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3. 11. 13. 23:23



습관처럼 사서 책장에 모셔뒀던 조지 오웰 관련 책 중 하나, [오웰의 장미] 책 모임을 앞두고 읽었다. 프랑스의 르포르타주 작가 아드리앙 졸므가 2018년 여름 <르 피가로>지에 실었던 르포를 바탕으로 집필한 책이라고 한다. 작은 판형에 170쪽밖에 안 되는 책인데, 이전에 읽었던 해설서들에서는 알 수 없었던 알찬 내용과 현재적 영향에 관한 서술이 빼곡해서 큰 기대 없이 펼쳐들었다가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마침 여름에 오웰의 소설 네 권을 읽었고, 전날까지 [나는 왜 쓰는가]를 읽은 터라 그의 삶이 어느 정도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상태여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책은 서문 그리고 조지 오웰이 삶의 한 시기를 보낸 주요 장소에 방문하고 기록한 6편의 글, 저자의 해설격인 마지막 한 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는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 그리고 조지 오웰의 삶에 대한 짤막한 개괄과 저자의 평가가 담겨 있다. 2003년 이라크, 2007년 미얀마, 2017년 카탈루냐, 2018년 중국을 언급하며 조지 오웰 작품의 현재성을 실감하던 저자는, 2018년 <르 피가로>지의 연재 소재 요청에 그를 떠올리고 흔적이 남겨진 장소를 향해 길을 떠난다. “우파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지만, 국제주의 좌파에게도 오직 나라와 문화 속에서만, 어떤 사회적 틀 안에서만 자유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이론이나 보편적인 생각에 이끌리지 않고 견해를 세우기 전에 주어진 상황을 직접 경험하고자 하는 그의 신체적 욕구가 그를 남다른 사상가로 만들었”다는 오웰의 면모에 대한 저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조지 오웰, 이 시대의 영웅”이라는 찬양조의 제목에 살짝 일었던 긴장감은 간명하고 건조한 문체 덕에 사라졌다. 

 

“1. 이튼 칼리지 학생으로”의 배경인 이튼스쿨은 1440년 헨리 6세가 가난한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했고 지금까지도 국왕이 교장을 임명한다고 한다. 대체로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인 1,000명 이상의 교외 기숙생 ‘오피던Oppidan’과 별도로 ‘칼리저Colleger’라 불리는 70명의 학생에게 영국 왕실 장학금이 지급되는데, 1917년부터 1921년까지 재학했던 ‘왕의 장학생 에릭 블레어, KS(King's Scholar)’의 이름도 문서보관소에 남아 있다. 이튼스쿨 졸업생을 이르는 ‘올드 이토니언(Old Etonian)’이라는 단어가 있을 만큼 독보적 위상을 지닌 명문이지만, 엘리트 계급의 속물근성과 독특한 유동성을 겸비하고 학생들의 자유로운 활동도 인정되는 분위기의 학교라고 한다. 등록금 감면을 받고 입학한 세인트 시프리언스에서 어린 날 겪었던 자존감 상실과 억압적인 입시 준비, 약육강식과 차별의 경험을 긴 에세이로 남겼던 오웰은, 이튼 진학 후 학업보다 글쓰기와 토론 등 여러 특활반 활동에 매진했고 그 시절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남기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할 때 장학금을 받을 수 없었던 에릭은 여느 이튼 출신들과 달리 대학 진학 대신 식민지 제국 경찰로서 사회에 발을 내딛는다. 엘리트 양성소이자 반항아의 요람이기도 했던 이튼스쿨의 교내에는 2018년, “글을 잘 쓰지 못하면 잘 생각하지 못하게 되고, 잘 생각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이 대신 생각하게 된다.”는 오웰의 문구가 새겨진 흉상이 세워졌다고 한다.

 

“2. 제국의 더러운 일”에서는 1922년 11월, 열아홉의 에릭이 당도한 버마 곳곳을 탐색한다. 1903년 영국령 인도제국 벵갈의 모티하리에서 태어난 에릭의 모계는 과거 티크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던 프랑스인들로, 당시 버마에는 외가 친척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제국에 늦게 편입되고 1919년의 행정개혁에서도 배제된 버마는 영국 공무원들이 달가워하지 않는 지역이었고, 경찰청의 신입 하급 장교 신분이었던 에릭은 만달레이 경찰 훈련 학교에서 9개월간 부경감 후보생 교육을 받은 후 여러 임지를 거친다. 1925년 9월에 전근한 북부의 인세인은 “교수형”, 1926년 4월에 옮긴 모울메인(현재의 몰먀잉)은 “코끼리를 쏘다”의 배경이 되었다. 모울메인에는 외할머니와 외숙모가 살고 있었고 그 도시에서 꽤 알려진 사람들이었지만 오웰은 그에 관해 말을 아꼈다고 한다. 1926년 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발령 받은 버마 북부 이라와디강 좌안의 카타는 장편소설 [버마 시절]의 배경이자 에릭의 마지막 근무지였다. 

저자는 조지 오웰의 초상화가 걸린 한 카페에서 ‘카타의 오웰 전문가’ 뇨 코 나잉을 만난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금서였던 [버마 시절]을 한참 후에 읽었고, 아마추어 역사가로 변신해 1911년 식민 시대의 지도와 소설 속 장소들을 대조하는 작업을 통해 소설에 등장한 12채의 건물을 찾아낸 당사자다. 저자는 그의 안내로, 현재 경찰서장의 관사로 쓰이는 오웰이 살던 집을 방문하고 남아 있는 주요 장소들을 확인한다. 출간 당시 ‘카타’는 소송을 피하기 위한 출판사의 요구로 ‘카우크타다’(‘돌다리’ 혹은 ‘선창’이라는 뜻의 미얀마어라고 한다.)로 바뀌었는데, 카타에 새로 문을 연 호텔 중 한 곳의 식당에 ‘카우크타다’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세계적인 작가의 한 시절과 한 작품이 오롯이 담긴 장소에서 살아가는 후세의 열정적인 발견, 명성과 기념이 가져올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지역의 움직임, 거기에 공영방송 미얀마 tv가 조지 오웰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 이후 팬데믹과 군부 쿠데타를 거치며 카타는 어떤 변화를 맞이했을지 궁금하다.

저자는 카타에 세워진 아웅산 장군의 동상을 발견하고 독립 영웅이었던 그의 이중성과 버마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오랜 가택연금 생활을 했던 그의 딸 아웅산 수치 여사 그리고 지배층 교체에 가까웠던 1948년의 독립, 1962년 군사쿠데타로 시작된 군사독재, 1988년 8월 8일 ‘8888’ 항쟁과 실패 등 버마의 현대사도 짤막하게 소개한다. 한때지만 버마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며 동향에 관심을 갖고 관련 책도 읽고 했었음에도 전혀 몰랐던 군인과 정치권이 의존한 ‘점성가’의 존재와 저항이 시작된 날에 대한 ‘점성학적 길일’이라는 표현은 새롭게 다가왔다. 개연성 없는 단어 선택은 아닐 것 같은데, 서양인의 눈으로 볼 때 유독 도드라졌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사용된 걸까. 저자는 랑군에서 오웰의 책을 미얀마어로 번역한 투레인 윈을 만난 이야기로 글을 마친다. 청소년기에 [버마 시절]을 발견하고 매료되었던 그는 오웰의 수필집 번역을 막 마쳤다. 그는 제국주의에 환멸을 느꼈지만 피식민지인들을 미화하지 않으며 당시 버마 사회의 모습을 낱낱이 기록한 오웰의 정직성과 용기를 높이 평가한다. 

 

“3. 파리의 포도鋪道 위에서”는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경험하던 1928년 파리에서 에릭이 거했던 장소들을 찾는다. 책에 명기된 ‘코크도르 로’는 가상의 이름으로 현재는 파리 5구의 포드페르 로. 오늘날의 빈민들은 파리 외곽순환도로 건너편이나 넓은 교외 지역에 살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고 버마에서 돌아와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에릭은 가난한 이들과 매춘부, 부랑자 등이 엉켜 사는 파리 중심지 콩트르스카르프 지구에 위치한 트루아 무아노 호텔에 묵었다고 한다. 오웰은 이제는 없어진 싸구려 호텔에 묵으면서 영어 강습으로 푼돈을 벌고 프랑스어로 쓴 기고문을 발표하며, 에릭 블레어로서 작가의 삶을 시작한다. 벨 에포크의 낭만은 옛일이 된 파리에서 가난한 이들과 어울리며 사회를 탐구하던 에릭은 어느 날 가진 돈을 도둑맞아 거리로 내몰리고, 호텔 주방과 고급 식당 등에서 접시닦이로 일하며 관찰한 화려함의 이면을 기록으로 남겼다. 

1929년 말 지적장애인을 보살피는 일을 제안 받아 영국으로 돌아가지만 그 사이 일자리는 사라지고, 런던과 근교를 아우르는 떠돌이 생활은 1930년대 초까지 계속된다. [신부의 딸]에서 도러시가 경험하는 홉 따기와 도심 노숙 생활의 디테일한 세부들을 오웰은 짧지 않은 기간 몸소 겪었던 것이다. 저자는 작가로서의 잠입 취재나 참여 관찰을 넘어서는 오웰의 파리와 런던 생활에 대해, “자신의 편견들을 초극하려는, 사회계급의 장벽을 부수고자 하는 거의 자학적인 시도 같은 측면도 있었”다고 쓴다. 그 결과 오웰은 극빈자들에 대해 “당신이나 나와 같은 인간이며, 그들이 당신이나 나와 똑같지 않다면 그것은 그들의 생활방식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버마 식민지 경찰 생활에 대한 죄책감과 깨달음에 더해 오웰이 이 시기에 대해 설명한, 저자의 인용 글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나 자신이 제국주의에서 벗어나야 함은 물론, 인간에 대한 인간의 모든 형태의 지배에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다. 스스로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가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어졌다. 그들 중 하나가 되어 그들 편에서 억압자들에 맞서고 싶어졌다. 모든 것을 혼자 생각해야 했기 때문에 억압에 대한 증오심을 유난히 길게 끌고 갈 수 있었다. 당시에는 실패만이 미덕처럼 보였다.” 파리와 런던에서의 경험을 담은 책은 여러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한 끝에 1933년 1월에 빅토르 골란츠의 출판사에서 출간된다.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이 세상에 등장했고, 본명을 가린 이유는 가족의 명예를 위해서였다고 한다.   

 

“4. 노동자들 틈의 지식인”에서 저자는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의 배경이 된 맨체스터의 퇴락한 탄광 도시로 향한다. 20세기 중반까지 채탄과 철강공업으로 영국 중공업의 상징이었던 지역의 모습을 저자는 ‘사라진 문명의 풍경 같다’고 표현한다. 1936년 2월, 오웰은 ‘좌파 도서 클럽’ 총서 중 노동자 계층의 생활에 관한 책을 기획해 요청한 빅토르 골란츠의 제안으로 이곳에 온다. 거액의 선인세가 지급됐고 취재는 두 달간 이루어졌다. 책의 제목은 지역의 선착장을 해수욕장에 비유한 당시의 대중적인 농담에서 따온 것으로, 가난한 노동자 도시의 현실을 풍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오웰은 지역의 곳곳을 탐문하고 갱도에도 직접 내려가며 광부들의 노동과 삶을 관찰하고 기록한 1부에 더해, 당시 좌파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을 담은 2부로 책을 완성한다. 오웰의 작업이 못마땅했던 빅토르 골란츠는 자신의 견해를 담은 서문을 덧붙이고 개정판에서 2부를 삭제한다.

여전히 ‘근본적으로 노동도시’의 정체성이 남아 있는, 그러나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위건을 찾은 저자는 거리와 시립도서관 등 오웰의 흔적을 좇고 주민들을 만난다. 빈곤한 노동계급의 현실과 좌파의 위선을 고발했던 오웰의 책에 불만을 느낀 건 기획자만이 아니었다. 주민들은 오웰이 위건의 긍정적인 면을 외면하고 낙후하고 취약한 부분만을 찾아 선별적으로 부각시켰다고 생각했고, 그런 기류는 현재까지도 존재한다. “오웰은 심히 부당했고, 이 도시는 지금도 그 이미지 때문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그의 이름은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오웰은 마치 우리에 갇힌 원숭이들을 보듯 노동자들을 살펴보러 온 속물이었습니다.” 저자는 당시의 오웰과 그의 책이 선사한 낙인감을 기억하는 이들과 함께 성장한 1954년생 지역 역사가 토마스 월시의 말을 그대로 전한다.

오웰이 체류하던 당시 모습 그대로라는 시립도서관을 방문한 저자는 문서보관소 직원을 통해 2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의 퇴락과 1970년대 말 대대적인 폐광 등으로 지역 경제가 오랜 하향곡선을 그렸음에도 변치 않은, 몇 세대를 걸쳐 광부로 일했던 주민들의 자부심과 외부에 대한 경계심에 대해 듣는다. 영국 북부 노동자 도시의 독특한 지역색이기도 한 이 특성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른 위상과 평가의 변화도 크다. 시 의회 행정수반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그의 시대의 책’이며 그 시대는 지나갔다고, 결과적으로 “오웰은 위건을 지도에 올려놓았고, 그건 위건 시에 득이 되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2017년 위건 시민인 뮤지션 알렉스 그레고리가 오웰의 책 내용을 가사로 노래를 만들어 오웰의 양자인 리처드 블레어가 ‘오웰 협회’와 함께 위건을 방문하고, 이를 계기로 시 차원에서 만들어진 [위건 부두를 넘어서]라는 뮤지컬이 2018년 첫 선을 보였다고 한다.

