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8. 30. 04:21


• 아나클랜 http://anarclan.net

• Life goes on, we are everywhere.

• 국제연대를 위한 자유학교

 http://dopehead.net/freeschool

• 국민문화연구소..신채호,이회창의 유지를 받드는 사람들의 모임

• 아벨 파스(Abel Paz, 스페인)

• 쿠카이 코오, 마즈다 후

• "한국의 아나키운동은 패거리주의와 획일적 가치관 때문에 희생된 개인의 욕망을 부활시킨다는 명목으로, 조직적 노력보다는 개인의 자율에 지나치게 치중한 측면도 있다."(90p)

• 하기락( ~1997, 한국)


조약골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17_텍스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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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21. 23:15


4월부터 시작해서 11월 말까지는 죽어도(?) 논문을 써서 제출하고야 말겠다는 오기를 의지로 승화하겠답시고 읽었다. 언제 샀는지 기억에도 없는데 책장에 있어 신기하다 했는데, 나름 나홀로 기념 좋아하는 데다 그 기념 안하고 넘어가면 또 마냥 유예하는 게 버릇인 터라 반갑기도. 사실 제목에 '잘'자만 빠졌으면 좀 더 부담이 없었을텐데, 암튼 저작의 시점과 지금의 여러 조건 환경 차이가 보통이 아닐텐데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이 적지 않았다.
 

이건 순전히 나의 경우이지만, 논문을 발등에 떨어진 불로 여기기 전까지 나는 소위 방법론의 문제에 대해 거의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무엇에 대해 쓸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물론 시작이고, 그 시작이 반이겠지만 적절한 연구 방법에 대한 고민은 무척이나 부차적인 문제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여 작업의 과정이나 연구 진행 방법 혹은 연구 방법에 대한 문제는 대략 적당한 걸 찾으면 되겠거니 하는 정도였다. 물론 내 경우 전문연구자도 아니고 그저 하나의 학업을 정리하는 과정으로 도전해보는 셈이니 그렇다고 자위했지만, 읽고 나니 다시 긴장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저자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어 적잖이 현학적이거나 고루 혹은 지루할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그야말로 실용서를 표방하는 책의 제목에 걸맞게 무척 친절하고 구체적인 설명이 이어지고 연륜과 배려가 묻어나는 적절한 팁도 적지 않은 데다 군데군데 정말 웃기기까지 해서 지겨울 겨를 없이 책장이 넘어갔다. 만약 카라바지오에 대한 논문을 쓴다면, 여러분은 그림을 그릴 것인가? 라니...!! 게다가 때로 놀라울 정도로 실감나게 초심자의 비현실적인 욕망을 지적해주시니 이거 내 얘기군 싶어 민망하기도 하고, 대가의 통찰이란 초발심을 잊지 않는 것인가 혹은 무지막지하게 천재적인 기억력인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테마의 선택이나 자료 조사 방법, 작업 계획 그리고 원고쓰기 등 실제적이고 방법론적인 조언들과 더불어 학문적 겸손과 자부심에 대한 이야기와 그가 논문에 대해 내린 결론이 나는 참 마음에 들었다. 그가 말하는 학문적 겸손은 어쩌면 매우 당연하지만 실천하기에는 참 쉽지 않은, 특히 나처럼 별 아는 것도 없이 편협한 소갈딱지에다 다른 주장하는 자를 적 삼고 극단적인 주장하기를 일삼는 무리에게는 새겨들어야 할 고언이다 싶었다. 또 그가 말하는 학문적 자부심에서 나는 괜스레 의지가 솟고 마음이 들뜨기도 했는데여러분은 그 주어진 테마에 대해 공동체의 이름으로 말하는 인류의 기능인이다. 입을 열기 전에는 겸손하고 신중하도록 하라. 그러나 일단 입을 열었을 때에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라. 는 이야기였다.
 

솔직히 '어쨌거나 써야한다'는 궁지에 몰린 심정으로 다시 준비를 시작하며 나는 괜스레 급해져 좀은 위축되기도 했고 논문을 욕망하던 마음의 주객이 전도되어버린 듯한 느낌도 들어 고민스러웠다. '다문화' 바람의 뒷전으로 밀려 언젠가부터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미등록 이주민에 대해, 말을 시작할 수 있게 되자 목소리를 빼앗겨버린 그들의 존재에 대해 자꾸만 이야기하겠다는 거친 당위가 실은 진심을 가장한 손쉬운 안주는 아니었을까 반성도 되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깨달은 것 한 가지는, 실제적인 준비 없이 오로지 마음과 머리로만 산을 이리저리 옮기고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혼란이라는 생각이었다.
 

전에 논문연구 수업을 들을 때, 내가 좋아하는 어느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새삼 떠올랐다. '논문을 자신의 실존과 동일시하지 말라'는, 들으면서는 웃기면서도 뜨끔했었는데. 어쩌면 짧지 않은 책 속에 카드 정리 방법이며 참고 문헌, 인용문 기록 방법까지 까탈스런 노인처럼 구구절절 읊어놓은 저자가 내린 가볍고 유쾌한 결론도 다르지 않은 이야기였다. 논문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 즐거움을 얻는다는 의미라는, 중요한 것은 바로 모든 일을 재미있게 하는 것이다라는 뭐 그런 말씀.
 

꼬박 1년 6개월 동안 손 놓았던 공부를 다시 시작하자니 괜스레 어디 아픈 것도 같고 몸이 들쑤시기도 해서, 급작스런 전환보다 적절한 예열을~ 이라며 주섬주섬 보낸 시간이 벌써 보름이다. 나름 배수진 친답시고 소문 낼 만한 데는 다 냈고 이제 상황은 쪽팔림이냐 논문이냐로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제출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할 일, 졸업하고 나서 다음 학기에 할 일까지 미리 생각해놨으니 이제 주변 정리한답시고 딴 짓 할 꺼리도 없고, 기왕 하기로 한 거 즐겁게. 실은 고작 자기확인 내지 자기만족을 위한 작업이 되겠으나, 가능하다면 공동체에 완전 무익하지는 않은 방향으로, 그렇게 잘 끝낼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2008-04-14 02:06, 알라딘



논문잘쓰는방법
카테고리 인문 > 독서/글쓰기 > 글쓰기 > 논문작성법
지은이 움베르토 에코 (열린책들,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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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21. 23:13


책을 읽고 비분쟁 지역의 개인이 국제 분쟁과 관계를 맺게 되는 방식에 대해, 물음이 떠올랐다. 어떤 배경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냐에 따라 공감부터 무관심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반응이 있을 것이고, 적극적인 관심에서 뻗어나간 후원과 연대 활동 마침내는 현장으로의 투신까지 갖가지 실천이 가능할 것이다. 누구나 쉽사리 시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다보면 국외와 해외가 동의어인 우리에게도 그 땅과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르던 심정적 거리가 어쩌면 공감과 지지의 자양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애초에 그렇게 태어나는 사람은 없겠지만, 분쟁 보도나 관련 글을 접하다보면 전하는 이는 대체로 전문인으로서의 안정감 있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일 경우가 많다. 기자이건 활동가이건 현장과 나 사이에 분쟁 메신저로서의 공식화된 자격을 획득한 후이기 때문에, 글을 읽으며 새삼스레 분쟁과 어떤 개인 혹은 나 사이에 작용하는 미묘한 변화 지점 같은 걸 인식할 틈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색다른 점이라면, 그렇게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가깝고도 먼 '거리'를 새삼 감식하고 또 고민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분쟁이 연상시키는 칙칙한 이미지를 걱정한 것일까. 제목도 표지도 산뜻하다. 게다가 지은이의 문체도 어쩐지 필사적이고 우울했던 정문태 기자의 글에 비하면 구어체에 가깝게 경쾌하고 가벼운 필치다. 도입부의 결심과 결행 과정부터 시작해 본인의 고백이 꽤 많은 탓에 어느 부분에서는 분쟁 지역 여행자의 일기를 보는 느낌이기도 했다. 프롤로그와 첫 장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지은이는 아시아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반도에 폭 파묻혀 획일화된 우리네 삶의 외연을 확장하는 일을 세계에 대한 시선 돌리기와 직접 체험으로 바꿔보자고 꽤나 당부한다. 아무 것도 가질 수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하지만, 실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고 누구나 감행할 수 있는 차원은 아닐 터다. 하지만 그녀의 선동이 고맙기는 하다.

삼십 년을 한국에서 살아온 지은이가 어쩌면 꽤나 무대책에 무일푼으로, 세계를 떠돌기로 마음 먹은 데에는 두 가지의 자극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가 타전하는 현장의 박진감 넘치는 기사들과 한 달 간의 유럽 배낭여행. G(Gypsy)형 피를 가진 인간이면 된다는 정문태 기자의 운명론에다, 속에서 용솟음치는 역마살과 유럽을 떠돌며 느꼈던 세상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만 9년 동안 언론운동 활동가로 살아왔던 경험을 밑천 삼아 그녀는 과감히 분쟁 저널리스트로 거듭나기 위한 길을 나선다. 

자발적 가난과 유목의 삶을 선택한 지은이는 낯선 호주 땅에서 이주 노동자로 반 년쯤을 살면서 마음속에 품은 분쟁 취재의 꿈을 현실화할 계획을 세운다. 시드니의 운동판을 기웃거리고 난민 커뮤니티의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아시아에 새롭게 눈 뜨고 국제뉴스로 접하는 미처 몰랐던 세상의 내밀한 소리들을 심장에 차곡차곡 담는다. 그녀는 타지에서 자국 문제를 알리고 국제 연대를 호소하는 난민들과 교류하면서 출신국의 고유한 문화와 의식을 담지한 그들의 잠재력을 절감하고, 그러한 소통과 존중이 정체된 의식의 환기와 새로운 삶의 구성에 풍부한 자양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분쟁 취재길에 오른다.

