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처음으로 분회 모임에를 나갔다. 모임을 알리는 문자를 받고, 서너 시간 동안 문자를 너댓 번은 들춰본 것 같다. 갈까, 말까. 어지간해선 현관 문고리 한 번 안 잡는 월요일, 헌데 내가 통과하지 못한 같은 시간대를 비슷하고도 다른 풍경으로 그러면서도 멀리 한 곳을 향해 왔던 사람들이 지은 세 권의 책을 연달아 읽으며 마침 반성(?)을 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는 감히 27년 전 5월의 잔혹한 시간들에 눈과 마음을 박고 몇 권의 책을 읽으며... 혼자서 두 세상을 나눠 사는 듯한, 딴에는 자초한 어지러움의 날들을 보내는 중이었다.
편히 숨 쉬며 읽는 것조차 미안해지는 이야기들, 단지 나는 그렇게 그리고 그때에 태어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다는 단념도 마땅치 않았다. 누구나 겪는 성장통도 세계의 온 고통을 다 빨아들인 듯 눈물 뚝뚝 흐르는 이야기로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운 극한의 연속인 삶의 경험도 담담하고 당당한 이야기로 채우는 사람이 있다. 이럴 수 있을까 싶으리만치 둘러싼 모든 상황이 열악 그 자체인 저자의 체험담을 읽으며, 나는 인간이 때로 얼마나 단단한 존재인가를 새삼 느꼈다. 이런저런 핑계로 외면해왔던 일상에의 침잠을 조금이라도 걷어보고 싶어졌다, 고작 분회 모임에 얼굴 내미는 용기를 내는 것이라도 말이다.
제목 '소금꽃나무'는 저자가 5년간 일했던 한진중공업 동료들의 등짝에서 피어나던 피땀꽃의 이름이다. 그녀 역시 피워냈을 그 꽃, 어쩌면 숲을 이루었을 시절이 그녀에게는 황금의 시절이었나보다. 바로 옆에서 일하던 동료가 죽어나가도 어찌할 수 없는 사선같은 사업장이었지만 '하니까 되더라는 최초의 경험'들이 줄을 이었던 '사는 것 같은 날들', 장난 같고 놀이 같은 기발한 투쟁들로 공장의 활기를 높이고 노동자들의 사기를 높인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한진중공업은 민주노조 이십 년 역사, 여섯 명의 노조위원장 중 두 명이 죽고 세 명은 감옥 갔던 악명 높은 현장이었다.
지난 번 위원장 선거가 끝나고 어떤 아저씨가 그러셨습니다. "내는 김주익이 안 찍었다. 똑똑하고 아까운 사람들, 위원장 뽑아 놓으면 다 짤리고 감방 가고 죽어 삐는데,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김주익이를 우째 또 사지로 몰아넣겠노?"
알다시피 김주익 위원장은 2002년, 크레인 위의 기나긴 고공농성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쪼끼' 아저씨 운운, 노조만 보면 좋아 죽는 나의 허황된 낭만이 부끄럽고 섬뜩해 소름이 돋고 눈물이 핑 돌았다.
읽으면서 아무래도 하종강 님을 함께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떠나온 자의 부채감을 늘 저변에 깔고 있는 하종강이 바라보는 노동운동이 한없이 감싸고 싶고 믿어주고 싶고 밀어주고 싶은 어떤 '정의'라면, 김진숙에게 노동운동은 끊임없는 배반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당차고 오지게 가야만 하는 '현실'이다. 현장에서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어온 김진숙에게는 연대가 있을뿐 연민은 없다. 동감이 있을뿐 동정은 없다. 그들의 삶을 여기까지 끌어온 원동력은 공히 부채감이지만 김진숙에게 그것은 오히려 가차없고 신랄한 현실을 직시하는 힘이다.
실은 풀빛에서 다시 나온 '윤상원 평전'을 한 달 넘도록 곁에 두고 뒤척이고 또 뒤척이는 중이었다. '윤상원 평전'이 남긴 아쉬움을 내 선에서 해결(?)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읽거나 쓰고 싶지 않다는 변태같은 고집을 혼자 부리며 한참을 보내는 중에, 즈음 당도한 몇 권의 책표지에 절로 가는 눈길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 첫번째 책, 보내주신 고마운 님의 마음까지 더해져 한달음에 읽혔다. 나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았으나 벌써 '2쇄'가 찍힌 속지가 반가웠고, '그런'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을 것 같다는 심증은 어디선가 읽었던 그녀의 글에 대한 기억과 겹쳐지며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민주 노조 운동 20년. 부모형제 내팽개치고 살면서 내가 이 바닥에서 온몸으로 굴러 온 게 20년이 넘었는데, 두렵더라도 나부터 돌아볼 때가 되지 않았나. 허덕거리며 살다 보면 불현듯 고향에 몹시 가고 싶은 날이 있듯이.