위건 부두에 자리했던 ‘더 오웰’이라는 펍은 수년 전 문을 닫았지만, 오웰의 존재감은 위건 곳곳에 적당히 남아 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작가로서 오웰에게 첫 성공을 안겨준 책이었는데, 저자는 오웰이 위건에서 얻은 중요한 또 하나로 반파시스트적 사회주의 세계관을 지적한다. 정치 이론의 권위가 아닌 직접 경험으로 자신의 견해를 세우고 움직였던 오웰이 영국 파시스트 연합 집회에 참석한 곳이 바로 위건이었고, 몇 달 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참전한다. 

 

“5. 총구 끝의 사상”은 1936년 말부터 6개월가량 오웰이 POUM(통일노동자당)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스페인 내전의 배경지로 향한다.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와 여러 에세이를 통해 인간과 전쟁 그리고 전체주의 등에 대해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바르셀로나에 처음 도착해 느낀 해방감, 부대 생활에서 경험한 동지애, 전장의 혹독함과 권태, 적진의 군사 역시 같은 인간이라는 깨달음 같은 것이 개인적인 소회였다면, 좌파의 분열과 위선 그리고 진영을 가리지 않는 전체주의의 패악은 이후 그가 오랫동안 천착하는 주제가 되었다. 총상을 입었지만 회복하고 돌아온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반역자가 되어 있었고 수배를 피해 변장하고 프랑스로 피신하는 것으로 스페인 내전 현장을 떠났다. 

저자는 스페인 내전과 관련된 당시의 국제 정세와 스페인 내부의 여러 상황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관련된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흥미롭게 전한다. 바로셀로나행 기차를 타기 위해 들른 파리에서 만난 [북회귀선]의 작가 헨리 밀러가 오웰의 참전을 말리다 실패하자 자신의 벨벳 재킷을 주었고, 오웰은 스페인 체류 내내 그 옷을 입고 지냈다. 에릭 블레어라는 식료품상으로 병적을 등록했던 오웰이 군사교육을 받을 때 신병들을 촬영했던 아구스티 센텔레스라는 사진작가는 공화파가 패배한 후 프랑스로 피신해 남부 카르카손에 필름을 숨겨두었는데, 1979년에 되찾은 덕에 오웰의 스페인 내전 시절 모습이 사진으로 남았다. 오웰이 속한 부대의 대대장 조르주 코프에 대한 소개와 다음 장에서 후세로까지 이어지는 인연,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는 아라곤의 ‘오웰 도로’와 공화파 진지에 대한 묘사, 참호를 발견하고 복원작업을 주도하며 [오웰, 우에스카에서의 커피 한 잔]이라는 책을 출간했다는 빅토르 파도르와의 인터뷰 등 많은, 나로서는 처음 접하는 이야기들을 저자는 전한다.

스페인에 가본 적이 없지만 여행이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접했던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를, 이 부분을 읽으며 무척 새롭게 느꼈다. 저자는 현재는 기능과 외관이 완전히 바뀌었지만 오웰의 체류 당시에도 있었던 도심의 여러 건물들을 당시의 상황과 함께 설명하며 격세지감 속에서도 역사의 흔적을 소환하려 애쓴다. 결국 “오웰의 국제적 명성을 고려할 때, 세계적 관광명소인 이 도시에서 오웰에게 바치는 경의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고 쓰지만 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싸워야 하고, 싸우기 위해서는 자신을 더럽혀야 한다. 전쟁은 악이지만, 대개는 최소한의 악이다.” 저자도 인용한, 스페인 내전을 회고하며 쓴 오웰의 글 일부다. 굳이 감수하지 않아도 될 위험을 자처했던 작가의 진정성과 위대함이 느껴지지만, 참 어려운 문장이다. 

 

“6. 주라 섬의 로빈슨 크루소”에서 저자는 [동물농장] 출간으로 유명 작가 반열에 오른 오웰이 1946년부터 몇 년간 머물며 [1984]를 집필했던 스코틀랜드 이너헤브리디스 제도 주라 섬의 반힐을 찾는다. 주라는 정기적인 연락선이 없는 외진 섬으로 주변의 아일레이 섬에서 주라 섬의 크레이그하우스 마을로 가는 페리를 탄 후, 마지막 10km의 흙길을 포함해 50km를 더 가야 반힐에 닿을 수 있다고 한다. 아내 아일린이 사망한 후 어린 아들을 키우며 조용히 창작에 매진하고 싶었던 오웰은 <옵저버>지 편집장 데이비드 애스터 덕분에 이곳으로 이주했는데, 당시 런던에서는 가려면 이틀이 걸렸다고 한다. 

저자가 찾은 반힐은 오웰이 체류할 당시 주인의 후손이 관리 중이었고, 농가와 주변 환경은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외진 섬에서도 외진 곳에 위치해 물자가 부족하고 편의 시설도 없었는데, 오웰은 이곳에서 직접 농사와 사냥을 하면서 생활했다. 아들과 시간을 보내고 하루의 일상을 기록하고, 스모그 가득한 런던과는 달리 오염되지 않은 공기를 마셨다. 아들과 조카들과 나간 소풍에서 물살에 휩쓸려 고립되었다가 극적으로 구조되기도 하고, 결정적으로는 [1984] 집필에 몰두하면서 건강을 해치게 되어 결국 섬을 떠나게 되지만 말이다. 

접근성이 좋지 않은 곳이지만 ‘오웰 협회’는 매년 이곳을 방문해 오웰의 흔적을 둘러보고 죽을 고비를 맞았던 소용돌이를 체험하기도 한다. 저자도 이들의 순례에 동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총무는 어릴 적 이곳에 살았던 아들 리처드 블레어 그리고 주최자는 스페인 내전 시기 오웰 부대의 대대장이었던 조르주 코프의 아들 쿠엔틴 코프라는 점이 흥미롭다. 저자는 주라 섬이 오웰의 명성을 이용해 무언가 하지 않는 점을 높이 사며, 1984년에 한 증류수 제조사가 특별 위스키 양조통에 소설의 제목을 붙인 정도가 전부라고 전한다. 오지에 가까운 장소여서 더 그럴 것 같은데, 노령인 리처드 블레어와 쿠엔틴 코프 이후에도 ‘오웰 협회’의 다정하고 열정적인 방문은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튼스쿨과 미얀마, 파리 도심과 위건, 스페인과 주라 섬까지 오웰의 대표적인 장소들을 순례한 저자는 마지막으로 “7. 모든 것이 오웰적이다!”라는 짧은 글에서 세계 각국의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오웰의 현재적 영향과 좌우 진영을 막론한 다양한 재해석과 추종의 경향 등을 일별한다. 그중 2017년 11월에 오웰이 라디오 프로듀서로 근무했던 런던 BBC 건물 앞에 동상이 세워졌는데 직원들의 흡연 장소로 주로 이용되던 곳이라는 점이 재미있었고, 런던 정도면 언젠가 나도 한 번은 가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져 반가웠다. 그리고 마지막 문단에서 “오웰의 지속적인 영향력은 그가 취한 입장들보다는 언어의 명쾌함과 높은 정직성 덕분입니다. 그는 열린 태도로 사실들에 임했고 주저 없이 견해를 수정하곤 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는 보기 드문 자질이죠. 그는 자신이 취한 이념적 입장이 자신에게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눈으로 본 것을 썼습니다.”라는 쿠엔틴 코프의 말을 옮기며, “어쩌면 우리는 그저 오웰을 읽고 또 읽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지도 모른다”고 책을 끝맺는다.

 

짧은 책 내용을 너무 많이 옮기고 인용해서 민망하지만, 그만큼 흥미롭고 기억하고 싶은 대목이 많았다. 자신의 감상이나 소회 대신 해당 시공간과 관련된 여러 인물을 인터뷰하며 다양한 견해와 사실을 전달하는 서술 방식이 깔끔했고, 버마와 스페인 등에서는 소설만으로는 알 수 없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짤막한 역사적 설명도 추가되어 더 좋았다. 다양한 진영에서 수용하고 끌어들이는 오웰의 보편성과 현재성을 잘 느낄 수 있었고, 영국이나 유럽에서는 널리 알려졌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신선했다. [나는 왜 쓰는가]에서 아내가 사망한 뒤 입양한 아이를 버릴 것이라는 주변인들의 예상과 달리 성심껏 돌봤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어서, 오웰 사후 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했는데 책 덕분에 해소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내용도 문체도 군더더기 없이 간명하고, 저자의 감정이나 입장이 강조되지 않아 잘 읽히는 책이었다. 저자의 개성이 도드라지지 않지만 오히려 그게 장점으로 느껴졌고, “M에게”라는 헌사 그리고 6줄에 불과한 감사의 말에서도 느껴지는 일관성도 매력적이었다. 본문에 사진이 한 장도 없는 건 아쉬웠지만 책이 마음에 들다 보니 그마저 단정한 느낌이었다.  

 


아드리앙 졸므•김병욱 옮김
2020.11.6첫판1쇄, (주)뮤진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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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11. 12. 23:45

 

 

1931년부터 1948년 사이에 발표된 조지 오웰의 에세이 29편을 시간 순서대로 엮은 책이다. 각 글이 시작되는 쪽에 집필 시기와 발표 지면, 당시 작가의 사정과 사회적 배경 등이 간략히 정리되어 있고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과 지명 및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한 내용에 각주가 달려 있어 읽기의 이해를 돕는다. 빽빽한 활자들 사이에 간헐적으로 삽입된 사진들은 낮은 해상도에도 불구하고 나름 작가의 일대기를 아우르며 생생한 이미지를 전한다. 앞표지 책날개에는 ‘오웰의 에세이 전작 가운데 일부를 옮긴이가 선별하여 묶었’지만, ‘편역’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조지 오웰의 에세이집은 내가 갖고 있는 것만도 너덧 권은 되는데, 제목 때문인지 이 책이 한국에서 출간된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 다른 책을 읽다가 관련된 부분을 발견하거나 필요할 때 부분적으로 읽어보곤 했었는데, 이번 달 모임 책이 [오웰의 장미]로 정해진 터라 작정하고 읽었다. 

 

첫 수록작인 “스파이크”는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도 담긴 내용이어서 재회의 반가움 같은 것이 일었다. 주린 배로 종일 거리를 걷고 해질녘이면 노숙보다 나을 바 없는 구빈원 숙소에서 밤을 보내는 런던의 가난한 이들 그리고 그들과 같은 입장의 작가가 이채로웠던 기억과 함께, 이번에는 빈곤 못지않은 “무위”의 고통에 대해 기록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버마 시절의 경험을 담은 “교수형”에서 교수대로 호송되는 사형수가 물웅덩이를 피해 걷는 장면의 묘사는 그 자체를 하나의 유명한 에피소드로 알고 있었던 터라, 이게 오웰의 글에서 나왔던 거였나 싶어 새로웠다. 한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리는 행위의 반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본질에 대해 문득 깨닫고 “그리하여 사람 하나가 사라질 것이고, 세상은 그만큼 누추해질 것”이라고 단언하지만 곧 아무 문제없이 임무를 완수한 이들이, 나 역시 크게 웃으며 일종의 동지애를 느끼는 듯한 상황으로 글은 마무리된다. 같은 시기를 배경으로 한 “코끼리를 쏘다”에서는 절대다수인 식민지인들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제국주의자의 본질과 운명이 극적으로 드러나는데, 1인칭 화자로서 기술하면서도 자신의 사고와 행위를 객관화하는 냉철함이 ‘오웰스럽게’ 느껴졌다. 

 

모든 에세이가 자전적인 경험에 바탕한 견해와 주장을 담고 있는데, 절반가량은 당대의 전쟁과 관련되고 특히 직접 참전한 스페인 내전 그리고 스탈린의 소련 및 그를 지지하는 유럽 사회주의 세력의 기만과 위선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조지 오웰은 1903년에 태어나 1950년에 세상을 떠났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의 1차 세계대전과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2차 세계대전이 그의 생애와 겹치고 1936년부터 3년간의 스페인 내전 중 6개월을 직접 경험했다. 생각해 보면 그의 삶에서 평화로웠던 시기는 “정말, 정말 좋았지”의 배경인 세인트 시프리언스 예비학교 입학 이전의 짧은 아동기에 불과했을 것 같다. 표제작인 “나는 왜 쓰는가”에서 밝힌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은 그의 작가적 소명으로 널리 알려진 구절이고, 역자 후기의 발문으로 인용된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라는 구절 역시 그의 글쓰기의 단단함을 보여준다. 한편 산문을 쓰는 네 가지 동기로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 등을 언급한 같은 글에서, 스페인 내전으로 자신이 선 자리를 명확히 인식하기 이전의 딜레마를 드러내는 자작시가 인상적이었다. 조지 오웰이 기반하고 지향한 정치적 글쓰기가 당위적이고 자동적인 무엇이 아니라 작가적 양심과 헌신의 소산이라는 점이 새삼 느껴졌기에 말이다. 

 

조지 오웰이 발표한 수많은 에세이 중 일부를 추려 묶는 일에는 역자의 편향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대체로 익숙하게 알려진 작가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내용들이었지만, 읽으며 새롭게 인지하게 된 부분들도 적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 8월에 맺어진 독소불가침조약의 함의 그리고 오웰의 사상적 독자성과 면밀성을 보여주는 애국주의와 평화주의 등에 대한 견해가 특히 그랬다. 러시아 혁명과 소련 체제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를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으로 전락시켰는지를, 그럼에도 계급적 대의와 운동의 명분을 지킨다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것들이 눈감아지고 조직적으로 은폐되었는지를 전장에 직접 뛰어들어 경험하고 이후에도 변함없는 현실 속에서 지치지도 않고 발언하는 그의 모습은 눈물겨울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좌든 우든 나의 조국”이나 “영국, 당신의 영국”, “민족주의 비망록” 등에서 내놓는 매우 세심하고 현실적인 분석은 감탄스러웠고, “물론 유치하긴 하지만, 나는 너무 ‘계몽’되어서 가장 일상적인 정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좌파 지식인처럼 되느니 그런 식의 훈육을 받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정작 혁명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움찔하며 물러서는 이들은 국기를 보고 ‘한 번도’ 가슴이 두근거려본 적이 없는 바로 그 사람들인 것이다.”라는 부분에서는 좀 울컥했다. 