그녀는 용감하고도 무모했다. 그리고 무모한 만큼 거침없이 나아간다. 스스로 고백하는 막막함과 시행착오 만큼이나, 초반부는 사실 분쟁 취재에 출사표를 던진 한 젊은이의 좌충우돌 체험기 같은 느낌도 없지 않다. 처음 분쟁의 땅에 당도한 그녀의 모습은 낯선 세계의 가려진 진실을 파헤치고자 하는 열정과 순수로 가득찬 아마추어 같기도 하다. 그러나 타이-버마 국경 지대로부터 군부독재의 압제와 극심한 빈곤에도 고요히 숨죽인 버마 내부를, 성자의 나라에서 IT 강국으로 약진 중인 인도의 분쟁과 갈등으로 얼룩진 이면을, 타밀족에 대한 오랜 차별과 극심한 부패로 평화를 떠나보내는 스리랑카를, 히말라야 골짜기를 붉게 물들인 네팔 마오이스트와 절대왕정에 저항한 민중항쟁을 그리고 인도와 파키스탄의 '점령 로맨스'에 고통받고 신음하는 카슈미르를 가로지르며 현실을 생생히 전하는 동안 그녀는 변화하고 있었다.

국제분쟁과 관련한 일반론이나 지난하고도 복잡한 세계 정세와 배경 같은 것들은 대체로 생략되고, 지은이는 자기가 관심하고 추적한 것들을 소상히 서술한다. 리포트라기보다 에세이같기도 한 글들은 철저히 지은이의 성향과 지향을 따르고 있는데, 해서 자신이 좀 '빨갛고 삐딱한'(!) 인간이라 느껴온 독자라면 매우 흔쾌한 마음으로 눈을 빛내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종교와 민족, 점령과 교전, 협상과 평화와 같은 분쟁의 보편 언어와 함께 그녀가 더욱 주목하며 집요히 좇는 또 다른 코드는 이를테면 차별, 저항, 좌파, 반군, 혁명, 해방 같은 것들이다. 더불어 그녀는 언론운동 활동가로서의 문제의식을 현장에서도 예민하게 발휘하며 현지 언론에 대한 비판적 관심과 패악의 고발도 잊지 않는다. 

그녀가 누빈 땅 역시 대부분 이미 분쟁으로 유명세를 얻은 곳들이지만 기존의 관련서들이 거시적인 관점에서 분쟁의 큰 그림을 그리고 그 경과를 따라잡는 데에 치중했다면, 이 책에서 지은이는 자신의 관심 편향에 따른 특정 이슈에 대해 현재적 관점의 밀도 있는 심층 취재에 주력한다. 주로 저항 세력 내부의 동향 타진과 밀착 취재를 통해 미디어에 의해 호도되고 왜곡된 사실을 밝히는 것과 분쟁의 핵심 당사자이자 최대 피해자면서도 늘 소외되어 왔던 지역 민중들의 휘발된 신음을 되살려 고통스런 진실을 호소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리버럴 좌파'쯤이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사상의 거처를 찾는 순례자를 자임하지는 않는 까닭에, 지은이가 마주하는 분쟁 지역에서는 '좌회전'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만큼 심란하고 실망스러운 작태를 보이는 좌파들도 적지 않았다.

사실 이 책에서 내가 제일 기대하고 궁금했던 부분은 네팔의 상황이었는데, 주변 네팔분들에게 간헐적으로 얻어들어온 마오이스트들의 이야기와 왕정이 무너지고 선거를 하네마네 급박하게 돌아가는 요즘 상황이 어디서 어떻게 발원한 것인지 속 시원히 알려주는 책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십 년에 이르는 네팔 내전에 대한 책 한 권을 만날 수 없었고, 네팔 여행기 같은 데에서 마오이스트 활동의 파장이 가끔 언급이 되기는 했지만 당연히 단편적이고 주변화된 서술에 그쳤다. 지은이는 2006년 4월 정점에 이른 소위 '네팔 제2의 민중항쟁'을 시종 지켜보고, 그 원동력이 된 마오이스트들의 본거지 히말라야 계곡을 찾아 그들을 밀착 취재한다. 물론 무장항쟁의 빛과 그늘이 존재하겠지만, 그녀가 확인한 그들의 실체는 기대를 가져도 괜찮은 것이었던 것 같다. 격렬하고 거침없는 피플파워와의 상승효과로, 이 책에서 네팔은 유일하게 활기와 희망을 담은 현장인 듯 싶기도 했다.  

2004년부터 분쟁 현장을 누비면서 도둑 맞아 가진 것을 모두 털리거나 하는 긴급 상황에 봉착하면 그녀는 잠시 한국에 들렀다 가는 모양이다. 지난 5월에 쓰여진 프롤로그의 말미는 '봄날'을 애타게 부르는 땅, 카불에서 이유경 이라고 적혀있다. 그녀는 그렇게 세상을 떠돌면서 어느 새 삼십 년간 살아왔던 한국에서 폭 젖어 있던 많은 것들을 낯설고도 냉정하게 바라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다르게 존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란다' 라고 딸에게 말하는 영화 '초콜릿'의 한 대목을 에필로그에서 인용하는 그녀가 소망하는 것은, 서로 다름이 자연스럽게 존재할 수 있는 사회의 모습이다. 도무지 해결날 것 같지 않은 골 깊은 갈등과 분쟁도 따지고 보면 서로 다름을 용인하지 않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시작된 것일 테니 말이다. 그녀는 아마 지금도 저 먼 곳 어딘가에서 추레하고 볼 품 없는 모양새로 반짝이는 눈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나 역시 소망하는 세상의 한 구석을 지키고 있을 그녀에게, 관심과 응원을 보낸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분쟁 관련 서적 편집의 클리셰를 벗어나려는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에는 지도가 단 한 장도 나와 있지 않다. 물론 성의를 들이면 인터넷이나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겠지만 아쉬운 부분이다. 지역 지도 없이 지은이가 발 딛는 그 많은 곳들의 위치를 상상할 수 있는 독자들은 별로 없을 테니까 말이다. 책의 내용이 도식적이고 고착된 분쟁 분석이 아닌 진행형의 구체적인 사건들을 따라가는 서술에 주로 할애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최소한 지은이의 행로를 일별할 수 있는 정도의 지도는 덧붙여주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다. 


2007-10-05 03:20, 알라딘



아시아의낯선희망들끊이지않는분쟁,그현장을가다
카테고리 정치/사회 > 정치/외교 > 국제관계 > 국제분쟁/조정
지은이 이유경 (인물과사상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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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온 지 얼마 안 된 책이라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옮긴다, 내가 틀린 거면..;;;

   6p  열어 재낀 -> 열어 젖힌
  10p  환전은 불랙마켓에서 -> 블랙 마켓에서 (69p의 제목 나열에서도 마찬가지)
  26p  특히 몸과 매무새에 문제로 -> 매무새의
  92p  운전수 창밖을 -> 운전수가 창밖을
  97p  첫 2주 동안은 거의 방안에만 거의 쓰러져 있었다. -> 거의 방안에만 쓰러져 있었다.
 150p  400~500명이 폭도들이 달려들어 -> 400~500명의 폭도들이
 174p  타산지석으로도 삶는 -> 타산지석으로도 삼는
 185p  또 스시랑카 정부가 -> 스리랑카
 179p  섬은 그렇게 인재와 자연재해의 '윤간'으로 통곡하고 있었다. - 이건 오자는 아니고 개인적인 느낌인데 너무 불편했어서... 사실 관계의 설명이 아닌데 단지 비유적 표현으로 굳이 '윤간'이라는 단어 선택을 해야했을까 싶다. 더구나 타이-버마전선 꼭지에서 전쟁과 내전에서 전략으로 선택되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에 대해 언급하고 분노했던 게 생각나서 더욱 아연하고 불편했다.
 185p  또 스시랑카 정부가 -> 스리랑카
 384p  빨간 구도 신어? -> 구두

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21. 23:11


'한눈에 보는'과 비슷한 수식이 붙은 제목의 책은 사실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아는 건 없어도 어쩐지 너무 주마간산 겉핥기일 거라는 선입견이 작용하기도 하고, 제목에서부터 떡하니 선언하는 만큼 실제로 깊이 없는 사실의 나열에만 그치는 경우가 많기도 한 까닭이다. 하지만,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다면 오히려 다이제스트 형식의 구성이 미답지에 대한 입문서로는 적당할 때도 있다. 이 책도 그랬다. 발간은 2004년이지만 본문의 내용은 대체로 2002년쯤에서 정리되고 있으니, 벌써 5년이나 지난 시점의 기술이라는 게 좀 아쉽기는 했지만 내가 너무 늦게 읽은 탓이니 뭐랄 수도 없다.
 

책은 중동과 서아시아+동남아시아, 동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의 여섯 지역으로 크게 나누어 세계 각국의 분쟁 상황을 정리하고 있다. 유치한 삽화로 장식된 표지에 걸맞게 청소년 필독서로 선정되기도 한 모양인데, 표지뿐 아니라 본문의 구성 역시 기초 학습에 적당한 참고서 형식을 취한다. 한 절이 시작되는 첫 머리에는 그 지역 분쟁의 '포인트'가 한 줄의 헤드라인으로 그리고 주요사건의 경과가 연대순의 도식으로 정리되어 있다. 분쟁 지역 상황이 한 눈에 들어오는 단순한 지도와 몇 문단을 묶은 소제목들만으로도 상황이 개괄될 만큼 일목요연한 설명이 이어진다. 중간중간 들어간 박스에는 본문에서 다루지 못한 각종 팁들이 정리되어 있고, 챕터마다 말미쯤 붙은 칼럼에서는 그 지역의 이슈 중 논평할 만한 주제 하나를 매우 압축적으로 다룬다. 너무 도식화된 구성에 간략한 서술이라는 생각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들지만, 그야말로 초심자의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신경을 쓴 흔적은 역력하다.

