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니 두툼한 책 한 권에 박았던 머릿속에는 십여 년 전의 아프가니스탄 상황밖에 남아있는 게 없다. 2001년 주인공 마수드가 텔레비전 인터뷰를 빌미로 접근한 자살폭탄테러에 세상을 떠난 뒤,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문득 궁금해 검색창에 아프가니스탄을 쳐봤더니 대통령은 여전히 탈레반 체제 전복 후 미국이 갖다 앉힌 하미드 카르자이, 오늘도 카불에서는 경찰버스에 자폭테러가 일어나 10명이 사상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샘물교회 피랍 사건의 여파도 잠잠해졌고 더불어 한국에서는 다시 없었던 땅처럼 관심 밖으로 사라졌지만, 여전히 아프가니스탄은 불안한 고통에 잠겨있는 땅일 것이다.
국제분쟁에 관한 책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너무 고백해서 민망하지만, 이 책을 만나게 된 것 역시 정문태 기자의 책 한 꼭지가 발단이었다. 그는 책 말미 '가슴에 묻은 이야기들'이라는 장에서 미처 기사로는 송출하지 못했던 개인적 소회 다분한 네 편의 글을 묶어놓았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전설, 마수드', 소위 '판쉴의 사자'로 불렸던 한 사람의 이야기는 무척 강렬하고 인상적이었다. 9.11과 마수드의 죽음을 긴밀히 연결시켜 단일 음모로 조망하는 그의 글에는, 마수드에 대한 존중과 인정이 매우 각별하게 넘쳐흘렀다. 그리고 마수드를 묻은 2주 뒤, 10월 7일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외세가 득실거리는 아프가니스탄뿐. p333 그 글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분쟁을 다룬 거의 모든 책에 아프가니스탄은 빠짐없이 등장한다. 종족, 종교, 외세, 소련, 미국, 파키스탄, 탈레반, 북부동맹, 연합전선 등의 어지러운 키워드들 역시 어김없이 뒤따른다. 몇 권의 책을 통해 반복되는 이야기들을 아무리 주의 깊게 읽어도 균형 잡힌 사고와 입체적 적용력이 떨어지는 나에게 남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은 정말 어쩔 수 없는 뒤죽박죽 땅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거의 20년 동안 수 차례를 드나들며 현장의 밀착취재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특별한 애정을 간직한 저자의 이 기록을 접하고서야 나는 조금 정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여기서 다루고 있는 마수드를 중심으로 한 1990년대 후반까지만 말이다.
책을 쓴 크리스토프 드 퐁피이는 프랑스의 프리랜서 다큐멘터리 작가로서 1981년부터 수 차례 아프가니스탄의 현장을 찾아 30편 이상의 다큐를 제작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1979년 겨울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아프간 전쟁에서 북부의 판지셰르 지역을 중심으로 항전하며 공동체를 조직해 온 마수드라는 인물의 소문이 저자에게 전해진 것은, 전쟁 초기 그곳에서 국제의료지원단 활동을 했던 지인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고도의 위험을 무릅 쓴 은밀한 불법여행이었던 1981년의 첫 번째 잠입 이후 그가 마음속에 품었던 것은 마수드라는 한 인간에 대한 궁금증만은 아니었다.
필름에 담자.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알리자. 그렇다, 우리는 순진했다. 우리 이전에 다른 사람들도 이미 전쟁의 참상들을, 인간 세계에 존재한다고는 믿을 수 없는 온갖 지옥의 모습들을 전했었다. 심지어 위험을 무릅쓴 증언의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희생시킨 이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었다. 혹은, 달라진 것이 너무나 적었다. 아니, 틀렸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텔레비전에다 그 잔혹성을 토해 놓았고, 급기야 미국 국민들로 하여금 구역질을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전쟁은 끝이 났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p74
아프가니스탄은 타지크족, 우즈베크족, 투르크멘족, 하자라족, 키르기즈족, 파쉬툰족 등이 주요 인종을 이루며,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파키스탄 등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다. 아프가니스탄 역시 다른 분쟁국들과 마찬가지로 가치 있는 천연 자원과 분열 가능성을 지닌 다민족 구성이라는 조건으로 인해, 20세기의 중반 이후 미국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파키스탄과 소련의 틈바구니에 끼어 오랫동안 고통 받아왔다. 소련 침공 이후에는 판지셰르를 거점으로 치열하게 대소항전을 벌여온 마수드를 제외하면, 지도자라 할 만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이권과 권력을 쫓는 저열한 이합집산에 매진한다. 저자의 말을 빌자면 소련군으로 인해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든 이후로 아프간 역사에 전매특허가 되어버린 '아프간식 배신행위'다.
