스승의 축복과 지지 속에 페니키스 섬을 떠난 데이비드는 미국 중서부 전역의 학교를 옮겨 다니며, 코넬대에서 분류학을 함께 공부한 친구 허버트 코플랜드와 함께 북미의 모든 담수어를 발견하겠다는 목표를 실행하기 시작한다. 열악한 환경을 무릅쓰고 다양한 표본을 채집해 연구 논문으로 출판하기 시작한 그들의 존재가 알려지고, 정부는 그일이 미국의 학문적 업적이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시작한다. 1880년에 데이비드는 훗날 자신을 위기로 몰아넣는 스캔들을 일으키는, 총애하는 제자 찰리 길버트와 함께 여러 달 동안 작업을 수행한다. 수많은 물고기들을 발견하고 이름 붙이는 과정에는 스승 루이 아가시가 중요시한 도덕적 교훈이 개입했고, 낯선 해안들에서 받은 어부들의 결정적인 도움은 휘발되었다. 그렇게 수십 수백 종의 물고기와 이름 들을 세상에 선보이면서 데이비드는 자신의 존재감 역시 함께 드러낸다. 인디애나대학의 종신교수가 되고 수전과 결혼해 세 아이의 아빠가 된 데이비드는, 서른네 살에 대학의 요청으로 전국에서 가장 젊은 학장이 된다.

 

의 모든 면에서 승승장구하던 1883년 7월의 어느 날, 벼락으로 인한 화재로 데이비드의 연구실이 불타고 모든 표본과 자료가 소실된다. 평생을 바친 소중한 것들을 잃은 그는 실의에 빠지는 대신, 더 열심히 일에 매진한다. 1885년 11월에 아내 수전이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슬픔에 빠지기보다 신속히 움직이며 매끄럽고 호화롭게 장례를 치른 그는, 2년이 지나기 전에 대학교 2학년인 18세의 제시 나이트를 두 번째 아내로 맞이한다. 수전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셋째 소라 역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십대인 두 아이를 기숙학교로 보낸 부부는 탐사 원정에도 함께하는 파트너가 된다. "이미 지나간 불운에 대해서는 절대 근심하지 않는", "낙천성의 방패"를 가진 데이비드의 회복과 왕성한 활동은 캘리포니아의 부유한 부부(악덕 자본가이자 공화당 상원의원인 릴런드 스탠퍼드와 죽은 아들과 만나기 위해 영매를 찾아다니는 제인 스탠퍼드)에게도 알려진다. 1890년 블루밍턴으로 찾아온 그들은 자신들이 팰러앨토에 세울 작은 학교의 초대 학장직을 제안한다.

 

1891년 나이 마흔에 스탠퍼드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취임한 데이비드는 화려한 해양 연구 시설을 만들고 친구들과 제자들을 채용해 교수진을 꾸린다. 캠퍼스 내의 표본 보관 장소로 정한 건물 앞에는 부부 역시 존경해왔던 루이 아가시의 동상이 세워진다. 정해진 수순처럼 성공가도를 밟아가는 데이비드의 인생은 여러 종류의 동물들과 함께하는 집에, 제시와의 사이에서 나이트와 바버라가 태어나면서 거의 완성에 가까워진다. 이 시기 대학의 지원으로 여러 대륙을 누비며 어류 수집 원정을 떠나고, 그 목록에는 일본과 한국도 있어서 신기했는데 덧붙여지는 설명은 없다. 학장 부임 1년 만에 설립자 중 릴런드가 사망하자 그의 일을 도맡은 아내 제인과 데이비드 사이에는 갈등이 싹트기 시작한다. 영매를 추종하는 제인과 막대한 돈과 시간을 들여 어류 연구에만 치중하는 데이비드, 서로를 못마땅해하는 둘의 운명은 불운과 행운으로 갈리는데 그속에 도사린 반전은 이후 저자의 추적에서 자세히 밝혀진다.   

 

5장 "유리 단지에 담긴 기원"은 존재와 명명에 대한 철학자들의 논의를 소개하며 시작된다. 그리고 분류학자들이 "하나의 종을 최초로 명명할 때 그들은 그 최초의 표본을 특별한 명예를 부여한 매우 특별한 유리단지에 넣어둔다. 그 표본은 공식적인 과학의 기록부에 오를 때 그 종의 유일한 구성원으로 기재된다."(95쪽)는 설명과 함께 "완모식 표본"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만약 이 표본이 소실된다면 그 자리는 무로 남겨지고 물리적으로 이 종을 대표하는 새로운 표본은 "신모식"이라 불린다고 한다. 저자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표본관에서 데이비드가 자신의 이름을 붙인 유일한 바닷물고기 "아고노말루스 요르다니"를 영접한다. "모서리가 없음"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학명을 따온 그 물고기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진 독특한 형상이다. 두 면 사이의 경계가 없는 물고기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데이비드의 심중을 마음 밑바닥의 어두운 면에 대한 고백일까 추측하면서도 저자는 "그때" 그 답을 알지 못했다고 적는데, 이후에도 선명히 기술하지는 않는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그 이유가 정확히 와닿지는 않았는데, 삶의 끝까지 일말의 반성없이 이어진 그의 신념과 열정에 대한 자기확신을 상징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유독 사랑했던, 검은 눈동자를 가진 바버라가 아홉 살에 성홍열로 목숨을 잃은 1900년, 데이비드는 그 죽음을 가장 잔인한 재앙이자 파괴적인 충격이라고 회고하지만 곧 더 많은 물고기들을 찾아간다. 이후 학교를 좌지우지하는 데이비드의 족벌주의를 경계한 제인이 한 교수를 스파이로 붙이고 최측근 찰리의 학내 불륜이 발각되지만, 데이비드는 오히려 목격자에 대한 협박으로 위기를 넘긴다. 데이비드에 대한 제인의 불신과 해고 소문이 떠돌기도 했지만 1905년 어느 날 하와이를 여행하던 제인이 돌연 사망한다. 1906년 4월 18일 새벽, 리히터 규모 7.9로 추정되는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은 30년을 오롯이 갈아넣은 그의 신성한 물고기들을 파괴하고 스승 루이 아가시의 조각상을 땅에 거꾸로 처박는다. 혼돈 속의 저자에게 구원의 빛으로 등장한 데이비드의 한 장면이 펼쳐진 시공간이다. 어떠한 절망에서도 자신의 사명을 밀고가는 데이비드의 원동력을 찾기 위해 저자는 더 많은 자료들을 뒤지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친구가 전한 메일 속 카프카의 "파괴되지 않는 것"(7장의 제목)이라는 구절을 마음에 새긴다.

 

데이비드의 개인적인 에세이에서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라는 말을 발견한 저자는 "기만에 대하여"(8장의 제목) 사유한다. 여러 심리학자들의 연구를 검토하며 데이비드와 아버지가 도덕적 잣대를 들이댔던 자기기만에 대해 성찰하면서 인간에게 작용하는 긍정적 착각의 힘, '그릿(Grit, 끈질긴 투지)이라 이름 붙여진 한 특질에 주목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끝없이 나아갈 수 있는 자기확신, 부정적으로 발현된다면 어떤 비판과 위기에도 교묘히 대응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관철시키는 의지가 될 수 있는 그것. 1905년으로 돌아간 이야기는 9장("세상에서 가장 쓴 것")에서 미스테리 스릴러로 장르를 바꾼다. 1905년 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독이 든 물을 마셨던 제인이 얼마 후의 하와이 여행에서 갑작스레 사망한 사건, 현지 의사들은 스트리크닌에 의한 독살이라고 판단했지만 급히 하와이로 날아온 데이비드에 의해 과식과 협심증으로 사인이 돌변한 사건. 당시에는 애매하게 묻혔던 사인은 이후 의구심을 가진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조금씩 파헤쳐졌고, 그 흔적을 좇던 저자는 제인이 죽고 얼마 뒤에 데이비드가 남긴 다양한 색채의 그림들 그리고 그가 기록한 물고기 채집 방법에서 스트리크닌을 발견한다.   

 

이탈리아 알프스의 아오스타라는 마을은 심신의 장애를 지닌 이들의 안식처로, 수세기 동안 가톨릭교회가 가족에게 거부당한 이들에게 음식과 주거를 제공하고 돌보면서 사회에서 낙인 찍히고 배제된 이들이 자신들만의 방식과 속도로 존엄한 삶을 누리는 곳이라고 한다. 1880년대에 이곳을 방문했던 데이비드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공포의 공간"(10장의 제목)으로 각인된 곳이자, 루이 아가시가 강력히 우려한 "인류의 쇠퇴" 현장이기도 하다. 생물학적 유전에 경도된 데이비드는 가난과 게으름을 비롯한 인간의 거의 모든 능력과 특징 역시 혈통의 문제라고 믿었고, 학교 안팎에서 우생학(1883년 찰스 다윈의 고종사촌인 과학자 프랜시스 골턴이 만든 말이라고)의 열렬한 전도사를 자처했다. 우월한 유전자만 살아남기 위해 열등한 유전자는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부적합자"들에 대한 불임화 수술의 합법화는 중요했고, 사회의 가장 취약한 집단은 몰살되어도 마땅했다. 그는 우수한 인간이 희생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자이기도 했다.