머리말에서 지은이는 진행중인
 분쟁의 메커니즘을 가능한 알기 쉽게 서명하고자 노력했다. 몇 세기에 걸친 역사를 제한된 지면에서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매일 홍수처럼 흘러 들어오는 국제 뉴스를 설명하고 안내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의 말처럼 정말 욕심이나 겉멋 같은 건 싹 치우고 애초에 잡은 목표대로 사실 관계를 밝히는 데에 매우 충실한 책이라는 느낌이 든다. 사소하지만 그냥 넘어가기에 아쉬운 의구심 하나는, 쿠르드족의 문제를 다루는 부분에서 언급한 할라브자 마을의 대량학살 사건에 관한 것이었는데, 책에서는 의심할 바 없이 이라크의 소행으로 단정 짓고 박스 기사로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읽은 "나는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110-111p)에 의하면 내외에 이라크의 자국민 몰살로 알려져 갖은 규탄의 빌미가 되었던 그 비극은, 2003년 전 CIA 고위인사의 기고와 기밀 보고서에 의해 이란의 소행이었음이 밝혀졌다고 한다.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인지는 모르지만, 안 그래도 어쩐지 불쌍한 이라크와 이제 고인이 된 후세인을 생각하면 좀 아쉬운 부분이다. 

이 책은 작은 판형 얄팍한 두께에도 불구하고 무려 스무 곳 가량의 분쟁을 다루고 있는데, 전에 읽은 다른 책들에서 다루지 않았던 터키와 그리스가 얽힌 키프로스, 중국의 자치주이며 망명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 티베트, 일본과 러시아 간의 북방 영토 문제,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서 평화를 모색하는 북아일랜드, 러시아로부터의 완전 독립을 갈망하는 체첸, 식민통치가 갈가리 찢어놓은 르완다, 독립과 자치를 놓고 3세기째 공방을 벌이고 있는 바스크와 스페인, 반정부 무장세력과 일본계 대통령의 정부 간 갈등이 고조된 페루 등의 이야기가 새로웠다. 물론 무척 가벼운(?) 터치로 현상 위주의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궁금한 지역에 대해서는 다른 책을 구해볼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남북한 문제, 비원의 남북통일은 실현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동아시아 지역의 분쟁에 속해있는 한국의 이야기였다. 그러고보니 전에 읽은 글들은 모두 한국의 저자가 세계의 분쟁 현장에 대해 쓴 것들이었고, 참담한 전화와 파괴가 현재진행형인 그 지역들에 눈을 박으며 분개하면서 단 한 번도 우리나라와 결부지어 생각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바로 어제 군사분계선을 도보로 넘은 대통령의 이야기에 온 매스컴이 들썩였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이후 짱짱한 휴전선이 여전히 남북을 가르고 있는데도 말이다. 분쟁당사국의 국민으로서 이렇게나 불감어린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게 실은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어쩌면 나는 민족주의와 종교갈등 무엇보다 패권의 유린으로 비참한 분쟁에 휘말린 그 땅들을 조금은 내려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거듭 말하지만 이 책은 매우 압축적이고 도식적으로 분쟁의 기원과 경과, 현상황 등을 위주로 설명하기 때문에 그나마 분쟁 지역민들의 고통과 신음에 닭살이 돋거나 한숨이 나오는 독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건조한 기술로 더욱 도드라지는 것은, 유럽의 식민지 경쟁과 제국의 패권주의가 야기한 불평등하고 참혹한 지구사회의 현재였다. 북미와 중부 유럽을 제외한 지구 내 거의 모든 지역이 오늘날에도 크고 작은 극렬하거나 만성적인 분쟁에 휩싸여있으며, 옮긴이의 말마따나 
분쟁은 지금의 세계 질서를 지탱하는 불가결한 조건이 아닐까 싶은 생각에 나도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이어 옮긴이는 그렇다면 지금 세계 여러 지역의 분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갖는 것은 지적호기심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이자 윤리의 문제이다. 전쟁과 학살과 폭력에 반대한다고 할 때 그것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구체적인 바로 그 전쟁과 학살과 폭력에 대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라고도 덧붙이고 있다.

솔직히 상식이자 윤리의 수준으로 국제 분쟁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리기에 외면적으로 평화로운 우리들의 삶 역시, 세계를 추동하는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작동 방식과 연대를 가로막는 팍팍한 조건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반공과 용공으로 나뉘어 단 하나의 전선 아래 숨죽였던 시대의 기억은 가물해진 지 이미 오래, 무제한의 자유가 철철 흘러 넘치고 있다고 오해되는 세상에서 구가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자유가 혹시 타인의 고통에 공명하고 함께 가난해질 자유는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만 해도 골치부터 아파오는 국경 너머의 이야기들에 조심스레 관심이 생겨난다면, 그 첫 번째 책으로 꽤 마땅하다 싶기도 하고. 지은이의 국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서술들도 간간히 눈에 띄었으나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고, 원저와 역서의 출간 사이 변화된 국면을 채워 넣은 옮긴이의 노력과 성의도 느껴지는 고마운 책이다.


2007-10-03 22:47, 알라딘



세계분쟁지도
카테고리 정치/사회 > 정치/외교 > 정치일반 > 청소년정치사회
지은이 마스다 다카유키 (해나무,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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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21. 23:10


리뷰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니 두툼한 책 한 권에 박았던 머릿속에는 십여 년 전의 아프가니스탄 상황밖에 남아있는 게 없다. 2001년 주인공 마수드가 텔레비전 인터뷰를 빌미로 접근한 자살폭탄테러에 세상을 떠난 뒤,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문득 궁금해 검색창에 아프가니스탄을 쳐봤더니 대통령은 여전히 탈레반 체제 전복 후 미국이 갖다 앉힌 하미드 카르자이, 오늘도 카불에서는 경찰버스에 자폭테러가 일어나 10명이 사상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샘물교회 피랍 사건의 여파도 잠잠해졌고 더불어 한국에서는 다시 없었던 땅처럼 관심 밖으로 사라졌지만, 여전히 아프가니스탄은 불안한 고통에 잠겨있는 땅일 것이다.

국제분쟁에 관한 책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너무 고백해서 민망하지만, 이 책을 만나게 된 것 역시 정문태 기자의 책 한 꼭지가 발단이었다. 그는 책 말미 '가슴에 묻은 이야기들'이라는 장에서 미처 기사로는 송출하지 못했던 개인적 소회 다분한 네 편의 글을 묶어놓았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전설, 마수드', 소위 '판쉴의 사자'로 불렸던 한 사람의 이야기는 무척 강렬하고 인상적이었다. 9.11과 마수드의 죽음을 긴밀히 연결시켜 단일 음모로 조망하는 그의 글에는, 마수드에 대한 존중과 인정이 매우 각별하게 넘쳐흘렀다. 
그리고 마수드를 묻은 2주 뒤, 10월 7일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외세가 득실거리는 아프가니스탄뿐. p333 그 글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분쟁을 다룬 거의 모든 책에 아프가니스탄은 빠짐없이 등장한다. 종족, 종교, 외세, 소련, 미국, 파키스탄, 탈레반, 북부동맹, 연합전선 등의 어지러운 키워드들 역시 어김없이 뒤따른다. 몇 권의 책을 통해 반복되는 이야기들을 아무리 주의 깊게 읽어도 균형 잡힌 사고와 입체적 적용력이 떨어지는 나에게 남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은 정말 어쩔 수 없는 뒤죽박죽 땅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거의 20년 동안 수 차례를 드나들며 현장의 밀착취재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특별한 애정을 간직한 저자의 이 기록을 접하고서야 나는 조금 정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여기서 다루고 있는 마수드를 중심으로 한 1990년대 후반까지만 말이다.

책을 쓴 크리스토프 드 퐁피이는 프랑스의 프리랜서 다큐멘터리 작가로서 1981년부터 수 차례 아프가니스탄의 현장을 찾아 30편 이상의 다큐를 제작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1979년 겨울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아프간 전쟁에서 북부의 판지셰르 지역을 중심으로 항전하며 공동체를 조직해 온 마수드라는 인물의 소문이 저자에게 전해진 것은, 전쟁 초기 그곳에서 국제의료지원단 활동을 했던 지인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고도의 위험을 무릅 쓴 은밀한 불법여행이었던 1981년의 첫 번째 잠입 이후 그가 마음속에 품었던 것은 마수드라는 한 인간에 대한 궁금증만은 아니었다.


필름에 담자.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알리자. 그렇다, 우리는 순진했다. 우리 이전에 다른 사람들도 이미 전쟁의 참상들을, 인간 세계에 존재한다고는 믿을 수 없는 온갖 지옥의 모습들을 전했었다. 심지어 위험을 무릅쓴 증언의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희생시킨 이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었다. 혹은, 달라진 것이 너무나 적었다. 아니, 틀렸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텔레비전에다 그 잔혹성을 토해 놓았고, 급기야 미국 국민들로 하여금 구역질을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전쟁은 끝이 났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p74

아프가니스탄은 타지크족, 우즈베크족, 투르크멘족, 하자라족, 키르기즈족, 파쉬툰족 등이 주요 인종을 이루며,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파키스탄 등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다. 아프가니스탄 역시 다른 분쟁국들과 마찬가지로 가치 있는 천연 자원과 분열 가능성을 지닌 다민족 구성이라는 조건으로 인해, 20세기의 중반 이후 미국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파키스탄과 소련의 틈바구니에 끼어 오랫동안 고통 받아왔다. 소련 침공 이후에는 판지셰르를 거점으로 치열하게 대소항전을 벌여온 마수드를 제외하면, 지도자라 할 만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이권과 권력을 쫓는 저열한 이합집산에 매진한다. 저자의 말을 빌자면 소련군으로 인해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든 이후로 아프간 역사에 전매특허가 되어버린 '아프간식 배신행위'다.

1989년 소련이 물러간 후에 아프가니스탄의 분열상은 더욱 노골적으로 가속화되었다. 공식 철수와 함께 소련이 내세운 아프간 공산주의자들의 임시정부를 아프간 국민들이 받아들일 리 만무했고, 힘 다 빠진 소련이 필사적으로 갖다붓는 지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실적으로 장악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한편, 소련과의 항전 기간 동안 상황이 어려워지면 곧잘 해외로 내빼거나 이전투구에 몰입했었던 주요 지도자들은 각기 휘하의 무자헤딘을 이끌고 개선장군이 되어 아프간 전체를 대상으로 새로운 땅따먹기를 벌이기 시작한다. 주요 도시들의 통제권을 놓고 정부군과 각 지역 사령관들 사이의 명분없는 내전이 곳곳에서 벌어지지만, 1992년 배신과 음모로 점철된 불안한 동맹으로나마 마침내 무자헤딘 그룹은 카불 점령에 성공한다.