 

이전에 그의 소설들을 읽으며 구체적인 사회상의 기초가 되는 역사적 배경지식이 없어서 놓치는 부분들에 생각이 미쳤었다. 배경지식의 부족은 맞는데, 어차피 내가 살지 않은 시공간의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기 어렵지만 어떤 글을 잘 이해하고 싶다면 면밀하고 정치한 작가의 글을 잘 읽어내기 위한 독자의 성의와 상상력이 관건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 쉴 곳을 찾아서]의 곳곳에 언급되는 공습과 전쟁 연습을 연상케 하는 묘사들을 약간 이례적이라고 느끼면서도 무심히 넘어 갔던 무신경함이 떠올라 살짝 민망해지기도 하고 말이다. 생각해 보면 조지 오웰의 많은 글들이 양차 대전 사이 빈곤에 처한 이들 그리고 전운이 감도는 사회 분위기를 공통분모로 삼고 있음에도, 그에 대한 사회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대신 작가가 던져놓은 유머에 낄낄대며 인물과 서사를 따라가기 바빴던 것이다. 얼마나 갈지 모르지만, 일단 반성한다. 그리고 좀 뜬금없지만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에서 무척 와닿은 한 구절을, 정반대로 살고 있지만 나를 위해 옮겨둔다. “남을 위해서 살 것이면 ‘남을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 우회적으로 자신을 위하는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 

 

내가 처음 읽은 조지 오웰의 책은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워낙 유명해서 안 읽었지만 읽은 것 같았던 [동물농장]과 [1984]는, [위건 부두로 가는 길]과 [카탈로니아 찬가], [버마 시절]을 읽고 비로소 조지 오웰에 매료된 후에야 뒤늦게 읽었던 것 같다. 작년에 현암사에서 나온 소설 전집 덕분에 오랜만에 다시 그의 작품들을 읽고 나자, 몇 년 전 그의 책들을 몰아 읽으며 빠져들었던 기쁨이 떠올랐고 기대하던 [오웰의 장미]를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오웰의 장미]를 읽기 전 이따금 펼쳐보며 묵혀뒀던 이 책을 먼저 읽은 건 잘한 일이다. 예전에 읽었던 작품들의 세부 내용은 당연히 희미해졌지만, 연대기 순으로 실려 있는 에세이들은 시간이 흐르며 어렴풋하게 남겨진 책들의 기억과 인상을 환기하고 때로 아주 잊고 있던 것들을 되살려주었다. 역자 후기의 제목인 “언어의 타락과 오늘의 글쓰기”를 방향타로 작가 조지 오웰의 문적을 최대한 담아내려 애쓴 책이라고 느꼈다. 길지 않은 인생, 참 바지런하게 읽고 쓰고 움직이며 살았던 정직한 작가의 글을 읽으며, 역시나 일신의 안락과 쾌락만 탐하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조지 오웰•이한중 옮김

2010.9.15초판1쇄 2018.11.19초판16쇄 발행, 한겨레출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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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10. 15. 02:05



갈수록 추천된 몇 권 중 차악을 선택하게 되는 모임의 10월 책이었다. 함께 추천된 다른 책이 신간이어서 도서관에서 빌리기 어려울 것 같아 한 표를 던졌지만 영 내키지 않았다. 별로 읽은 게 없으면서도 심리학 관련된 책에 관심이 없기도 하고, 제목을 떠올리면 묻어두고 살았던 모멸의 기억이 환기되는 것 같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모임을 하는 한 책을 다 읽는 건 기본이라는 책임감으로 펼쳐든 책장, 헌사 첫 부분 “자신의 정신적 고통을 과감히 드러낼 용기를 지니며”에서부터 거리감이 느껴졌고(왜 드러내야 하지?) 머리말 “오늘도 모멸감에 시달리는 당신에게”를 읽으며 흥미가 떨어지고 저항감이 들었다. 모멸감을 느낀 적은 있지만 ‘오늘도 시달리고’ 있지는 않은데, 이 책을 읽으려면 그런 상태여야만 할 것 같은 불쾌한 기분도 밀려왔다.

 

본문을 시작하며 소개하는 2장의 여섯 가지 사례는 비교적 잘 읽히고 서두 부분보다는 나았지만, 이 책이 다루는 심리적 고찰의 중심이 되는 ‘사적 생활 환경 속 인간들 사이에서 맺어진 관계’가 전혀 없는 내게는 별로 와닿지 않기도 했다. 60쪽 전후, 자신을 피해자로 위치짓는 모멸의 당사자가 지원군을 찾고 편을 만들고 하는 식의 행위는 너무 극단적이고 이 정도면 “모멸감이 만드는 감정의 폭풍”이 아니라 치료받아야 되는 병적 상황 아닌가 싶고, 일반적으로 모멸감을 느꼈다고 이렇게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싶어 이상하게 여겨졌다. 91쪽 “피해자 역할을 두고 벌이는 이 경쟁과 같은 비참한 운명을 ‘훈장’으로 여기는 상황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라는 부분에 이르자 책을 그만 읽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이 겪은 모멸감을 드러내고 공동체 내에서 반응 행동이나 타인에 대한 비난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당연히 그렇다고 가정하는가? 저자가 자신의 일과 삶의 배경을 너무나 보편적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내가 살아온 배경과 환경이 표현에 너무 인색하거나 혹은 감정을 감추는 데에 익숙했던 것인가? 내게 배우자나 연인 같은 물리적으로 친밀한 관계의 상대가 없기 때문인 것인가? 이 책을 읽어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진한 저항감과 얕은 반론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모멸감은 불쾌감, 수치감과 어떻게 다른가? 모멸감이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 무겁고 큰, 돌이킬 수 없는 낙인 같은 느낌인 데다 곰곰 생각해봐도 정확히 어떤 감정을 뜻하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되어서 어학사전을 찾아봤다. * 모멸감侮蔑感: 업신여김과 깔봄을 당하여 느끼는 수치스러운 느낌, * 업신여기다: 교만한 마음으로 낮추어 보거나 하찮게 여기다, * 깔보다: 만만하고 다루기 쉽게 여기어 얕잡아 보다. * 불쾌감不快感: 마음이 거슬리고 언짢은 느낌, * 수치감羞恥感: 자신의 잘못이나 약점 따위로 인하여 부끄러운 느낌. 불쾌감이나 수치감과 사전적 의미가 다르고, 은연중에 받아들이게 된 감정 역시 다르다는 건 알겠지만,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모멸감'이라는 단어의 분명한 정체는 모르겠다에 가깝다. 신기한 것은 侮(업신여길 모)와 蔑(업신여길 멸)이라는 두 개의 자동사가 합쳐져 피동의 의미가 되는 단어라는 점.

 

아무려나 고역의 전반부를 지나니 중반부터는 그래도 전보다 읽을만 해졌고, 관계의 당사자들을 가해자, 피해자, 구원자 등으로 나누지 않고 모멸감에 대해 다루는 점은 신선했다. 고통이나 모멸감을 신체화하는 언어 표현이 부정적 감정을 증폭하거나 현실을 왜곡하는 효과에 대한 지적 그리고 욕구 대신 소망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타인 혹은 자신에 대한 바람이 즉각 충족되어야만 한다는 전제 혹은 집착을 완화하는 효과 등도 기억할 만한 부분이었다. 저자의 설명에서 중요한 것은 모멸감은 대부분 상호작용 과정에서의 '해석'이 문제시된다는 것, 언행 당사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상대가 모멸로 받아들이고 감정에 빠져들수록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문화적 틀에 크게 기인한다는 것이다. 서두에서 마지막까지 ‘우리 문화’를 강조하는 부분이 종종 등장하는데, 저자의 주장대로 독일에서 유독 ‘가해자-피해자’ 구도가 강력하고 뿌리 깊다면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책에서는 사적 관계에 국한했지만 현대 사회가 아니라 ‘우리 문화’를 꼽은 데에는 나치즘의 영향도 있는 것일까?

 

후반부에서는 모멸감을 줄일 수 있는 행동 양식 등에 대해 제안하는데 15장에서 모멸 현상이 일어났을 때 당사자들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솔직히 너무 작위적으로 느껴졌고 대단히 지적인 사람들이거나 심리학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과연 전문가의 개입 없이 가능할까 싶어졌다. 16장에서 설명하는 모멸을 유발하지 않고 민감성을 줄이는 방법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는데, 거칠게 정리하자면 세뇌와 최면, 명상과 수련에 가까운 느낌이어서 역시 사람/마음의 일에 다른 대안은 없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물론 내게 달라져야 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되새겨볼 만한 이야기들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맺음말에서 심리치료사의 역할에 인간의 고통에 기여하는 문화적 현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이 포함된다는 말은 인상적이었고, 다 읽은 후 돌이켜보니 관계와 심리를 다루면서도 문제적 상황에 봉착한 개인에만 초점을 두지 않은 점은 괜찮았던 것 같다. 주리를 틀며 읽을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본문의 구성 방식도 한 몫했다. 주요 서술, 여담, 인용, 각주, 미주, 괄호 속 안내(때로는 한참 뒤의 내용을 참고하라는) 등 본문이 너무 여러 차원으로 산만하게 정리되어 있어 읽을 때 집중이 안 되고 정신이 없었다. 여담 부분의 글자를 초록색으로 표기한 것도 가독성 떨어졌고, ㅇ로 표시한 각주는 본문의 ㅇ표시를 너무 흐리게 처리해 가끔은 찾아 읽느라 불필요한 에너지를 써야 했다. 책이 타겟으로 삼는 독자가 모멸감 등 관계의 고통으로 스트레스 상태라면, 이런 부분에 대한 고려도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책을 읽으며 원래 제목이 뭐였을지, ‘모멸감’이라는 단어가 독일어에서도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일지 궁금해지긴 했다. 관계에서 주고받는 감정의 해석으로 자신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문제를 다루는 저자가 강조하는 것 중 다른 하나는,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이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단어에 꽂힌 의문이 무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언젠가부터 불쾌감이나 수치감 같은 단어를 대체(?)하는 느낌의 ‘모멸감’이라는 키워드가 회자되는 이유가, 여러 겹의 스트레스로 일상이 힘든 이들을 향한 심리학이나 자기계발서 출판계의 마케팅 결과는 아닐까 하는 불손한 상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아무려나, 다 읽고 나니 읽는 과정에서 느꼈던 고통스러움은 어느 정도 상쇄되고 새겨볼 만한 이야기들이 남기는 했다. 어떤 책이든 끝까지 읽고 나면, 잠시나마 마음과 시간을 내어 관계 맺은 결과로 내게 남겨지는 부분이 있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지간히 회피 성향인 내게는 부작용도 남았는데 나의 모멸감과 관련된 지난 사건과 인물의 기억이 환기되었다는 점. 지난 일이라는 생각을 따로 할 일이 없을 만큼 뇌리에서 지우고 살고 있었는데, 책을 읽고 모임을 하며 별로 달갑지 않은 기억이 소환되었다. 책에서 이야기한 '반추'의 부정적 의미를 책 덕분에 실감하고 있는 셈. 요즘 책 모임 참 애매하다.



프랑크 M. 슈템러 지음•장윤경 옮김
2022.7.1초판1쇄인쇄 7.8발행, 유영(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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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9. 23. 23:23

 


"책머리에" 작가의 두 번째 문장이 “나는 10시쯤 눈을 뜬다.” 였다. 일요일의 기록이었지만 6시나 7시쯤 눈을 뜨는 사람보다는 가깝게 느껴져 일단 호감. 그다음엔 책이 “나의 강박증을 어떻게든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시도에서 쓴 작품”이며 “어떻게 이 애정이, 무관심과 비애 그리고 아주 지독한 증오로 주기적으로 바뀌는 감정의 사이클을 모두 견뎌내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일까?” 라는 자문과 “팬이 된다는 것에 관한 책”이라는 서술에서 마음이 열렸다. 축구에 관심 없고 경기 중계를 제대로 본 적도 없는 내게는 이 책을 읽어내기 위해 축구가 아닌 다른 키워드가 필요했는데 이 정도면 되겠다 싶어졌다. 9월의 모임 책이어서 마주하게 된 무관심한 분야에 관련된 두꺼운 책이었는데, 읽기의 부담을 덜어주는 도입부였다.