라고 말머리를 연 이 책이 결국, 아주 오래 망설여왔던 분회 모임의 문을 여는 손잡이가 되어주었다. 이따금 들르는 당지역위 싸이트에서 발견한 그녀의 이름, 6월 당원교육의 강사로 올라있는 그 이름을 보고서 나는 며칠을 집중적으로 고민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었고, 그러나 투쟁이 아닌 일상 당 활동에 내딛는 발걸음은 옮기기가 참 쉽지 않았다. 분회와 학습 모임, 당원 교육과 같은 일상적인 지역위 활동에 얼굴을 내미는 것 자체에 대한 모종의 두려움이 적지 않았던 까닭이다.
주변 사람들은 꽤나 열혈(?)로 오해하고 있지만, 사실 '당원'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기회주의적 배수진을 늘 등 뒤에 둔 것이었다. 어디나 다를 바 없는 조직 생리에 대한 거부감과 냉소 그리고 거리두기는 거시적 환호와 미시적 거부, 지역위 활동에의 외면과 선택적 투쟁 참여로 일관되어 왔었다. 그나마도 이주단체에서 일하면서부터는 주말 일정 참여가 거의 불가능해져 9.24 평택 평화대행진 이후에는 다시 유령당원으로 돌아온 터였다. 물론 복잡하게 얽혀있는 정치적 관계망속으로 휘말려들고 싶지 않은 의도적인 물러섬이기도 했다. 역시 나는 소위 진보의 비단길만을 열망하는 기회주의자였다,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야간고등학교에 진학하려는 꿈조차 관리자에게 짓밟히고, 뭔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는 강학들을 신고할까 말까 갈등하며 아쉬운 대로 야학을 드나들었다는 김진숙. 노느니 장독 깬다는 심정으로 어느 비오는 날 집어든 전태일 열사에 관한 책을 통해 '자신이 벌레가 아니'라는 환희와 희열을 느낀 후로부터 삶이 달라졌다는 김진숙. 그후의 삶은 분명 벌레처럼 살았던 이전보다 더욱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그녀는 스스로도 자신을 믿을 수 없는 날들을 통과하며 민들레처럼 낮고 질긴 인간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변질이라 손가락질하고 혁신을 요구하는 전교조에 대해 지극한 믿음과 애정을 '여전히' 보내는 그녀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었던 자긍심을 발현하는 교육에 대한 신뢰와 그로부터 출발한 전교조의 정신을 지켜나가는 많은 교사들에 대한 지지와 더불어 비정규직과 학습지 교사에 대한 연대를 소망한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보이는 불철저함과 정치적 계산에 대해 고민하고 비판하기보다 이름 없는 노동자들의 충심과 진정성을 주목하며 노동운동의 희망으로 삼는다.
삼성을 이건희가 현대를 정주영이 만든 것이 아니라 피땀 흘리며 일한 노동자가 만들었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조차도 낯설게 받아들이는 오늘의 우리에게, 만 5년을 바다 위의 용접공으로 살았던 그녀는 간결하고 대차게 주장한다. '거북선은 우리가 만들었다'고. 체험을 통해 다져진 그녀의 시선 그리고 신념은 근본적이고도 명료하다. 울분과 통한의 추모사로 수없이 많은 동료들을 열사로 떠나보내면서도 흔들림 없이 묵묵한 그녀를 보며, 별 하는 일도 없으면서 싸움의 정당성을 찾고 뒷걸음의 핑계를 찾아왔던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시기 노동운동의 전망'이라는 거창한 제목이 붙은 그녀의 강연은, 온전히 노동운동속에 녹여온 삶을 반증이라도 하듯 그저 세상 사는 이야기였다. 20만 이주노동자를 불법으로 낙인 찍고 서서히 목줄을 조여오는 제도의 폭압, 1300만 중에서 이미 800만이 넘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어찌할 수 없이 소수자인 구조조정의 논리, 정당한 파업에 대체인력을 투입하고도 무지막지한 손배소 가압류를 통해 노조와 노동운동을 무력화시키는 자본의 통치, '그래서 결국은 아무도 남지 않는' 신자유주의의 미친 소용돌이. 헌데, 그런 세상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웃음이 나고 기운이 났다.
그래요. 저는 5년 전에도 똑같은 죄목으로 구속된 적이 있는 전과잡니다. 대통령은 바뀌었어도 노동자를 둘러싸고 있는 노동 현실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라면 지나친 자기 합리화일까요? ...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릴께요. 법이 곧 정의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같이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이 배가 등가죽에 붙어 가면서 정의를 소리 높여 외치지 않더라도 그저 법이 정의이기만 하다면. 그렇다면…….
책의 마지막, 그녀가 적었던 '항소이유서'의 일부다. 그녀의 말마따나 '저 혼자 종치고 민주화됐다고 믿는 인간이 수요 이상으로 출하'된 비극의 시대에 이십 년이 넘도록 그녀가 싸우는 이유다. 또한 세상이 이미 달라졌다고 너무 쉽게 믿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우리가 여전히 의심하고 싸워야 할 이유가 아닌가 싶다.
2007-07-04 00:40,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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