하지만 랍바니 대통령과 '아프간 저항군'의 일곱 개 정당 및 파벌들이 연합한 내각의 구성원들은, 이미 복합적인 증오와 분노의 함수관계 위에서 복마전의 연합을 유지해왔던 터였고 대부분 권력에 눈이 멀어 자기 이익 챙기기에만 혈안이 되어있었다. 십 년의 대소항전 동안 단 한 번도 아프간을 떠나지 않고 싸웠던 유일한 사령관 마수드는 무자헤딘이 해방시킨 카불에서 국방부 장관으로서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지만, 오랜 전쟁에 따른 무질서와 혼란상은 오히려 가속화되며 치안 부재의 상황으로 치닫고 카불은 완전히 수습 불가의 무법지대로 변모한다. 그 와중에 마수드의 오랜 적수이자 필요에 따라 각종 외세를 등에 업으며 자신의 안위와 축재에 몰두하던 파쉬툰족의 수장 헤크마티야르는, 국무총리 자리를 요구하며 미국으로부터 지원 받아 빼돌렸던 미사일로 카불을 불바다로 만들기에 이른다.

그 사이 파키스탄과 미국은 새로운 계획을 준비한다. 닳고 닳은 데다가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아프간의 파벌들로는 자국의 이익을 담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파쉬툰족을 중심으로 남부에서 결성된 탈레반은, 초기에는 이슬람교의 가르침에 따른 엄격한 규율로 오랜 전쟁의 혼란에 지친 국민들에게 희망으로 떠올랐다. 남부의 칸다하르를 본거지 삼아 세력을 넓히던 탈레반은 미국과 파키스탄의 지원을 등에 업고 무서운 기세로 약진을 거듭한다. 당시 친미 탈레반 정권의 카불 접수는 투르크메니스탄으로부터 파키스탄에 이르는 가스 송유관 건설이라는 미국의 이해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996년 9월, 이미 지도력과 행정력이 바닥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카불이 또다시 불바다가 되는 것만은 막으려했던 무자헤딘들은 탈레반의 무혈 입성을 뒤로 하고 카불을 떠난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정교일치의 이슬람 근본주의를 지향하는 탈레반의 극단적 통치 아래 놓이게 된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저자의 직업은 다큐멘터리 작가이다. 이 글은 그가 거의 열 번에 걸쳐 드나들며 제작한 아프가니스탄과 마수드에 대한 여러 다큐멘터리 작품들에 따르는 부수적인 산물이다. 기록은 일목요연하기보다 대체로 저자의 기억과 맞물리는 에피소드 중심으로 이어지며, 특히 1997년 판지셰르에서 만난 마수드와의 일화들이 매우 구체적으로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1981년의 첫 만남 이후 아프가니스탄의 자연과 사람들에 애정을 갖게 되고 마수드라는 아직은 검증되지 않은 한 인간에 매료된 저자는 1990년대 초중반의 카불 진입과 점령 그리고 퇴각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저항군 지도부'가 보인 난맥상과 마수드의 부침을 꾸준히 목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1997년, 거의 칩거하다시피 판지셰르 계곡에 틀어박혀 카불 진격을 준비하는 마수드를, 그가 무려 15년 이상 주목하면서 때로 실망과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존경과 신망을 아끼지 않는 사령관 마수드의 진면목을 카메라에 담고자 하는 일념을 갖고 다시 아프간을 찾은 터였다. 그는 한 사람의 저널리스트이기 이전에 진심으로 마수드의 정직성을 믿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진정한 하나의 국가가 되기 위해 오랫동안 전쟁으로 고통 받아 온 아프가니스탄의 평화로운 미래를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간절히, 바위처럼 과묵한 마수드의 입을 열어 진심 어린 고백을 듣고 싶어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이 보아온 '평화의 사람' 마수드를 자신의 필름에 담아, 배신과 음모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아무도 돕지 않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도 꿋꿋이 제 길을 가는 마수드의 진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하는 순수한 저널리스트였다.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카불로 왜 돌아가고자 하는가? 절망하지 않고 어떻게 19년 동안이나 전쟁을 할 수 있었는가? 도스톰처럼 도무지 존경할 구석이 없는 자와 왜 동맹을 맺었는가? 그리고 또, 하자라족을 대량학살한 사이야프와 왜 동맹을 맺었는지 설명해 달라. 동료들의 죽음에 대해, 평화를 향한 꿈에 대해, 가족에 대해, 아들과 세 딸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내 카메라 앞에서 자신을 털어놓아 달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찍는 필름은 전쟁의 수장으로서의 그에 대한 전설에 관한 필름 하나를 더 보태게 될 뿐일 테니까. p326

하지만 끝내 그는 원하는 것을 필름에 담을 수 없었다. 마수드는 특출난 전략가이며 강인하고 투철한 평화의 전사였지만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며 하소연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중간중간 저자가 고백하듯이, 십 수 년의 인연이어도 결국엔 아프간과 무관한 서방세계의 언론인일 뿐인 그에게 마수드가 할 말은 별로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는 끊임없이 마수드를 신뢰하고 또 그가 건설하고자 하는 여성이 권리와 사회적 지위를 갖게 되고 국교가 이슬람교인 다인종적이고 현대적인 국가 아프가니스탄에 지지를 보낸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자들과의 동맹이나 카불 점령기에 적절한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한 마수드에게 실망하기도 하지만, 겸손하고 정직한 마수드의 태도와 토로를 옮기며 그는 오히려 변호인을 자처하는 것 같다.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한 나라를 이끌 만한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들이 전혀 아니었어요.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들은 더더욱 아니었고요. 대부분이 전쟁 때문에 학업을 중단한 사람들이었어요. 행정업무를 수행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정당마다 권력이 자기네들에게 이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경찰은 무장한 사람들로 하여금 법을 존중하게 만들 수 있는 수단을 전혀 갖추고 있지 못했지요. 나 자신도 전쟁에만 완전히 몰두해 있는 바람에 내 주위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충분히 관심을 기울일 수가 없었어요. 나는 지금에 와서는 심지어 판지셰르에 혜택을 준 게 아무것도 없다는 비난까지 듣고 있는데, 그게 사실이에요." p320

무자헤딘이 카불에 입성한 지 두 달 후에 마수드가 랍바니 정부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주목한 외국 관측자는 거의 없었다. 마수드는 권력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시를 수호하는 군사적 임무를 맡았다. 마수드는 그 대가를 지금까지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여러 파당들과의 싸움 때문에 매번 떠나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인데도 말이다. 
p373

저자는 1997년 7월의 만남에서, 마수드의 카불 진격 작전에 동행한다. 전장의 한 복판에서 초조한 기다림과 공포에 위축되는 스스로를 느끼며, 한 번 실패했던 무자헤딘 사령관이 그의 마지막 지지자들과 모든 것을 걸고 벌이는 최후의 공격 준비와 진행 과정을 꼼꼼히 기록한다. 그는 초긴장 상태의 전선에서 마수드가 보이는 침착하면서도 상대방을 압도하는 지도력과 배움도 용기도 심지어 무기도 부족한 그의 부하들이 서로를 향해 보이는 존중과 존경 역시 감동적으로 기록한다. 때로는 그의 주변에 포진한 능력 부족의 참모들을 탓하기도 하면서, 명민한 측근들을 키워내지 못한 마수드의 한계를 안타까워하기도 하면서. 비무장 민간인으로서 갈 수 있는 마지막까지 함께 한 저자는 샤말리 고원 전투의 위험을 넘기고 해방된 카리사르를 뒤로 하며,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전장을 떠난다.

프랑스로 돌아간 저자는 전장의 한 복판에서 기록한 영상물을 통해, 무엇이 대규모 공격의 기반이 되었는지 그리고 마수드가 변호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미디어의 힘을 통해 설명할 요량이었다.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지원은 전무한 상태에서 때로 '프랑스의 사람'으로 오해를 받아온 마수드에 대해 저자는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고, 그보다는 별의별 사람들이 얽히고 설켜 끝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복잡한 땅에서 단연 도덕적이고 올바른 대의명분을 지켜나가는 마수드를 서방세계에 변별시키고 싶은 욕구를 잠재울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죽어 하나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체 게바라와 달리, 아흐마드 샤 마수드는 바로 지금 먼 땅에서 무려 20년 간 외롭고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16년 전에, 처음 마수드에 관한 필름을 촬영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카메라를 잡는 일이 과연 의미가 있는 일인지 의문을 품어보지 않았다. 시선이 미치는 곳에 있는 것을 열심히 촬영하면 증언을 쓸모있는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언론매체에서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해설자가 곧 신탁이다. '스타'이고, 그럴싸한 영웅이다. 최근의 세계사에 관한 이른바 나레이션에 잔뜩 끼어 있는 온갖 부정확한 내용들을 보고서,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저들이 얼마만큼이나 아프가니스탄을 이슬람 테러리즘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는지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은 CIA의 정신나간 조언자들이 지옥의 불을 가지고 장난을 쳤는데 말이다. p401

그러나 미디어는 그의 바람대로 본질을 밝히는 보도를 전혀 하지 않았고, 그가 아프간에서 겪었던 엄청난 감동의 드라마는 여전히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묻혀 버리는 뻔하고 골치 아픈 국제 분쟁 보도로 잊혀졌던 것 같다. 한편, 아프가니스탄에서 들려오는 소식 역시 희망적인 것이 없었다. 성공적인 카불 진격에도 불구하고, 무자헤딘의 내각 구성 불발로 공격을 포기한 마수드가 다시 판지셰르 계곡에 은거하고 있다는 우울한 상황이었다. 세기말을 넘기며 탈레반의 횡포는 도를 넘고 있었으나 국제사회의 무관심은 여전했고, 2001년 탈레반이 바미안의 석불 파괴라는 초강수를 두자 그제서야 세계는 아프가니스탄의 혼란과 고통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말미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 즈음 마수드는 서방세계로 눈을 돌려 파리와 스트라스부르를 여행했으나, 마땅히 받았어야 할 환대는 없었다고 저자는 적고 있다. 

