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5. 21. 22:55


몇 주 전 처음으로 분회 모임에를 나갔다. 모임을 알리는 문자를 받고, 서너 시간 동안 문자를 너댓 번은 들춰본 것 같다. 갈까, 말까. 어지간해선 현관 문고리 한 번 안 잡는 월요일, 헌데 내가 통과하지 못한 같은 시간대를 비슷하고도 다른 풍경으로 그러면서도 멀리 한 곳을 향해 왔던 사람들이 지은 세 권의 책을 연달아 읽으며 마침 반성(?)을 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는 감히 27년 전 5월의 잔혹한 시간들에 눈과 마음을 박고 몇 권의 책을 읽으며... 혼자서 두 세상을 나눠 사는 듯한, 딴에는 자초한 어지러움의 날들을 보내는 중이었다. 

편히 숨 쉬며 읽는 것조차 미안해지는 이야기들, 단지 나는 그렇게 그리고 그때에 태어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다는 단념도 마땅치 않았다. 누구나 겪는 성장통도 세계의 온 고통을 다 빨아들인 듯 눈물 뚝뚝 흐르는 이야기로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운 극한의 연속인 삶의 경험도 담담하고 당당한 이야기로 채우는 사람이 있다. 이럴 수 있을까 싶으리만치 둘러싼 모든 상황이 열악 그 자체인 저자의 체험담을 읽으며, 나는 인간이 때로 얼마나 단단한 존재인가를 새삼 느꼈다. 이런저런 핑계로 외면해왔던 일상에의 침잠을 조금이라도 걷어보고 싶어졌다, 고작 분회 모임에 얼굴 내미는 용기를 내는 것이라도 말이다.

제목 '소금꽃나무'는 저자가 5년간 일했던 한진중공업 동료들의 등짝에서 피어나던 피땀꽃의 이름이다. 그녀 역시 피워냈을 그 꽃, 어쩌면 숲을 이루었을 시절이 그녀에게는 황금의 시절이었나보다. 바로 옆에서 일하던 동료가 죽어나가도 어찌할 수 없는 사선같은 사업장이었지만 '하니까 되더라는 최초의 경험'들이 줄을 이었던 '사는 것 같은 날들', 장난 같고 놀이 같은 기발한 투쟁들로 공장의 활기를 높이고 노동자들의 사기를 높인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한진중공업은 민주노조 이십 년 역사, 여섯 명의 노조위원장 중 두 명이 죽고 세 명은 감옥 갔던 악명 높은 현장이었다.

지난 번 위원장 선거가 끝나고 어떤 아저씨가 그러셨습니다. "내는 김주익이 안 찍었다. 똑똑하고 아까운 사람들, 위원장 뽑아 놓으면 다 짤리고 감방 가고 죽어 삐는데,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김주익이를 우째 또 사지로 몰아넣겠노?"

알다시피 김주익 위원장은 2002년, 크레인 위의 기나긴 고공농성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쪼끼' 아저씨 운운, 노조만 보면 좋아 죽는 나의 허황된 낭만이 부끄럽고 섬뜩해 소름이 돋고 눈물이 핑 돌았다.

읽으면서 아무래도 하종강 님을 함께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떠나온 자의 부채감을 늘 저변에 깔고 있는 하종강이 바라보는 노동운동이 한없이 감싸고 싶고 믿어주고 싶고 밀어주고 싶은 어떤 '정의'라면, 김진숙에게 노동운동은 끊임없는 배반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당차고 오지게 가야만 하는 '현실'이다. 현장에서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어온 김진숙에게는 연대가 있을뿐 연민은 없다. 동감이 있을뿐 동정은 없다. 그들의 삶을 여기까지 끌어온 원동력은 공히 부채감이지만 김진숙에게 그것은 오히려 가차없고 신랄한 현실을 직시하는 힘이다. 

실은 풀빛에서 다시 나온 '윤상원 평전'을 한 달 넘도록 곁에 두고 뒤척이고 또 뒤척이는 중이었다. '윤상원 평전'이 남긴 아쉬움을 내 선에서 해결(?)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읽거나 쓰고 싶지 않다는 변태같은 고집을 혼자 부리며 한참을 보내는 중에, 즈음 당도한 몇 권의 책표지에 절로 가는 눈길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 첫번째 책, 보내주신 고마운 님의 마음까지 더해져 한달음에 읽혔다. 나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았으나 벌써 '2쇄'가 찍힌 속지가 반가웠고, '그런'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을 것 같다는 심증은 어디선가 읽었던 그녀의 글에 대한 기억과 겹쳐지며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민주 노조 운동 20년. 부모형제 내팽개치고 살면서 내가 이 바닥에서 온몸으로 굴러 온 게 20년이 넘었는데, 두렵더라도 나부터 돌아볼 때가 되지 않았나. 허덕거리며 살다 보면 불현듯 고향에 몹시 가고 싶은 날이 있듯이.

라고 말머리를 연 이 책이 결국, 아주 오래 망설여왔던 분회 모임의 문을 여는 손잡이가 되어주었다. 이따금 들르는 당지역위 싸이트에서 발견한 그녀의 이름, 6월 당원교육의 강사로 올라있는 그 이름을 보고서 나는 며칠을 집중적으로 고민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었고, 그러나 투쟁이 아닌 일상 당 활동에 내딛는 발걸음은 옮기기가 참 쉽지 않았다. 분회와 학습 모임, 당원 교육과 같은 일상적인 지역위 활동에 얼굴을 내미는 것 자체에 대한 모종의 두려움이 적지 않았던 까닭이다.

주변 사람들은 꽤나 열혈(?)로 오해하고 있지만, 사실 '당원'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기회주의적 배수진을 늘 등 뒤에 둔 것이었다. 어디나 다를 바 없는 조직 생리에 대한 거부감과 냉소 그리고 거리두기는 거시적 환호와 미시적 거부, 지역위 활동에의 외면과 선택적 투쟁 참여로 일관되어 왔었다. 그나마도 이주단체에서 일하면서부터는 주말 일정 참여가 거의 불가능해져 9.24 평택 평화대행진 이후에는 다시 유령당원으로 돌아온 터였다. 물론 복잡하게 얽혀있는 정치적 관계망속으로 휘말려들고 싶지 않은 의도적인 물러섬이기도 했다. 역시 나는 소위 진보의 비단길만을 열망하는 기회주의자였다,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야간고등학교에 진학하려는 꿈조차 관리자에게 짓밟히고, 뭔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는 강학들을 신고할까 말까 갈등하며 아쉬운 대로 야학을 드나들었다는 김진숙. 노느니 장독 깬다는 심정으로 어느 비오는 날 집어든 전태일 열사에 관한 책을 통해 '자신이 벌레가 아니'라는 환희와 희열을 느낀 후로부터 삶이 달라졌다는 김진숙. 그후의 삶은 분명 벌레처럼 살았던 이전보다 더욱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그녀는 스스로도 자신을 믿을 수 없는 날들을 통과하며 민들레처럼 낮고 질긴 인간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변질이라 손가락질하고 혁신을 요구하는 전교조에 대해 지극한 믿음과 애정을 '여전히' 보내는 그녀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었던 자긍심을 발현하는 교육에 대한 신뢰와 그로부터 출발한 전교조의 정신을 지켜나가는 많은 교사들에 대한 지지와 더불어 비정규직과 학습지 교사에 대한 연대를 소망한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보이는 불철저함과 정치적 계산에 대해 고민하고 비판하기보다 이름 없는 노동자들의 충심과 진정성을 주목하며 노동운동의 희망으로 삼는다. 

삼성을 이건희가 현대를 정주영이 만든 것이 아니라 피땀 흘리며 일한 노동자가 만들었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조차도 낯설게 받아들이는 오늘의 우리에게, 만 5년을 바다 위의 용접공으로 살았던 그녀는 간결하고 대차게 주장한다. '거북선은 우리가 만들었다'고. 체험을 통해 다져진 그녀의 시선 그리고 신념은 근본적이고도 명료하다. 울분과 통한의 추모사로 수없이 많은 동료들을 열사로 떠나보내면서도 흔들림 없이 묵묵한 그녀를 보며, 별 하는 일도 없으면서 싸움의 정당성을 찾고 뒷걸음의 핑계를 찾아왔던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시기 노동운동의 전망'이라는 거창한 제목이 붙은 그녀의 강연은, 온전히 노동운동속에 녹여온 삶을 반증이라도 하듯 그저 세상 사는 이야기였다. 20만 이주노동자를 불법으로 낙인 찍고 서서히 목줄을 조여오는 제도의 폭압, 1300만 중에서 이미 800만이 넘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어찌할 수 없이 소수자인 구조조정의 논리, 정당한 파업에 대체인력을 투입하고도 무지막지한 손배소 가압류를 통해 노조와 노동운동을 무력화시키는 자본의 통치, '그래서 결국은 아무도 남지 않는' 신자유주의의 미친 소용돌이. 헌데, 그런 세상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웃음이 나고 기운이 났다.