 

축구와의 사랑이 시작된 1968년 9월 14일, 즈음의 작가는 별거하던 부모가 이혼하고 이사한 작은 집에 문제가 생겨 이웃집에 얹혀 살던 중학생이었다. 축구팀 아스널의 홈구장 하이버리는 이혼하고 따로 사는 아버지와 아들이 주기적으로 만나 시간을 보내기에 적합한 장소였고, 누구나 겪는 성장통에 누구나 겪지는 않는 가정사를 감당하며 자라나는 소년에게 펼쳐진 새로운 세계였다. 차원이 다른 몰입감으로 축구에 빠져들면서 극대화된 ‘고통으로서의 오락’ 개념(“바로 그 개념이 내 인생을 형성해주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나는 좋아하는 것들-축구는 물론이거니와 책이나 음반도-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대한다는 비난을 들어왔고, 후진 음반을 듣거나 내게 큰 의미가 있는 책을 미적지근한 태도로 대하는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분노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24p)이 작가의 기질 그리고 삶의 과정과 결합해 축구와 일체화된 독특한 일생으로 승화된 듯 했다. 20년 넘도록 축구와 함께한, 동일시와 의미부여 끝판왕의 남다른 일대기는 간략히 연도와 기간이 표기된 세 장의 본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1968~1975", 열한 살의 첫 번째 직관부터 성년이 된 열여덟 살 시절까지를 기록한 첫 장은 축구와 더불어 명랑과 우울을 오가는 성장기다. 이혼 후 새 가정을 꾸려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아버지는 사춘기 아들을 위해 구하기 힘든 경기의 입장권을 마련해 함께하고, 어머니는 아직은 위험할지 모르는 원정 축구 관람을 당사자도 의아할 만큼 어렵지 않게 허락해준다. 부모의 배려와 지지 속에서 남부럽지 않은 아스널 팬으로서의 역사를 쌓기 시작한 소년의 정체성은 아스널과 하이버리와 축구장 팬 문화와 더불어 형성되어 간다. 대체로 폭력적이고 혐오발언을 일삼는 열성 축구팬들의 행태를 때로는 관찰하고 때로는 휩쓸리지만 과거의 거대한 참사를 알게 되고 '작은' 폭력을 직접 겪으며 자신만의 응원 방식과 철학을 정립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인생에 드리운 그늘과 컴플렉스, 다양한 감정과 고충을 소화하면서 성숙해가는 소년에게 축구의 모든 것이 삶과 사회를 이해하는 거대한 배경이자 자양분이 된다.

 

소년은 1975년 10월 4일, 경기장에 함께 간 사촌 동생 마이클을 통해 자신의 지난 모습을 반추하며 "축구여, 안녕" 나름 감상적인 작별 인사로 축구장을 떠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른이 된 작가에게 6~7년을 열광했던 아스널과 축구와의 이별은 조금 슬프지만 유년기를 마감하는 당연한 수순처럼 느껴졌고, 바로 다음 챕터에서는 "제2의 아동기"라는 제목으로 열 달만에 자연스럽게 해후한다. 1년 가까운 권태기의 원인은 아스널의 부진한 성적과 진부한 플레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신상의 변화, 운명적인 재회의 이유는 새로운 감독의 부임과 여러 가지 신상의 변화였다. 대학 시험을 치르고 입학 전까지 런던 근교에서 일을 하고, 공립학교 출신이라는 점이 메리트가 되어 케임브리지에 입학하고, 졸업 후 런던에서 4년간 외국인에게 영어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도 계속된 '축구와 삶'이 두번째 장인 "1975~1986"에 담겨 있다.

 

마지막 "1986~1992"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된 '축구와 삶', 자칭 '아스널 사이코'(281p)로서의 일상이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 '아스널과 축구'가 일순위인 작가의 특별함은 어떤 소수성처럼 권리로서의 위상을 획득한 느낌, 가족들도 친구들도 직장에서도 그 특수성을 인정하고 양해하는 수준에 이른다. 함께 아스널을 응원하지만 경기와 관련해 어떤 상황에서든 작가보다 더 슬플 수는 없다는 것을 상호 인지하는 여자친구가 존재하고, 아스널 홈 구장인 하이버리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집을 구해 마음껏 분노하고 분석하며 경기를 즐기는 작가의 모습은 묘하게 흐뭇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초판 본문의 마지막 글은 1992년 1월 11일 경기와 관련한 것이고, 말미에 2011/12 시즌에 대한 소고가 특별부록으로 실려 있는데 리그의 변화와 과거에의 향수, 세월이 흐른 만큼의 안정감 정도를 빼면 달라진 건 별로 없는 느낌이었다. 아, 마지막 글에서 “하이버리에서 마지막 시즌이 시작될 때 클럽은 시즌 티켓 소지자들에게 내 책인 [피버 피치] 특별판을 증정했고”(412p)에서는, 대성덕에 대한 존경을 담은 마음의 박수를 보냈다. 작가는 지금도 여전히 하이버리 한 구석을 지키며 일상을 보내고 있을까?

 

축구에 대해 전혀 모르는 독자로서  ‘축구는 내 인생’인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는 쉽지 않은 독서이기는 했다. 장거리 버스 이동 때가 아니면 낮잠을 전혀 안 자는 편인데 읽다가 잠드는 신선한 경험이 보태졌다. 포지션의 특징이나 경기 룰, 등장하는 선수들과 팀들과 리그 등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보니 특정일의 경기 중심으로 서술되는 이야기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축구 자체에 관한 부분에서는 지루함이 몰려왔고 '글자만' 읽을 수밖에 없었다. 본문이 끝나는 381쪽까지 등장하는 수많은 선수들 중 들어본 이름은 펠레뿐이었고, 2010년대 초를 다룬 특별부록 편에서도 티에리 앙리, 웨인 루니, 리오넬 메시 정도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작가는 본인이 소화할 수 있는 만큼만 쓰는 미덕과 균형감각의 소유자인 듯, 궁금했던 현대 영국의 사회경제적 분위기 같은 것은 별로 엿볼 수 없었지만 다행히 유머와 필력은 훌륭해서 축구 자체에 대한 부분을 빼면 재미있었다.

 

체감상 분량의 10% 정도인 축구 외적인 부분, 그러니까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기도 했다. 좋아하는 일에는 좋은 것만 있지 않다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면서, 갖은 우여곡절 속에 배신감과 실망을 겪으면서도 꺾이지 않는 좋아하는 마음이 새삼 궁금해졌다. 어떤 면에서는 감정적으로 실질적으로 비실용과 비효율의 집합인 좋아하는 일이, 때로는 인생의 반전을 만들어내지만 대체로는 그저 자기만족일 뿐인 그 일이, 내용과 형식은 변화할지언정 대다수에게 계속되는 이유가 뭘까. 우리는 그 무엇으로든 삶의 시간을 채워내야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과 무의미와 권태보다는 좋아하는 무언가에 돌진함으로써 얻는 희노애락과 그로부터 파생된 감정과 상황과 우연들을 정교화하면서 의미를 찾는 것이 인간에게는 필수불가결한 것일까. 물론 대다수 사람에게 적용할 수는 없는 패턴일 테고 정도의 차이도 크겠지만 말이다.

 

순정과 인내 부문에서 작가에 비할 바 아니지만, 나 역시 누군가를 무언가를 참 많이 좋아하고 그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어서 느껴지는 공감이 있었다. 다만, 거의 처음으로 축구의 멋진 점과 축구 관람의 매력을 언급하고 ‘전 세계의 중심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309p)을 설명하며 반례로 든 것들에는 수긍하기 어려웠다. 뮤지컬이나 콘서트 등은 계속되니 축구 경기와 같은 일회성은 없다고 했는데 축구처럼 상대편과의 상호작용에 따라 어떤 전개와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는 정도는 아니겠지만 라이브 공연의 특성상 매 공연마다의 고유성은 분명 존재한다. 어린 시절 지하 소극장 콘서트에서 같은 공연을 보고 또 보면서도 매번이 달랐던, 지금 여기여서 가능한 작은 세상의 벅찬 충만감 같은 것이 떠올랐다. 읽으며 축구에 대해 가장 긍정적으로 또 단정적으로 서술한 부분으로 다가왔는데, 그 매력을 굳이 다른 분야와 비교하며 설명해야 했을까 싶어 아쉬웠다. 

 

본문에 자주 등장하는 '신나다'를 거의 '신 나다'로 표기해서 잊을 만하면 의아해졌는데, 길지 않은 "옮긴이의 말"에서 91/92시즌이 “자국 리그의 부흥을 위해 대기업의 자본을 끌어들여 ‘프리미어리그’를 출범시키기 직전”이었다는 짧은 설명이 책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주제에 집중하는 작가의 자제 덕에 본문에서는 다른 설명이 없었는데 초판이 집필된 1990년대 초반이 신자유주의가 세계의 새로운 질서로 자리잡고 거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면서 스포츠 또한 더욱 상업화의 극단으로 재편되는 시기였다는 점이 상기되면서, 1990년대 초반 이미 과거의 향수에 젖어 있던 팬에게 집필 당시의 변화는 꽤 의미심장한 변곡점이었겠구나 싶어졌다. 나이를 먹으면서도 성장하지 않아도 괜찮은(?) 어느 한 부분을 남겨두는 일, 작가만큼은 아니지만 내게는 노래와 영화가 그런 셈이다. 어린 시절 잠깐씩은 함께 즐기는 동호인이 있었지만 무엇을 좋아하든 거의 혼자인지 한참인 터라, 오랜 아스널팬으로서 대체로 혼자가 아닌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는 작가가 부럽기도 했다. 책 모임이 아니었다면 읽을 일 없었을 책, 좀은 버거웠지만 마음의 접점에서 피어오르는 생각들이 적지 않았다.

 

 

닉 혼비•이나경(임지현: 특별부록) 옮김
2005.2.3.1판1쇄 2014.1.15.2판1쇄, (주)문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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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9. 3. 15:57

 

 

베트남, 방글라데시, 네팔, 미얀마, 스리랑카, 필리핀 출신 이주활동가들을 인터뷰한 구술 기록을 엮은 책이다. ‘차별에 맞서 삶을 일궈내는 이주활동가들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대표 저자격인 이은주는 책 출간의 계기와 문제의식 등을 서술한 서문에서 “부끄러움과 반성으로 시작한” 작업이었다고 고백한다. 

 

이주노동자의 한국 이입 역사가 30년을 넘었고 그사이 차별적인 정책과 제도에 저항하는 당사자들의 조직과 투쟁이 명멸했으며 지금도 곳곳에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한 세대가 성장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주노동자의 온전한 자리는 없고, 그들의 존재감이 가장 크게 드러나는 때는 혹독한 노동과 극심한 차별의 피해자로서 부각될 때다. 그럼에도 많은 제약을 감내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권리 침해에 취약한 이주노동자들의 곁을 지키는 이주활동가들이 도처에 존재하고 있다.

 

책에는 그들 중 여섯 명의 사연이 담겨 있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에 두 페이지 정도의 간략한 소개글, 후에는 한국에 오게 된 사연과 한국 사회에서의 노동과 삶, 현재의 활동에 대한 구술이 입말로 기록되어 있다. 인터뷰이 대부분 20대 초반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에 와서 지금보다 전반적으로 열악했던 현장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했다. 20년 이상 한국에서 생활하며 이주활동가로 성장한 과정은 다르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 성공한 이주노동자로서의 모국 귀환 대신 자신과 동료들이 처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삶의 방향을 전환한 인물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인과 결혼하고 국적 취득에 개명도 했지만 끝나지 않은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며 후배 이주민들과 함께하는 활동에 매진하는 김나현.  
기회를 찾아 온 한국에서 고된 노동과 모든 것을 건 투쟁으로 청춘을 보내고, 노동조합 활동과 영화 작업을 통해 이주노동의 현실을 기록하고 질문을 던지는 마문.  
한국에서 10년간 체류하며 미등록 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요구하는 투쟁에 앞장서다가 2004년 강제 출국된 이후 네팔노총에서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이주노동을 떠나지 않아도 되는 네팔을 만들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샤말 타파.  
미래가 보이지 않는 고향을 떠나온 한국에서 위험한 노동 환경을 경험하며 오랜 미등록 생활을 견디고, 단체 활동을 통해 이주노동자 조직과 지원 및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헌신하는 또뚜야.  
산업연수생 체류를 마친 후 미등록으로 일하기 시작한 대구 성서공단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노동조합의 4년차 전임 활동가로 살아가는 차민다.  
모국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중 신변의 위협을 피해 입국한 한국에서 필리핀 이주노동자 공동체를 조직하고 권리를 위해 투쟁하며 자신의 신념을 따르는 놀리. 

 

이주노동이 사회경제적 성취와 안정된 미래를 위한 가장 유력한 선택지인 아시아 국가의 현실을 배경으로 이들은 오래 전 한국에 왔다. 제도의 세부가 바뀌어도 이주노동자를 값싼 노동력으로만 인식하는 점은 변치 않은 한국 사회가, 이들을 이주활동가로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한 사람이 성인으로 성장할 만큼의 기간 동안 일하며 살아도 안정적 정주의 방법은 한국인과의 결혼뿐인 배타적인 조건에서, 여러 어려움을 딛고 정착한 이들의 경험과 삶이 성공이 아닌 연대의 서사로 기록될 수 있었다는 점이 소중한 것 같다.    


이은주 ․ 박희정 ․ 홍세미
초판1쇄펴낸날 2023.4.3, 도서출판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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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8. 20. 00:30

 


“인간의 흑역사”라는 주제와 범주가 너무 방대하고, 특정 시대나 지역이 아니라 그야말로 전 지구적 인류사 전체에서 장별 테마에 해당하는 사례들을 임의적으로 기술하는 식이어서, 그런대로 흥미롭기는 하지만 무척 산만한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인간이 바보짓을 반복하는 원인으로 든 것은 대체로 뇌 활동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데, 깊이 생각하지 않고 손쉬운 판단을 내리는 편법이라고 할 수 있는 '휴리스틱', 그와 관련된 '확증 편향', 이들이 누적되고 집적되어 일어나는 '집단 사고' 등의 인지적 편향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복합적 작용으로 인간은 자만심과 탐욕에 기반해 미래에 대한 '소망적 사고'를 하고 '현실 회피' 또한 곁들여진 의사 결정을 하기 때문에 분별력을 잃고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반복된다는 것. 그렇게 다 함께 망하는 사례가 도처에 비일비재한 '공유지의 비극'이며 기후위기로 대표될 수 있을 것 같다.