 

페니키스 섬에서 루이 아가시의 은총에 매혹되었던 데이비드는 다행히도, 종의 다양성과 자연의 불확실성이라는 다윈의 생각에 죽을 때까지 반대한 스승과는 의견을 달리 했지만 이는 인간계에 대해서는 통용되지 않았다. 생물의 위계와 "사다리"(11장의 제목)에 생이 끝날 때까지 집착한 데이비드의 지극한 오류의 이유를 저자는 혼돈으로 추정한다. 어린 시절 자신에게도 불안을 안겼던 그 느낌. 그보다는 한평생 밀고온 신념에 대한 자기부정과 모든 것이 무화될 가능성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닐까 나는 생각했는데, 이 역시 혼돈이지만 조금은 다른 결이 아닐까 한다. 아무려나 "그 사다리가 데이비드에게 준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의 해독제. 하나의 거점. 중요성이라는 사랑스럽고 따스한 느낌."(207쪽) 가느다란 구원의 섬광을 좇아 일생을 파헤치는 동안 자주 당혹감을 느끼고 어느새 경멸하게 된 데이비드와 자신이 어떤 측면에서는 같은 것을 갈망했다는 사실을 저자는 숨기지 않는다.

 

희망을 기대했던 대상에게서 황량한 공허를 확인한 저자가 향한 곳은, 데이비드가 치켜든 우생학의 깃발 아래 수많은 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구금되어 불임화되고 삶을 짓밟히고 때로 목숨을 잃기도 했던 버지니아주 간질환자 및 정신박약자 수용소다. 데이비드의 생시 강제 불임화의 대상이자 중요한 소송의 주인공이었던 캐리 벅의 후손들은 모두 사망했지만, 어렵사리 수소문해 십대 시절을 그곳에서 보내고 불임화 수술을 당한 후 나올 수 있었던 애나 그리고 애나의 돌봄으로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메리를 만난다. 둘은 한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고 마을에서 더 많은 이들과 더불어 살고 있었다. 우생학과 권력이 온전한 삶을 정면으로 부인했지만 결국 살아남아 서로에게 다정함과 상냥함의 그물망이 되어주는 사람들. 우월성과 완벽성이라는 임의적 기준으로 모든 것을 위계화해 줄세우고 취약성을 말살하려는 우생학적 비전으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호혜적인 삶의 실질적인 힘과 아름다움. 그것을 저자는 잡초처럼 보이지만 약초가 되고 염료가 되고 화관이 되고 소원빌기의 매개가 되기도 하는 "민들레"(12장 제목)를 통해 표상한다. 그리고 너무 어렸던 일곱 살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다양한 관점"을 환기하고, 그때는 아버지에게 돌려줄 수 없었던 뒤늦은 대답을 분명히 한다.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그런데 마지막 장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는 더욱 놀라운 반전이 담겨 있다. 사후에도 기념비적인 학자로 명망이 높은 데이비드의 생물 분류가 학문적으로 무화될 수밖에 없는 치명적 발견, 그러니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상징이나 은유가 아닌 학계의 기정사실로 확증되었다는 사실이다. 저자가 캐럴 계숙 윤의 <자연에 이름 붙이기Naming Nature>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된 1980년대 분기학자들의 발견은, "타당한 진화적 집단은 특정한 한 조상의 모든 자손을 포함해야 하며, 다른 것은 하나도 포함해서는 안 된다는 것"(237쪽) 그리고 "종들이 거쳐 간 시간의 흐름을 가장 신빙성 있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공통의 진화적 참신함"이라고 부른 특징들, 그러니까 새롭게 추가된 특징들"(238쪽)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었고, 이는 데이비드가 쌓아올린 표본의 거탑들이 실은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범주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저자는 산꼭대기에 사는 모든 동물을 '산어류'로 범주화하는 엉뚱한 예시를 통해 다시 한 번 쉽게 설명하는데, 이에 따르면 '어류'는 인간의 직관이 빚어낸 망상적 범주일 뿐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자명한 사실이자 상식으로 당연시되어온 '물고기', '어류'가 존재하지 않는 생물 범주라니. 저자는 여러 관련 기관 종사자와 과학자 들을 인터뷰한 내용과 릭 윈터바텀이라는 분기학자의 토로를 인용한다. "30년 넘게 학생들에게 실제 자연 세계가 우리가 설정한 범주대로 분류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려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 관념이 학계 밖으로는 도저히 퍼져 나가지 않는 것을 보면서 크게 실망했다."(244쪽) 독자들의 충격을 진정시키는 것까지 그의 몫은 아니겠지만,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신의 삶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도 충분히 많겠지만, 저자는 별들을 포기하고 우주를 얻게 된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수많은 이들의 '별과 물고기의 상실'에 대해 열거한다. 어류의 해체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인류에게 가지는 의미와 상징성은 무엇일까, 그것이 여전히 추상적인 질문이라면 인간의 무지와 오류와 인식과 직관이 각자의 삶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또 수용되는가.

 

짧지 않은 에필로그는 저자의 삶에 밀착한다. 물고기를 포기하고 시카고를 떠나 워싱턴DC에서 새롭게 일을 시작한 저자의 뇌리에는 여전히 곱슬머리 남자와 총이 자주 떠올랐지만,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인 낯선 곳에서 평온함을 느꼈다. 그리고 "우리가 자연 위에 그려놓은 선들 너머를", "아무런 기준선도 그어지지 않은 그곳을" 간절히 보고 싶어한 그의 앞에 한 여자가 나타났다. 에메랄드색 눈을 가진 여자는 저자의 아내가 되었고, 저자는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263~264쪽)임을 말한다. 그리고 과학의 세계에도 저자의 가족과 이웃들의 세계에도,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알 수도 없었던 새로운 일들이 빈번히 일어난다.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해골 열쇠 하나를 얻었다. 이 세계의 규칙들이라는 격자를 부수고 더 거침없는 곳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물고기 모양의 해골 열쇠"(267쪽), 저자는 "모든 자ruler 뒤에는 지배자Ruler가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의 범주란 잘 봐주면 하나의 대용물이고 최악일 때는 족쇄임을 기억해야 한다."(268쪽)고도 말한다. 그리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우생학의 망령, 인종주의자들의 공격에 이렇게 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그 허구를 쪼개버릴 물고기 모양의 대형 망치다."(268쪽)

 

 

내 차례가 되어 추천한 6월의 모임 책이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길 위의 편지]와 리베카 솔닛의 [오웰의 장미]와 함께 투표에 부쳤는데 당당히 선택되었다. 이래저래 많이 회자된 덕에 제목은 익숙했고 책에 따라붙는 알듯말듯한 찬사에 궁금증이 일어 사두었는데 올해 참 책을 잘 안 읽기도 하고 읽는 속도도 느려진 탓에 묵혀두다가 모임 책이 되었다. 선언적이지만 갸우뚱하게 만드는 제목과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라는 매력적인 부제의 조합, 어둡지만 따뜻한 느낌의 삽화가 그려진 리커버 표지가 마음에 든다고 느꼈는데, 내일이 모임이므로 그래야 했지만 오랜만에 내려놓는 사이를 아쉬워하며 하루만에 다 읽은 책이기도 하다. 잊고 싶지 않은 부분이 많아 정리하다 보니 요약편집증을 이기지 못하고 또 길어졌는데, 기억력이 심히 감퇴하고 있어 기록 욕구가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탓도 있다. 아무려나-

 

개인의 고통에서 시작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과 연루된 현대 과학사의 미국사의 그늘을 관통하고 반면교사로서의 깨달음에 이르는, 여럿의 이야기들이 중첩된 거대한 하나의 이야기였다. 따로 존재할 때는 별로 관계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인물과 사건 들을 정교하게 엮어 자유롭게 유영하는 듯한 서술을 통해 생성되는 의미들, 저자와 데이비드의 삶 그리고 과학사와 미국 사회라는 여러 겹의 레이어가 겹쳐지면서 풍부해지는 메시지들이 흥미로웠다. 데이비드의 개인사와 그의 일의 부침 혹은 반성적 관계를 직관적이고 운명적인 계시처럼 기술한 부분들(첫 아내 수전과 두 번째 결혼, 아기 소라의 죽음 후에 편애하던 바버라의 죽음까지)에서는 살짝 갸우뚱해지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선을 넘지 않는 해석에 수긍이 됐고 연결과 편집으로 설득력을 취득한 독특한 글쓰기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주요 내용과 주제 못지 않게 혼돈 그 자체인 저자와 데이비드와의 관계와 긴장, 여전한 현실임에도 강력한 명맥은 숨겨져 있는 듯 보였던 우생학의 다크 투어리즘, 가장 큰 세 번의 반전(저자의 성정체성, 데이비드의 제인 살해 의혹, 어류의 해체)은 차원을 넘나들며 마지막까지 눈길을 사로잡았다. 