이 모든 혼란 속에서 마수드는 너무나 순수한 이상주의자의 초상을 하고 있었다. 정치가로서 가치가 있기에는 너무나 정직했다. 사실 마수드는 서투른 정치가였다. 나를 포함한 몇몇 기자들이나 기대를 걸어보기에 딱 알맞은 인물이었다. 더욱이, 미국 언론을 읽어보기만 하면, 그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거나 기껏해야 '프랑스의 매스컴이 좋아하는 카리스마적 인물'로 나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혹시 그가 궁지에 몰리게 된다면, 혹시 포탄이나 총탄 하나가 그의 모험에 종지부라도 찍는 날이 온다면, 누가 마수드를 그리워하겠는가? 그의 친구들, 가족들, 그를 진정으로 겪어본 몇 안되는 사람들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어떻게 되든 세상은 관심이 없다. 오늘날의 영웅은 더 이상 꿈이나 엄격함이나 용기나 끈질김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p421

저자는 아프가니스탄과 마수드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 같다. 영악하게 미디어를 다룰 줄도 몰랐고 심지어 영어를 구사할 줄도 몰랐던 마수드를 지켜보면서 그는, 오직 아프가니스탄의 평화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싸우는 마수드의 진가를 몰라주는 서방세계의 몰이해와 무관심을 안타까워하며 애가 닳아 어쩔 줄 몰라한다. 마수드가 단 한 번이라도 내심을 비춰주기를 갈망하며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그에게서는, 특종을 좇는 저널리스트의 욕망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수드는 누구에게나 그랬듯이 그를 존중하며 절도 있게 대했을 뿐, 그의 특별한 애정에 별다른 답을 하지 않는다. 저자가 자조하듯 고백하는 것처럼, 마수드에게는 아프가니스탄을 이해하지 못하는 서방 세계 사람들의 기분 전환 따위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긴급한 일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철없는 어른의 위험을 무릅 쓴 짝사랑에서는, 이방인으로서 한 순결한 인간과 아름다움이 파괴된 땅을 사모하며 돕고자 하는 진정성이 가득 묻어난다. 결국 대답을 얻지 못한 그의 질문들과 조금은 헛헛한 나레이션으로 채워지고 말았다는 마수드의 필름을 볼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평화와는 거리가 먼 아프가니스탄에 이렇게나 개인적인 감정을 얹어도 좋은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고 나는 저자가 보여준 아프가니스탄과 마수드가 참 좋아졌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어쩌면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전장으로 돌진하는 저자의 용기와 실천력이 부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가 믿고 존중하고 애정을 가진 대상을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고 또 그를 위한 가치 있는 기록들을 남긴 그가 참 부러웠다. 
 

서두에 적은 대로 마수드는 2001년 9월 9일, 9.11을 이틀 앞두고 자살폭탄테러에 의해 암살당했다. 아주 얄팍한 생각이지만, 잘만 포장하면 체 게바라처럼도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어졌다. 물론 우리는 동시대의 혁명가 혹은 신실한 전사를 받아들이기에는 꽤나 실용적인 이해관계에 기반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말이다. 독립적이고 강직했으며 평화를 위해 싸울 줄 알았던, 평화를 위해 때로는 진실을 뒤로 하고 패배를 택해야했던 한 사람의 진실을 알아주는 일이 요즘 세상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는 하다. 게다가 무슬림에 대한 오해와 부정의 시선은 또 어떤가. 아무런 복잡한 요소가 없는, 이제 우리(?)를 위협하는 그 무엇도 가진 것이 없는 박제된 체 게바라, 전혀 불편하지 않은 체 게바라 정도나 되어야 환영받으며 소비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 읽고 괜히 기분이 그래서 이리저리 책을 뒤적거리다보니, 책을 펴낸 날이 2004년 9월 9일. 아흐마드 샤 마수드, 그의 3주기 날이다. 이러면 출판사에 괜히 더 고맙다.  


2007-10-03 01:24, 알라딘



판지셰르의사자마수드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프랑스에세이
지은이 크리스토프 드 퐁피이 (꿈엔들,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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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21. 23:06


그때 나는 몰랐지만, 2003년과 2004년은 이주노동계에 큰 변화가 불어닥친 분기점이었다고 한다. 2003년 봄 안양으로 이사를 한 나는,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꿈(?)을 조심스레 꺼내 쓰다듬으며 첫 외출을 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주노동자 지원단체를 찾아가 자원활동을 하고 싶다고, 정말 뻘쭘하고 멋적었지만 정말 그러고 싶어서 용기를 낸 참이었다. 무시 당하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나를 맞은 분은 통역 능력이나 노무 혹은 법무 지식 같은 어마어마한 전문성을 이야기하며 마지못한 듯 자원활동 신청서를 내어주셨다.

허탈하고 좀은 서운한 마음으로 돌아온 나는, 괜시리 열적고 민망한 마음에 얼마 후에 있다는 자원활동가 오티를 가지 않았고 곧 다른 단체에서 일하게 되면서 자원활동은 아주 먼 일이 되었다. 그해 겨울 공부방 아이들과 함께 광화문에서 열린 행사에 다녀오는 길, 무척 긴박한 느낌이 드는 강제추방 반대 유인물을 받아들고 지하철에서 한참을 읽으면서야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당장 죽음으로 내몰리는 이들에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얼굴로 '당신의 친구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정말 잘 몰랐기 때문에 스스로를 탓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차례로 이어진 죽음들을 뒤늦게 확인하며 내가 가진 낭만적 대상화가 많이 머쓱해졌었다.

이 소설은 그런 험상궂은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랑을 찾아 네팔을 떠나 온 이주노동자 카밀과 가난으로부터 내몰려 한국에 온 사비나 그리고 미국 이민 생활에서 받은 유년기의 상처로 그늘 지고 무기력한 삶을 이어가던 여인 신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긴 이야기다. 저자는 2003년 11월 11일, 지하철 선로로 뛰어든 한 스리랑카 이주노동자를 텔레비전 뉴스에서 목격한 후 소설의 연재를 결심했다고 밝히고 있다. 강제추방 위기에 몰린 이주노동자들이 불안한 짐승처럼 쫓기던 끝에 줄을 이은 죽음의 행렬, 그 시작이었다. 

소설의 기둥을 이루는 줄거리는 카밀과 신우의 만남 그리고 카밀과 사비나의 재회를 둘러싼 이야기다. 철없는 양아치로 청소년기를 보내던 중 운명적인 사랑으로 이끌린 사비나를 찾아 한국으로 건너온 카밀이 겪은 험난한 이주 노동의 개인사, 가난하지만 당당했던 소녀가장 사비나가 한국에 와서 온갖 부조리한 상황에 내몰리며 경험하는 '돌아버릴' 것 같은 자잘한 사건의 일상들 그리고 '세상이 화안해요'라는 낯선 청년의 한 마디에 사로잡혀 스스로도 미처 몰랐던 모성애를 느끼고 삶의 안온함과 생활의 질곡에 빠져드는 신우의 이야기가 주축을 이룬다.

이름 있는 신만도 삼 천이 넘는 가난하지만 정신의 풍요로움을 가진(혹은 가졌다고 믿고 싶은) 네팔의 신비롭고 도저한 분위기가 소설 전체를 아우르면서도 중반 이후부터는 당시 급박하게 몰아닥친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한 묘사가 매우 구체적이고 자세하다. 주인공 카밀과 사비나 뿐 아니라 친구들의 이야기가, 이주노동자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사건을 망라한 에피소드로 생생히 전해진다. 특히 고용허가제 도입 시기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겪은 비참한 상황과 단속추방에의 대응, 차례로 목숨을 잃은 열 한 분의 이주노동자에 대한 이야기가 주인공 세 사람을 둘러싼 감정선과는 다른 톤으로 마치 르포처럼 고발된다.

신문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라선지(단행본 출간을 앞두고 다시 손을 보았겠지만) 부분부분 이야기가 끊어지는 감이 없지 않고 어쩌면 난삽하달 정도로 여러 가지 층위의 이야기가 복합적으로 펼쳐지지만, 한편 각별한 마음으로 읽다보니 꽤 여러 방면의 미덕을 가진 작품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주인공 세 사람의 삶과 사랑, 운명이 짜임새 있는 구성과 묘사로 이어지고, 네팔 혹은 소위 문명의 발전을 이루기 전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사람들의 생과 사를 넘나드는 믿음과 세계관이 이채롭게 펼쳐진다. 한편 이 땅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열악한 현실이 대다수 그들의 삶을 소재로 삼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매우 집요하고도 성의 있게 서술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이주노동자를 일방적으로 대상화하지 않는다는 점인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고 말하는 우리조차도, 이따금 겉모습만으로 누군가를 재단하고 경시하거나 미화하고는 한다. 이는 단지 이주노동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피부색과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람일수록 그런 편견은 강하게 작용하는 게 사실이다. 긍정적일 때조차도 그들을 마냥 선하거나 약한 존재로 인식하고 동정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게 아직은 우리의 수준이라고 생각되는데, 작가가 선택(?)한 입장은 그저 이주노동자들의 편에 서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편에 섬으로써, 그들의 투쟁과 사랑과 삶의 내밀한 구석을 살피고 그들이 처한 현실과 그들이 꾸었던 꿈을 눈물겹게 그려내는 데에 어느 정도 성공한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아쉬운 점도 없지 않았다. 문명 이전의 초자연적인 정신 세계와 그런 무구함을 간직한 네팔에 대한 저자의 애착 때문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그들의 2세 이야기로 급속히 뛰어넘은 소설의 에필로그는 너무 싱겁고 작위적인 마무리란 느낌이 들었다. 부분부분 편차는 있지만 작품은 비교적 팽팽한 탄력 위에서 이야기를 전개해가는데, 두 주인공의 비극적인 결말로 절정을 이룬 후의 이야기는 탁 풀어져 너무 설익은 화해와 봉합을 조장하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크게 볼 때 다소 헐거운 구성에 비해 인간 관계와 감정을 다루는 섬세한 묘사는 매우 탁월하고 풍부하며, 한 인간에 내재한 다양성이 박진감 넘치고 생동감 있게 그려져 읽는 동안의 몰입도는 꽤 높았다. 