 

서양 백인 남성이 중심인 기술의 한계를 프롤로그에서 밝혔지만, 예로 든 사례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서구에 치우치지 않은 점이 좋았다. 농경이 인류가 위계와 탐욕에 눈뜨고 전쟁을 일삼으며 공멸을 향해가게 되었다는 관점은, 저자의 독보적 견해는 아니고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를 참조한 것이었지만 과문한 독자의 마음에 느낌표를 남겼다. 농경과 가축 사육을 통한 정착 생활을 인류가 문명을 일구기 시작하는 초석으로 교육받았고 계급 지배와 전쟁은 그로 인한 것이라기보다 인간의 역사에서 당연한 듯 별개로 인식했던 점을 새삼 깨달았달까. 17세기 초 오스만 제국의 무스타파 등 황제들의 이야기는 영화 [3천 년의 기다림]을 떠오르게 했고 찾아보니 정말 그 에피소드가 맞아서 반가웠고, 유럽에서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배경에 흑사병 창궐과 오스만 제국의 부상으로 육로가 막혔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 것 역시 반가웠다. 물론 당시 과학 기술의 발전과 미지의 땅에 대한 인간의 모험심과 정복욕이 맞아 떨어진 것이겠지만 말이다.   

 

언급했던 내용들을 같은 맥락과 선상에서 비교하며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는 인간의 특징을 강조하는 몇몇 부분은 억지스럽게 느껴졌고(216p 1998년 NASA의 화성기후궤도선 추락과 1492년 콜럼버스의 계산 실수 비교 등), 각 장의 말미에 덧붙인 '탑 랭킹'은 마주할 때마다 의아했다. 객관적 위상이나 공신력 있는(그런 게 있을 리도 없겠지만) 자료도 아닌 듯하고 그냥 저자가 임의로 정한 걸로 보이는 내용을 서너 줄의 정보로 가볍게 다루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고, 특히 9장의 “과학 연구로 죽은 과학자 Top 6”은 이게 농담조로 언급할 이야기일까 싶어 읽으며 매우 불편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1888년 시카고의 한 감리교 선교단체의 ‘순회형 헌금함’이 ‘행운의 편지’의 탄생이었다는(255p) 부분이었는데, 영국이 아니었다니, 진심 놀랐다. 나름 흥미로웠던 부분은  우생학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음을 알려주는 프랜시스 골턴에 대한 일화들, 지금도 이어지는 메탄올 중독을 떠올리게 만든 유연휘발유 발명과 확산에 기여한 토머스 미즐리의 이야기,20세기 전후 많은 과학자와 발명가들이 자신들의 발명품(다이너마이트, 기관총, 자동발사기관총, 비행기, 무선통신 등)이 전쟁 종식에 기여할 거라고 믿었다는 사실 같은 부분이었다.

 

단편적 요약의 사례들이 새롭고 흥미로운 경우도 많았지만 그야말로 단편적이고 너무나 많은 사례가 등장해 수박 겉핥기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책의 성격상 불가피한 부분이라고 느꼈다. 그보다 더욱 불가피한 점은 크게 위트 있게 느껴지지도 않는 사견들, 에피소드 하나 나올 때마다 따라붙는 “여기서 우리가 건질 교훈은...”, 본문 서술 중 ( )로 부연한 실없는 농담 등으로 인한 몰입의 방해였다.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면 저자가 자신의 필력에 과도한 자신감을 가진 듯 느껴졌는데, 나름 참으며 읽다가 “미안하지만 이 장은 이 책에서 그리 재미난 부분이 아니다.”(162p)에서 실소와 함께 짜증이 폭발하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희한하게도 그 이후부터는 내용 집중에 방해가 되는 의미없는 유머와 ‘교훈질’이 확 줄어든 느낌이어서 혹시 번역자나 편집자도 비슷하게 느꼈던 걸까 싶기도 했다.

 

마지막 '감사의 글'에서 비욘세, 케이트 블란쳇에 데이비드 보위의 유령까지 언급한 걸 보면서, 썰렁한 유머의 내면화는 저자 자체였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강력한 독후감은 이런 류의 책이 계속 출간되고 뒤표지에 따르면 엄청난 화제와 인기를 구가하는 이유가 뭘까 하는 점이었는데, 누구나 무언가를 깊이 알고 싶어하지는 않고 그야말로 너르고 얕은 지식이 선호되는 시류가 전 세계적이기 때문일까? 8월의 모임 책이어서 읽기는 했는데, 단편적으로 몰랐다 인상적이었다 식으로 언급하는 정도 말고는 나눌 이야기가 별로 없었다. '인간의 흑역사'가 궁금한 이들을 위한 마중물 같은 책을 염두했다면 그렇구나 하겠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대부분의 사례들을 가십처럼 다뤄야 했을까 의아하기도 하다.   
 

톰 필립스•홍한결 옮김
2019.10.10초판1쇄, (주)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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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7. 31. 05:34



글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인용 구절과 작가의 이름과 책의 제목이 등장한다. "책은 내가 들고 온 슬픔이 쉴 자리를 반드시 만들어 주었다"고 적은 저자가 살아오는 동안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문장들일 텐데, 그 글을 쓴 이들에게도 이 책은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 많이 무겁고 충격적이기도 한 이야기를 부담스럽지 않은 밀도와 온도에 유머까지 곁들여 써낸 문장가는 이전에 무척 독실한 독자였겠구나, 책 말고는 기댈 데 없는 절박한 시간들이 길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싶었다. 

 

결과적으로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다시 곱씹게 되는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가족과 성장기, 학교와 직장 생활, 짝꿍과의 만남과 결혼 생활, 투병 등 온통 저자의 개인적이고 내밀한 사연들로 가득한 책이다. "들어가며"를 집중해 읽었음에도 본문 첫 번째 글의 첫 문장을 마주하고는 나도 모르게 취재 내용인가 생각했는데, 간명한 선언처럼 시작된 개인사에 담긴 희로애락의 파고는 상당했다. 출판된 책이니 기록된 만큼은 언급해도 괜찮겠지만, 읽었답시고 인상적이었던 내용들을 내 말로 옮겨 적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느끼는 것 자체가 대상화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30대를 전후해 몇 년간 판이하게 다른 두 지역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며, 이 다른 세계가 동시대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나 다른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서로를 마주칠 기회가 있을까 생각하면 새삼스럽고 막막할 때가 있었다. 몇 달 전 [쇳밥일지]를 읽으면서도,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 시절에 느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가난과 결핍은 시기나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은연중에 과거 혹은 옛날의 어떤 상태로 간주하는 무신경함. 세계는 당연히 늘 수많은 다름들로 구성되는데, 내가 둘러싸인 물리적 조건과 작은 범위의 경험 속에 갇히고 마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무척이나 두터운 인식의 벽인 것 같다.   

 

저자의 많은 인용구들을 읽으면서 글이란, 책이란 참 신기한 것이란 사실과 다시 만났다. 무수히 쏟아져나오는 책들 중 어떤 구절은 누군가의 마음에 각인되고 한 시절 생의 무게를 나눠지는 거대한 공감의 우주가 되기도 하는, 잊고 지냈던 마법을 기억해낸 기분. 어쩔 줄 모르는 헛헛한 마음을 달래주던 어린 날의 책들 그리고 서울 떠날 결심을 굳히고 딴에는 용기와 위로를 되새기며 자주 읽었던 백석 시인의 "선우사"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어떤 책도 읽기만 하면 지금의 나를 비춰주고 무언가를 건네주는데, 갖은 자극으로 산만해진 나태한 마음과 정신이 무의식 중에 그런 만남을 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많은 책들이 쏟아져나오고 단기간의 요란한 추천과 홍보에 이어 무화되어 버리는 듯한 신간에 심드렁한 마음이 될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 특별한 호기심의 상대가 아닌 이의 개인적인 에세이들을, 단기간의 집중적인 홍보에 혹해 샀다가 읽으며 피로하다고 느끼는 경우도 있었다. 트위터 타임라인에서 작가의 계정과 신간 소식을 본 기억이 있는데 트위터에 잘 들어가지도 않게 되면서, 사뒀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출간 직후의 소란스러움은 출판사로서는 불가피한 것이겠지만, 온라인에서 두어 번만 마주쳐도 시끄러운 거리감을 느끼는 내게는 적정한 시기의 독서였던 것 같다.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떠올리며 딴에는 용기와 위로를 되새기던 머지 않은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고, 헛헛한 마음을 달래주던 지난 시절의 책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한 사람의 마음에 각인되고 어떤 시기에는 생의 무게를 나눠지기도 하는 많은 인용구들이 처음이면 처음인 대로, 이전에 책에서 읽었을 텐데도 새로우면 새로운 대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누구나 많은 일을 겪으며 살아가지만, 이 책은 더욱 '살아가는' 중인 당사자만이 직접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었다. 어떻게든 길을 만드는 사람,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의 글이 주는 힘을 오랜만에 느꼈다. 

 

 

장일호
2022.12.4.처음찍음 2023.2.6.네번찍음, 도서출판 낮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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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7. 28. 00:33

 

 

앞서 읽은 두 권의 책이 복잡한 마음을 안겨준 부분이 있었는데, 언뜻 실용서 같은 이 책을 읽으며 조금 편안해졌다. 무슨 주제와 연결되든 ‘상담’에는 관심이 없고 별로 신뢰하지 않는 편인데 이 책을 산 이유는 올초까지도 이어진 매월 책 구입 중독과 작가에 대한 어렴풋한 기대 때문일 것이다. 그의 책을 읽은 건 [쓰기의 말들]뿐이지만 말이다. 나는 글을 열심히 쓰거나 작가의 꿈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지만,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마음까지 부정할 수 없음을 책을 읽으며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잘 쓰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잘 듣고 잘 읽고 잘 생각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당장은 모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냥 사는 사람은 없다", 아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마 잊고 살고 있었던 것 같고, 강력하고도 새롭게 다가왔다.   


은유
2023.1.2.1판1쇄인쇄 1.9. 발행,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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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7. 24. 02:30

 

예전에 다큐멘터리 [보테로]를 인상 깊게 보고 그에 관한 책을 찾아 읽었었다. 마약 카르텔의 중심에서 환골탈태했다는 그의 고향 메데진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마침 신간이 눈에 띄어 반가웠다. 개인적으로 '마약왕 에스코바르'는 이름 정도나 들어봤을 뿐이지만 "마약의 수도는 어떻게 전 세계 도시의 롤모델이 되었나?"라는 부제가 붙은 걸 보면 무지한 내가 느끼는 그의 영향력과 위상은 생각보다 대단한 것인 것 같았다. 꽤 기대하며 선택한 것에 비하면, 책은 보고서 형식의 무미건조한 서술로 채워져서 별로 재미가 없었고 생각지도 못했던 방해 요소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터라 때로 불쾌했고 결국엔 씁쓸한 느낌이었다. 하여 250쪽밖에 안 되는 책을 지루함과 불퉁한 마음을 다스려가며 끝까지 읽어내느라 다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무려나-

 

메데진은 보고타에 이어 콜롬비아에서 두 번째 큰 도시로, 안데스 산맥 중부 아부라 계곡에 들어선 안티오키아주의 주도라고 한다. 2020년 기준 약 257만 명이 살고 있고 아부라 계곡 대도시권으로 확장하면 인구는 약 373만 명. 커피 등 농업 생산 중심이었던 도시의 주력 산업이 20세기 중반 이후 제조업으로 바뀌면서 인구가 늘기 시작해 대도시화되었고 콜롬비아 최초의 메트로폴리탄 건설 계획인 '메데진 마스터플랜(MMP)'를 통한 개발이 이루어졌지만 급격한 인구 폭발과 비공식 정착지의 무분별한 확장을 행정력이 따라가지 못했다고 한다. 하여 도시 인프라 부족으로 아부라 계곡 인근의 자연재해가 대형 참사로 이어지는 일이 많았고, 특히 1980년대 전후부터는 산업 기반이 붕괴한 도시에 빈곤과 실업, 폭력이 만연하면서 지역 자체가 마약 카르텔과 반군의 온상이 되었다고.