 

삶의 밑바닥에서 혼돈을 극복하고자 했던 자신의 몸부림은 살짝 내려 놓은 채, 데이비드와 그의 '부적합자'들의 흔적을 좇으며 맹목적 진화론의 오류와 우생학의 흑역사 그리고 과학계 밖으로 좀처럼 내보낼 수 없었던 비밀을 세상에 드러낸 저자의 노력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구원의 섬광을 발견하고 추적한 자가 실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자였다는 사실을 확인한 저자의 전율과 그 너머로의 도약에 대해, 당분간 떠오를 것 같다. 새삼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어보고 싶어졌고, 한국에도 존재했던 '부적합자들의 처소'였을 삼청교육대와 형제복지원이 떠오르기도 했다. 제인이 영매를 좇는 부분에서는 [나이트메어 앨리]의 장면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전반적으로 시각적 이미지를 연상케하는 묘사들이 많아서 영화화된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책에 실린 유일한 사진인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거꾸로 땅에 박힌 루이 아가시의 동상의 강렬함을 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아직 '세계대전'은 발발하지 않았던 현대 초기의 영미권 세계는 인권 개념 따위 없이 인류의 오만이 최고의 정점에 달했던 시공간이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그 시대의 빛과 어둠은 오늘날까지도 꽤 막강한 영향력을 알게 모르게 행사하고 있는 것 같아서 더욱 궁금해진다. 책으로도 영화로도 자주 만나고 싶은 시공간.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나름의 의지와 어떤 운명적 만남으로 마침내 작은 빛을 만난 저자의 이야기가 에필로그에 이르러 너무나 영롱하고 환하게 생동하는 점이 낯설기는 했지만, 백 명은 될 만큼의 이름들이 난무하는 '감사의 말'을 읽으며 이런 다정함이라니 싶었다. 새로운 장으로 넘어갈 때마다 등장하는 인상적인 삽화의 일러스트레이터 케이트 샘워스의 이름도 '감사의 말'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중간중간 괜히 이름이 궁금해 책장을 뒤적거렸던 게 생각나서 앞표지 날개나 서지정보에 따로 실었다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더불어, 본문이 시작되기도 전에 무려 네 쪽에 걸쳐 진을 치고 있는 '찬사'들도 조금 아쉬웠다. 긴 에필로그에 이은 삽화와 변화(책 출간 6개월 후 스탠퍼드대학과 인디애나대학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 이름이 붙은 건물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에 대한 몇 마디와 감사의 말, 긴 주석까지 후미에 들어가는 내용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나무랄 데 없는 책이라면 '찬사' 정도는 제일 마지막에 배치해도 좋지 않았을까. 빠짐없이 차례대로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자로서, 시작부터 쏟아지는 찬사들의 첫 쪽을 읽다가 지레 질려서 책을 다 읽은 후에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아쉬움도 없는 책을 어떻게 만날 수 있으랴. 좋은 독서였다.

 

 

룰루 밀러•정지인 옮김
2021.12.17.1판1쇄 2023.1.25.1판28쇄 펴냄, 곰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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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6. 18. 11:13

 

 

폭탄 같은 자명종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이른 새벽, 성경 구절까지 동원해 스스로를 독려하며 어렵사리 몸을 일으키는 도러시는 잉글랜드 동부 서퍽주 나이프 힐에 있는 성 애설스탠 교회의 사제인 찰스 헤어 신부의 외동딸이다. 스물여덟 살의 도러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부속사제를 둘 수 없는 가난한 교회에서, 예배 집전을 제외한 모든 일을 담당하고 있다. 이천 명가량의 주민이 사는 마을은 남북으로 농경 지역과 사탕무 정제소가 들어선 공장 지역으로 나뉘고, 이들의 사교 생활은 '나이프 힐 보수주의 클럽'과 '디 올드 티 숍'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교회는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사교 클럽과도 한창 진행 중인 보궐선거와도 무관한 듯 대다수 주민들과 거리를 둔 채 존재한다.

 

자신의 가난을 시대를 잘못 타고난 탓으로 여겨 언제나 심기가 불편한 신부는 '하층계급'도 '하급 귀족'도 티 숍에 모이는 '커피 여단'도 혐오하고 세간에 유행하는 종교적 자유주의 풍조인 앵글로가톨릭주의를 '로마 열병'이라 부르며 폄훼하는 인물이다. 독선과 오만으로 교구와 주민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는 그가 부임한 이후 신도들은 부자들을 필두로 확연히 줄어들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좋았던 과거를 회상하며 맹목적인 주식 투자를 지속하면서, 매년 꾸준히 재산을 까먹고 있는 신부는 늘 부족한 생활비에 허덕이는 딸의 곤욕을 모른 체하고 고급스럽고 까다로운 입맛을 고수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덕분에 수시로 날아오는 동네 가게의 외상값 독촉장에 간담이 서늘해지고 고민과 수치심에 사로잡히는 것은 도러시다. 

 

그럼에도 도러시는 신부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고 언제나 경건함을 유지하며 묵묵히 기도와 찬양, 주어진 직분(전멸에 이른 '결혼을 위한 교류회'와 '연소자 금주 동맹', 그나마 굴러가는 '어머니 연합' 간사 그리고 걸스카우트의 전신인 걸가이드의 대장 역할을 포함한 교회의 모든 일)에 충실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신부의 면도물을 데우며 시작하는 하루, 전날 메모한 쪽지에는 7시 성찬례 준비부터 신도 방문, 교회 시설 관리와 신부의 세 끼 식사에 이르는 다양한 할 일들이 적혀 있다. 괴팍한 신부 탓에 어려워진 교회 운영을 위한 수익 사업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것도 오롯이 그의 몫, 다년간 기부금 모금을 위한 가장 행렬과 연극을 준비하며 도러시는 갖은 재봉질은 물론 갈색 포장지와 아교로 그럴듯해 보이는 갑옷이며 군화를 만드는 것도 가능한 금손이 되었다. 따분하고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수많은 할 일에 떠밀리듯 숨가쁜 생활 속에서 가끔 불만이 일 때면 도러시는 성경 구절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간혹 용납할 수 없는 불경스러운 마음이 느껴질 때면 핀으로 팔을 찌르며 참회하는데, 이는 누구도 모르는 비밀이다.

 

자칭 세 사생아의 아버지이자 화가인 워버턴 씨는 그런 도러시의 생활에 기이한 환기창 같은 이웃이다. 경건하고 신실한 도러시와는 극단의 성향과 생활을 영위하는 그는 2년 전 이웃이 되어 동거하던 가정부이자 첩이 갑자기 떠난 후 마을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었던 마흔여덟 살의 한량이다. 문란하고 부도덕한 그의 습관에 가까운 성추행이 도러시에게도 있었지만, 다양한 책과 좋은 차와 함께하는 대화는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 없는 일종의 연민과 이해"를 선사했기에 유랑하듯 사는 그가 나이프 힐에 올 때마다 교류는 이어졌다. 도러시는 둘만 있게 되는 상황과 추문을 퍼뜨리는 마을의 험담꾼인 또 다른 이웃 셈프릴 부인을 동시에 경계하면서 그와 대화를 나누며 잠시나마 다른 세상을 만났다. 그리고 선거운동이 한창인 거리에서, 거액의 외상값이 쌓인 카길스 정육점 앞을 지날 일에 잔뜩 주눅들어 있던 도러시 앞에 오랜만에 워버턴 씨가 나타난다.