그래요. 저는 5년 전에도 똑같은 죄목으로 구속된 적이 있는 전과잡니다. 대통령은 바뀌었어도 노동자를 둘러싸고 있는 노동 현실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라면 지나친 자기 합리화일까요? ...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릴께요. 법이 곧 정의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같이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이 배가 등가죽에 붙어 가면서 정의를 소리 높여 외치지 않더라도 그저 법이 정의이기만 하다면. 그렇다면…….

책의 마지막, 그녀가 적었던 '항소이유서'의 일부다. 그녀의 말마따나 '저 혼자 종치고 민주화됐다고 믿는 인간이 수요 이상으로 출하'된 비극의 시대에 이십 년이 넘도록 그녀가 싸우는 이유다. 또한 세상이 이미 달라졌다고 너무 쉽게 믿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우리가 여전히 의심하고 싸워야 할 이유가 아닌가 싶다.  


2007-07-04 00:40, 알라딘



소금꽃나무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 사회학일반 > 사회비평에세이
지은이 김진숙 (후마니타스,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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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21. 22:51


" …… 목숨이 아깝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고 외치는 저나 여러분 모두 오늘 밤 죽기는 싫습니다. 하지만 점점 더 커지는 총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이 깜깜한 밤중에 광주를 뒤덮은 공수부대의 총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광주시민을 어둠 속에 몰아넣고 총질을 해대는 살인마들을 저대로 내버려둬야 옳습니까. 광주시민이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면 광주시민은 오늘밤 다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 몇 시간 후, 아니 30분 뒤에라도 여러분과 저는 영영 이별을 할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는 영원히, 살아서는 두 번 다시 얼굴을 못 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광주시민이 우리를 기억할 겁니다. 우리의 죽음이 곧 살아있는 역사로 기록될 겁니다. 광주와 광주시민들은 결코 오늘밤을 잊지 않을 겁니다. 오늘밤 도청에 있는 우리를 영원히 기억할겁니다. …… ."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을 사수하다 전사한 광주민중항쟁 지도부 대변인 윤상원이 계엄군의 진격 소식에 마지막 항전을 준비하며 시민군들에게 남긴 말이라고 한다. 솔직히 좀은 불퉁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는 중이었지만, 이 대목에서 양팔에 소름이 돋아버렸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똑바로 마주할 수 있는 사람, 마음 한 번 달리 먹으면 피해갈 수 있음에도 그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 그 강함과 그 의지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윤상원을 생각할 때 곧잘 아옌데를 떠올린다. 전장이되 전장이 아닌, 투항과 삶을 얼마든지 맞바꿀 수 있는 상황에서 선택하는 죽음. 
 

지독히도 가난한 집안의 장남, 줄줄이 딸린 동생들의 양보와 부모의 온갖 바라지를 독차지하고 도시에 유학하며 가세를 일으킬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전후 세대의 많은 농촌 출신 장남들의 운명이었고 갈 길이었으며, 양 어깨에 매달린 책임감으로 내달려 자수성가한 뒤에는 집안의 어엿한 기둥으로 오직 가족에 복무한 우리의 아버지 삼촌들이 있었다. 1950년, 전남 광산군 임곡마을 곤궁한 농가에서 여섯이나 되는 동생들의 장남으로 태어난 윤상원 역시 마찬가지.
 

열심히 공부하고 출세해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장남의 무게에 짓눌리며 중학시절부터 도시에서 유학한 그는, 그러나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보다는 사춘기의 방황과 반항으로 학창시절을 보낸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 담배로 시름을 날리면서도 저 하나 바라보고 뼈빠지게 일하는 부모 생각이 떠나지 않았던 소년. 끼도 많고 재주도 많고 입심도 좋아 주변에 많은 친구들이 늘 함께였던, 그러나 도시 친구들 사이에서 유달리 가난한 자신의 처지가 늘 마음 한켠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던 소년이었다.
 

삼수를 하고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1971년, 박정희의 독재가 서슬 퍼렇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억압의 기운 가득한 캠퍼스에서 걱정거리 주렁주렁 달린 지난한 현실 대신 연극반에서 맛보는 무대 위의 희열에 열정을 태운다. 그 시절 누구도 예외일 수 없었던 유신의 공기를 느끼면서도, 대학에 가서는 사람 구실 하리라는 온 집안의 기대를 배반할 수 없었던 그는 군생활을 끝내고 복학한 후에 외무고시 준비에 매달렸다.
 

그리고 어느 날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다 풀려난 선배 김상윤과의 만남, 말 그대로 운명을 바꾼 그 만남으로 그의 삶은 갈등 속에서도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긴급조치가 난무하는 폭압의 정치 속에서 어렴풋이 유혹처럼 다가오곤했던 저항의 의지와 시대에 헌신하고자 하는 신념을 막아섰던 것은 언제나, 극도의 가난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가족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는 부모와 동생들이었다. 청춘의 혈기와 솟구치는 의협심, 양심의 소리 속에서 끝없이 번민하며 그는 '마지막 효도'로 졸업과 취업을 선택해 상경했지만, 어렵사리 합격한 은행에서의 직장생활은 육개월로 끝이 났다.
 

전남대의 '교육지표 사건'에 연루되어 피신한 후배들과의 만남을 통해 결심을 굳힌 그는 1978년 여름, 광주로 내려와 공장에 취업해 노동자로 살아가며 광주지역 노동운동의 기틀을 잡고자 모색을 시작한다. 그러던 중 당시 광천공단에서 들불야학을 꾸리던 학출 노동자 박기순의 설득으로 야학에 합류하고, 김상윤과 녹두서점을 함께 운영하며 한편 그 곳에서 주민운동을 펼치던 김영철 등과도 연대활동을 이어간다. 비록 '마지막 효도'라는 전제를 달기는 했지만 서울로의 취업 상경에서 육개월 만에 돌아와 광주에 붙박힐 수 있었던 것은, 대학시절 김상윤과의 만남 이후 꾸준한 학습과 토론을 통해 시대와 운동에 대한 고민을 놓치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그가 광주로 돌아온 후 80년 5월 항쟁까지 활동했던 광천동은 공단 인근의 빈민촌이었던 시민아파트를 중심으로 주민운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인접한 들불야학은 지역의 종교단체와 노동자들의 희망으로 활기 어린 공간이었고, 김상윤이 광주의 지역운동 거점으로 삼아 문을 연 녹두서점과도 긴밀히 연계하고 있었다. 윤상원은 이 시절 광천공단노동자실태조사 등을 수행하는 지역운동과 불의의 사고로 이르게 세상을 떠난 박기순이 헌신했던 들불야학 활동 그리고 녹두서점 일 등에 동시에 관여하며 광주지역 노동운동의 싹을 틔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80년 피의 광주에 앞선 서울의 봄. 학생운동을 비롯 오랜 억압 속에서 암중모색 중이던 다양한 운동이 새로운 세상을 맞을 준비로 바삐 움직이던 때, 그는 부평에서 열린 '전국민주노동자연맹' 결성 집회에 광주전남 지역을 대표하는 중앙위원으로 비밀리에 참여했다. 한편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광주전남지부 실무자로 내정되어 합법과 비합법을 오가며 본격적인 대외 활동을 준비하던 청년운동가였다. 그와 동시에 자율적 총학생회 건설의 기회를 맞은 전남대에서 총학생회장에 출마한 박관현을 돕고 들불야학과 광천동 주민운동, 녹두서점을 챙기며 함께 활동하는 이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 갈등과 준비 끝에 운동에 투신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그토록 자신을 옭아매던 가족도 내팽개치고 혼신을 다해 매달렸던 노동운동이 채 싹을 틔우기도 전에, 광주에는 피냄새 가득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치밀한 준비와 계획 하에 일찌감치 사전 검속으로 운동권 지도부들을 연행한 군부는 저항하거나 혹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민들을 상대로 살육작전을 감행했고, 분노한 시민들은 처절하게 투쟁했지만 사상자만 속출하며 속절없이 무너져갔다.
 

윤상원과 들불야학팀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채 외로운 항거를 지속하고 있는 광주 상황을 보며 투사회보와 민주시민회보 등을 제작해 뿌린다. 그리고 계엄군이 물러난 해방 광주의 수세적이고 타협적인 시민학생수습대책위를 보며 시민궐기대회를 조직하고 25일 마침내 새로운 항쟁지도부를 꾸리기에 이른다. 그러나 시민들의 분노와 통한을 담아 결사항전을 각오한 항쟁지도부의 결성 역시 너무나 늦었다. 불과 이틀만에 압도적인 물리력으로 공습을 감행한 계엄군에 의해, 도청을 중심으로 최후까지 광주를 사수하던 시민군들은 장렬히 전사하거나 투항하고 만다. 
 

도청 민원실 2층 창가에 총구를 대고 최후의 결전에 임했던 윤상원은, 계엄군의 총격으로 복부 관통상을 입고 죽었다. 함께 있던 김영철과 이양현이 시신을 옮기고 덮은 커튼에 불이 붙었고, 후에 외신 기자의 카메라에 잡힌 그의 시신은 창자가 흘러내리고 불에 탄 처참한 상태였다고 한다. 윤상원은 성명미상으로 분류한 계엄군에 의해 시청 청소차에 실려 망월동에 가매장되었고, 죽은 지 한 달이 다 되어서야 아버지가 확인하고 봉분했다.
 