 

그 시기 코카인 거래 시장을 장악하고 전 세계적인 마약왕으로 등극한 에스코바르는 메데진에서 복지와 자선 사업을 펼치고 가톨릭교회 재정에도 기여하며 '빈민들의 로빈 후드'라는 별명을 얻고 1982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인물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범죄 사실을 폭로하고 비난한 법무부장관을 암살하고 테러를 일삼던 중 정부에 부채 탕감과 사면을 거래하다 실패하자 스스로 수감되었고, 이후 탈주해 은신하다가 1993년 최후를 맞은 곳 역시 메데진이었다. 마약왕에서 정치인으로, 희대의 대형 범죄를 일으키고 극적인 최후를 맞은 안티 히어로로서 에스코바르의 존재감은 사후에도 건재했다. 드라마 등 대중문화 콘텐츠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낭만적으로 미화되기도 하고, 메데진 곳곳에 남은 그의 흔적은 다크투어리즘으로 관광객을 끄는 자원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에스코바르가 활동할 당시까지도 주민들에게 마약 밀매는 범죄라기보다 사업의 하나로 여겨졌다고 하는데, 무정부 상태의 빈곤 속에서 생존이 최우선 과제가 된 이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2000년대 이후 시작된 메데진의 변화를 이끈 이들은 주로 정치인과 전문가 들이었다. 책에서 첫손에 꼽는 이들은 수학자 출신으로 2004년부터 시장과 안티오키아 주지사를 역임하고 2022년 대통령 선거에 도전한(1차 투표에서 4.18% 득표로 8인의 후보 중 4위, 궁금해서 찾아봄) 세르히오 파하르도와 건축가 알레한드로 에체베리. 파하르도는 사회적 불평등과 폭력의 해결책을 개인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공간 즉, 공공 장소에서 찾고 도시의 물리적 구조 개선을 주장했다. 그는 "도시가 가장 가난한 지역사회에 빚진 사회적 부채를 해소할 방법으로 '교육'을 내세우고"(45p) 재임 시기 투자 예산의 52%를 교육 관련 프로그램에 할당했고, 새로운 인프라와 건축 사업을 교육의 일환으로 간주했다. 이 내용은 '통합 도시 프로젝트'를 위한 시 정부의 개입 부분에서 다시 한 번 유사한 표현으로 등장하는데, 기억하고 싶은 문구여서 옮겨둔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도시의 '사회적 부채'인 사회적 불평등"(132p)

 

사회적 격차를 해소하고 주민의 존엄성 회복을 꾀하는 구상의 실행을 담당한 건축가들 중 대표격인 알레한드로 에체베리는 파하르도가 시정의 핵심 철학으로 삼은 '사회적 도시계획' 전략의 창안자였다. 그는 "도시의 변화가 사람과 함께 그리고 사람을 위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49p)하고, "존엄성과 자부심의 문제는 개입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도시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 최고의 품질을 지닌 건축물을 세우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문제죠."라고 말하는 건축가다. 저자는 이에 더해 메데진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로 "지역 사회에 자극을 줘 주변 지역을 되살리고 생기가 돌게 하는"(53p) '도시침술'을 강조한다. 메데진의 '사회적 도시계획'과 도시개발 프로젝트는 이후 시정 권력 이동에 따른 여러 가지 부침을 겪지만, 메데진은 201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도시 계획과 정책 분야에서 혁신적인 사례로 손꼽히는 '셀럽시티'로서 지속적인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메데진의 변화를 교통, 주거, 교육, 공공장소, 문화, 지식, 테크놀로지 등 여러 측면에서 살펴본다. 전체적으로 낙후하고 불균등 발전을 보이는 도시의 교통 정책에서 우선순위는 걷기, 자전거, 대중교통, 택시, 자가용 순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세계 최초로 메트로케이블이라 불리는 케이블카를 대중교통 수단으로 만든 것인데, 2004년 K라인 개통을 시작으로 현재 6개 노선이 완공되었다고 한다. 계곡에 위치한 도시 지형과 고지대에 밀집해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의 이동성을 고려한 케이블카의 대중교통화는, 빈민가 지역의 낙인 효과를 줄이고 소득을 창출하며 지역 중심부와의 연결성을 높이는 효과도 가져왔다. 수용 인원의 제한성과 러시아워의 과밀 등 한계도 지적되지만, 수력 발전을 이용한 전기를 활용하고 인근 건물들의 차량 접근을 제한해 오염을 줄인 친환경적인 시스템으로 평가받는다. 애초 구상 단계에서는 정치적 냉소와 위험을 감수할 보험 계약자 확보의 어려움에 직면했던 프로젝트가 도시의 변화를 이끌며 꾸준히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메데진 대중교통의 인프라는 메트로, 가선 트램, 트란비아라 불리는 노면전차, 전기버스, 간선급행버스, 메트로케이블 등 다양한 수단의 유기적 연결로 '통합 이동성 네트워크'를 구성해 생태적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이에 '보편적 기본교통' 시스템으로서의 공공 자전거 엔시클라 그리고 산자락 마을들이 분포한 산하비에르 지역에 2011년 설치된 6개의 야외형 에스컬레이터는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상징적인 교통수단으로 거론된다. 교통 혼잡과 대기오염이 심각한 도시 중심부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차 없는 날', 부제 운영 시스템 '피코 이 플리카', 정기적으로 도로를 폐쇄해 임시적으로 주민들의 신체 활동 공간으로 전용하는 '시클로비아' 등 다양한 정책들이 활용되고 있고, 장기적으로 2030년까지 자전거가 대도시권 전체 교통량의 10%를 담당할 수 있도록 하는 목표도 설정하고 있다고 한다. 문외한 입장에서도 획기적으로 느껴지는 정책들인데, 무엇보다 대도시의 정책 입안이 신속성과 효율성이 아닌 생태와 취약자 친화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메데진의 변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공공 공간은 주민의 교육과 만남, 문화예술과 여가와 체육 활동 등을 위한 다양한 공간이다. 도서관 공원, 교육 공원, 문화센터, 맨발의 공원, 생태공원, 연결형 생활공원(우바) 등으로 소개되는 곳들 중에는 과거 감옥이나 갱단의 거점 등 부정적인 역사를 품은 건물을 개조하거나 그 부지에 들어선 경우도 있어 공간의 의미에 포용성을 더한다. 산크리스토발 지역 서쪽 외곽에 위치해있다는 페르난도 보테로 도서관 공원은 개인적으로 관심이 더 갔는데, 브로셔 수준의 짧은 설명이 아쉬웠다. 저자는 최근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도시에 대한 권리'를 처음 제창한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의 "도시 거주자는 국가 단위의 멤버십인 국적에 기초한 권리와 무관하게,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125p)는 말을 인용하는데, 여전히 기본권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또다른 권리의 이름으로 배척되고 호도되는 현실과 '새롭게 주목받는' 권리 목록과의 거리와 긴장에 대해 생각이 미치기도 했다.

 

이 책이 관심이 간 이유는 보테로 때문이었는데,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많지 않다. 다큐에서도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서술되어 있어 기념으로(?) 옮겨보자면 "콜롬비아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조각가인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의 청동 조각상 <새>를 둘러싼 일화도 흥미롭다. 1995년 6월 야외 콘서트 도중 산안토니오 광장의 조각상 아래에서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해 230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참사가 발생했다. 좌파 게릴라 그룹인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이 평화 협상에 응하지 않던 당시 국방장관 페르난도 보테로 제아Fernando Botero Zea를 응징하는 대신 그의 아버지인 보테로의 작품을 파괴하면서 벌어진 테러였다. 보테로는 폭력에 저항하면서도 메데진 시민들이 이 사건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작품을 파괴된 채로 보존해 광장에 두기를 원했다. 그리고 몇 년 후인 2000년, 같은 형태의 작품을 다시 제작해 시에 기증했다. 오늘날 산안토니오 광장에는 테러 희생자 명단이 바닥에 새겨져 있고, 두 마리의 청동 새가 <평화의 새들>이란 이름으로 나란히 서 있다. 그는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그림에 정치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걸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런 예술가들의 힘과 열정 덕분에 메데진이 오늘날 마약과 폭력, 살인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151p)

 

메데진의 변화에는 정치와 행정, 전문가들의 역할 못지 않게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인 지역에서 살아가는 예술가와 주민들의 기여 역시 컸다. 일상적인 폭력에 지역의 아티스트들은 예술을 통해 저항했고, 메데진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의 10% 이상이 발생하는 곳이었던 산하비에르 지역에서는 야외형 에스컬레이터 설치로 물리적 환경이 개선되기 이전부터 지역의 젊은이들이 주축이 되어 지역사회를 바꾸기 위한 벽화 활동이 활발했다. 특히 힙합 활동가들은 빈민가의 청소년들에게 랩과 춤, 그래피티를 가르치는 비폭력 저항의 메신저였는데, 그러한 파급효과 때문인지 2009년 이후 산하비에르 지역의 힙합 아티스트 10명이 갱단에 살해되는 비극도 있었다고 한다. 현재 메데진에는 5개의 힙합 학교가 있고, 그중 아랑훼즈 지역에서 콜롬비아의 가장 유명한 그룹 중 하나인 크루 펠리그로소스가 운영하는 학교의 학생 600명 중 40%가 십대 소녀들이라고 한다. 힙합 학교가 운영되면서 이 지역의 살인율이 80%나 감소했다는 사실도, '삶을 향한 힙합'이라는 모토로 교육과 평화를 위해 빈민가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존재도 놀랍고 감동적이다. "지역 주민들은 우리를 히트맨(암살자), 마약 중독자, 방랑자의 동의어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길을 건넙니다. 거리를 건너와 우리를 맞이하고 우리를 이곳의 변화에 도움이 되는 주체로 생각합니다."(164p) 당연하게, 하루아침에 그리 된 것이 아니라니 더욱.

 

이외에도 콜롬비아의 대표적인 볼거리 중 하나인 메데진 꽃 축제와 여러 이벤트, 대안 노벨상이라 불린다는 '바른 생활상The Right Livelihood Award'("세계 문제의 근본 원인에 대한 비전과 모범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용감한 사람들과 조직을 존중하고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 175p)을 수상한 40년 이상 지속된 '메데진 국제 시 축제' 그리고 기술과 산업을 선도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혁신지구와 교육센터 등이 메데진의 변화를 이끄는 요소들로 소개된다. 현재진행형 이슈 중 하나인 팬데믹과 기후위기 관련한 도시 계획 및 현황, 보고타에서 시작되어 메데진에서도 정책화한 시클로비아 운영에 대한 설명으로 책은 마무리된다. 에필로그에서는 도시학자의 입장에서 "메데진의 그늘과 남은 과제"를 살피며 현장의 목소리를 세세히 듣지 못한 한계와 더불어, 본문에서도 한 차례 언급했던 2019년 세계시장포럼 참석자들과 산하비에르에 방문했을 때 1인 시위자가 들고 있던 팻말 속 "시장은 현실을 보여달라" "현실을 숨기지 말라" "집도, 먹을 것도, 직장도 없다" "시장은 이런 사람들이 오면 우리를 숨겨두려고만 한다"는 내용을 환기한다.

 

몰랐던 내용이 많았지만, 그 어떤 정책에도 사각지대 그리고 탁상과 현장의 괴리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며 읽었다. 두어 차례의 방문과 정부 및 관계기관이 발간한 보고서와 홈페이지의 내용 등이 주요 자료였을 테고, 그러한 정책 수행 과정에서 메데진에 수여된 각종 도시와 혁신 관련 상과 헌사 들은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근거로 기능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러 프로젝트들에 대한 많은 설명에서 '주민 참여' 항목이 강조되지만 '일반 주민'의 목소리는 별로 접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읽으면서도 들었는데, 도시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보고서에 가까운 책이었으니 그러려니. 전체적으로는 기술과 자본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쓰이는, 이러한 결정과 실행이 가능한 정치와 행정이 어느 정도는 지속가능한 동시대의 시공간을 확인하는 신기함이 가장 컸다. 실질적 무정부 상태를 경험한 적 없는 시민으로서, 살인과 폭력이 횡행하며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지역의 주민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일일지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그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나서는 이들이 꾸준히 있고 잠정적으로 권력을 획득하는 게 가능했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반가웠던 것 같다.

 

그러나 머리말에서부터 언급되어 마음이 불편했는데 중간중간 거듭되다 후반부에는 사진에까지 등장해 불쾌함으로 책을 덧씌운 전 서울시장의 존재감이 너무 컸다. 도시학자로서 저자의 활동 이력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점은 알겠으나 책을 펼치자마자 헌사의 대상으로 이름이 거론되는 건 무방비상태에서의 충격이었다. 사회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서의 치적이나 개인적 친분을 감안하더라도, 불특정다수의 독자들을 전제한다면 이 자체가 2차 가해가 될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책을 다 읽은 후 실제로 불쾌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책 소개 하단에 간단히 안내 문구라도 넣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고, 저자나 출판사의 성범죄에 대한 민감성 수준에 실망스러웠는데 혹시 자살한 그의 성범죄 사실을 부정하고 생전 공적인 행보를 부각해 명예 회복을 꾀하는 측이라면 더욱 문제적이라고 느꼈다. 한편, 성범죄와 같은 파렴치를 저지른 유력 인물의 영향력 혹은 추종의 자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난감하고도 어려운 자문도 생겨났고 말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목에서 그의 이름과 그를 향한 존경과 심지어 사진을 대면했을 때의 당혹감과 불쾌감과 별개로, 그러한 존재들을 무조건 배척하고 무시하면 되는 것인가 하는. 물론 이는 나로서는 매우 사적인 수용의 문제이지만, 사회적으로 확장하면 여전히 지난한 투쟁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정리하며 짚어보니 책은 나쁘지 않았지만, 사소한 것이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걸 강력하게 확인했다.

 


박용남
2023.1.13초판1쇄인쇄 1.20발행,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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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3. 7. 10. 15:45

 


단순하고 직관적인 제목이 눈에 들어왔고 가능한 이야기인가 궁금해졌다. 저자는 워킹홀리데이로 간 런던에서 어렵사리 취업에 성공하지만 혹사당하며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낸다. 더는 견디지 못하고 악덕 상사에게 저항한 대가는 해고 통보, 살인적인 물가의 런던에서 두 달치 월세 정도의 은행 잔고를 떠올리며 생존을 고민하던 중 숨만 쉬는데도 돈 걱정을 해야 하는 삶에 대한 의구심에 다다른다. 행복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경쟁하고 일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숙명 역시 근본적인 의심의 대상이 된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아등바등하는가 고심하던 저자는 불필요한 소비를 하나씩 삭제하며 잠잘 곳과 먹을 것, 교통수단 등 세 가지를 삶의 필수적인 요소로 정리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만 해결할 수 있다면 살아가는 데에 더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마저도 돈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해결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소비하지 않는 삶을 계획한다. 

 

돈 없이 사는 삶을 위해 주변을 수소문하고 정보를 찾던 저자가 런던을 떠나 처음 도착한 곳은 우프(WWOOF, World Wide Opportunities on Organics Fams "자원봉사자와 유기농 농장을 연결하는 상호 교환의 네트워크") 중 하나인 웨일스의 '올드 채플 팜'이다. 조상의 지혜를 빌어 석기시대 마을 같은 농장을 일군 프란은 흙집을 짓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농사 지으며 자연과 호흡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무료로 숙식을 제공받으며 일하고 머무를 수 있는 이곳에서 저자는 텃밭과 양들을 돌보며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처음으로 경험하고, 아주 작은 일에도 매번 고맙다고 말하는 이들을 통해 사랑받는다는 느낌에 감격한다. 심신을 갈아넣으며 일했지만 결국은 시스템에서 밀려난 도시와는 다른 관계와 질서 안에서, 자신이 그 자체로 쓸모 있는 존재라는 확신을 얻은 소중한 경험이다. 생존의 필수요소를 정하고, 자신의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망에 대해 궁구하던 저자는 우핑을 통해 무소비의 삶에 더해 사랑의 욕구에 대해서도 성찰하기 시작한다.  