 

저녁에 작가가 방문한다는 거짓으로 초대에 성공한 그는 도러시의 답답한 삶을 도발하는 대화와 더불어 오랜만의 성추행과 강제 뺨 키스에도 성공한다. 워버턴 씨의 성추행으로 도러시의 뇌리에는 5년 전의 사랑, 자신에게 청혼했으나 폐렴으로 죽은 밀버러 성 베데킨트 교회의 보좌신부 프랜시스 문 그리고 남모르는 불치병인 자신의 성적 냉담증과 아홉 살에 목격한 부모 사이의 무시무시한 광경 등이 떠오른다. 집 앞까지 따라온 워버턴 씨를 물리치고 돌아온 온실에서 아교 냄비를 끓여 가장 행렬에 쓰일 군화를 만들며 팔을 꼬집어 잠을 좆는 도러시. 여기까지가 6장으로 구성된 제1부의 내용인데, 오믈렛을 만들 때조차 모양이 흩트러지지 않기를 짧게 기도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찰라를 의식할 때면 "이교도적인 황홀경"에 빠졌다는 자책에 자연숭배를 반성하며 "장미 가시로 팔을 세 번 찌르며 삼위일체의 삼위격"을 되새기는, 신앙에 잠식된 도러시의 삶은 제2부에서부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제2부는 낯선 공간에서 몽롱한 상태로 잠에서 깬 도러시의 혼미한 시선에서 시작된다. 영문을 알 수 없이 런던의 뉴 켄트 로드에 있게 된 도러시는 기억을 잃었다. 도러시를 매춘부나 부랑아쯤으로 여기고 다가온 노비와 플로와 찰리는 그에게 약간의 돈이 있다는 걸 확인한 후 켄트주에 가서 함께 홉을 딸 것을 제안한다. 판단 능력을 잃은 도러시는 일행과 함께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고 노숙하며 하루에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 홉 밭으로 향한다. 플로와 찰리는 중간에 사라졌지만 거리 생활에 필요한 여러 재주를 가진 노비와 함께 도러시는 마침내 일을 얻는다. 집시들과 다양하게 가난한 사람들이 모인 홉 농장의 하루는 새벽부터 시작되고 손에 피가 흘러 굳어야만 그나마 수월해지는 노동은 험하지만, 마흔 명이 한 팀이 된 홉 밭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와 일이 끝난 밤 캠핑이라도 온 듯 불가에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에는 기묘한 공동체적 온기가 흐른다. 의식이 정지된 듯 고되지만 무감히 견딜 만한 생활은, 농장 사람들 사이에서 도러시와 연인 관계로 여겨졌던 노비가 닭을 훔치는 데 앞장선 대가로 잡혀가고 홀로 남겨진 후 갑자기 기억이 돌아오면서 마감된다.

 

엘런 밀버러가 된 도러시가 거리를 유랑하고 홉 농장에서 일하는 동안, 삼류잡지인 <피핀스 위클리>에는 사라진 '신부의 딸'에 대한 자극적인 기사가 연일 실렸다. 셈프릴 부인의 악의적인 인터뷰를 그대로 받아적고 근거 없는 추측을 덧붙인 기사 안에서 도러시는 유부남과 눈이 맞아 사제관을 떠난 치정극의 주인공이 되어 파리며 빈 어딘가에서 목격되고 있었다. 홀연히 돌아온 기억과 우연히 확인한 기사를 통해 현실의 일부를 깨달은 도러시는 자신의 진실과 함께 나이프 힐로 돌아가기 위한 교통비를 청하는 편지를 신부에서 거듭 보내지만 답을 받지 못한다. "지난 3주 동안의 몽환적인 무심함"이 부서진 후 꿈에서 깨어난 듯 도러시의 의식은 선명해졌지만, 그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기도를 잊은 채 자신의 생존에 골몰한다. 홉 따기 시즌이 끝난 후 농장에서 선의를 보여준 털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돌아온 도러시는 그간의 해묵은 때를 벗겨내고 얼마 안 되는 전재산을 털어 옷가지를 장만하고 매춘부들이 기거하는 메리 여인숙에 여정을 푼다. 절박한 마음으로 신부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지만 답장을 채 당도하기 전에, 돈이 떨어진 도러시는 거리로 나온다.

 

메리 여인숙에 머물며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새벽부터 공공도서관의 신문 광고란을 찾고 적잖은 지원서를 보내지만 "위험한 독신녀"인 도러시를 받아주는 곳은 없다. 교양 있는 말투는 가정교사나 하인을 구하는 주부들에게 마이너스로 작용했고 달리 선택지가 없는 도러시는 "밑바닥 세계에 가까워질수록 덜 끔찍해" 보인다고 느끼며 제3부에서, 런던의 트래펄가 광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살을 파고드는 밤의 추위를 견디며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파문된 신부, 남편에게 쫓겨난 부인, 중산층이었다가 전락한 부인, '유대인 놈', 변태적인 노래만 반복하는 남자 등 불결하고 추잡한 열세 명의 무리에 끼어 있는 도러시. 각자의 불만과 욕지거리와 저주와 허세를 담은 독백들은 당직 경찰관이 나타날 때 잠시 멎을 뿐이지만, 모두가 괴로운 뼈까지 시린 새벽이 되자 이들은 벤치 위에 인간 피라미드를 만들어 함께 견딘다. 그리고 새벽 5시에 열리는, 테이블당 차 한 잔이면 잠시 몸을 녹이고 눈을 붙일 수 있는 카페로 몰려가 노곤한 몸을 잠시 쉰다. 

 

기억을 잃었던 홉 농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는 도러시는 거리 생활에 금세 적응한다. "희귀하지만 절대 사라지지 않는 기묘한 종족의 일원이 되어" 일을 구할 때와는 달리 도움이 되는 교양 있는 말투로 푼돈을 구걸하면서 하루하루 연명한다. 그렇게 열흘째가 되는 날 구걸 금지법을 정기적으로 집행하는 경찰에 연행된 덕에 간만에 긴 잠을 자고 즉결 재판소를 나온 아침, 뜻밖의 상황이 도러시를 기다리고 있다. 다섯 번의 편지에도 무답이었던 아버지가 실은 그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에서 절대 잊히지 않을" 아침 식사를 스스로 준비하는 일을 감당하며 신부는 단지 그것만은 아닌 이유로, 15년간 왕래가 없었던 사촌 토머스 경에게 연락을 취해 도러시를 찾아 런던의 일자리를 구해달라고 부탁한 터였다. 아버지의 도움을 청하는 마지막 편지의 답장과 동봉한 돈은 메리 여인숙에서 나온 도러시와 어긋났지만, 토머스 경의 집사 블리스는 도러시를 제때 찾아냈다. 

 

제4부에서 도러시의 삶은 또 한 번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다. 자격을 갖추지 못했지만 토머스 경의 변호사를 통해 런던에서 멀지 않은 사우스브리지 여학교의 보조교사 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링우드 하우스 아카데미라는 이름을 내건 그곳은 당시 현금 수익인 학비를 겨냥해 몇 가지의 집기를 구비하고 난립한 작은 사립학교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교육보다는 수업료를 내는 학부모들의 만족을 위해 매진하는 4류 사립학교였다. 교장인 크리비 부인은 수업료 납부율에 따른 학생 차별을 당연히 여기는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자로, 배움이 짧은 학부모들에 대한 보여주기식 습자와 단순한 프랑스어 문장 암기만을 중요시했다. 무지하고 의욕 없는 아이들과 낡고 뒤떨어진 교재와 학습 과정, 보조교사에게 거의 모든 수업을 맡기면서도 하인처럼 부리는 교장 사이에서도 도러시는 나름의 혁신을 꾀하면서 교사직을 "마음과 영혼을 바칠 만한 과업"이라 여기며 몰두한다.

 

새로 부임한 교사가 마음에 들어 푼돈 모아 산 꽃다발을 선물하기도 한 상냥한 아이들을 위한 도러시의 노력은 그 자신도 일깨우고, 교실은 잠시나마 배움의 의지와 생동감으로 넘친다. 그러나 교재 중 하나로 삼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자궁'이라는 결정적 단어가 등장한 직후, 학부모들은 '실제적인' 교육을 등한시한 채 불필요하고 품위 없는 문학 교육을 일삼는 도러시를 정면으로 비난한다. 학교로 몰려온 학부모 대표들의 불만 표출과 그들 앞에서의 교장의 꾸중, 그들이 돌아간 뒤에도 이어진 질책 등을 단지 일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참아낸 도러시의 일상은 다시 회색빛으로 물든다. 크리비 부인과 학부모들이 원하는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교육으로 돌아간 결과, 잠시나마 제대로 된 수업에 앎의 즐거움을 경험했던 아이들의 배신감과 실망은 더욱 커졌다. 냉담해진 아이들의 수업 방해와 저항은 갈수록 심해졌고 부임 초기 티가 나지 않게 귀를 비틀라는 교장의 체벌팁에 충격 받았던 도러시는, 교실의 집단적인 조롱에서 가장 큰 소리를 내는 소녀의 귀싸대기를 때리기에 이른다.