알려진 대로, 지인들에 의해 1982년 들불야학의 박기순과 영혼결혼식이 진행됐고 1997년에는 새로 조성된 망월동 신묘역에 합장되었으며, 2001년에는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식 인정되어 '명예회복'되었다. 1991년에 나왔던 평전 '들불의 초상'의 재개정판이 지난 달에 출간되었고, 지난 해에는 불에 탔던 그의 생가가 복원되었다고 한다. 며칠 전 모교인 광주 사레지오고교에서는 그의 동상제막식이 있었다 하고, 그의 일기를 묶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집도 새로이 나왔다고 들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다시 '부활'하는 것일까.
 

사실 책을 읽으며 아쉬운 점이 한 둘이 아니었다. 조금 다른 느낌이기는 했지만 지난 달 출간된 '윤상원 평전'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내가 느낀 아쉬움은 최소한의 성의 내지는 진정성의 결여로부터 온 것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불과 서른 해를 살다가 '영웅적인 죽음'만이 세인의 주목을 끈 한 인물의 삶을 재구성하는 일 자체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삶을 증언할 수많은 사람들이 생존해있는 시점에서, 그의 일기와 기록들이 생가를 장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토록 평면적이고 단순한 어린이 위인전 같은 책을 만들어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다. 
 

이 책의 저자는(물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시리즈물이다보니, 저자는 책표지에서 이름을 찾아볼 수도 없을만큼 크게 존재감을 갖지 않지만), 서두의 작가의 말에서 인물에 대한 짙은 애정을 드러낸다. 하지만 '아름다운 결단'의 근원을 묻는 그의 절절한 물음까지만 나는 공감했다. 책을 읽는 내내, 광대의 끼를 타고나 시름이고 걱정이고 소리 한 자락으로 잊으며 유유자적 살았던 낭만적이고 순박한 청년과 운동에 헌신해 죽음의 투쟁 한복판에 뛰어든 치열한 투사의 극적 대비에만 안이하게 머물렀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별로 납득되지 않는 화자의 시점 혼용과 맥락없이 뒤섞이거나 출처를 밝히지 않은 인용은, 가뜩이나 불만스런 심정에 몰입마저 방해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구구절절 기록하고야 만 것은... 그의 저항과 그의 죽음이 어쩐지, 도처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소리 없는 아우성에 갇혀버린 듯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나 역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수없이 부르면서도, 이 노래가 그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곡이었다는 것을 참으로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기억은 사라지고 기념은 때가 지나면 잊혀지기 마련, 그의 삶과 죽음의 정신은 어찌되었건 '계승'하기 위해 애써야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졌다.


2007-06-07 03:33, 알라딘



윤상원
카테고리 정치/사회 > 정치/외교 > 정치사상 > 정치투쟁
지은이 편집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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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21. 22:47


'전선기자 정문태의 전쟁취재 16년의 기록'을 읽고서 마구 고무되어, 한달음에 읽어내려갔던 책이다. 사실 따로 '아시아네트워크'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이미 몇 년 전에 네트워크에 참여한 아시아 각국 기자들의 글이 묶여 책으로까지 나와있었다. 뿐만 아니라 언제인지 모르게 내 책장에도 떡하니, 아마 ngo학과 수업을 청강하며 참고자료랍시고 사두었던 모양인데 도무지 기억에 없다. 새로운 일을 하면서 조금씩 극복하기 시작했지만, '아시아'에는 관심도 없고 애정도 없는 편향된 의식이 이렇게 드러나고 만다.
 

'아시아네트워크'는 아시아인의 눈으로 아시아를 보자는 취지로 2000년 9월 '한겨레21'을 통해 아시아 20여개 국의 언론인과 민주화운동가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오랜동안 서구 외신의 눈을 통해 스스로를 바라보며 세계를 읽었던 상식의 역설을 넘어서고자 하는 독립적인 시도. 그러나 이 실험을 주도한 정문태 기자가 쓴 머리말에는 뼈아픈 반성과 자책에도 불구하고 결국 '언론인들만'의 네트워크로 시작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과 함께 앞으로 펼쳐진 멀고 먼 여정에 대한 나름의 의지가 담겨있다.
 

뉴스상품을 장악한 언론자본의 폐쇄성과 공고함 앞에 대륙과 역사의 근친성 따위는 너무나 순진한 연대의 로망이었을까. 아무려나, 그렇게 시작된 길의 첫 번째 보고서가 나온 게 이미 4년 전이다. 책은 아시아 14개국 기자들의 기사를 주제별로 묶은 네 개의 장과 세 사람의 특별기고문까지 총 5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마지막 장 '내릴 수 없는 깃발'에서는 특별기고자들의 짧은 자서전 세 편이 이어지는데, 버마학생민주전선의 의장이었던 나잉옹과 동티모르의 초대 대통령 사나나 구스마오 그리고 팔레스타인 하마스의 지도자 야신이 그 주인공이다.
 

오해와 왜곡 혹은 어떤 시선이 그대로 고착되어 상식이 되어버린 아시아의 전설들에 대해 까발리는 1장 '해묵은 거짓말', 쌍동이처럼 반복되는 비극을 간직한 아시아 각국의 5월 그리고 아시아 국가들과 한국전쟁의 내적 연관과 미국 혹은 서구에 유린당한 아시아의 공분을 담은 2장 '그들도 우리처럼',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세계화와 지역화 혹은 양자의 공존을 다각적으로 모색하는 3장 '혈통과 민족을 넘어', 섹스와 젠더의 문제 그리고 아시아적 인습 속에서 장벽 또는 디딤돌로 작용하는 여성을 고찰하는 4장 'sex of asia'까지가 기사 묶음이다.
 

글들은 기사를 재수록한 것이 많은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좀 들쭉날쭉한 느낌이 없지 않다. 심도 있는 분석 기사가 있는가 하면, 가십성의 가벼운 기사도 적지 않다. 하지만 나처럼 아시아에 무심해온 독자라면, 현장의 목소리와 내부자의 관점을 담은 자국의 소리가 꽤 흥미롭고 신선하게 느껴질 거라고 생각된다. 서구로부터 발신되 외신을 그대로 주워섬기는 일에 대한 비판도 과분할 만큼 나는 외신에도 별 관심 없는 편이었다. 알려면 너무 어렵고 알게 되면 심사 복잡해지는 세계의 이야기에 아주 조금씩이나마 의식적으로 노출되기 시작한 것도 불과 이삼 년 사이의 일인데, 특히 아시아쪽은 스치듯 들어도 그야말로 난망함을 감출 수 없는 소식들이 너무 많았다. 참 징글징글한 반복이다 생각하며 무심히 넘겼던 사연들.
 

책장을 덮고 문득 어렸을 적 사회과부도가 떠올랐다. 4학년이 되면서 처음 받은 것 같은데, 그 책은 이전까지의 교과서와는 뭔가 다른 차원이라는 느낌이었다. 저학년때 끝났다고 생각했던 커다란 판형에, 미술이나 음악책처럼 허랑하게 얇지 않은 두께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속에 담긴 알록달록한 그림과 지도들. 사회과부도를 손에 넣은 이후로는, 덮었던 책장을 펼쳤을 때 나오는 그림에 나온 사람 머릿수를 헤아려가며 이겼네 졌네 하던 따위의 교과서 장난은 빠이빠이였다. 
 

생소한 국명과 재미있는 지명, 복잡한 국기들을 유심히 살펴보던 우리는 이따금 아이엠그라운드 나라이름 대기, 수도 이름 맞추기 같은 학구적인 게임을 포스트교과서 장난으로 삼기 시작했다. 아싸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를 주워섬기고, '만두'가 들어가는 네팔의 수도 이름에 깔깔거리고, 대만과 타이완이 같은 나라인지 아닌지 내기를 했다. 지배질서도 패권도 서구문명도 몰랐던 어린 마음은 그렇게 순진하게 단지 우리나라와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묘한 애정과 초보적 동류의식을 피워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지구본 같은 건 어쩌다 가는 과학실에나 있었고 세계지도 역시 자주 접할 수 없었던 시절, 그때 우리에게는 미국이나 유럽보다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게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었다. 아무리 뚫어져라 살펴봐도 삼면이 바다인 외로운 한반도, 아래는 재수없는 일본이 바나나마냥 휘어감싸고 있고 위로는 무서운 북한과 더 무서운 중공이 있었다. 그 위에는 아악 소련! 그래서 찾아보기 시작한 게 어디서 주워들은 5대양 6대주에 근거한 '우리 아시아' 대륙의 나라들이었다. 구라파는 너무 멀었고, 미국도 바다 건너 한참. 어린 눈에는 한반도에서 한 뼘이면 다 들어차는 아시아의 나라들이 어쩐지 친근한 이웃처럼 보이기도 했었다.
 