실은 이야기를 읽으며 내심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네팔이 아닌 파키스탄 사람, 주인공 카밀의 생김 묘사와 딱 맞지 않음에도 읽는 내내 자꾸만 떠오르는 걸 어찌할 수가 없어, 중반 이후부터는 아예 머리 속에서 그가 주인공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실제 주인공이 분명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 못내 궁금해하고도 있었는데, 며칠 전 우연한 대화 속에서 누군지 알게 되어버렸다. 역시, 픽션과 현실의 차이가 얼마나 극명할 수 있는가를 다시 한 번 느끼며... 한편, 불행한 결말 속으로 뛰어드는 주인공과 달리 현실의 그는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실제로 이주노동자들의 삶이 하나 같지야 않겠지만, 짧지 않은 이야기 속의 두 문장이 아직은 그들의 삶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게 아닐까 싶다. 소설의 초반부, 신우의 집에 주저앉아 살려고 찾아온 카밀과 사비나가 달랑 손가방 하나씩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나누는 신우와 그들의 대화다.


 "아무 것도 없이 어떻게 살 거예요?"  "언제나 이렇게 살아왔는걸요."


2007-09-27 03:37, 알라딘



나마스테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박범신 (한겨레신문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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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21. 23:04


"전선기자 정문태 전선취재 16년의 기록"은, 너무 멀리 있다고 느꼈던 저 세계의 고통이 마음의 문을 두드린 최초의 책이었다. 오랜 시간 전선을 따르며 소외된 땅 잊혀진 사람들이 토해내는 단말마와 같은 통한을 담은 기자의 고발을 그저 지나칠 수 있는 독자는 얼마 없을 것이다. 알수록 골치 아프고 심사 복잡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무지와 무관심에의 반성은 그저 읽기라도 해야 알게나 된다는 그나마 팔자 편한 심사인 것도 사실이다. 그런 마음으로 집어들었다가 한 달이 넘도록 뇌리를 떠다니는 책이다.

분쟁전문가라는 타이틀을 단 저자의 책은 소재와 주제가 정문태 기자의 책과 흡사하지만, 서술과 기술 방식은 매우 상이하다. 최근에 쓰여진 제 3세계의 현대사 교과서와 같은 구성과 대체로 가치판단을 유보한 냉정한 기술은, 흥분과 절망보다 오히려 담담한 관조를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차라리'라는 탄식이 붙었어야 옳은 제목이지만, 책을 읽다보면 저자는 꽤나 명민한 현실주의자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학문적인 연구와 현장에의 경험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룬 책은, 3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와 3부가 학문적 지향을 가진 세계에의 분석이라면, 2부는 그러한 분석을 가능케한 뼈아픈 참여관찰의 보고서다.

'전쟁과 인간, 국가'라는 제목이 붙은 1부에서 저자는 인간이 전쟁을 하는 이유와 냉전 이후의 국제 분쟁에 대한 학문적 접근을 시도한다. 정치학자들이 유럽 근대국가의 기원으로 일컫는다는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끝없이 이어진 전쟁과 인간 본성의 관계에 천착했던 철학자들의 탐구가 소개된다. 특히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대한 공감과 동시대적 유효성에 주목하면서 냉전 이후 국제 사회를 주도하는 미국의 패권으로부터 세계 평화를 지켜내는 일은 유엔의 평화유지 기능 개혁을 통해 지향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물론 개별 국가의 주권보다 인권을 존중한다는 미명 아래 보편화된 소위 '인도주의적 개입'이 야기해 온 힘의 논리에 따른 국제 정치의 본질을 저자 역시 통감하고 있으며, 따라서 지금과 같은 미친 미국에 대한 우려는 책 전반에 걸쳐 높은 수위로 지속된다. 

2부에서 저자가 찾은 분쟁지역은 국제 분쟁에 관한 어느 책을 펼쳐봐도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고통스러운 땅들의 목록이다. 팔레스타인, 이라크, 보스니아, 코소보, 카슈미르, 아프가니스탄, 시에라리온 등이 현재 진행형이라면, 캄보디아는 오랜 분쟁의 수습 끝에 남은 너무 깊은 상흔에 몸부림을 치는 땅이고 동티모르는 그나마 다행이다 싶은 마음으로 평화의 미래를 빌어주고픈 작은 나라다. 그리고 저자는 게바라의 혁명기지이자 최후의 피를 흘린 볼리비아와 혁명 쿠바의 멍에 관타나모 수용소 그리고 '아메리카 요새에 갇힌 슈퍼 파워'라는 제목으로 미국까지를 아우르며 분쟁 지역의 참상을 전한다. '전쟁의 첫 희생자는 언제나 진실'이라는 저자의 머리말이 의심할 수 없는 명제임이, 비록 포연도 절규도 없는 행간에서나마 절절하게 느껴진다.

매 장이 시작되는 페이지에는 분쟁지도와 함께 '누가 왜 싸우나, 국제사회의 노력은, 사망자는, 난민은, 지금은, 면적, 인구, 종교' 등의 그 지역 일반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멀리 있다고 느끼는 만큼이나 단편적인 휘발성 독서로 만나게 되는 땅인 터라, 이렇게 집약된 전달이 효율적이고 편리하다고 느끼면서도 한편 한 국가의 면적, 인구, 종교 같은 항목과 동급으로 사망자와 난민이 등재될 만큼 이미 전시의 일상이 자리잡은 곳이라는 게 참으로 난망하다. 끝나지 않는 전쟁이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 막막한 어둠을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3부의 제목은 '21세기의 새로운 전쟁'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도 친근한 단어가 되어버린 '테러리즘' 혹은 '테러와의 전쟁', 정의의 전쟁과 불의의 전쟁에 대한 고찰 그리고 자살폭탄테러에 대해 다루고 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나 무시로 테러 관련 뉴스를 접하면서도 한국에서 폭발물 따위가 터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다. 저자는 '테러'의 역사적 뿌리를 설명하며 혁명 이후의 무질서와 반혁명의 기운 차단을 위한 공포의 통치를 옹호했던 로베스피에르의 "테러는 정의이자 덕(virtue)이다."라는 단언과 함께,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이후 과도기의 무정부주의 상태를 수습하기 위한 테러체제, 즉 공포정치를 새롭게 조명한다.

정의의 전쟁과 불의의 전쟁에 관한 논의는, 솔직히 말장난 같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저자는 사뭇 진지하게 국제법과 갖은 전쟁 이론들을 섭렵하며 나름 두 개의 전쟁에 대한 고찰을 수행한다. 국제법에서 규정하는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테러와의 전쟁'은 '새로운 전쟁'이라 일컫는다는 다소 맥빠지는 일반론을 확인하지만, '정의의 전쟁론'이 정의하는 전쟁의 불가피하고도 뚜렷한 이유와 수행 과정에서의 절제된 규범 준수, 신속한 상황 종결과 합리적 마무리 등의 원칙이 만약 현실에서 지켜지기만 한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정의의 전쟁과 관련한 저자의 작은 결론은, 어쨌거나 미국이 벌인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 따위는 도저히 정의롭지 않다는 당위의 확인이다.

에필로그를 대신하는 마지막 장은 '그 진한 고통의 내면세계'라는 부제를 붙인 자살폭탄테러에 관한 이야기다. 언론의 영향이 다분하겠지만, 은연 중 이슬람은 원래 그런가보다 했던 자폭테러가 실제로 지구상에 등장한 것은 채 30년이 안 된다고 한다. 이라크 역시 2003년 3월의 미군 침공 이전에는 단 한 건의 자폭테러도 없었다고 한다. 자폭테러를 '순교'라 주장하며, 하마스의 활동을 국가테러에 맞선 '테러의 균형'으로 정의하는 야신의 말이나, 어디에도 희망 없는 현실에 저항할 최초이자 최후의 수단으로 자폭테러를 선택한다는 그들의 절망을 함부로 '테러'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우리가 '테러'라고 인식하는 많은 것들은 입장의 차이에 따라 극명히 달라지는 대상일 뿐이다. 우리가 윤봉길이나 이봉창을 의사라고 부르듯이, 백범을 테러리스트라 했다해서 포탈이 들썩거리고 수십 개의 흥분 댓글이 달리듯이 말이다. 오히려 무엇이 테러인지를 밝히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한 자폭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고, 그들을 끊임없는 질곡으로 내모는 현실이 지구 저 편 어디에서는 악몽처럼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는 다음 이야기는 정말이지 섬뜩하고도 가슴 아픈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미국과 서유럽의 젊은이들은 영국의 베컴 같은 프로 운동선수를 우러러본다. 이슬람의 젊은이들은 자살폭탄테러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인물을 '순교자'로 우러러본다. 이것이 21세기라는 동시대를 사는 지구촌 젊은이들의 큰 차이이다. 이슬람 세계에도 사이버 문화가 널리 퍼져 있다. 이슬람 젊은이들이 자주 드나드는 전투적 웹 사이트들에는 지금 이라크와 이스라엘 등지에서 벌어져온 '영웅적 순교행위'(자살폭탄테러)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펼쳐졌다는 얘기로 가득하다. 불만족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 무력감을 떨쳐내고 출구를 찾는 이슬람의 진지한 젊은이들은 그런 웹사이트에서 대안을 찾아내고 기꺼이 스스로를 던지기에 이른다.