 

방학과 크리스마스 즈음 워버턴 씨와 신부의 편지가 당도하지만 아직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방학의 밥을 축내는 것을 아까워하는 크리비 부인을 피해 공공 도서관이며 산책으로 하루를 보내며 도러시는 새삼 텅빈 외로움을 느낀다. "큰 도시에서는 수많은 사람과 부산스러움 때문에 적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착각을 할 수 있고, 시골에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서로에게 관심이 많다. 하지만 사우스브리지 같은 곳에서는 가족과 자기 집이 없으면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한 채 인생의 절반을 보낼 수도 있다."(373쪽) 고립감과 권태감에 지친 도러시에게는 아무런 희망 없는 봄학기의 시작도 기쁜 일로 다가오고, 아이들을 제압한 비루한 교사가 된 도러시에게 여전히 가장 중요한 것은 일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온전한 허수아비를 되찾은 크리비 부인만이 그런 도러시가 마음에 드는 듯 몇 달 간 넘볼 수 없었던 식탁 위의 마멀레이드를 허락하고 "다음 학기"를 자주 언급하지만, 실소를 부르는 유치한 변화 역시 계획적 해고를 앞둔 연막이었다. 

 

학생의 머릿수와 학비를 담보로 해적질이 난무하던 하류 사립학교의 생리를 알 수 없었던 도러시는 얼마 후인 학기가 끝나는 날 가차없이 해고되었다. 불가항력을 인지하고 짐을 싸 링우드 하우스를 나선 도러시 앞에, "밀-버러"를 찾는 소년이 나타나 전보를 전달한다. 셈프릴 부인의 명예훼손 소송 피소로 도러시에 대한 오해와 추문이 거짓으로 밝혀졌다며 도러시를 데리러 오겠다는 워버턴 씨의 전갈, 곧 나타난 워버턴 씨와 함께 도러시는 어리둥절하게 택시에 오른다. 런던에 도착해 나이프 힐로 향하는 기차에서 도러시는 "모든 진정한 사건은 마음속에서 일어난다는 진부한 말"을 되새기며 신앙을 잃은 현실과 "인생을 완전히 다시 시작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고백한다. 워버턴 씨는 난데없는 기억 상실이 억압된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신부의 딸'로 돌아가 독신으로 늙어갈 미래를 주워섬기며 청혼하고, 그가 그리는 제법 설득력 있는 이야기에 잠시나마 수긍하던 도러시는 그의 스킨십 시도에 주술에서 벗어나듯 정신을 차린다.

 

제5부의 2장,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제1부와 다름없는 도러시의 일상으로 채워진다. 독한 감기에 걸려 긴 요양을 떠났다는 공식 명분처럼, 핼쓱해져 돌아온 도러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예전의 생활로 돌아왔다. 최면에 걸린 듯 신앙에 모든 것을 의탁하고 바쁘게 수행하던 갖가지 일들은 그대로다. 신앙을 잃은 채 이전과 다름없는 일을 묵묵히 해내면서 도러시는 삶의 본질에 대해 묵상한다. "궁극적인 목적이 없는 삶의 구석구석에는 우울함과 쓸쓸함이 도사리고 있다."(423쪽)는 뒤표지의 발문은 스산한 진실을 담고 있지만, 궁극적인 삶의 목적은 절대자의 계시 속에 숨겨진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각자가 발견하고 의미를 부여할 때 깨달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앙을 잃었지만 신앙의 욕구마저 사라지지는 않은 도러시는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그녀는 경건한 마음으로 몰두"하며 자신의 일과 함께 다시 살아간다.   

 

1935년 3월에 출간된 두 번째 소설인 [신부의 딸]은 신앙에 잠식된 채 버거운 일상을 이어가던 도러시가 생각지도 못했던 극한의 경험을 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작가는 런던 근교 마을의 교회에서 붙박이처럼 살아가던 도러시를, 기억을 잃은 채 런던 근교 홉 농장으로 돌아갈 방법을 잃은 채 런던의 거리와 근교 마을의 사립학교로 이동케 한다. 그리고 도러시의 절박한 상황과 더불어 그 공간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인물들의 생생한 묘사를 통해 비참하고 피폐한 당대 가난한 이들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본령을 잃은 종교와 제기능을 하지 않는 제도, 개인의 책임이 된 빈곤, 희망 없는 미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환멸을 내면화한 작가의 시선이 주목하는 사회의 그늘 아래 군상들은 우스꽝스럽고도 처연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지만, 비틀린 인물들과 상황 속에서도 빛나는 작가의 유머와 여유가 독자들의 숨통을 틔우고 시공간을 뛰어넘는 상상력을 발휘하게 만든다.   

 

작가가 되기 위해 제국경찰을 그만두고 런던에서 경험한 밑바닥 생활과 이후의 사립학교 교사 생활을 바탕으로 한 작품인 덕에, 거의 아는 바가 없는 1930년대 영국의 어떤 실상들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주인공 도러시를 통해 드러나는 '늙은 영국의 노처녀'들이 봉착한 현실은 새롭게 다가왔다. 공식적인 여성의 사회 활동이 허용되지 않았던 과거 유럽에서 결혼하지 않은 혹은 혼자된 중산층 이상 여성들의 의지처가 수녀원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그러한 전통이 사라지고 현대가 시작된 그러나 사회적 지위는 여전히 낮은 시기 부와 명예를 가지지 못한 대다수 여성들의 삶의 행로에 대해서 말이다. 트래펄가 광장에서 노숙하고 몰려간 새벽의 카페 앞에서 누추한 입성에 머뭇거리는 도러시에게 그레타 가르보를 언급하며 핀잔을 주는 벤디고 부인의 말, 링우드 하우스 아카데미의 도러시가 근교를 하릴없이 배회하며 너도밤나무 아래 기대 앉아 자신만의 소박한 크리스마스 만찬과 함께 읽는 조지 기싱의 [짝 없는 여자들]은 그래서 더욱 인상적이었다.

 

개연성도 설득력 있는 설명도 없이 기억을 잃고 또 되찾는 파격이 당혹스러웠지만, 갖은 곤경의 와중에도 자신이 처한 현실에 언제나 충실한 도러시의 행보에는 응원과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여 그의 마지막(?) 선택지가 이전의 일상과 능구렁이 같은 워버턴 씨와의 결혼 중 양자택일이라는 것이 무척 잔인하게 느껴졌다. 워버턴 씨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의 사랑을 돈으로 바꾸면 열 배는 더 의미 있는 내용이 된다는 촌철살인의 지혜를 도러시에게 선사했지만, 아무리 암담한 노처녀의 삶이 기다리고 있대도 그를 선택하는 것은 돈의 위력에 굴복하는 것일 뿐이니까 말이다. 다행히(?) 도러시는 성 애설스탠 교회의 일상으로 회귀했다. 겉보기에는 이전과 다를 것 없고 심지어 오랫동안 삶의 중심이었던 신앙을 잃은 채 돌아와 계속되는 도러시의 삶은, 그러나 '주어진 것과 선택한 것'이라는 엄청난 질적 차이가 숨겨진 차원이 다른 일상이다. 이야기가 환상으로 전환되지 않는 한 당대의 현실에서 또 다른 비약적 가능성은 설정하기 어려웠을 테지만 극한의 모험 같은 곤경을 차례차례 경험하고 돌아온 주인공의 앞날에, 작가는 꽤 근사한 결말과 미래를 열어둔 것 같다. 

 

 

조지 오웰•이영아 옮김
특별 양장판 발행 2022.12.5, (주)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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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6. 12. 01:37

 
 
조지 오웰의 이야기는 재미있다. 몇 년 전 한동안, 오래 제목만 익숙했던 그의 작품들을 몰아 읽은 때가 있었다. 얼핏 꽤 무겁고 진지해 보였던 책들도 읽다 보면 금세 휘말리듯 빠져들었고, 소설은 소설대로 산문은 산문대로 시대와 호흡하며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들고자' 애썼다는 뜨거운 작가의 매력을 실감케 했다. 출간된 소설과 르포르타주, 여러 버전으로 편집된 산문모음집 중 몇 권을 읽고 생애에 관한 책도 한두 권 읽은 후 그는 내 마음속 작가 중 한 명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민음사의 '디 에센셜' 시리즈도 굿즈 욕심에 샀는데, 다시 읽어볼 생각은 안 들었고 그냥 소장 중. 