같은 바닥에서 피어오른 탓인지 아시아의 작은 나라들은 참으로 유사한 근현대의 난국을 거쳐왔다. 하지만 일찌감치 개발독재로 진공적 경제성장을 이룩한 우리에게 주입된 아시아는 언제나 우리 발치 쯤 수직적 연계선상 하에 있었던 듯 싶다. 그리하여 현재적으로 의미있는 아시아 역시 동아시아시대 중심국가로 발돋움고자 하는 대한민국 주변에 포진한 성장 잠재력과 투자 가치를 겸비한, 대장 노릇하며 이것저것 빼먹기 좋은 순진한 골목 쯤으로 인식되고 있는 건 아닐까.
 

물론 권력과 자본의 관점은 언제고 변할 리 만무하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시선은 오래 전부터 조금씩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화하고 있다. 압축적 경제성장이 아닌 한국의 민주화와 운동을 주목하고 연대하는 많은 단체들, '80년 광주를 통해 민주화의 성지를 만들어내고 87년 항쟁을 통해 민주화를 쟁취한' 한국을 배우겠다는(?), 군사독재 아래 고통받는 나라 출신의 이주노동자-활동가들 역시 적지 않다고 알고 있다. 우리는 너무 오래 개천에서 난 용마냥 서구에 대한 동경과 반아시아적 사고 속에 길들여져 왔지만, 결국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서로 만나고 소통하며 변해가는 모양이다. 어린 시절 사회과부도를 들춰보던 마음으로만 돌아가도,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는 가뿐히 과거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007-05-25 01:52, 알라딘



우리가몰랐던아시아
카테고리 정치/사회 > 정치/외교 > 국제관계 > 동북아국제관계
지은이 아시아네트워크 (한겨레신문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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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21. 22:45


책을 읽기 전까지 '전선기자'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저자가 첫 장에 자세히 설명하고 있기도 하지만 소위 '종군기자'라 하면 어릴 적 교과서에서 만났던 시인 구상 정도 혹은 '라이프'지나 '퓰리처'상 같은 것들과 관련된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 뿐이었다. 게다가 염두에 없는 중에도 나의 무의식은, 전쟁 혹은 전선에 뛰어드는 사람들을 막연히 어떤 호전적 기질을 가진 이들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말하지 않음으로 명예롭게 사라져가고자 했다는 '전선기자 정문태'는 '벙어리의 변명'이라는 글로 서문을 연다. 거액의 계약금을 낼름 받아먹은 탓이라고 했지만... 전선의 기자를 시민사회가 파견한 전쟁의 감시자로 인식하고 있는 그가 두 개의 침략전쟁을 바라보며 느낀 분노와 불쾌감 같은 것이 책을 쓴 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기록은 그가 세상을 향해 발신했던 기사들에서 미처 밝힐 수 없었던 전쟁의 이면을 세세히 증언한다.
 

어쩌면 오늘날의 전쟁보도는 삐라와 다를 바가 없다. 자본과 패권의 취사선택을 거친 일방적 보도가 무방비상태의 시민들에게 공습처럼 날아든다. 그것이 전지구적으로 양산되는 폭력의 대부분을 전담하는 미국과 결부되어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은 많지 않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뒤늦게 읽고서 가슴이 뛰고 머리가 열리는 느낌이었다.(물론 금세 닫힐 것이다만) 필사를 하듯 타이핑을 해놓은 구절들을 몇 번이나 되짚어 읽으며 나의 무지와 외면의 부채감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다.  
 

책은 전선의 꽃, 전선의 부랑아들 / 나의 혁명, 나의 해방구 / 끝없는 전쟁 / 멀고 먼 전선 / 비밀전쟁 / 가슴에 묻은 이야기들 이라 소제목을 붙인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있다. 정문태라는 개인의 경험이자 '전쟁과 언론은 필연적으로 적대관계여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전선기자의 비망록이기도 하다. 그의 기록은 서방언론 관점의 받아쓰기로 익숙해져 있었던 소외된 전선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알아도 알아도 끝이 없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정치판의 비정함과 불량함을 절망적일만큼 잘 보여주고 있다. 
 

'배반과 분열로 혁명도 투쟁도 모조리 날려버린 고단하고 처량한 인간 군상들'과 함께, 참호를 파고 들어가 기자인지 지원군인지 헷갈릴 만큼 스스로를 넣고 동고동락한 버마전선. 영원한 학교이며 어머니 같은 존재라고 말하는 그곳에서 전선기자로서의 걸음마를 뗀 그는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 예멘, 코소보, 동티모르, 라오스, 캄보디아 등 수많은 전선을 옮겨다니며 중립과 객관이 아닌 '발에 채이는 사실'을 기록한다. 전쟁을 '국가'로 위장한 '정부'가 저지르는 가장 극단적인 '정치행위'로 파악하는 기자의 눈은, 포화와 죽음을 너머 인간의 삶과 욕망이 가장 비극적으로 아프게 충돌하는 살풍경과 부조리의 배면으로 향한다.
 

'목숨을 걸고 전선에 뛰어든 기자'라는 멋진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대신, 그는 살아 남아 자본과 언론이 쳐놓은 장막을 걷어내고 전쟁의 가려진 진실과 묻혀진 패악을 고발한다. '평화'라는 립서비스만으로 자국의 실익 없는 전쟁을 방치하는 국제사회와 무기력한 유엔을, 크메르 루주만을 광기 어린 학살주범으로 몰아넣고 '킬링필드'의 눈물로 왜곡해버린 캄보디아의 진실을, 스스로 정한 법마저 어기고 침공을 감행한 나토와 미국이 저지른 코소보 전쟁의 더러운 실체를, '부수적인 일'이라는 한 마디로 책임도 죽음도 외면하는 셀 수도 없는 미국의 양민학살들을, 그리고 책상머리의 상상력으로 그 많은 학살과 전쟁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연구자들의 문화론을.
 

그리고 그는 고백한다. 실존하는 숱한 죽음들 속에서 감정을 잃어가며 '더 이상 사람이기를 스스로에게 강박하지 않겠다는 주문'을 걸었던 버마전선의 뼈저린 반목과 분열의 최후 그리고 현재진행형인 싸움에 대해서. 함부로 테러리스트라 불리운 저항의 전사들, 아프가니스탄의 전설이었던 '판쉴의 사자' 마수드와 최고지휘관의 희생을 명령 삼아 기꺼이 죽음으로 걸어가는 '블랙 타이거'에 대해서. 또 공황상태의 딜리를 예감하면서도 동티모르를 떠났던 이해할 수 없는 스스로의 결정에 대해 서슴없이 '나는 개같은 기자였다'고,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고 자백한다.
 

스스로를 G형 피의 논리를 가진 인간이라 칭한 그의 글은, 박진감 넘치고 뜨겁다. 야만의 전쟁 한복판에서 보이지 않는 포화의 발신자인 세계 정치의 흐름을 감지하며 권력과 자본의 이해관계를 감식하는 일 못지않게, 그는 어떤 상황에서건 인간의 참모습을 지향하는 일에 대한 믿음과 공감을 깊이 드러낸다. 그가 보고 느끼고 기록한 글을 읽으며 나는, 목격자는 증언자가 되어야한다는 서경식 선생의 말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미디어를 통해 연출되고 중계되는 전쟁에서 '환상증폭기'가 되기를 거부하고 전선기자로서의 명예를 지키려는 그의 고투가 참으로 고마웠다.
 

그리고 또 하나. 전선을 누비며 예리한 눈을 빛내는 그의 가슴이 얼마나 뜨거운가를 행간의 숨결에서 자주 느꼈다. 정말 많은 밑줄을 그으며 읽은 책이었는데, 내가 미처 몰랐던 사실들에 대한 부끄러움 못지않게 올곧게 자기 역할을 지켜나가는 한 인간에 대한 감동이 선연했다. 전투를 수행하지 않으면서 전선을 가는 기자가 감내하는 고독한 목격과 끊임없는 자기 검열, 그 지난함의 산물인 이 책. 더욱 빛나는 이유는 저자가 스스로 탓하는 역사든 현상이든 뭐든 간에 '주류'와 '비주류'로 편가르기해 왔던 내 고약한 습성의 덕분이라고도 생각한다. 솔직히 말하면 책을 읽고 한 동안 그에게 뻑 갔었지만, 연정(?)을 키우기에는 너무나 비장한 기록이었으므로... 특히 마음에 들었던 저자의 '가녀린' 고백으로 얌전히 마무리하기로 한다.
 

만남과 헤어짐, 그 일상적인 행위가 전선을 뛰는 내겐 늘 고역이었다. 정에 약한 나는 '만남이 곧 이별'이라는 이 바닥 생리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나는 냉정함을 배워야 했고, 사람보다는 일을 먼저 생각하는 기계적 습성을 익혀야 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 전선의 '냉랭함'이 내가 살고 남을 살릴 수 있는 길임을 깨달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거친 전선에 익숙해져 갈수록 대신 수많은 도시 친구들이 떠나갔다. 내 몸에 흐르는 찬 기운을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고 이해를 구할 수도 없었던 나는 떠나는 도시 친구들을 붙들지 못했다. 그로부터 나는, 만남을 곧 이별로 여길 줄 아는 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에서 외톨이가 되고 만 나는 말 없이도 나를 이해해 주는 친구들이 있는 전선으로 달려갔고, 그 전선에서 외로움을 달랬다.(176쪽)


2007-05-22 00:40, 알라딘



전선기자정문태전쟁취재16년의기록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 사회학일반 > 르뽀/시사/비평
지은이 정문태 (한겨레신문사,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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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21. 22:42


나는 원래 인간이 좀 촌스러워서, 특정 날짜에 대한 반응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이다. 언제부턴가 일종의 습관이 되어버려서, 꼭 의식하고 있지 않더라도 즈음이 되면 절로 시선에 밟히는 것들이 있고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곧 때가 다가오는구나 자각하게 된다. 게다가 살짝 기념주의자이기도 해서, 혼자서라도 뻘짓거리를 하고 넘어가야 스스로 불편하지가 않다.
 