책을 읽은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는데, 가끔 국제 뉴스와 마주칠 때면 구석구석 박혀있던 이야기의 편린들이 다시 떠오르고는 했다. '북한은 야만정권'이라 씨부려대는 부시의 보도를 접하면서는,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텔레비전을 통해 봤던 동계 올림픽의 도시 사라예보가 포화로 철저히 파괴된 불모의 땅이 된 것은 물론 'balkanize'(분열하다)라는 영어 신조어까지 만들어내고만 지금의 발칸반도 상황이 떠올랐다. 아무리 지정학적 위치 어쩌고 해봐야, 무차별 공습의 기선 제압이 대세인 얍씰한 보신주의 전쟁판에서 한반도라고 언제까지나 예외가 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반공교육의 오바가 다분했겠지만, 어린 시절 잦았던 등화관제 훈련과 심심찮게 날아오는 중공기와 더불어 울리던 싸이렌 그리고 실체를 알 수 없는 절망감 같은 것이 떠오르기도 한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저자에게서는 지극한 현실주의자의 면모가 느껴진다. 단 한 순간도 전시를 살아보지 않은 주제에, 이따금 내가 꿈꾸는 어떤 변혁이나 무정부적인 세계에의 섣부른 낭만 따위는 아주 자근자근 뭉개졌다. 그것은 차마 민망하여 게바라의 얼굴을 새긴 티셔츠를 입지는 못하지만 눈에 띌 듯 말 듯 핸드폰 고리 정도는 달고 다녔던 소심한 동경과 애정 표현 따위, 혹은 자폭테러에 스러져간 마수드의 이야기를 찾아 읽으며 발산하는 감동과 찬탄 따위를 완전 무색하게 만드는 냉정한 직시였다. 책을 읽으며 내가 느끼는 세계의 고통은 어쩌면, 우울한 나들이 중에 잘못 내딛은 발걸음으로 얻은 작은 상처만도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상록수 부대의 파병과 관련한 반대여론, 분쟁 지역의 난민촌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 '국익'을 선점하는 일본 정부와 비정부기구의 활동 등을 예로 들면서 한국전쟁 당시 국제사회로부터 받은 도움과 한강의 기적, 올림픽 개최,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으로서 한국이 국제사회에 갚아야 할 빚 따위를 운운하는 대목은 정말이지 아연했지만... 나와는 다른 입장에서,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치열하게 세계의 평화와 공존을 고민하는 저자의 진지한 이야기는 충분히 값진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세상의 꿈 역시 현실에 고스란히 묻혀버릴지 모른다,고 나는 또 시건방지게 생각한다.


2007-09-27 02:46, 알라딘



나는평화를기원하지않는다국제분쟁전문가김재명의전선리포트
카테고리 정치/사회 > 국방/군사 > 전쟁사
지은이 김재명 (지형,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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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21. 23:02


자의식 비슷한 게 생겨난 후에는 누구나 자신의 특별함에 대한 믿음을 가슴 깊은 곳에 새기며 살아간다,고 나는 믿는다. 스스로를 정말 보잘 것 없다고 말하는 사람조차도 '나 자신'의 고유함에 대한 무의식 같은 것이, 실은 저 밑바닥에서부터 사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거칠 것 없는 매력이나 청춘의 눈부심 따위가 물리적으로 사라진(?) 나이가 된 후에도, 젊은 날 꾸던 꿈을 생활 뒤로 물리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유독 그랬던 때가 아련히 떠오른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아침, 전철을 탈 일이 있어 책장 앞을 서성이다 골라들었다. 여름 휴가는 가을날로 받아놨지만 어딘가로 떠날 형편은 못 되고, 그렇다고 떠나고 싶은 바람마저 아주 모른 체 할 수는 없고. 정갈하고 깔끔한 표지가 주는 단정한 느낌에 조용한 기대를 품었다. 책을 받아 훌훌 책장을 넘겨보았던 날은, 너무 공들인 아기자기한 편집이 오히려 거슬려 도로 책장에 꽂아버렸었다. 대체 무슨 기록이길래 이렇게도 유난스레 시각을 장악하려 드는 걸까 싶기도 했었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상찬을 하는 책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용히 책장을 넘긴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책을 읽고 느꼈을 법한 진한 공명이 내게도 자주 와닿았다. 기실 세상은 얼마나 많은 인간들로 북적이는지, 대다수와 다른 특이한 성정과 기질을 타고난 사람들만 모아도 도시 하나 만들 만큼은 족히 될런지 모르겠다. 한 사람의 고유성과 별개로, MBTI니 애니어그램이니 하는 인간의 성향을 무리로 구별 짓는 잣대가 받는 각광 역시, 결국 어떤 부류로건 묶이고야마는 인간의 보편성에 생각이 미치게 한다.   
하지만 십 년을 훌쩍 넘겨 쌓이고 쌓인 기록의 정수를, 달리는 차 위에서 집어삼키듯 읽어낸 것이 예의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이라기보다 사람 같았고, 기록이라기보다 마음 같았다. 젊은 날의 맹세와도 같은 고요한 치기를 세월이나 나이듦에 묻어버리지 않는 혹은 묻어버릴 수 없는 태생의 절절한 고백들. 참으로 많은 곳을 오랫동안 여행 중인 떠도는 영혼의 이야기들을 그저 건조하게 넘기고 있는 내가 괜히 아쉽기도 했다. 
 

눈이 오래 머무는 행간에서는 이따금 '황색눈물'이 자아냈던 아련함이 떠올랐다. 잠재울 수 없는 열정과 물 오른 패기에 휘둘리며 빛나는 스스로에 현혹되었던 많은 청춘들이, 조금은 주눅 들고 조금은 포기한 채 평온한 평범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 우리들 대다수의 삶이라는 씁쓸한 동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 대다수에 속하지 않는, 삶의 모든 시간을 청춘의 질감으로 채워나가는 사람에게서 전해오는 막연한 동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빛나는 청춘의 한 때에 붙박혔던 낭만과 몽상을 여전히 붙들고 가는, 내 삶과는 많이 다르지만 응시하며 응원해주고픈 꿈을 접어버리지 않은 사람인가 싶었다. 방랑을 향하는 삶의 자장 속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혹하지 않는 나직한 울림, 동요하지 않는 조용한 끌림. 내겐 참 적당했다. 여전히 모르는 채로, 그가 내내 그리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2007-08-11 01:51, 알라딘


끌림
카테고리 여행/기행 > 기행(나라별) > 세계일주기행
지은이 이병률 (랜덤하우스코리아,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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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21. 23:01


하종강 님의 새 책이 나왔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한겨레21'에 연재했던 인터뷰글 모음집이란다. 이 역시 '하종강의 노동과 꿈'에 가면 대부분 다 볼 수 있지만, 한 권의 책으로 묶인 글들을 책장 넘기며 읽는 맛은 또다른 것이다. 꽤 두툼한 책을 받아들고, 이 많은 사람들의 겹겹이 주름진 삶을 삽시에 읽어내려가려면 꽤 숨이 가쁘겠다 싶기도 했는데 너무 쉽게 책장을 넘긴다는 미안함 약간을 빼고는 읽는 내내 역시나 감동스럽고 행복했다. 연재 시기가 몇 년 전이다보니 읽으면서 지금은 어찌 살까 궁금해진 사람들의 근황까지 짤막한 후기로 덧붙인 저자의 정성도 고맙다.
 

저자가 정한 '비교적 간단'한 기준 덕분에, 인터뷰 주인공 중에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 기준이란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 우리 사회의 모순된 억압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는데 기여하지 않는 사람, 운동권 내에서조차 중심에 우뚝 서 있지 않은 사람, 투쟁 대열의 끄트머리쯤에 겨우 참여했다가 전투경찰에 쫓겨 골목에 숨어 두려워 떨었던 사람,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고 화려한 조명을 받을 일도 없지만 진정한 우리 사회의 주역인 사람...... 이다.

오랜 세월 동안 노동 상담과 교육 활동을 해 온 저자의 이력 탓인지, 인터뷰이들 중 다수가 저자와 인연이나 면식이 있는 사람들인 듯 했다. 게다가 저자는 특유의 섬세함이랄까 속 깊은 정으로 오래 전 스쳐간 인연의 자락을 기억하고 끄집어내어 인터뷰를 핑계 삼아 다시 만난 그들의 현재와 과거를 찬찬히 적어내린다. 지극히 평범하거나 혹은 지극히 외곬이거나 한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모두들 참으로 쉽지 않은 선택을 자신의 길이라 여기며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과 각별한 심정을 나누며 살아가려면 얼마나 바쁘고 정신이 없을까, 뭐 이런 시덥잖은 생각이 곁가지를 치다가... 문득, 산만하고 정리되지 않는 인간 관계를 짐으로 여기며 일정 기간의 만남이 없으면 지레 마음에서 접어버리곤 하는 내 행태에 생각이 미쳤다. 수많은 싸이 일촌과 네이트온 친구 리스트를 자랑처럼 여기는 시끌벅쩍한 세상 한 쪽에 대한 조용한 반발치고는, 나는 너무나 무책임하게 인연의 끈을 거둬들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늘 만나고 안부를 주고 받는 것 이상으로,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다가 어느 날 우연히 반갑게 마주치거나 안부를 전해듣는 것이 또한 사람살이의 별미이고 소중한 기쁨일텐데 말이다. 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한시적으로 무척 가난하다는 이유로 언제부턴가 주변을 단속하고 사람 만나는 일 자체를 부담으로만 미뤄두며 살고 있는 내 모습이, 실은 꽤나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쉽게 마음 주지 않으며 문을 꼭 닫아둔 채 상처 받지 않으려 혼자 있기를 고집하는 내 모습이 괜스레 안스럽기도 했다.

아무려나, 자리를 지키며 살다가 저자의 인터뷰 요청을 받은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거절을 거듭하다가 마지못해 응해서는, 남다를 것 하나 없이 그저 자기 할 일을 할 뿐이라고 담담히 말한다. 그런 그들의 평범하되 굴곡지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모두 옮기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아직도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반복하는 저자의 마음이 애틋하다. 제각기 가는 길도 사는 모양새도 다르지만,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겸허하고 그런 그들에 대한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않는 저자의 따스하고 정겨운 마음이 행간에 오롯이 묻어난다.