1989년 소련이 물러간 후에 아프가니스탄의 분열상은 더욱 노골적으로 가속화되었다. 공식 철수와 함께 소련이 내세운 아프간 공산주의자들의 임시정부를 아프간 국민들이 받아들일 리 만무했고, 힘 다 빠진 소련이 필사적으로 갖다붓는 지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실적으로 장악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한편, 소련과의 항전 기간 동안 상황이 어려워지면 곧잘 해외로 내빼거나 이전투구에 몰입했었던 주요 지도자들은 각기 휘하의 무자헤딘을 이끌고 개선장군이 되어 아프간 전체를 대상으로 새로운 땅따먹기를 벌이기 시작한다. 주요 도시들의 통제권을 놓고 정부군과 각 지역 사령관들 사이의 명분없는 내전이 곳곳에서 벌어지지만, 1992년 배신과 음모로 점철된 불안한 동맹으로나마 마침내 무자헤딘 그룹은 카불 점령에 성공한다.
하지만 랍바니 대통령과 '아프간 저항군'의 일곱 개 정당 및 파벌들이 연합한 내각의 구성원들은, 이미 복합적인 증오와 분노의 함수관계 위에서 복마전의 연합을 유지해왔던 터였고 대부분 권력에 눈이 멀어 자기 이익 챙기기에만 혈안이 되어있었다. 십 년의 대소항전 동안 단 한 번도 아프간을 떠나지 않고 싸웠던 유일한 사령관 마수드는 무자헤딘이 해방시킨 카불에서 국방부 장관으로서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지만, 오랜 전쟁에 따른 무질서와 혼란상은 오히려 가속화되며 치안 부재의 상황으로 치닫고 카불은 완전히 수습 불가의 무법지대로 변모한다. 그 와중에 마수드의 오랜 적수이자 필요에 따라 각종 외세를 등에 업으며 자신의 안위와 축재에 몰두하던 파쉬툰족의 수장 헤크마티야르는, 국무총리 자리를 요구하며 미국으로부터 지원 받아 빼돌렸던 미사일로 카불을 불바다로 만들기에 이른다.