 

'올드 채플 팜'에서의 시간을 통해 다양한 방식의 대안적 삶을 경험해 자신만의 방식을 찾기로 한 저자는, 한 장소에 머무르는 기간을 1개월 내외로 정하고 이동 방법을 고민하다가 자전거를 떠올린다. 0원으로 가능한 방법은 자신의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하는 일, 기적처럼 런던의 한 자전거 카페에서 답이 오고 주인 캐서린은 자전거는 물론 필요한 다른 장비들과 인류애 가득한 '선행 베풀기'를 선사한다. 5개월 동안 여러 농장에서의 우핑 생활을 거치며 저자는 웜 샤워즈(Warm Showers)를 비롯한 여행자를 위한 전 세계적 무료 숙박 네트워크를 알게 되어 도움을 받고, 캐서린의 감동적인 호의를 통해 '0원살이'를 더욱 확신하게 된다. 2014년 10월 31일, 급작스러운 준비를 마친 저자는 '헤이 메도우 팜' 친구들의 긍정 에너지와 응원을 가득 받으며 1년간의 '0원살이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프로젝트의 규칙 중 마지막 8번은 "죽지 않는다." 무모하고 의아하게도 느껴지는 프로젝트가 저자에게는 그야말로 생사를 건 모험이었던 것이다.

 

'0원살이 프로젝트'의 첫 번째 목적지는 영국 남서부 서머싯에 위치한 '팅커스 버블', 화석연료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에너지를 자급자족하며 전동공구 대신 손노동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엄격한 친환경 공동체다. 모닥불을 지펴 준비하는 식사, 재래색 화장식, 3시간은 불을 지펴야 가능한 목욕, 비바람이 몰아쳐도 이어지는 노동 속에서 저자는 약속한 2주를 채우며 자신만 불편함을 느끼는 이곳의 '미개한' 생활 방식에 대한 의문과 회의에 휩싸인다. 팅커들은 땅에서 나는 것만으로 생계를 해결하는데, 일례로 사탕수수 재배가 야기하는 열대림과 동물 서식지 파괴 그리고 가공 과정에서의 자연 오염과 노동 착취, 불공정한 무역 시스템 등을 이유로 설탕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자연을 해하지 않는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들에게 문명 사회에 익숙한 생활의 불편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심각한 기후위기에 봉착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최소한의 인터넷과 대중교통은 이용하지만 환경을 위해 자동차와 비행기를 타지 않고, 허름한 차림과 손노동의 삶에서 자유를 느끼며 자연을 섬기는 삶. 팅커들의 고결한 신념과 실천에 대한 경외감과 쾌적한 문명에 대한 갈증을 동시에 느끼며, 저자는 다음 여정을 이어간다.

 

짐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자전거를 교체하고 여러 도시를 이동하는 일 역시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해결하면서 저자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즈음 적극적인 지지를 표하며 경고를 담은 초대장을 보냈던 크리스와 소통해 12월 방문 약속을 잡는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노동하고 살아가며 사람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는 그는 "세상을 다른 관점으로 보는" 이상한 사람, '지극히 정상적이었던' 저자의 세계관에 변화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인 듯하다. 파트너 모락과 함께 사는 크리스의 집에 도착한 후 메일과 달리 냉랭하고 예민한 태도에 당황하지만, 소지품을 검사하며 대체할 천연 제품을 건네고 음식 생산 과정을 비롯한 현대적 삶의 병폐에 대해 세뇌하듯 늘어놓는 크리스의 '철학'에 저자는 어느 정도 감화된다. 현대적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업, 축산업, 어업 및 가공식품과 패스트푸드의 문제점 그리고 인간의 존재 양식에 대한 그의 철학에 나름의 해석을 덧붙인 적잖은 내용이 본문에 정리되어 있다. 더불어 사회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연의 일부로서 알몸을 사랑하는 나체주의자이자 다자사랑주의자인 크리스와 모락을 통해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과 사랑에 대해서도 새롭게 사유하며, 다자사랑과 영적수행의 목적이 같은 것이라고 적는다.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친구와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도시에서의 '0원살이'를 위해 런던으로 향한 저자는 런던 운하에서 살아가는 보트 피플, '급진적 주거 네트워크'의 멤버들과 만난다. 프로젝트의 취지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크레이그의 호화 보트에서 2주를 생활하고 버려진 집을 빌려 살아가는 스퀏팅 멤버가 되어 예술가들인 제이-메이 아지트에서도 생활한다. 그러는 동안 최소 소비를 지향하는 청년과 만나 무소비 데이트를 즐기기도 하고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먹거리 해결 방법인 스킵 다이빙(덤스터 다이빙)에 도전해 성공적인 '0원살이'를 이어간다. 그러는 사이 저자는 친구로부터 정통 프리건(Freegun, "자본주의 시스템에 저항하는 총체적인 구매 거부 운동인 프리거니즘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라는 말까지 들으며, 소비하지 않는 삶의 방식이 지닌 의도치 않은 급진성을 깨닫는다. 어느 날 갑자기 해고를 당하고 침대에 누워 앞날의 생존에 대해 번민하다 시작된 '0원살이'는 저자가 생각한 것보다 넓고 깊은 변화로 확장되고 있었다.

 

'0원살이'의 절반을 지날 즈음 봄을 맞아 저자는 다시 '올드 채플 팜'을 방문하고, 외부의 자극 없이 정적인 농장에서 갑작스러운 생활의 격변이 불러온 내면의 소란과 마주한다. 프로젝트를 통해 만난 많은 자연인들과 달리 여전히 일상에서 지루함을 느끼고 홀로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연과의 연결감을 느끼지 못하며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던 저자는 프란과의 대화를 통해 7일간의 홀로 단식을 결행한다. 그리고 블루벨 계곡에서 홀로 캠핑하며 단식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몸이 "빛으로 가득 차올라", "대지와 나를 연결하는 생명의 끈"을 통해 자연이 몸에 들어와 피와 함께 전신에 흐르는 느낌과 함께, "자연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연결된" 경험을 한다. 자신의 생명과 자연이 온전히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은 저자는 "자연을 섬기는 삶"이라는 강렬한 변화를 맞는다.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생존의 필수 요소를 마련하는" 퍼머컬처(Permaculture)와 생태건축에 대한 관심으로 웨일스의 '라마스 생태 마을'로 향한 저자는, 자스민과 사이먼이 각종 실험을 통해 자립 생활을 구현 중인 이곳에서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삶과 그를 위한 여러 기술을 배우고 경험하며 문명 사회의 노동과 소비가 아닌 자연과의 연결 회복 그리고 자립과 자족을 통해 생존과 사랑이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프로젝트 10개월이 지날 즈음, 비자 만료일 이전에 영국을 떠나야 하는 저자는 산책길에 우연히 만난 리투아니아인에게서 '레인보우 개더링'에 대해 알게 된다. 런던의 친구집에 남겨둔 짐을 정리하며 1년 10개월의 영국살이를 정리하고, 히치하이킹으로 함께 발트 지역으로 떠나기로 한 친구의 사정으로 혼자가 되자 운명처럼 레인보우 개더링을 떠올리고 런던을 떠난다. 프로젝트 초기 자전거와 함께 선행 베풀기를 선사했던 캐서린의 봉고로 유럽 대륙에 당도해, 오롯이 혼자만의 히치하이킹이 시작된다. 섹스를 목적으로 차를 태워준 운전자도 있었지만 큰 난관 없이 친구가 있는 베를린에 도착하고, 레인보우 개더링에 함께 갈 동료를 페이스북으로 물색해 비슷한 여정을 진행 중인 나라를 만난다. 히치하이킹으로 만난 운전자들 중에는 자신의 젊은 날을 떠올리며 흔쾌히 차를 태워주고 필요한 것들을 선물하는 이들이 적지 않고, 인간에 대한 신뢰와 그들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레인보우 개더링' 장소에 도착한 저자는 또 다시 새로운 차원의 변화를 마주한다.

 

'레인보우'는 유목 인디언의 삶을 동경하며 자연과 결속된 삶과 사랑과 신비의 상징인 보름달을 기리는 이들, 레인보우 개더링은 1972년 미국에서 '부족들의 레인보우 개더링'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다. 레인보우라는 이름은 호비 부족의 한 예언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지구가 병들고 동물과 식물이 죽어갈 때, 모든 국가, 인종, 종교가 모인 다양한 색깔의 새로운 부족이 나타나 지구를 구할 것이다. 그들은 'The Warriors of the Rainbow', 무지개 전사다."(243쪽) 애초 레인보우 패밀리만의 비밀스러운 모임이었던 개더링은 인터넷의 발전과 함께, 찬반 속에서도 그 정신을 세상에 퍼뜨려야 한다는 추세 속에 그 폐쇄성이 완화되었다고 한다. 개더링이 열리는 시기와 장소의 경도와 위도 정도가 sns에서 공유되고, 참여자들은 준비하는 이들이 주변에 남긴 단서를 통해 찾아가 함께한다. 저자는 과거 참여 경험이 있는 동행 나라 덕분에 밤안개 자욱한 몽환적인 초원의 리투아니아 개더링에 무사히 당도한다. 

 

레인보우 개더링은 낯선 참여자들을 "웰컴 홈"이라는 말로 환영하고, 모두가 둥그런 원 모양으로 둘러앉아 손을 맞잡고 신비로운 태초의 소리인 "옴~~~"의 강력한 진동과 에너지를 공유하고, 매직 햇의 노래를 부르며 자발적인 기부와 동참으로 마련한 먹거리를 푸드 서클을 통해 함께 나누며, 평화 조화 자유 자연 영성 사랑 연결 등의 가치를 지향하는 시공간이다. "1960년대 미국에서 크게 유행한 히피 문화와 보헤미아니즘의 영향도 받았다. 이 대항 문화 역시 국가 시스템, 자본주의, 소비주의, 대중매체, 위계질서, 폭력 등에 저항하고 사랑과 평화를 외친다는 점에서 레인보우 정신과 많은 면이 닮았다."(243~4쪽) 레인보우 개더링에서는 촬영과 화학 제품 사용을 금지하고 "성적 의도가 없는 나체 행위"를 모든 인간의 자연스러운 권리로 여긴다. 이곳에서 문명 사회의 시간 개념은 현재의 평온을 방해하는 요소일 뿐 날짜 역시 중요하지 않고, 미래를 그리거나 무언가를 기대하는 행위로부터도 해방되는 온전한 자연스러움을 지향한다. 무언가 필요할 때면 "커넥션!"을 외쳐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누고 거짓된 인사나 표정 대신 마음으로 통하는 인연을 믿는 관계가 유지된다. 그렇게 각자가 원하는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자연과의 연결을 통해 사랑과 평화를 나누며 보름달의 절정을 함께 보내면, 각자의 가슴이 시키는 대로 다음 여정을 향하는 것이다. 

 

저자는 리투아니아 개더링에서 레인보우들과 쉽게 동화되지 못한 자신이 "구경꾼 또는 이방인의 눈으로 이들의 세계를 관찰"했다고 적지만, 이내 점차 마음의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나는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됐다."고 적는다. 그리고 다음 여정 슬로바키아의 '레인보우 집'으로 향한다. 나라와 헤어지고 히치하이킹으로 슬로바키아에 닿은 저자는 이곳에서 자신의 세계를 관찰한다. "나의 세계를 더 깊이 알아갈수록 나는 참을 수 없는 외로움에 사로잡혔다. 이 외로움은 외부가 아닌 내면 깊은 곳에서 오는 공허함이었다. 내게서 그 공허함을 꺼낸 것은 다름 아닌 레인보우였다. 레인보우 패밀리는 내가 지금껏 살면서 만난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든 온전히 '진짜'로 존재했다. 꾸밈없이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상태로 '지금'을 살았다. 그들의 얼굴은 평온했고, 몸짓은 물이 흐르는 듯했다(물론 모든 레인보우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편의상 '레인보우'로 통칭하여 부르겠다)."(263쪽)

 

여기서 만난 넵튠이라는 레인보우에게 자신이 느끼는 내면의 공허, 명상과 진리, 자연과의 연결, 평온과 해방감 등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고 대화를 나눈다. 흐름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연습이 필요하고 히치하이킹이야말로 아무것도 예측하지 않고 흐름에 순응하는 법과 인내심을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 모든 존재는 연결되어 있고 우중 우연은 없으며, 영혼이나 참자아라고 할 수도 있는 '더 높은 자신'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것, '머리'가 원하는 욕구와 갈망이 아닌 영적인 성장과 진화를 통해 자신의 참모습과 평화에 이를 수 있다는 것 등. "당신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에요. 진정한 성장을 소망한다면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해요. '지금 난 좀 이기적이었어. 음, 괜찮아. 다음엔 이기적이지 않으면 되니까. 그래, 다음엔 다르게 한 번 해보자' 이렇게 생각하고 웃어넘기세요. 자신을 비난하거나 질책해선 안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성향과 모습에 이름표를 붙이지 않아야 해요.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야'라는 정의는 강력한 에너지를 만듭니다. 생각과 말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 있어요. 당신이 믿고 말하는 모든 것이 현실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니 자신을 그렇게 규정하지 마세요. ... '나는 내가 마음에 안 들어. 노력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해'라는 판단과 자책은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지 못합니다."(276쪽)

 

넵튠과의 대화와 자기 관찰을 통해 머리보다 "저절로 일어나는 일"의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한 저자는 슬로바키아 개더링 첫날 만났던 존스 베리 가족과 다시 만난다. 앤드류와 데비와 5명의 아이들로 구성된 존스 베리 가족은 대형 트럭에서 생활하며 지구 곳곳에서 봉사와 섬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들, 그리고 숲에 남은 레인보우들과 함께한 푸드 서클에서 저자는 '레인보우 카라반'에 대해 알게 된다. "최초의 땅에서 레인보우 전사의 소명을 다하는 거예요. 자유, 사랑, 연민을 위한 일이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충분히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눠주고, 안전하지 않은 사람들을 보호학, 아프리카에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만들고, 음악을 함께하고, 사랑과 평화를 아프리카와  나누는 것. 이게 바로 레인보우 카라반의 비전이에요."(285쪽) 각자 자신이 경험한 기적의 순간을 이야기하며 아프리카로 향하는 레인보우들과 조우하게 된 저자는 저절로 일어나는 가슴의 일을 믿고 그들과 함께하기로 한다. 