 

작년 말에 국내에 미출간된 [신부의 딸]을 포함한 여섯 권의 조지 오웰 소설전집 세트가 현암사에서 출간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복되는 네 권을 이미 다른 판본으로 읽었음에도 반가운 마음으로 구매했는데, 역시나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볼 적극성을 발휘하기는 쉽지 않아 책장에 고이 모셔두었다. 그리고 봄이 시작될 즈음 '오월엔 오웰'을 작정했으나 유월로 미뤄졌다. 책 참 안 읽고 지내는 요즘, 다시 읽어도 재미있을 것이 분명한 현암사의 조지 오웰 소설전집을 정독하며 늘어진 생활을 다소 정비하기로 했고 출간순으로 박스에 나란히 꽂힌 차례를 따라보기로 했다.

 

[버마의 나날]은 조지 오웰이 1922년부터 5년간 제국경찰로 일했던 버마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1934년에 출간된 그의 첫 소설이라고 한다. 영국은 1752년 동인도회사를 통해 버마와 교류를 시작했고 1886년에 버마를 인도의 한 주로 편입해 1948년까지 식민지로 삼았다. 소설이 전개되는 시공간인 1920년대 초반의 카욕타다는 철도종착역이 있는 군청 소재지로 법원과 병원, 학교에 공동묘지와 교도소까지 들어선 행정 거점이며 약 4천여 명 인구 중 7명의 유럽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옮긴이 해설에 따르면 조지 오웰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카사라는 지역을 모델로 한 허구의 도시라고 한다.

 

예전에 열린책들에서 나온 [버마 시절]로 읽었는데, 다행히도 대략의 분위기와 극히 일부의 인상적인 장면들을 제외하면 까마득히 망각한 상태여서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고 마지막 25장에 이를 때까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주인공 플로리의 운명을 따라갈 수 있었다. 플로리는 대영제국의 목재 회사 직원으로 15년째 버마에 살고 있다. 작업 현장인 정글과 위수지인 북버마의 카욕타다를 오가는 그의 일상을 채우는 것은 맡겨진 일을 제외하면 좁디좁은 관계와 의미 없는 수다, 술, 여자, 책 정도다. 뒤표지에 적힌 발문 "공유하지 못하는 아름다움은 무의미하다."는 문장처럼, 고독한 플로리의 누군가와 함께하고픈 욕망을 자극하는 엘리자베스와의 에피소드들 그리고 버마의 원주민들과 지배계급 유럽인들의 각양각색 면모와 크고작은 사건들이 소설의 두 축을 이룬다. 

 

카욕타다에서 가장 중요하고 소설에서 커다란 갈등과 각종 사고의 배경이 되는 곳은 유럽인 클럽이다. "영혼의 성채"라고까지 표현된 클럽은 식민지에 체류하는 '푸카 사이브'('진정한, 옳은, 적절한, 예의 바른' 영국인이나 유럽인을 부르는 인도의 존칭)인 백인들의 교제와 여가의 장이자, 원주민 고위 관리들도 넘볼 수 없는 "열반의 세계"다. 백인들은 클럽에 모여 고립감과 무기력, 불만과 허위의식을 달래며 원주민들을 무시하고 혐오하는 것으로 선민의식을 공유하고 자존감을 높인다. 지역의 극소수 인구집단인 백인들은 절대다수의 주민들에게 경외와 복종의 대상이고, 그들이 불쾌한 날씨와 문화적 지체와 따분한 일상을 견디는 힘은 제국주의의 모순과 부조리를 응축한 클럽 생활에서 나온다. 

 

카욕타다의 백인들이자 클럽 회원인 부판무관 맥그리거, 관구 경찰서장 웨스트필드, 목재 회사 지부장 래커스틴과 그의 아내, 다른 회사의 지부장 엘리스, 산림청 소장 대리 맥스웰의 공통점은 제국주의자로서의 높은 긍지 그리고 수위는 다를지언정 모두가 체화하고 있는 원주민들에 대한 혐오다. 싼값으로 하인들을 마음껏 부리며 위세를 떨 수 있는 환경은 본국에서는 누릴 수 없는 식민지 생활의 유일한 덕이지만, 본국의 민주주의와 제도화가 인도와 버마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갈수록 방자해지는 하인들을 이전처럼 마냥 착취할 수 없다는 점은 커다란 안타까움이다. 그리고 어느날 당도한 동양인 한 명을 클럽 회원으로 입회시키라는 포고령은, 원주민들을 스스럼없이 '검둥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물론 지역 사회의 원주민 투 탑인 우 포 카인과 베라스와미에게도 커다란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소설의 시작을 여는 인물은 카욕타다의 군 치안판사 우 포 카인, 돈으로 산 관청 서기직으로 시작해 갖은 모략과 악행으로 성공가도를 달려온 그는 말년 선행의 공덕으로 현생의 악업을 무화시키겠다는 인생 계획의 소유자다. 등장인물 대다수와 외떨어져 끝없는 야욕 채우기에 골몰하는 그의 현재진행형 타겟은 비교적 청렴함으로 자신과 대비되며 출세의 장애물로 여겨지는 교도소장이자 병원장인 베라스와미. 백인들에 대한 무한 신뢰와 존경을 깊이 내면화하고 자신을 비롯한 원주민을 열등하게 여기는 그는, 동료 백인들이 못마땅해하는 '급진적' 입장의 플로리에게 유일한 대화 상대이기도 하다. 자신을 찾아주는 플로리의 존재에 감읍하며 위기에 몰렸을 때 '백인의 친구'라는 위신과 평판에 의지하기도 하는데, 이 우정은 결국 플로리가 파멸하는 기폭제가 된다. 

 

우 포 카인의 계략이 저변에 흐르는 가운데 별다른 일이 없는 유럽인 클럽과 플로리의 나날에, 래커스틴의 조카 엘리자베스가 등장한다. 몰락의 성장기를 통과하며 영국과 프랑스 출신의 부모를 차례로 잃고 고아가 된 스물 두 살의 엘리자베스는 낭만과는 거리가 먼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래커스틴 숙부가 있는 버마로 건너왔다. 재능 없이 자유분방했던 예술가 기질의 엄마에게 학을 뗀 엘리자베스는 영민하고 용감한 여성이었지만, 당시 모든 여성이 그랬듯 결혼 외의 사회적 안정을 이룰 길 없는 상태였고 숙부와 숙모는 식민지에서 남편감을 찾을 때까지 그를 돌봐줄 셈이었다. 2년 전 부모로부터 300루피에 산 마 흘라 메이를 정부로 두고 권태로운 관계를 이어가던 플로리에게 엘리자베스의 출현은, 버마에서 자초한 타락의 삶을 구원할 일방적 계시가 된다.

 

물소에 놀란 엘리자베스를 구해준 첫 만남의 희망적 조짐을 환기하며 플로리는, 한쪽 얼굴에 선명한 푸른 모반의 수치를 끊임없이 의식하면서도 그에게 다가가고 반감을 사고 눈치를 보고 다시 다가가다 물러서기를 반복한다. 다른 영국인들과 달리 제국주의를 불합리하게 여기고 원주민과 그 문화를 존중하는, 그러나 꿈에 그리던 사냥과 사격을 가능케해준 플로리에게 수시로 극단의 양가감정을 느끼는 엘리자베스의 심경 변화를 플로리는 잘 알아채지 못한다. 숙부의 추행과 마 흘라 메이의 정체, 홀연히 나타나 유럽인 사회를 동요시킨 안하무인 헌병 베럴과의 연결 가능성, 원주민 폭동에서의 플로리의 활약 등에 따라 두 사람의 관계는 우스꽝스럽고도 진지하게 변화를 거듭한다.

 

엘리자베스와의 사랑과 미래를 통해 비참하게 전락하기 전의 인생을 되찾고 싶은 플로리의 바람은 안쓰럽고 절박하지만, 심경과 언행과 상황의 엇박자는 한편의 소극을 보는 것처럼 실소를 불러일으킨다. 청혼하려던 순간 지진이 나고 연적으로 여겼던 베럴이 냉정하게 떠나고 폭동 진정의 영웅으로 등극한 뒤, 새 생명을 얻은 듯 희망에 부풀어 6주 만에 방문한 신부가 주관하는 예배에 참석한 플로리는 처음으로 모반에 의기소침하지 않고 엘리자베스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우 포 카인의 사주를 받은 마 흘라 메이의 소동과 돌이킬 수 없는 총체적 파국이다. 롤러코스터 같은 마지막 순간들, 엘리자베스의 차가운 마음을 용기 내어 확인한 플로리의 선택은 자살. 반려견 플로의 두개골을 쏘고 자신의 가슴을 관통시킨 총알로 지리멸렬한 삶이 멈춘다.