그 사이 파키스탄과 미국은 새로운 계획을 준비한다. 닳고 닳은 데다가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아프간의 파벌들로는 자국의 이익을 담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파쉬툰족을 중심으로 남부에서 결성된 탈레반은, 초기에는 이슬람교의 가르침에 따른 엄격한 규율로 오랜 전쟁의 혼란에 지친 국민들에게 희망으로 떠올랐다. 남부의 칸다하르를 본거지 삼아 세력을 넓히던 탈레반은 미국과 파키스탄의 지원을 등에 업고 무서운 기세로 약진을 거듭한다. 당시 친미 탈레반 정권의 카불 접수는 투르크메니스탄으로부터 파키스탄에 이르는 가스 송유관 건설이라는 미국의 이해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996년 9월, 이미 지도력과 행정력이 바닥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카불이 또다시 불바다가 되는 것만은 막으려했던 무자헤딘들은 탈레반의 무혈 입성을 뒤로 하고 카불을 떠난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정교일치의 이슬람 근본주의를 지향하는 탈레반의 극단적 통치 아래 놓이게 된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저자의 직업은 다큐멘터리 작가이다. 이 글은 그가 거의 열 번에 걸쳐 드나들며 제작한 아프가니스탄과 마수드에 대한 여러 다큐멘터리 작품들에 따르는 부수적인 산물이다. 기록은 일목요연하기보다 대체로 저자의 기억과 맞물리는 에피소드 중심으로 이어지며, 특히 1997년 판지셰르에서 만난 마수드와의 일화들이 매우 구체적으로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1981년의 첫 만남 이후 아프가니스탄의 자연과 사람들에 애정을 갖게 되고 마수드라는 아직은 검증되지 않은 한 인간에 매료된 저자는 1990년대 초중반의 카불 진입과 점령 그리고 퇴각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저항군 지도부'가 보인 난맥상과 마수드의 부침을 꾸준히 목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1997년, 거의 칩거하다시피 판지셰르 계곡에 틀어박혀 카불 진격을 준비하는 마수드를, 그가 무려 15년 이상 주목하면서 때로 실망과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존경과 신망을 아끼지 않는 사령관 마수드의 진면목을 카메라에 담고자 하는 일념을 갖고 다시 아프간을 찾은 터였다. 그는 한 사람의 저널리스트이기 이전에 진심으로 마수드의 정직성을 믿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진정한 하나의 국가가 되기 위해 오랫동안 전쟁으로 고통 받아 온 아프가니스탄의 평화로운 미래를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간절히, 바위처럼 과묵한 마수드의 입을 열어 진심 어린 고백을 듣고 싶어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이 보아온 '평화의 사람' 마수드를 자신의 필름에 담아, 배신과 음모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아무도 돕지 않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도 꿋꿋이 제 길을 가는 마수드의 진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하는 순수한 저널리스트였다.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카불로 왜 돌아가고자 하는가? 절망하지 않고 어떻게 19년 동안이나 전쟁을 할 수 있었는가? 도스톰처럼 도무지 존경할 구석이 없는 자와 왜 동맹을 맺었는가? 그리고 또, 하자라족을 대량학살한 사이야프와 왜 동맹을 맺었는지 설명해 달라. 동료들의 죽음에 대해, 평화를 향한 꿈에 대해, 가족에 대해, 아들과 세 딸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내 카메라 앞에서 자신을 털어놓아 달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찍는 필름은 전쟁의 수장으로서의 그에 대한 전설에 관한 필름 하나를 더 보태게 될 뿐일 테니까. p326
하지만 끝내 그는 원하는 것을 필름에 담을 수 없었다. 마수드는 특출난 전략가이며 강인하고 투철한 평화의 전사였지만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며 하소연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중간중간 저자가 고백하듯이, 십 수 년의 인연이어도 결국엔 아프간과 무관한 서방세계의 언론인일 뿐인 그에게 마수드가 할 말은 별로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는 끊임없이 마수드를 신뢰하고 또 그가 건설하고자 하는 여성이 권리와 사회적 지위를 갖게 되고 국교가 이슬람교인 다인종적이고 현대적인 국가 아프가니스탄에 지지를 보낸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자들과의 동맹이나 카불 점령기에 적절한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한 마수드에게 실망하기도 하지만, 겸손하고 정직한 마수드의 태도와 토로를 옮기며 그는 오히려 변호인을 자처하는 것 같다.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한 나라를 이끌 만한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들이 전혀 아니었어요.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들은 더더욱 아니었고요. 대부분이 전쟁 때문에 학업을 중단한 사람들이었어요. 행정업무를 수행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정당마다 권력이 자기네들에게 이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경찰은 무장한 사람들로 하여금 법을 존중하게 만들 수 있는 수단을 전혀 갖추고 있지 못했지요. 나 자신도 전쟁에만 완전히 몰두해 있는 바람에 내 주위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충분히 관심을 기울일 수가 없었어요. 나는 지금에 와서는 심지어 판지셰르에 혜택을 준 게 아무것도 없다는 비난까지 듣고 있는데, 그게 사실이에요." p320