문득 책장에 꽂힌 '윤상원'에 눈길이 멎은 게 보름쯤 전. 그렇구나, 다시 5월이구나. 5월은 참 바쁜 달이다. 이래저래 이름 붙은 날들이 많은, 자식 없는 무학의 고아가 아닌 다음에야 완전히 피해갈 수 없는 기념일 과잉의 달. 와중에 백화점이니 할인마트는 각종 선물세트 팔아먹기 바쁘고, 평소에 잊고 지내던 감사의 마음을 표하는 게 나쁠 리는 없건만 그래도 아주 마땅치는 않다.
 

물론 나 역시 '5월'이라는 말에 가장 먼저 '그 날이 다시 오면'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돌이켜보면 사실 대학시절 이미 '5월 광주'는 금기라기보다 무심히 잊혀진 사건이었다. 희생자들이 명예회복되고 생존 피해자들이 배상을 받고 국가적으로 기념하는 '공식 역사로 등재'된 후에는 4.19만큼이나 박제화되어 멀어져버린 것도 같다. 국립묘지로 단장한 신묘역의 번드르르함 만큼이나 광주는 더 이상 아프고 통절한 무엇이 아니라, 때가 되면 되새기며 '지금의 민주화'를 지키기 위해 전범 삼아야 할 기념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광주는 너무 이르게 '해치워버린' 사건인 것 같다.
 

강풀이 만화를 그리고 누군가는 영화도 만들고 책이야 무수히 쏟아져 나왔지만, 광주의 진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두가 우방이라고 믿고 있었던 미국의 실체를 드러냈다는 것, 단지 폭도들이라고 매도 당한 광주 시민들이 열흘 간 만들어냈다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재현을 강조하는 것, 총칼로 무차별학살을 자행한 군부에 저항한 시민들의 민주 염원이 만들어낸 시대정신을 기억하는 것, ... 
 

무어라고 해석한다고 해도, 어쩐지 우리 모두가 '5월 광주'를 너무 떨이로 해치워버린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역사의 무게에 가위 눌려 모두가 우울한 낯빛을 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뭐 그런 걸 생각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미 갈 데까지 간 정치인들이 하나같이 4.19세대 운운하며 민주를 향한 투쟁의 역사를 외투 삼아온 현실을 생각하면, 말 많은 '386'을 넘어 이제 너도 나도 '5월 광주'의  적자임을 내세우는 역겨운 꼴을 보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책을 읽으면서 소위 특수공공법인이라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부터 기념되는 혁명과 인물들에 대해, 아니 그들의 기념 관점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쓰잘데기 없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는데... 더 이상 파헤칠 묻혀진 진실의 가능성이 없다고 믿겨지는, 공공의 기념이 가리는 무언가가 여전히 남아있지 않을까. 명예회복과 배상을 통한 공식화 속에서, 목격자들이 할 말을 잃고 희생자들이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이 만약 광주의 현재라면, 결국 그냥 그런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만이 남게 되는 건 아닐까 주제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음... 책은, 대학시절 마일드한 필독서 몇 권의 저자였던 김진경 선생이 '솔'이라는 고등학생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구성되어있다. 한참 지난 역사적 사건을 시시콜콜 전달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 사람은 무엇으로 사람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다고 서두에 밝히고 있다. 그리고 아주 쉽고 친절하게, 물론 동세대로 '광주'를 겪은 저자의 심사야 간단치 않았겠지만 참으로 담담하게 서술된다.
 

지난 주 이래저래 받는 뉴스레터들에서 같은 시를 몇 번이나 마주쳤다. 찬사 일색의, 심지어 어느 뉴스싸이트에서는 오월 광주가 소녀 천재시인을 낳았다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기사를 마주치기도 했다. '그 날'이라는 제목의, 질펀하게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그 짧은 시는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탁월한 시적 형상화에 성공한 작품인 듯 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겪지 않고도 그리 선하게 그려내는 게 오히려 무섭고 이상했다. 그리고 나 역시 80년 5월의 광주에 대해 어떤 직접적 체험도 없으면서 선험적 고통의 근원이라도 되는 듯 무겁게 반응하는 게 오히려 의심스럽기도 하다.
 

황석영의 책을 다시 집어드는 건 솔직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언제 사놓았는지 기억에도 없는 얇은 책이 하나 있었다. 하얀 바탕의 매끈한 표지, 한 시간 남짓이면 다 읽어버릴 수 있는 초박형 두께, 물론 중간중간 저릿한 느낌이 없지야 않았지만 책장을 덮고 나도 별 감흥(?)이 없다. 2007년 나의 광주, 어쩌면 2007년 우리 모두의 광주가 지금 이런 모습은 아닌가 싶다. 부담없고, 깔끔하고, 그리고 여운이 없는. 올해는 그렇게 지나버렸다. 안전한 기념으로 머물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조차 좀 부끄럽고 무안하다.


2007-05-21 00:55, 알라딘



5.18민중항쟁(역사다시읽기3)
카테고리 정치/사회 > 정치/외교 > 정치사상 > 정치투쟁
지은이 김진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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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21. 22:39


벌써 일주일이 넘도록 즐겁고 있다. 편하지 않았던 사무실 동료를 대면하는 마음의 턱이 조금씩 사라지고, 예전 같으면 부담에 부담을 느끼며 잔뜩 몸을 움츠렸을 상황조차 이상하게 편안하다. 고작 두 권의 독서로 일상의 기분이 달라졌다고 느끼는 날들, 이 나이에 인생의 책 운운하며 새삼 깨달음을 얻은 듯 떠드는 게 낯간지럽기는 하지만 사실이다. 이 책을 읽은 새벽, 침대맡에서 잔뜩 고무되어 호흡을 고르다가 집어든 책이 한참을 묵혀두었던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였다. 현재적으로 살아 생동하는 이들에게 '현혹'되는 일은 이제 그만, 이라고 외쳤던 내속의 소리도 가볍게 묵살. 모두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일종의 전염이었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 제목의 첫 단어는, 원시사회의 '권력 없는 추장'으로부터 빌어왔다고 한다. 누가 누구를 '대표'한다는 환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수유+너머' 공동체의 고민이 만들어낸 호칭, 저자는 회원들이 자신을 부르며 슬며시 머금는 미소와 그 웃음을 바라보는 자신 역시 짓게 되는 웃음에 대한 이야기로 '고추장'의 내력을 설명한다. 권력에의 의지가능성만으로도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존재였다는 원시사회의 추장 이야기는 오늘날 곳곳에 만연(!)한 대표의 폐해를 이따금 불가항력인 듯 무력하게 목도해왔던 입장에서 매우 반가운 것이었다.  
 

저자는 어쩌면 깊이 고민하기도 전에 지리멸렬해져버린 키워드에 새롭게 접근한다. 자유, 행복, 도덕, 기억...들로부터 마침내 인권과 국가, 그리고 혁명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구성하며 한편 하나의 축으로 작용하는, 이미 생활과 떼어내어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일조차 단념해버린 듯한 단어들. 혹은 넘치는 말들 속에서 진작에 빛을 잃고 새로운 수사들만을 떼었다 붙였다 하는 개념어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떠올리기도 전에 파묻어버렸던 물음을 되살리는 일이고 묻기도 전에 대답해버렸던 질문을 기억해내는 일이다. 니체의 입을 빌리고 스피노자와 클라스트르를 인용하며 맑스와 엥겔스를 불러내는 그의 이야기에, 현학적이거나 난해한 부분은 거의 없다. 그저 그렇다고 주워섬겨왔던 지식의 관행에 새로운 의문부호를 달고 허황하지 않은 희망을 길어올리려는 그가 말하는 많은 것들이 내게는 반갑고 소중했다. 
 

나의 무지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십여 개에 달하는 말들의 향연에 빠져 조금 머리가 복잡해질 즈음 그는 '세상 속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그가 '論'하는 세상의 문 앞에서 기다리는 자는 2000년대 소수자의 형상을 한 몸에 담고 죽어간 故 최옥란이다. 그리고 5cm도 안 되는 문턱에서도 좌절하는 사람들, 언론이 흘려대는 공허한 평균치를 체감할 수 없는 양극화 속의 가난한 사람들, '의식은 또렷한데 숨쉴 수 없'어 죽어가는 농민들이 그가 바라보는 세상속에 있다. '대표'를 자임하는 권력과  눈 감고 기도하는 대중, 새로운 정체성을 생산하지 못하는 정치, 평화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미국 그리고 상상의 공포로 세계를 유린하며 무한증식을 획책하는 무시무시한 생명권력이 있다.
 