 

베라스와미의 의리로 '사고사' 종결된 그의 죽음 이후 베라스와미는 쇠락하고 우 포 카인은 클럽 회원으로 선출되지만 내세를 위한 공덕을 쌓지 못하고 급사한다. 긴 이야기는 플로리의 사망 이후 맥그리거 부판무관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한 엘리자베스, 숙모 못지 않게 속물적이고 현실적인 식민지 지배계급의 안주인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그의 근황으로 끝을 맺는다. 플로리의 죽음과 장례식에 대한 짧은 기술 이후 이어지는 "버마에서는 상당히 많은 유럽인들이 자살을 하기 때문에 그런 일에는 사람들이 별로 놀라지 않는다."는 말을 뒷받침하듯 식민지의 시간도 무심히 계속된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지는 마무리다.

 

긍정적이거나 바람직하게 여겨지는 인물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드문 소설이다. 다른 유럽인들과 달리 제국주의에 비판적이고 자신의 모순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우리의' 플로리에게 자주 감정이입이 되었지만, 마 흘라 메이와 엘리자베스를 대하는 분열적인 모습은 민망한 진실을 보여줄 뿐이다. "운명이 어머니의 태내에서 그의 얼굴에 푸른 모반을 찍어 넣었을 때"부터 시작된 다자적 소외와 열등감에 늘 시달리는 플로리의 심경이 자주 묘사되어 영화 [마티아스와 막심]의 막스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막스는 자비에 돌란이 연기했으므로 가당치 않은 상상일 것이다. 주로는 고독과 자학, 아주 가끔 기대와 희망 사이를 숨가쁘게 오가던 플로리에게 모반은 "죽음과 함께 즉시 옅게 변한", "희미한 잿빛 얼룩에 지나지 않았"지만 평생 그의 삶을 지배한 낙인이자 수치의 증표였다. 옮긴이의 해설은 조지 오웰은 떠난 뒤에도 악몽처럼 떠나지 않는 버마 생활의 기억을 떨치기 위해 소설을 써야만 했다고 전하는데, 자전적인 소설은 아니라지만 어느 정도 작가의 페르소나일 플로리에게 그래서 모반이 꼭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출간된 후 버마의 유럽인들에게 적잖은 공분을 불러일으켰다고 하는데, 식민지 유럽인들의 생활상과 원주민들에 대한 태도 등이 부정적으로 그려지기는 하지만 크게 과장됐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적지 않은 분량에 꽉 들어찬 당시의 사회문화적 현실은 흥미로웠고 대다수 인물들이 스테레오타입으로 묘사되기는 하지만 상황에 따른 내면의 갈등과 심경의 변화가 섬세하게 기술된 플로리를 통해서는 인간 탐구라고 할 만큼의 다채로운 입체성이 느껴졌다. 덕분에 처음 책을 집어들고 조금은 뜬금없다고 여겼던 뒤표지의 발문이 의외의 핵심을 담은 문장이라고도 생각됐고, 시공간을 초월하는 삶의 의미 같은 것에 대해 순한 마음으로 생각해보기도 했다. 이런 게 문학의 힘이라면 환영.

 

 

조지 오웰•공진호 옮김
특별 양장판 발행 2022.12.5, (주)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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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5. 14. 14:21

 

 

전혀 궁금하지 않았지만 한 사람이 시차를 두고 두 번째 추천했기에 못 이기는 척 투표한 결과 이번 달 모임 책이 되었다. ‘일베’는 많은 신조어들이 그렇듯 생겨난 맥락이나 대중화된 흐름을 잘 알지 못한 채 익숙해져버린 말인데, 그중 단연 문제적인 단어일 수 있겠다. 그럼에도 별로 궁금하거나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은 나의 게으름 때문일 것이지만, 갖은 부정적 함의를 흡수한 채 어떤 대명사처럼 쓰인 지 한참 지난 단어를 제목으로 내건 책이 출간된 건 비교적 최근이라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문제적이라는 강력한 인식에 비해 따로 고민해본 적도 아는 바도 없는 대상이어선지, 일베의 자장이나 파급력에 대해 저자가 전반적으로 과대평가한다는 느낌이 읽으며 지속되었다. 여성과 진보에 대한 혐오, 능력주의와 ‘공정’을 표방하는 ‘젊은’ 우익적 주장을 “일베의 현재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이 들었고, 일베 이후 유튜브 등 다양한 온라인 플랫폼에서 유사한 주장으로 더욱 영향력이 커진 집단이 등장했는데도, 이를 굳이 일베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은 논리 전개를 위한 환원주의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별로 내키지 않는 마음을 달래며 책을 읽기 시작했으나 소시적 피씨통신 유저로서, 그들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는 초반부는 의외로 흡인력 있게 읽혔다. 꽤 오래 나우누리며 천리안을 사용했지만 동호회 활동이 중심이었던 터라,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글을 쓰는 가장 강력한 동인이 ‘웃음’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기는 어려웠지만 말이다. 저자는 웃음을 ‘사이버 공간의 자본’으로 단정하고, 한국적 웃음 모델을 우월적 웃음(인종 차별, 소수자 비하 등 권력 관계 함의, ‘프로불편러’)과 대비적 웃음(권력 비판, 사회 풍자 등)으로 구분하며 일베의 계보를 설명한다. 단정적 전제에 갸우뚱하는 마음이다 보니 저자의 주장보다는 연원을 몰랐던 신조어나 온라인 현상의 맥락 등을 새롭게 알게 되는 측면이 더 흥미롭게 느껴졌고, 의구심과 수긍을 오가며 1장(일베의 계보: 사이버공간의 간략한 문화사)을 읽었다.

 

저자의 설명에서 의구심이 일었던 부분들. 범진보계열 정당 지지자를 진보 세력으로 보는 것 자체가 나이브한 관점이라고 느껴졌는데, 수구/보수 양당 구조 정치 현실에서 시민들 중에는 방어적/비판적 지지 의사를 가진 경우가 많고 사회/생활세계의 보수성은 이러한 정치적 선택과 별도로 보는 것이 더 온당하지 않을까? 다른 계량적/실증적 자료를 사례화하기 어렵겠지만,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쓰거나 기사에 댓글을 달만큼 적극적인 의사 표현을 하는 사람들이 온라인 사용자 전체에서 얼마나 비중을 차지할 것이며(물론 그러한 표현 자체가 여론의 근거가 되기는 하지만) 댓글의 내용을 당시의 인식으로 일반화하는 게 맞을까?

 