무자헤딘이 카불에 입성한 지 두 달 후에 마수드가 랍바니 정부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주목한 외국 관측자는 거의 없었다. 마수드는 권력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시를 수호하는 군사적 임무를 맡았다. 마수드는 그 대가를 지금까지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여러 파당들과의 싸움 때문에 매번 떠나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인데도 말이다. p373
저자는 1997년 7월의 만남에서, 마수드의 카불 진격 작전에 동행한다. 전장의 한 복판에서 초조한 기다림과 공포에 위축되는 스스로를 느끼며, 한 번 실패했던 무자헤딘 사령관이 그의 마지막 지지자들과 모든 것을 걸고 벌이는 최후의 공격 준비와 진행 과정을 꼼꼼히 기록한다. 그는 초긴장 상태의 전선에서 마수드가 보이는 침착하면서도 상대방을 압도하는 지도력과 배움도 용기도 심지어 무기도 부족한 그의 부하들이 서로를 향해 보이는 존중과 존경 역시 감동적으로 기록한다. 때로는 그의 주변에 포진한 능력 부족의 참모들을 탓하기도 하면서, 명민한 측근들을 키워내지 못한 마수드의 한계를 안타까워하기도 하면서. 비무장 민간인으로서 갈 수 있는 마지막까지 함께 한 저자는 샤말리 고원 전투의 위험을 넘기고 해방된 카리사르를 뒤로 하며,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전장을 떠난다.
프랑스로 돌아간 저자는 전장의 한 복판에서 기록한 영상물을 통해, 무엇이 대규모 공격의 기반이 되었는지 그리고 마수드가 변호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미디어의 힘을 통해 설명할 요량이었다.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지원은 전무한 상태에서 때로 '프랑스의 사람'으로 오해를 받아온 마수드에 대해 저자는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고, 그보다는 별의별 사람들이 얽히고 설켜 끝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복잡한 땅에서 단연 도덕적이고 올바른 대의명분을 지켜나가는 마수드를 서방세계에 변별시키고 싶은 욕구를 잠재울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죽어 하나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체 게바라와 달리, 아흐마드 샤 마수드는 바로 지금 먼 땅에서 무려 20년 간 외롭고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16년 전에, 처음 마수드에 관한 필름을 촬영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카메라를 잡는 일이 과연 의미가 있는 일인지 의문을 품어보지 않았다. 시선이 미치는 곳에 있는 것을 열심히 촬영하면 증언을 쓸모있는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언론매체에서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해설자가 곧 신탁이다. '스타'이고, 그럴싸한 영웅이다. 최근의 세계사에 관한 이른바 나레이션에 잔뜩 끼어 있는 온갖 부정확한 내용들을 보고서,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저들이 얼마만큼이나 아프가니스탄을 이슬람 테러리즘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는지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은 CIA의 정신나간 조언자들이 지옥의 불을 가지고 장난을 쳤는데 말이다. p401
그러나 미디어는 그의 바람대로 본질을 밝히는 보도를 전혀 하지 않았고, 그가 아프간에서 겪었던 엄청난 감동의 드라마는 여전히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묻혀 버리는 뻔하고 골치 아픈 국제 분쟁 보도로 잊혀졌던 것 같다. 한편, 아프가니스탄에서 들려오는 소식 역시 희망적인 것이 없었다. 성공적인 카불 진격에도 불구하고, 무자헤딘의 내각 구성 불발로 공격을 포기한 마수드가 다시 판지셰르 계곡에 은거하고 있다는 우울한 상황이었다. 세기말을 넘기며 탈레반의 횡포는 도를 넘고 있었으나 국제사회의 무관심은 여전했고, 2001년 탈레반이 바미안의 석불 파괴라는 초강수를 두자 그제서야 세계는 아프가니스탄의 혼란과 고통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말미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 즈음 마수드는 서방세계로 눈을 돌려 파리와 스트라스부르를 여행했으나, 마땅히 받았어야 할 환대는 없었다고 저자는 적고 있다.