누군가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버젓이 세상 한 구석에 존재하지만 내가 모르던 일들 중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처가 될 만한 사실들이 많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서 피어오르는 질문이 있다. 계속해서 상처를 받다보면 결국엔 고개를 돌리고 싶어지지 않을까. 자꾸만 스스로가 작아지고 미워지다보면, 나처럼 심지가 약한 인간은 아마도 결국 살기 위해 다른 곳으로 향하는 시선에 마음을 맡겨버리고 말 것이다. 내 속을 들여다 볼 용기 없음과 내 몸을 바꾸고 싶지 않은 지독한 관성이, 타인의 고통에만 천착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기형의 자아를 더욱 공고히 만들어온 것은 아닐까.
 

지난해 누군가로부터 받은 편지에는 "어두운 것도 집착이더군요."라는 말이 있었다. 편지를 쓴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글을 읽는 내 마음 속에도 깊이 공명이 일었다. 편지함에 넣어둔 지도 한참이 지난 서신의 한 대목이 다시 떠오른 것은 열흘쯤 전이었다.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읽는 중이었고, 정확히는 '자의식, 또 하나의 문턱'이라는 장을 읽으면서였다. 우울과 어두움과 불안들, 갖은 어찌할 수 없음에 사로잡힌 불균형한 자의식이 내 목을 죄고 또한 내가 거기에 목을 매고 있었다는 것을, 그 전에라고 전혀 모르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 음울한 집착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일은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하면서, 나는 늘 저 멀리 있는 누군가의 상처를 힐끗거리며 세계를 바꾸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저자는 '돈 없이 살 궁리'라는 에필로그로 책을 마무리한다. 자신을 무슨 대단한 운동이라도 하는 듯 여기는 친구의 이야기를 꺼내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 역시 자신의 살 궁리임을 이야기한다. 지식인 또한 위기의 세계를 함께 살아가는 생활인이라는 점을 나는 가끔 잊는다. 생활은 없고 사유만 있는 듯한 저 먼 곳의 지식인이 아닌, 제 살 궁리로써 세계를 사유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민하는 그의 글에서 어떤 절실함과 고양감이 느껴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너무 쉽게 끄덕이고 너무 쉽게 아파했던 까닭은, 어쩌면 그 끄덕임과 아픔 속에 정작 나 자신이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자주 무겁고 활짝 웃을 수 없었던 이유 또한 마찬가지일런지 모른다. 세계를 바꾸려는 지난한(?) 욕망은 결국 내 속의 질문으로부터, 힘겨움에 중단하지 않으려면 웃으며 함께 가야한다는 것. 이제 나도 '살 궁리'를 시작하였다.


2007-05-02 01:36, 알라딘



고추장책으로세상을말하다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 사회학일반 > 사회비평에세이
지은이 고병권 (그린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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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21. 22:36


지금의 '수유+너머'를 처음 알게 된 건 "book+ing 책과 만나다"를 손에 넣으면서였다. 제목과 지은이 집단이 유인하는 호기심에 책의 목차를 훑어보고도 언감생심 욕심을 부려 본 터였다. 예나 지금이나 아는 건 쥐뿔도 없으면서 삐딱하게 있어 보이는 건 꽤나 좋아하는 탓에 사두기는 했지만, 다시 확인한 목차에서도 변치않는 좌절을 동반하는 거리감과 그들이 구사하는 그 낯선 언어에 지레 질려 책장을 덮고 잊어버렸었다.
 

이진경의 '철굴'은 소시적 철없는(?) 선배들로부터 아주 몹쓸 책으로 일찌감치 찍혔던 터라 청개구리 심보로 들춰본 게 십여 년 전, 그 이진경이 이 이진경이라는 컴백한 연예인 소식 전해들은 심드렁한 반가움 정도로 그들에 대한 호기심은 정리되었다. 그러나 몸에 배인 버릇은 무서워서 '수유+너머' 딱지를 달고 나온 몇 권의 책들은 언제 샀는지도 모르게 책장을 채워가고 있었고, 우연히 관심하게 된 블로그 주인장의 일상을 이따금 엿보며 종이책으로 활자화되지 않은 '수유+너머' 공동체를 간헐적이나마 지켜보곤 했었다.
 

이후 그들이 '소수자 선언'과 함께 발표한 일련의 글들을 접했고, 이전 그들이 집단적으로(?) 구사하는 단어들의 생소한 용법에 의아해했던 기억이 무색하게도... 무려 이해가 되며 마구 가슴이 뛰었던 것 같다. 그들은 거리의 싸움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고(혹은 그들이 벌이는 거리의 싸움을 본격적으로 목도하기 시작했고), 'F키라' 까페를 개설하고서 생기발랄하고도 즐겁게 한미FTA를 공략하는 투쟁을 즐겁게 지켜보며 한편 내가 섰던 거리마다 어김없이 등장해 나부끼는 '수유+너머'의 깃발이 일방적으로 정겨워지기 시작했다. 좀은 시끄럽게 동 뜨기는 했다고 생각되지만, 아무렴 어떠랴.   
 

'수유+너머'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산파 역할을 한 고미숙씨가 탄생부터 2003년까지 공동체 내부를 들여다보며 써내려간 글이다. 국문학 고전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교수사회의 진입장벽과 제도의 불모성에 잠시 좌절하고 일찌감치 자유롭게 공부하는 즐거움을 꿈꾸며 수유리 한 구석에 작은 공부방을 열었던 것이 그 시작이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지금 '수유+너머'는 남산 아래 옛 정일학원 건물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한다. 물리적 시공간의 한계로 차마 욕심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다닌 여고가 있는 그 거리가 훤히 떠올라 괜히 그리워졌다. 요즘은 그렇게 잘 안 부르는 듯 한데, 내가 여고를 다닐 때만 해도 그 동네의 이름은 다름아닌 '해방-촌'이었다.  
 

사람들은 때로 자기가 꿈꾸던 무언가를 실천으로 옮기는 이들을 보며 묘한 양가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쌩짜로 말하자면, 팔짱 끼고 앉아 여기저기 뜯어보며 곱씹어보며 어디 이것들이 잘 하나 보자 하는 마음 같은 것? 물론 그들이 그들의 무기인 말로 좀 오바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없지는 않다. 꼴랑(!) 2주일 도보순례에 '대장정'을 떡하니 갖다붙이고는 지식인의 신체성이 어쩌고 저쩌고, (차마 원텍스트에 접근할 능력도 없으니 그저 감정적 거부감을 감추기가 더 급하기는 하지만) 한 문장 건너 하나씩 튀어나오는 그 잘난 유목이니 횡단이니 배치니 기계니 되기니 하는 단어들의 생소한 용법들.
 

하지만 어쩌면 얄미울 정도로 세련되고 근사하게 자신들의 사유와 활동에 어울리는 수사(?)를 붙이는 것 역시 능력이고, 어쩌면 알 듯 모를 듯한 그 말들의 자장이 힘을 발휘하게 만드는 것 역시 능력이 아닐까. 책을 읽으며, 감히 내가 주워삼키기도 뭣하지만 나는 그들이 입에 달고 사는 그 말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구성에 아직은 불가결한 새로운 개념어가 아닐까 싶어지기도 했다. 오히려 그렇게 반복 구사를 해주니 언어권력을 움켜쥐기보다는 퍼뜨리고 또 퍼뜨려 함께 쓰고 함께 가자는 운동의 확산을 위한 노력 아닐까 싶어지기도. 용어의 보편화를 견인하며 그들이 전파(?)하는 개념어들이 '정의(definition)'의 권력으로 화하지 않기를, 감히.
 

사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혹은 사로잡힌 말들을 움켜쥐고 말하고 또 말한다. 지적 탐색 끝에 도달한 의심의 여지없는 일물일어인지, 개념을 풍부화할 부수어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의 동어반복인지, 이도저도 아닌 그저 습관성 남발인지 내 알 바 아니지만, 어쨌건 낄낄대며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그 말들이 친숙하고 그럴싸하게 들려버리는 것이다. 어울리지 않게 잠시 너그럽자면, 나는 책에서 느껴지는 자족적인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고, 마침 자신의 구체적 생활이 지향을 향해 변화하는 과정이라면 더욱 당연하지 않을까. 
 

이 책에서 저자는 '수유+너머'의 미래상에 대해 단언하지 않는다. 오직 모를 뿐! 오직 갈 뿐! 이라고 경쾌하게 말하는 그들이 나는 그래서 더 미덥다. 그들의 꿈은, 돋보이기 위해 타자와 비교하거나 기존의 것들을 폄훼하고 무시하지 않는다. 이미 어떤 식으로건 해방을 향해 가고 있는 다른 인물, 다른 집단으로부터 배우고 참조하는 것에도 적극적이다. 운동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경쟁이 아니라 경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참 보기 좋게 보여준다.
 