2010년 이후 한국 인터넷 담론장의 문제 관련, 당시는 유튜브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가 대중화되기 시작하는 시점이고, 포털에 비하면 소수일지라도 기존 인터넷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sns로 유저들이 이동하던 시기였는데 그러한 변수가 언급되지 않은 점이 의아했다. 일베 등장의 토양을 온라인 담론장의 조건에서만 찾는 것도 부적절한 느낌이었는데, 정치·사회·경제적 상황의 전반적인 보수화 및 극단화(박근혜 집권 및 탄핵), 경쟁과 양극화의 심화 경향 등 현실 세계의 변화도 중요하게 고려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디시에서 통용되고 일반화된 신조어들 중에 나도 알 만큼 보편화된 말들, 짤 드립 어그로 등의 급속한 확산은 미디어의 확대재생산이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또 ‘웃음’이 평범 내러티브와 만나 비윤리적 혐오로 변질/확장된 일베의 전제조건 중 하나는 사소할 수 있지만 회원가입이 불필요한 익명의 커뮤니티라는 점이 주요하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신상을 가릴 수 있지만 개인의 디지털 페르소나를 표방할 수밖에 없는 sns와 달리 일베에서 유독 극렬한 혐오가 창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치적 상황 변동과 더불어 그렇게 조성된 커뮤니티의 우편향 분위기에 더해 낮은 문턱과 익명성이 큰 작용을 했을 것 같은데 그에 대한 주목이 거의 없어서 의아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온라인은 이제 실제 세계의 일부라기보다 실제 세계를 다양한 매개물을 통해 반영하는 컨텍스트 혹은 실세계를 포함하는 또 하나의 더 넓은 우주 같은 것이라고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 형식의 공통성에 기반해 거의 무한한 내용을 살피는 느낌이어서, 저자가 언급하는 사건과 현상 들이 내가 살아온 동시대의 것들임에도 생소한 부분이 너무 많았고 이는 광범위한 매트릭스에 산개하는 사건과 현상 중 무엇에 관심을 두는지 여부에 따라 포착되거나 무화되는 오늘날 현존의 본질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80쪽에서야 ‘인터넷 남초 커뮤니티의 역사’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1장의 부제는 이것이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남성적 시각의 한계가 반영된 부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1장을 읽으며 저자의 문제의식과 내용 전개를 어느 정도 가늠하게 되었지만 본문에 해당하는 2장(혐오의 수치화: 2011~2020 일베 데이터 분석), 3장(일베적 혐오: 내부의 타자들), 4장(일베를 만나다: 각자도생의 ‘평범’을 꿈꾸는 이들), 5장(여성혐오와 능력주의: 일베만의 문제는 없다)을 읽으면서도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거나 설명이 미비하게 느껴지는 지점은 꽤 있었다. 94쪽에서 능력주의를 체화한 일베 이용자들의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태도가 앞으로 살펴보게 될 일베(적) 혐오표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라는 부분은 중요한 지점으로 생각됐지만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됐다. 142쪽에서 ‘ㅋ’을 하나만 쓰는 것이 상대방의 의도를 무시하고 나아가 명백한 비아냥이자 도발이라는 설명에서는, 공간과 연령에 따른 차이는 존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전혀 동의가 안 되어서 깜짝 놀랐다. 2장의 분석은 대단히 방대한 것이면서도 구멍 내지 오류에 대한 양해지점도 존재하는 데이터 분석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4장에서는 ‘일베’ 10명을 인터뷰하고 각 절의 제목을 ‘불안과 공포’, ‘응어리진 분노’, ‘수치, 순응, 그리고 평범 내러티브’로 붙였는데, 책 출간을 준비하며 새로 쓴 부분도 많겠지만 인터뷰 자체는 거의 7~9년 전 내용이어서 시의성이 떨어지는 느낌이었고 이전의 논문에서 과도하게 많은 걸 가져온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불안한 현대에서 거의 유일한 안정을 보장하는 사랑이라는 언급이 나오고, ‘로맨틱한 사랑에 대한 남성들의 기대’와 유사한 표현이 몇 번 등장하는데 정확히 어떤 의미로 쓰인 건지 이해가 잘 안 됐다. ‘평범 내러티브’라는 명명이 적절한 것일까 싶기도 했는데 5장과의 극적 대비 효과는 느껴졌지만, 과거 어느 시기에나 있었던 남성 청년 세대와 일베와의 차이를 내포하지 못한 개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5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장대호라는 인물이 내게는 낯설었지만, 그의 글들을 일베의 말들의 전형이라 규정/논증하고, 그 글이 자신의 거주지 방언일 뿐 자신의 글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은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297쪽에서 “일베의 말과 생각이 한 사람의 것으로 온전히 체화되었을 때 얼마나 반공동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파멸적인 사례다”라고 그에게 주목하는 이유를 밝히지만, 극단적인 사건으로 결과화된 한 사람의 특수성과 일베의 상징성을 과하게 합치시킨 느낌도 들었다. 사례가 ‘루저-백치-괴물로서의 일베라는 믿음을 강화’할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기가 ‘일베의 전형을 명징하게 직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밝히는데, 일베라는 넓은 스펙트럼에서 한 사례를 대표로 내세우는 것은 비약적 선택인 것 같고 특히나 그의 존재는 너무나 유별난 경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읽고 싶은 책이 아니어서 이렇게 삐딱한 태도의 독서가 이어졌고, 논문에 기반한 대중서임에도 나로서는 동의할 수 없는 지점이 종종 있어서 6장(결론: 차가운 열광의 확산과 일베적 정치의 탄생)을 읽으면서도 소소하고 허접한 마음의 반론은 이어졌다. ‘한국 산업화의 원천은 혐오였으며, 혐오자들은 국가가 그 발전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체계적으로 생산해낸 도덕적·정치적 산출물이다.’라는 주장에는 일면 동의가 되었지만 소외된 친절함과 386세대로 대표되는 저항하는 청년상에 대한 수치심이 분노를 격화시키고, 회피 혹은 순응이라는 행위 전략을 이끈 수치심이 타자화 과정에서의 동정심을 제거하여 ‘혐오 사회’의 문을 열어젖힌다는 주장은, 합당한 매개 없이 도약한 결론처럼 느껴졌다.

 

그들이 공감 능력이 없다기보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아닌 패자와 승자로 사태를 판별하고 승자에 공감 및 능력주의 신봉과 패자 혐오, 지배자 갈망을 내면화하기 때문에(‘전도된 공감’) 비도덕적이고 패륜적인 ‘차가운 냉소’의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 내게는 차라리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소위 ‘상식적인’ 수준을 훨씬 넘어선 ‘고인드립’이나 극도의 비윤리성을 집단적으로 수용하면서 웃음/냉소의 계기로 삼고 그러한 사실에 대한 성찰이 전혀 없는 것은 아무래도 익명성과 집단불감증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일베’ 유저들을 평범 내러티브를 내면화한 보통의 동시대인이라는 점에(일베의 보편성?) 주목하다 보니 이런 부분을 기각한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책의 후반부 363쪽의 ‘이준석이라는 정치인이 등장한 이래 10년이 지나는 동안 어떤 정치인, 논객, 학자도 이준석이 구사하는 일베적 내용과 형식과 비전을 파훼하지 못했다.’라는 부분을 읽으면서야, 떨어지는 시의성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출간된 이유를 알게 된 기분이었다. 일베가 곧 이준석 지지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혐오를 무기로 젊은 주요 정치인으로 부상한 그의 위험성, 그가 주장하는 논리의 저변에 자리한 ‘혐오의 자유’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한 권의 책으로는 적당할 수 있겠다는 수긍이랄까. 그러나 “‘혐오의 자유’는 어디서 시작되는가”라는 명확한 부제에 비해, 평범에 닿기 위한 개인적 노력에서 좌절하고 수치심을 자신의 몫이라 여기며 자신의 고통은 물론 타인의 고통도 억압하는 것을 정당히 여기는 일베의 멘탈리티에 대한 설명에서, 공격적인 혐오 확산과 극단화 지점으로의 도약에 대한 설명이 너무 빈약한 느낌이어서 많이 아쉬웠다. 물론 거대하고 부정적인 사회적 현상의 연원을 콕 집어 몇 가지로 정리하고 단언할 수 있는 학자는 없겠지만 말이다.

 

‘혐오’는 사전적으로 ‘싫어하고 미워함’이라는 의미의 단어인데, 소수자나 자신의 적대파에 대한 표현으로서의 ‘사회적 혐오’는 다른 층위의 의미로 변화한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혐오’라는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것인데 ‘혐오의 자유’만 문제인 것일까 싶기도. 나 역시 정치적 수구 세력들을 혐오하지만 그 감정을 일베와 같은 식으로 발화하거나 표현하지는 않는데, 이는 개인적 선택 내지 성향에 기인하는 것일까? 어쩌면 누구도 납득할 만한 답을 줄 수 없는 부적절한 의문일 수 있지만, 사실 내가 가장 궁금한 지점은 그 부분이었다. 더불어 진보/운동 진영이 일베/수구의 주장에 대해 ‘혐오’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것 이상의 사회적 설득력을 얻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부분에도 생각이 닿았다. 맥락과 사실관계, 역사 등을 종합해야만 제대로 납득할 수 있는 사안과 현상을 왜곡하거나 호도하지 않기 위해서는 늘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아닌 어떤 사안에 대해 골몰할 이유는 없으되 이슈가 되고 있다면 단순명쾌하게 자기 입장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에? 제도적 현실의 압력을 넘어서는 개인적 실천은 요원하고 정치적 올바름은 고루하고 골치 아프게 느껴지기 때문에? 사회운동의 장을 떠나온 자로서 민망한 질문이지만, 인간의 사회적 반응 행동 관련해서도 때로 궁금해지는 부분이기는 하다.  

아무려나 책 모임 성원으로서의 의무감을 길어 올리며 겨우 읽어냈다. 미시적이지만 공감 혹은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적지 않았으나 저자의 명석함과 해당 분야에 대한 박식함과 전문성에 비해 나의 이해와 논리적 반론 구성 능력이 너무 떨어지는 관계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에 대해 논리적으로 언어화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수시로 느꼈다. 그럼에도 제대로 다시 읽으며 숙고하고 싶은 열의는 없고, 책 모임의 겉핥기 습성상 집단의 힘을 빌어 이해를 높이거나 오해를 줄이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마지막으로 사소하지만 강렬하게 남은 인상은 ‘나가며’의 후반부와 ‘감사의 말’에서 일베가 좌절한 평범을 가장 고퀄의 수준으로 이룩한 저자 자신의 현재를 가감없이 드러낸 부분이었다. 갸우뚱하다가 약간 당혹스럽고 웃겼는데, 나로서는 아무래도 저자의 성별에 기인한 것이라는 편견을 거두기 어렵다.


김학준
2022.6.13초판1쇄 2022.7.12초판3쇄펴낸날, 도서출판 오월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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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