이 모든 혼란 속에서 마수드는 너무나 순수한 이상주의자의 초상을 하고 있었다. 정치가로서 가치가 있기에는 너무나 정직했다. 사실 마수드는 서투른 정치가였다. 나를 포함한 몇몇 기자들이나 기대를 걸어보기에 딱 알맞은 인물이었다. 더욱이, 미국 언론을 읽어보기만 하면, 그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거나 기껏해야 '프랑스의 매스컴이 좋아하는 카리스마적 인물'로 나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혹시 그가 궁지에 몰리게 된다면, 혹시 포탄이나 총탄 하나가 그의 모험에 종지부라도 찍는 날이 온다면, 누가 마수드를 그리워하겠는가? 그의 친구들, 가족들, 그를 진정으로 겪어본 몇 안되는 사람들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어떻게 되든 세상은 관심이 없다. 오늘날의 영웅은 더 이상 꿈이나 엄격함이나 용기나 끈질김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p421
저자는 아프가니스탄과 마수드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 같다. 영악하게 미디어를 다룰 줄도 몰랐고 심지어 영어를 구사할 줄도 몰랐던 마수드를 지켜보면서 그는, 오직 아프가니스탄의 평화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싸우는 마수드의 진가를 몰라주는 서방세계의 몰이해와 무관심을 안타까워하며 애가 닳아 어쩔 줄 몰라한다. 마수드가 단 한 번이라도 내심을 비춰주기를 갈망하며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그에게서는, 특종을 좇는 저널리스트의 욕망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수드는 누구에게나 그랬듯이 그를 존중하며 절도 있게 대했을 뿐, 그의 특별한 애정에 별다른 답을 하지 않는다. 저자가 자조하듯 고백하는 것처럼, 마수드에게는 아프가니스탄을 이해하지 못하는 서방 세계 사람들의 기분 전환 따위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긴급한 일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철없는 어른의 위험을 무릅 쓴 짝사랑에서는, 이방인으로서 한 순결한 인간과 아름다움이 파괴된 땅을 사모하며 돕고자 하는 진정성이 가득 묻어난다. 결국 대답을 얻지 못한 그의 질문들과 조금은 헛헛한 나레이션으로 채워지고 말았다는 마수드의 필름을 볼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평화와는 거리가 먼 아프가니스탄에 이렇게나 개인적인 감정을 얹어도 좋은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고 나는 저자가 보여준 아프가니스탄과 마수드가 참 좋아졌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어쩌면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전장으로 돌진하는 저자의 용기와 실천력이 부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가 믿고 존중하고 애정을 가진 대상을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고 또 그를 위한 가치 있는 기록들을 남긴 그가 참 부러웠다.
서두에 적은 대로 마수드는 2001년 9월 9일, 9.11을 이틀 앞두고 자살폭탄테러에 의해 암살당했다. 아주 얄팍한 생각이지만, 잘만 포장하면 체 게바라처럼도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어졌다. 물론 우리는 동시대의 혁명가 혹은 신실한 전사를 받아들이기에는 꽤나 실용적인 이해관계에 기반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말이다. 독립적이고 강직했으며 평화를 위해 싸울 줄 알았던, 평화를 위해 때로는 진실을 뒤로 하고 패배를 택해야했던 한 사람의 진실을 알아주는 일이 요즘 세상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는 하다. 게다가 무슬림에 대한 오해와 부정의 시선은 또 어떤가. 아무런 복잡한 요소가 없는, 이제 우리(?)를 위협하는 그 무엇도 가진 것이 없는 박제된 체 게바라, 전혀 불편하지 않은 체 게바라 정도나 되어야 환영받으며 소비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 읽고 괜히 기분이 그래서 이리저리 책을 뒤적거리다보니, 책을 펴낸 날이 2004년 9월 9일. 아흐마드 샤 마수드, 그의 3주기 날이다. 이러면 출판사에 괜히 더 고맙다.
2007-10-03 01:24,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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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지셰르의사자마수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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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크리스토프 드 퐁피이 (꿈엔들, 200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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