잘난 좌파 엘리트 공동체를 만든 우두머리의 일기장이라고 설핏 보아넘기기에는, 그들이 나날이 적나라하게 부딪히며 건설하고 지속하며 애쓰는 모습도 참 예쁘다. 어딘가에서 뚝 떨어진 꿈의 공동체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 자기를 바꾸지 않으면, 자의식을 넘어서지 않으면 결국 함께 꾸는 꿈 역시 몽상에 그치고 말 것이라는 것. 사람과 사람이 만나 소통하고 갈등하고 때로는 대립하고 떠나보내기도 하면서 현재를 이룬다는 것. '수유+너머'가 흐뭇한 것은, 끊임없이 현재진행형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고마운 것은, 우리 이만큼 했다가 아니라 당신도 하세요! 라고 책이 자꾸만 말한다는 것이다.
 

책장을 덮으며 더욱 '기특'했던 것은 개인적인 독후의 감이었는데, 나도 '수유+너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 참 아름답고 보기 좋지만, 그 중심에 나도 끼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아니라 내가 있는 곳에서 나도 저렇게 웃으며 가고 싶다는 생각. 남산 해방촌 자락 모교가 있는 그 먼 곳을 그리워하기보다 곳곳에 이런 앎과 삶의 공동체가 생겨나기를, 그리하여 곳곳의 공동체 그 어딘가에 나도 있기를. '그들의 언어'를 어줍잖게 한 번 빌리자면... 내가 있는 자리를 초원으로 만드는 유목하는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이랄까. 지리멸렬한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 덤덤하게 허우적대던 내게 활기를 불어넣어준 책, 뒤늦게 고맙다.


2007-04-27 02:00, 알라딘
 

 

아무도기획하지않은자유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 지식과학문
지은이 고미숙 (휴머니스트,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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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21. 22:32


생각해보니 '최순덕성령충만기'를 읽을 때도 침대맡에서 책을 집어들었고 제일 앞에 실린 작품에 어쩐지 공명이 일지 않아 한동안 덮어뒀던 것 같다. 그나마 '나쁜소설'에서 언급되는 '윤대녕'에 눈길이 멎어 단숨에 읽어치우기는 했지만, 그가 실험(?)하는 어떤 형식미보다는 함께 윤대녕에 열광하던 우리들의 허름하게 반짝였던 시절이 불과 십 년만에 이렇게나 우울한 현실로 내려앉았다는 실감이 더 신랄하게 와닿았던 것 같다. 코앞에 닥친 절박한 시험 기회보다 심란한 일탈의 욕망이 더욱 간절한 어느 날, 애꿎게 성실한 태세로 최면씩이나 유도하며 '나쁜소설'을 재현하는 주인공이 자아내는 실소. 그 어이없는 상황에는 가위 눌린 채 발버둥치는, 어쩔 수 없는 생활자들의 처연한 비극이 숨어있는 것만 같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한동안 책을 덮어뒀다가 서울을 오가는 전철 안에서, '나쁜소설'을 읽고 이상한 심드렁함에 젖어 시큰둥하게 일별했던 제목들을 다시 살폈다. 표제작에서도 제목붙이기의 고역에 대해 밝히고 있지만, 그러고보니 짧건 길건 구비구비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몇 마디 말로 제목을 붙이는 일은 실상 얼마나 고단한 일일까 싶기도 했다. '누구나 ... 야채볶음흙'은 그런 의미에서 어떤 연민이 일기도 하는 경망스럽고 난망하다 싶은 제목이었는데, 막상 이야기에 집중하다보니 모래자갈 섞인 흙을 씹는 것처럼 설겅설겅하던 제목도 금세 잊어버리고 이야기에 빠져들어버렸다. 기발하지만 가볍지는 않게, 조롱하는 듯 하지만 주인공의 입장으로, 그는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부터 참 유연하게 독자의 공감을 끌어내는 재주를 가진 것 같다. 
 

그의 이야기들은 대체로, 명랑하지만 심드렁한 혹은 발랄하지만 우울한 양가적 감정선 위에서 읽게 된다. 보편의 상식을 단박에 눙치는 허무맹랑한 상상력도, 경험담이라고 믿어의심치 않게 되는 허약하고 별 볼 일 없는 청춘의 회고담도 마냥 슬프거나 마냥 웃기지 않다. 진정성이라는 무거운 말을 갖다붙이기에는 주인공들의 비루한 일상에 한 번 더 낙인을 찍는 것 같아 미안하고 개연성이라는 무책임한 말로 설명하기에는 그들 존재에 사무친 상처가 너무 깊은 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이야기의 목적은 해결에 있지 않고, 그는 많은 작품에서 슬며시 사라지거나 상황 자체를 페이드아웃하는 식으로 마무리를 한다. 비껴가는 맺음이라기보다, 결국 인생도 이야기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호흡을 고른 후부터는 되바라지지 않은 세련과 허랑방탕하지 않은 상상으로 잘 버무려진, 첫 작품집보다 한결 균형이 느껴지는 그의 이야기들 모두를 참 재미나게 읽었다. 현실에서 만난다면 별로 반가울 일 없을 것 같은 시덥잖은 특기의 소유자들이 줄줄이 등장해 푸념처럼 내뱉는 밥과 노동과 국가 그리고 세계를 향한 넋두리. 정상과 비정상 혹은 일상과 망상의 경계를 지우는 고독한 인간의 박진감 가득한 고백. 마침내 '이야기'의 치유력을 믿고 '쓰기'를 소명으로 삼은 저자의 갈팡질팡 내력까지, 자기만의 세계에 내려앉아 수세적으로나마 '동지'를 찾아 외연을 넓히려는 자들의 밤너구리같은 모색이 즐비하다. 현실은 이렇게 냉정한 것이라고 정색을 하는 게 되려 민망할 정도로, 복합적인 결핍과 함량 미달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성심과 진력이 눈물 날 정도로 상쾌했다. 게다가 책 말미에 한 편의 시시껄렁한 시처럼 남겨진 작가의 말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미안합니다.
 이번엔 작정하고 '내' 이야기들을 좀 써보았습니다.
 다음부턴 그러지 않겠습니다.
 

 소설이 잘 써지지 않을 때마다
 내가 중얼거리는 말이 있습니다.
 

 겁 많은 두 눈아, 겁내지 마라.
 부지런한 네 두 손이 다 알아서 해줄 테니.
 

 나에게 위로가 되었던 이 말이, 
 당신에게는 미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곧 인류평화를 위해 장가를 갑니다.
 인류평화를 위해 기꺼이 한 몸 희생해 준 여자친구에게,
 전(全) 인류를 대신해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평화로워진 지구에서, 또 만납시다.
 


                                                         2006년 7월 처녀좌에서
                                                                              이기호



2007-01-17 23:15, 알라딘


갈팡질팡하다가내이럴줄알았지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이기호 (문학동네,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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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21. 22:30


네 편의 단편이 묶여있다. 문학에 문외한인 나는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에서 그녀의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알게 되었다. 소설속에서 메구무는 유령처럼 스쳐간 실제 인물로 그리고 하나의 오브제로 등장했었다. 열여덟에 첫 소설을 발표하고 일본문학계에서 주목받는 젊은 작가였던 그녀, 반의 반쯤 한국인의 피가 섞여있음을 뒤늦게 알고 반년 정도는 한국에 머물기도 했다고 하며 몇해 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삶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 책이 나온 건 95년, 서문을 장식한 '한국의 독자 여러분께 드리는 글'에서 그녀는 새파랗게 젊은 작가의 문학을 향한 열정과 청춘의 생기를 진하게 발산하고 있지만 이제는 세상에 없다. 
 

'강변길'의 소년은 가족을 버린 아버지를 향한 배다른 누이의 복수로, 매달 생활비를 받으러 새 여자와 살고 있는 아버지의 집을 찾아간다. 어머니는 죽고 아버지에게는 버림 받았지만, 그 고역의 강변길은 오히려 사무친 상처와 구질구질한 일상의 유일한 돌파구처럼 보인다. 애증도 핏줄당김도 없이, 안절부절 대문 앞에 서거나 이따금 어색하게 아버지와 마주앉는 소년은 담담하다. 누이와의 다툼을 피하기 위한 어쩔 수 없음이라기보다 무심히 난감을 즐기는 듯한 소년은, 표현하지 못하는 고통을 온몸으로 앓을 뿐 더 이상 무언가 나아지리라는 희망은 끝내 보이지 않는다.
 

'갈매기집 이야기'에는 조금 복잡하게 엮인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행간에 흐르는 나른함 때문인지, 때로 소리치고 좌절하는 인물의 표정조차 종이인형의 그것처럼 건조하기 이를 데 없이 느껴진다. 원정이라는 걸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2군에서도 짤려버린 야구선수 옛 친구를 위해, 주인공은 하네다 공항의 창가 까페에 기꺼이 동행하지만 그 살가운 위로도 어쩐지 허약하고 힘이 없다. 두꺼운 이불 아래 상처를 깔아뭉갠 듯, 낯익음이나 낯설음도 무의미하게 흘러갈 뿐 인물들은 서로를 부여잡지 않는다. '잊혀진 가사의 한 구절'같은 여인만이 선명한 표정으로 존재감을 발하지만, 그녀는 시종일관 알 듯 모를 듯 묘연함 위에 존재할 뿐이다.
 