솔직히 말하면, 읽다가 반한 사람이 어찌나 많았는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상형의 모습으로 출몰해 정신이 다 없을 지경이었다. 속으로 멋지다! 를 연발하다보면, 그예 이어지는 것은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사랑하는 가족들 이야기. 아무렴 이렇게나 멋잇는 사람이 설마 짝이 없겠냐 싶어 괜히 김이 빠지기도 했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반문하며 우습기도 했다가. 나도 모르게 삼천포로 빠지는 생각이 어디서부터 왔을까도 잠시 돌아보다가...  


물론 길고 긴 삶의 한 과정을 뚝 떼어내고 짧은 시간의 인터뷰로 정리한 글에서 일상사의 잔주름들까지, 한 사람의 인간이 가진 고유한 개성과 고약한(?) 습성까지 모두 담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불가피한 축약과 강조 속에는 분명, 의도되지 않은 미화와 피워올리고 싶은 감동도 함께 반죽되었을 터이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것은, 인생사건 무엇이건 정점의 순간 불타오르는 희열과 흥분이 거두어진 후 남겨진 평시의 비루함을 견디는 일일테니 말이다.

실은 얼마 전부터, 너무 이런(?) 이야기들에 골몰하면서 치열한 삶의 의지를 다지기보다는 오히려 어줍잖은 선망과 헛꿈의 지수만 높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자기 검열이 없지 않다. 처방전도 없이 사들인 약을 땡기는 대로 먹어가며, 정작 필요한 운동은 내팽개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은 흙탕물 위에 띄워놓은 튜브 위에 앉아 물이라도 튈까 근심어린 얼굴로 오염된 물을 굽어보고만 있는 것은 아닌가.

인간 대 인간이라는 혹은 인간 자체라는 복잡하고도 오묘한 존재와 관계에 대한 부담스러운 고민을 돌파하는 일은, 골몰하는 생각이 아니라 만나고 부대끼는 체험으로나 가능한 것일 터. 내 경우라면 분명 복합적으로 생동하는 인간을 대상으로 쉽게 열광하고 쉽게 지겨워하는 버릇에 대한 각성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 못지 않게, 지난한 인내와 의식적인 이해의 노력이 또한 더해져야 할 것이고. 어쨌건 실천적 노력 없이 그저 주워섬기듯 읽으며 감동 받고 잊어버리는 반복이 되지는 않아야겠다는 새삼스런 다짐. 

사실 생각해보면, 내 주변에도 최소한 '단면'이나마 아름다운 사람들은 수두룩하다. 단지 근접했을 때 느끼게 될 어떤 적나라한 동질성과 마주치고 싶지 않은 내 이기심이 자꾸만 멀리로만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일 뿐. 여전히 모든 인간이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인간도매금론에는 동의할 수 없는 형편이지만, 그러나... 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건 오랜 시간 한결 같고 또한 더불어 살아가려는 진심에 기반한 것이라면 그것은 내가 환장하는 어떤 지점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훌륭하고 가치있는 것이라는 당연한 교훈을 확인한다. 지나치게 제도를 저주하는 나의 습성이 혹 어떤 열등감과 불안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고백과 더불어.

길게 주절거렸지만, 매우 개인적으로 뻗어나간 다단한 감상을 제외하면...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서 본의 아닌 냉소를 날리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착한 마음과 열심히 살아낼 용기를 듬뿍 선사하는 '아름다운' 책이다. 우후죽순 쏟아지는 자기계발서들과 비교할 바는 물론 아니지만, 혹여나 이런 좋은 책이 내게 와서 독이 되지 않도록 정신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좀 까칠한 감상이 되어버렸네. 무던하고 눈물 나는 이야기들이 수두룩하다보니 딴에는 지병인 감동 중독에의 매몰을 경계한답시고 그렇게 되어버렸다. 마지막으로... 하종강 님의 쾌유를 진심으로 바란다.


2007-07-18 02:44, 알라딘


 

길에서만난사람들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복지 > 노동문제 > 노동문제일반
지은이 하종강 (후마니타스,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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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21. 22:57


지난 여름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을 읽으며, 들어본 이름인데... 정도였던 하종강 님의 홈피를 지금껏 열심히 드나들고 있다. 묵은지같은 글들을 찾아읽으며 세상엔 아직 변명하지 않는 좋은 사람들이 참 많구나 생각하고, 한편 그들 참 따스하고 즐겁구나 생각하며 괜히 기분이 좋아질 때가 많다. 그 하종강 님의 산문집이 새로 묶여 나왔다, '하종강의 중년일기'라는 소박한 부제를 달고서.

많은 사람들이 올라섰다가 내려선 길에 아직도 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역시 일찍이 그 길에서 내려섰으나 제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직도 그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이고, 그 만남 속에서 저는 거의 매번 감당할 수 없는 소중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렇게 길 위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물 한 잔 떠다 주는 일이라도 성의껏 하며 살자는 것, 그래서 최소한 '길을 막는 사람'이 되지는 말자는 것, 그것이 길가에라도 남아 있기 위한 저의 다짐입니다.

그의 일기가 시작되는 첫 장 '풀꽃편지'의 여는 말이다. 길에서 내려선 사람들은 뒤돌아가는 줄로만 알아 서운했고, 길에서 내려서면서는 바라보는 것만도 미안해 돌아서야하는 줄 알았던 어느 시절이 떠올랐다. 물론 그저 길가에 남아 길을 막지 않는 사람이라도 되고자 한다는 저자의 도저한 겸허가 곧이 들리지 않지만, 내려섰다고 생각한 후부터 줄곧 길을 향한 짝사랑에 삶을 건 그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설령 그렇다해도 길가에 있기 때문에 길 위의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고 그래서 길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맴돌기라도 해야겠다는 새삼스런 의지.

'철들지 않는다는 것', 세상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일에서 자주 나오는 관용구이기도 하지만 90년대 중반에 대학 생활을 한 사람들 중의 일부에게는 자연스레 떠오르는 노래가 있을 것이다. 90년대 초중반 거의 해마다 음반을 내며 무수히 투쟁의 현장을 달궜던 조국과 청춘의 노래 '새세대 청춘송가'.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민망하다, 오랜만에;;;) 한총련의 진군가가 담겨있었던 그들의 세번째 음반 테이프 앞면의 첫 곡이었다.

'내가 철들어 간다는 것이 제 한 몸의 평안을 위해 세상에 적당히 길드는 거라면 내 결코 철들지 않겠다'는 그야말로 가열차고 패기만만한 선언과도 같은 가사의 이 노래를 우리 모두는 정말 사랑하였다. 이후의 가사는 갈수록 가관, 하염없이 점입가경인데 노래를 만든 윤민석의 행보(그러고보니 최근황은 모르겠다, 여전히 '송앤라이프'인지...)가 꽤 한결같았다는 걸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불리어지며 가사가 전파한 주술의 힘 역시 믿을만 한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때 우리에게 철이 든다는 것은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멀쩡히 졸업해 사회로 나가는 것이었을까. 물론 그것이 운동의 끝은 아니겠지만 경험이라고는 그것뿐이었던 내게, 5월이며 8월의 대중집회에 얼굴을 내미는 졸업선배들과의 조우는 약간 묘한 기분이었던 것도 같다. 아프게 철들고 안타깝게 철들고, 어쩌면 철들지 않고 싶었지만 철들 수밖에 없었던 많은 사람들. 하지만 그들이 여전히 소리없이 주위를 맴돌며 마음 한 켠 내어주고 있다는 걸 그대로 남아있는 사람들은 가끔 잊어버리곤 했던 것도 같다. 어쩌면 '철들지 않겠다'며 세상 많은 것들과 벽을 치고 모여앉은 그 속은 깊고도 고립된 청춘의 우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훌훌 넘어가는 책장을 느끼며 실은, 전작의 고요한 강렬에 비해 너무 싱거운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크게 보잘 것 없는 이야기들 속에서, '노동'을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노동'과 '노동자'를 늘 심연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들 속에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한껏 푸근해지고 말았다. 온라인으로 이미 읽었던 글들도 적지 않고 워낙이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마치 내가 잘 아는 마음 약하고 착한 이웃 아저씨의 공책을 들여다보는 느낌이기도 했다.


가끔 그렇게 '성공하겠다는 집념으로 가득찬 성실함'을 마주 대하면 숨이 막힌다. 지하철에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노약자에게 자리 양보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자주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보다 더 인간의 내밀한 고민으로 시선을 돌리는 새로운 '혁명'이 왜 하나같이, 좀 더 살기 편해지는 쪽으로, 좀 더 유명해지는 쪽으로, 좀 더 돈을 많이 버는 쪽으로, 부당한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탄압 받지 않는 쪽으로만 향해지는지,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유난히 수줍음이 많았던 그 친구는 10년 넘게 대학 선생을 하다가 칼국수집 주인이 된 것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멋쩍었는지, 말을 하면서 계속 더듬었다. ... 전국의 칼국수 집 주인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칼국수 장사가 대학 선생 일보다 못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10년 세월 동안 자신이 노력한 분야에서 승부를 보지 못한 친구가 안쓰러웠을 뿐입니다.


운동의 당위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걸려넘어지는 어떤 경직이나 사소한 일에 대한 무의식적 경시 같은 것을 그의 글에서는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일상의 오감이 '노동'을 향해 열려있지만 잠식되거나 매몰되지 않고 오히려 풍부한 외연의 확장으로 이어진다는 느낌은, 글이 반영하는 삶의 진정성이 아닐까. 얕은 분노로 시작된 거친 합리화를 관철하기 위해 자주 공허하고 대책없는 주장을 남발하는 스스로의 가벼움을 되돌아보기도 했다. 한편, 하종강 님이 말하는 '부채감'과는 차마 비교도 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나름 작은 부채 하나는 오래 달고다니며 느꼈던 비빌 언덕 만난 듯한 동질감. 

너무 금세 읽어버려 좀은 허무하기도 하고 분량이 너무 적은 것 같아 좀은 아쉽기도 하지만 어쩐지 '철수와영희'가 크게 삿된 욕심을 내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기쁘게 책장을 덮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철들지 않을 것인가를 고민하며, 또한 관성을 넘어서는 반성의 힘을 기대하며. 


2007-07-06 00:45, 알라딘



철들지않는다는것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하종강 (철수와영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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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