 

아프리카라는 최종 목적지 외에는 아무것도 정해진 것 없는 레인보우 카라반은 존슨 베리 가족과 제각각 사랑과 평화의 열정을 마음에 품은 적잖은 히피들과 함께하는 모험이다. 십수 명 히피들의 대이동은 지나는 곳곳에서 관심과 이목을 끌며 호의를 받기도 하고 경찰서 신세를 지기도 하며, 미처 몰랐던 인연을 확인하기도 하는 여정이다. 열악한 조건과 환경에서도 소란스럽고 즐거운 분위기가 유지되기도 하지만, 아무도 보고 싶지 않다며 눈을 가리고 누구와도 말하고 싶지 않다고 입을 닫는 수행에 들어가는 히피도 있다. 직관을 믿고 흐름을 따르고자 하는 몇은 트럭을 떠나 자신의 길을 떠나고, 개중 몇몇과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된 저자는 이들과의 인터뷰를 책에 싣기도 한다. 그리고 시리아 난민 가족의 피난길과 유사한 루트를 이동하며 특별한 연민을 느끼게 된 그들과 함께하려 도착한 난민 캠프에서, 예상치 못했던 경험을 하기도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적 긍정'을 잃지 않는 태도, 관대함과 평온함으로 타인과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 그러나 계획도 질서도 없고 누구 하나 주도하는 이도 없는 여정을 함께하며 걱정은 저자의 몫이 된 것 같다. '0원살이' 생활자에서 히피 수행자로 서서히 정체성의 변화를 겪고 있는 저자의 감동과 의문과 혼란과 내적 투쟁이, 레인보우 카라반에 내내 함께한다.

 

며칠간 도심을 통과하며 찾았던 깨끗한 물가, 천상의 계곡에 도착한 이들은 맑은 물과 숲에 치유받고 함께 영화 [성 프란체스코]를 본다. "자연과의 연결과 거룩한 가난을 통해 신의 사랑을 실천"한 프란체스코의 삶은 저자에게 깊은 감동을 안겼고 "나의 가슴이 그의 진리에 반응했다"고 적은 저자는 그날 밤 "한참 지구와 회전하며 대지와의 일체감을 느꼈다. 그 이후로 며칠을 사람들과 말하지 않았다. 프란체스코로부터의 울림과 대지와의 연결 속에 고요히 머물고 싶었다."(352쪽) 천상의 계곡에서 존스 베리 가족은 일부 레인보우들과 이틀 뒤에 떠나 터키로 가는 여정을 선택한다. "사랑해!!!"라는 외침을 주고받으며 헤어진 몇 년 후 에티오피아에서 말라리아와 장티푸스에 걸려 데비는 세상을 떠났고, "우리는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궁극의 안식을 취하게 된 것이 그 어떤 죽음보다 완벽하고 아름다운 마무리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355쪽) 천상의 계곡에 남은 이들은 묵언수행과 치유 의식을 행하며 각자의 고요함에 이르는 집중 수행의 시간을 보낸다. 마지막 날의 수행에서 저자는 "우주, 의식, 신, 연결, 사랑, 위대한 정신, 더 높은 자아.... 그게 무엇으로 불리든 이제 나는 그 세계를 믿을 수 있을 것 같다."(367쪽)는 고백과 함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때가 왔다. 그리고 그 여정은 반드시 홀로 행해져야 한다."(367쪽)는 가슴의 분명한 소리를 듣는다. 

 

애초 소비하지 않는 삶, '0원살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저자의 과제였던 생존과 사랑은 레인보우들과의 만남과 수행을 통해 이제 "생존과 사랑을 초월한 세계"로, "'우주'라는 무한하고도 신비로운 진리의 세계"로 향한다. 다시 혼자가 되어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하며 "흐름을 믿는 연습"에 돌입한 저자는 세르비아에서 기적 같은 도움을 경험하지만 한편 마을 캠프에 몰려든 난민이 아니었기에 받을 수 있는 혜택이었음을 깨달으며 세계의 모순과 죄책감을 뼈아프게 경험한다. 전쟁으로 고통받고 생존을 위해 피신한 곳에서도 백안시 되는 난민의 현실과 여행자로서 특별한 호의를 누리는 상황의 대비. 2010년 연평도 포격전이 일어났을 때 여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전방의 신병교육대에서 소대장으로 교관 임무를 수행했다는 저자의 이력이 이 일화에 이어져 기록되는데, 오랜 꿈이었던 군인으로 복무하며 '평화를 위한 무력'에 대해 회의하게 된 저자의 군 생활은 3년의 의무 기간을 마친 뒤 종료되었다고 한다.

 

2015년 10월 저자는 그리스의 친환경 비건 공동체 '프리 앤 리얼'에서 '0원살이' 1주년을 맞는다. 12월에 그곳을 떠나 가능한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하고 가급적 소비하지 않는 방식으로 터키와 조지아, 이란, 인도 등을 거쳐 2016년 10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이후 "가난한 구도자로서의 삶"을 계속하면서 2018년부터는 '자연식물식'을 하는 강도 높은 비건이 되었고 2021년 봄부터는 지리산 자락의 버려진 '숲속 오두막'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400쪽이 넘는 여정을 펼치기에 앞서 저자는 "이야기를 시작하며: 세계의 확장"을 통해 한국으로 돌아온 후 6년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적었는데, 각 절의 부제는 '빈집살이' '먹고 살기' '가슴이 원하는 일' '돈이 사라진 세계'다. 나처럼 제목에 끌려 책을 선택한 이들을 위한 프롤로그는, 책을 다 읽은 후에 다시 훑어 보니 대략 10년에 이르는 한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현재 시점에서 간명하게 압축한 것이었다. 긴 여정의 에피소드, 과정에서의 깨달음과 변화, 독자에게 전하고픈 주장들까지 다양한 온도로 쓰여진 글이어서 읽으며 여러 감정이 교차했고, 때로 갸웃거리고 불편한 마음을 달래며 책장을 넘기느라 잊었던 저자의 메시지는 이미 서두에 밝혀둔 셈이었던 것 같다.

 

 

분량이 꽤 되지만 읽으며 느낌이 이렇게 많이 달라지는 책은 오랜만이었다. 2년간의 '0원살이'와 방랑 기간 동안의 기록을 토대로 이후 프로젝트보다 훨씬 근본적인 변화의 삶을 살면서 숙고하고 정리해 묶어낸 글인 것 같은데, 이미 차원이 다른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과거 어떤 시기를 거치면서 경험하고 느낀 의문과 좌충우돌과 혼란을 당시의 관점으로 생생히 설명하는 부분들에서 상당히 공들인 글쓰기라는 느낌을 받았다. 생존과 정체성의 불안과 위기라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삶의 한 국면에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소비하지 않는 삶'으로 전개되는 게 신선했고, 몇 권의 책에서 접했던 스킵다이빙과 생태 공동체에서의 구체적이고 다양한 경험이 흥미진진했다. 그런데 레인보우 개더링에 함께하며 관찰자에서 초보 수행자로 '진화'해가는 중반부터 "나가며"에 이르러 구도자로서 나름의 이론을 정립한 듯 현재 세계의 각종 위기를 언급하고 대안과 해법을 내놓는 부분은, 전혀 기대하거나 원한 바가 아니어서 당황스러웠다. 도시화와 산업화, 자본주의화를 거치며 파괴되고 파국을 향해가는 세계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진단은 새로울 것이 없는데, 변화를 위해 수반되어야 할 무수한 구체적 요소와 복잡성에 대한 고려 없이 추상 수준에서 이어지는 당위적 설명들이 반드시 저자의 몫이어야 했을까. 물론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도전을 통해 삶을 근본적으로 바꾼 당사자로서의 진정성을 충분히 느껴졌지만 말이다.

 

저자의 솔직한 기록에서 내가 더 많이 공감한 부분은 자신의 여정과 프로젝트에 대해 때로 의구심을 느끼며 자문하는 부분이었던 것 같은데, 그러한 자문들은 대체로 물리적 고생과 주변의 호의 그리고 어설픈 의미부여로 뭉뚱그려지고 마는 느낌도 들었다. 질문은 공감되는데 답변에는 공감되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수행과 신비 체험으로 다시 태어난 저자가 더 이상의 질문을 멈추고 자신의 경험과 그를 통한 깨달음의 주장을 반복하는 느낌이어서 납득을 체념하고 그저 읽는 상황이 되는 측면도 있었다. 진리를 찾기 위한 구도나 수행에 대해 책 한 권으로 알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예상치 못한 전개와 절정을 거쳐 맥락을 세심히 고려하지 않으면 일관성이 느껴지지 않거나 거칠고 나이브하게 단정적인 결말에 이르러 설파하는 주장들이 내용의 옳고 그름과 별개로 당혹스러웠다. 물론 저자가 짚어내는 대로, 지금 나의 삶의 패턴을 바꾸고 싶지 않고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겠지만, 갑자기 도드라지는 가르치려는 태도에 거부감이 일었다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저자가 그리스에서 자신을 당연히 채식주의자로 여기는 이에게 반발하는 마음과 행동을 적은 부분이 있는데, 후반부를 읽으며 내 마음이 내내 그랬던 것 같다. 못난 마음이지만 진짜 그랬고, 그런 마음이 이어져 절정이 이른 "나가며" 부분은 얼마 되지 않는 분량인데도 읽다 내려놓고 잃다 내려놓느라 정말 겨우 책을 다 읽었으니까.

 

책을 집어들 때마다 뒤표지에 적힌 세 줄의 발문에도 아쉬움의 눈길이 멎었다. "우리는 돈 없이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나 역시 궁금한 부분이었지만 그다음 대답처럼 따르는 문장이 굳이 "진짜 혁명은 화염병을 던지며 시위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지 않는 생활 습관에서 시작된다."여야만 했을까 싶어서 말이다. 어떤 행위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임의적 대립물과 비교하는 것이 책에서 저자가 수없이 동어반복하며 주장하는 '진리'와 배치된다는 느낌이기도 하고, 지금 국내에서는 잘 쓰이지도 않는 '화염병'이라는 상징물을 통해 안 그래도 언론과 지배 세력이 마녀사냥하는 시위와 물리적 투쟁의 폭력성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물리적이고 집단적인 투쟁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방식과 시도 자체를 구시대적이고 불필요한 무엇으로 단정하는 듯해서 불편하기도 했고 말이다. 작은 부분에 딴지를 거는 것 같아 민망하지만 단 세 줄의 뒤표지 발문이어서 더 눈에 띄는 탓에 꼭 이 문장이어야 했나 싶었고, 책을 읽으면서 이따금 갑작스러운 비약이나 일종의 침소봉대처럼 느껴지는 부분들을 만날 때 일었던 반발심이 환기되기도 했다. "2022년 한겨레 선정 올해의 책 10선" 중 한 권이라니 나름의 반향도 있는 책인 것 같아서, 왜 굳이? 하는 마음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아무려나, 내게는 2023년 나님 선정 오래갈 여운과 혼란의 책이 될 것 같다. 지난해 여운과 혼란의 책은 단연 [짐을 끄는 짐승들]이었는데, 못지 않은 무게감으로 공감과 당혹의 양가감정을 선사하는 읽기였다.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까칠하거나 불퉁한 느낌이 내 마음의 반영이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어지간하면 저자의 마음과 의도를 이해하고 싶은 욕심도 내려놓지 못한 독자로서, 간만에 꽤나 에너지를 들이는 독서였다. 책 모임에서 읽었더라면 누군가와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을 텐데, 혼자 읽고 혼자 소화하려니 쉽지 않아 나만 원하는 기록이 참 길어졌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주 후의 여러 경험 속에서 ‘나는 사람을 싫어한다’는 걸 새삼 느꼈고 약간 교훈처럼 환기하며 일상을 보내고 있다. 혼자서도 크게 외로워하거나 힘들어하지 않고 그럭저럭 지낼 수 있는 성정과 연륜과 체념을 다행스레 여기며, 생동하는 타인에 대한 기대 같은 것 없이, 다른 세상에 있거나 아주 멀리에 있는 이들이 전해주는 노래와 영화와 책과 이런저런 콘텐츠 들을 통해 감각과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는 일에 익숙해졌다. 때로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싶지만 그게 아니라면 또 어떻게 살 것이며, 때로 혼자 너무 안락한 것 같아 불특정다수를 향해 민망한 마음이 들지만 세계의 고통에 내 몫을 더 얹지 않는 삶도 있는 거지 자위하고 만다. 지금의 내가 이런 나여서, 이렇게 불손한 독후감이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투덜거린 것만큼 내내 나쁘지만은 않았기에, 나름 공감했거나 기억하고 싶은 본문 몇 부분을 애써 옮겨두었는데 언젠가 다시 읽게 되었을 때 달리 느껴질지 궁금하다.



박정미
2022.10.28초판1쇄 2023.2.13초판3쇄, 도서출판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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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