'썩어 가는 동네'는 좀더 명료하고 좀더 아련한 느낌이다. 주인공 사내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이른 나이에 자의로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의 덧없음을 깨달아버렸다. 그가 믿는 것은 오직 자신의 몸과 살아있는 자기자신 뿐. 그토록 아끼던 많은 것들이 거짓말처럼 불길속에 사라지는 모습은, 이후 그를 간소벽과 이동벽으로 몰아넣었다. 물론 여기서도 문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관하거나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렇게 자연스레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일주일에 세 번, 도쿄 지하를 가로질러 그가 찾아가는 방과 후 학원의 마을에서 풍기는 이물감을 담은 역한 냄새만은 명징하다. 마을 사람 누구도 쉽사리 감지하지 못하는 '썩어가는' 냄새, 형태가 있는 모든 것을 환영처럼 여기는 그에게만 강박처럼 달려드는 냄새. 사실 누구나 이미 젖어든 것으로부터는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법이다.
 

표제작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썩어 가는 동네'를 서성이거나 돌아선 인물들 같다. 냄새 대신에 주인공이 예민하게 감지하는 것은 급격한 영락과 맞바꾼 가면의 삶을 살아가는 누이와 어머니의 존재, 조금 다른 점은 그 역시 무대를 오가며 이따금 연기를 하면서도 내밀한 상처에 늘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랜동안 뭉갠 상처는 얄팍해질지언정 사라지지는 않는다. 희미한 불안과 함께 등장한 그녀를 경계하고 관심하면서 그는 자신이 떠나온 곳을 내내 떠올리지만 결코 입밖에 내지 않는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도착한 어긋남을 확인하고 오래 덮어두었던 무거운 짐을 생각하지만, 누구도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만이 자명할 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결국 하나같이 먼 곳을 응시하듯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 뚜렷한 상처를 깔고 투명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무방비의 삶을 덮쳐오는 시련에도 인물들은 담담하고 단단하게 일상을 이어간다. 애당초 희망 따위는 없었다는 듯 쉽게 체념하고 자연스레 절망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살아간다. 무심한 듯, 치밀하고 섬세한 묘사에는 기약없이 순환하지만 강고한 우연의 연쇄가 내재되어 있다. 고작 이십 몇 년을 살아온 그녀의 속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과 풍경들이 들어차있었던 것일까 궁금해진다. 남루하고 보잘 것 없지만 발버둥 대신 묵묵히 살아가기를 택한 사람들의 이야기, 살아있는 그녀가 내보인 이야기들은 여기까지다.  


2007-01-03 01:57, 알라딘



돌아가지못하는사람들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 일본소설문학선
지은이 사기사와 메구무 (문학사상사, 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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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21. 22:28


미사여구 없이도 스스로 수사의 기능을 겸비하는 듯한 느낌의 단어들이 있다. 이거 봐야하나 말아야하나 갈등했지만 결국 펼쳐보고만 이 책의 제목 역시 오해와 이해 사이를 아슬하게 가로지르는 단어들의 조합. 그러나 프라하와 소녀와 시대는 매우 정확하게 공간과 당사자와 시간을 가리키는 이를테면 일물일어에 충실한 작명이었다. 십대 시절 1960년대 초반의 몇 년을 프라하의 소비에트 국제학교에서 보낸 일본인 요네하라 마리의 회고담, 이념과 감수성과 개인과 국가가 비등한 비율로 어지러이 혼재된 세계의 추억담이다.
 

1960년대 초반, 각국 공산당의 이론정보지인 '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의 일본 공산당 대표인 아버지를 따라 프라하에 머물렀던 저자는 50여개국의 학생들이 모인 소비에트 국제학교에서 4년간 교육을 받는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리스 창공의 아름다움을 눈에 선한 듯 찬미하던 리차, 언제나 과장된 꾸밈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던 루마니아 출신의 열혈 애국소녀 아냐 그리고 마음 한 켠에 드리운 짙은 고독을 도도하고 의연한 어른스러움으로 에두른 촉망 받는 재능의 소유자인 유고슬라비아 소녀 야스나. 마리와 각별한 우정을 나눈 세 소녀의 지난 이야기와 이후 재회의 사연이 각기 독립된 장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마리가 프라하에 체류하던 시절은, 아직 동구권의 공산주의가 비교적 공고한 체제로 기능하고 있던 때. 특히나 소비에트 학교의 학생들은 대개 수십 년간의 지난한 투쟁을 통해 각국 공산당 혹은 공산주의 정권의 요인으로 자리 잡은 부모를 두고 있었으며, 학교의 분위기 또한 인간의 얼굴을 잃기 전 순진한 공산주의의 표정을 담은 곳이었다. 가장 예민한 성장기를 공동체적 가치를 지향하는 소비에트 학교에서 보낸 마리는 일본으로 돌아간 뒤, 경쟁과 무관심으로 점철된 학교 생활에 시달리며 프라하 시대의 향수를 그리움과 동경으로 회상한다. 
 

역사와 현재가 판이하게 다른 수많은 나라에서 왔지만 각자의 고국에 대한 애정과 존중이 자연스러웠던 우애로운 평등, 누군가에게 컴플렉스가 되는 부분은 절대로 놀림감 삼지 않는 아이들의 인간적인 성숙과 배려, 특출난 재능의 발견이 질시나 경쟁의 재료가 아닌 공공의 미덕으로 승화되는 협동적 기풍 같은 것들. 이를테면 활자 그대로의 '共産'이라는 정신이 아직은 살아있었거나, 혹은 부모가 선택한 대의를 대물림하여 내면화한 물들기 전의 아름다운 지향을 아이들과 학교는 지켜가고 있었다. 이데올로기의 그늘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 우산 아래의 특권속에 안주한 소녀 시절이었기에 향수는 다분히 인간적이고 갈등과 고뇌가 있을지언정 안온하며 평화롭다. 
 

프라하에서 돌아온 뒤 일본에서 생활한 저자는, '프라하의 봄'을 비롯한 1960년대 후반 불안정한 동구권의 정세와 90년대에 불어닥친 유고 내전의 바람 속에서 소녀 시절 벗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안위를 궁금해한다. 십대의 몇 해를 함께 보낸 친구들과의 추억은 내밀하고도 사적인 것이지만, 조국과 인종과 모국어를 달리하는 그녀들의 인연은 이데올로기와 체제의 격동이 빚어낸 것이었기에 이후의 행보 또한 역사의 궤도와 떼어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입을 앞두고 하나둘씩 연락이 끊어졌던 친구들을, 저자는 삼십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 찾아나선다.
 

90년대 중반 자본주의의 물결이 어지러이 일렁이는 프라하는, 삼십 년 전 소녀들의 반짝이는 재잘거림을 추억하기에 너무 많이 변모해버렸다. 그러나 어렵사리 수소문한 친구들과의 재회. 공부와는 담을 쌓고 영화배우를 꿈꾸었던 매력 만점의 리차는 어린 시절을 상상하는 것으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건실하고 믿음직한 민중의 의사로, 과장된 거짓말과 과도한 애국심으로 늘 현실의 모순을 비껴가던 아냐는 부패한 공산정권의 주구가 되어버린 부모의 특권과 뒷받침으로 영국인과 결혼하여 서방의 기자로, 마리의 가슴속에 짠한 그리움과 비밀스러운 연대의 우정을 남겨준 야스나는 유고 내전의 피폐한 현실 속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발휘하며 고단하나마 묵묵히 살고 있었다.
 

올해 봄 세상을 떠난 요네하라 마리의 삶은 책날개의 소개 정도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지만, 프라하 시절과 옛 친구들을 회상하는 행간을 읽으며 그녀가 어떤 가치를 지향했는가 하는 것은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실명을 거론하며 후일담 형식을 취하는 이 글에서 그녀는 가급적 친구들을 '판단'하지 않으려 애쓰는 듯 보인다. 그러나 어린 시절 호흡했던 프라하의 공기와는 사뭇 다르게 고도화한 자본주의의 만성적 병폐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일본에서 생활하며, 그녀는 자신의 체험으로 녹여낸 성찰을 통해 이데올로기와 체제 그리고 인간의 문제를 담담히 보여준다. 매우 주관적인 경험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경계 위에 선 자의 긴장을 잃지 않음으로써 개인과 세계, 역사를 넘나들며 더욱 생동감을 얻는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녀들의 소녀 시대 역시 이미 권력 투쟁으로 변질되기 시작한 공산 체제의 특권층에게만 가능한 것이었으며 그 시대 민중의 삶과는 분명한 괴리를 보이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유년기의 경험에까지 혐의를 들씌우는 것 역시 무척이나 비인간적이고 기계적인 관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설령 그렇더라도 저자 마리를 비롯해 리차와 야스나 그리고 주변인물로 언급되는 몇몇의 진실한 삶의 행로를 보며 스미는 연민과 감동이 만만치 않다. 역사도 이데올로기도 체제도 결국 사람 하나하나의 문제일지 모르겠다. 소박하고 사소한 삶과 관계들이 모여 종잡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세계를 이룬다는 변할 수 없는 진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2006-12-31 21:31, 알라딘


프라하의소녀시대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일본에세이
지은이 요네하라 마리 (마음산책,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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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렴, 이슬 먹고 살려고  (0) 2011.05.18
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