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어느 프로그램에서 그녀를 다룬 방송을 했다는데, 덕분에 뒤늦게 알게 된 이름이다. 적국이었던 일본 여성이지만, 조선의 아나키스트 박열과의 사랑과 공동투쟁 그로 인해 맞게 된 이른 죽음으로 인해 그녀는 2006년 대한민국의 '광복'을 기념해 공중파로 되살아난 모양이다.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 라는 강렬한 부제의 주인공 가네코 후미코. 아나키스트니 무슨무슨 주의자니 하는 말은 혁명적으로 살다간 인간의 삶을 지칭할 때 자주 사용되는 말이지만, 그녀에게 쓰일 때 역시 '통칭'의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다.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살과 뼈와 피를 가진 한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법적으로 '무적자'였던 그녀는, 태어난 땅에서 또 어린 나이에 거의 식모로 보내진 조선땅에서 학대로 점철된 성장기를 보낸다. 충청도 어느 마을에서 '식민자'로 그러나 버려진 자로 생활하는 7년 동안, 혈육의 정이나 친구와의 우정 같은 것과는 무관한 소녀의 삶 속에서 때로는 자살을 꿈꾸고 또 때로는 기성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성공하여 자신의 삶을 일으켜세우는 꿈을 꾸기도 하면서 지옥같은 고통의 나날을 버텨낸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를 기다린 것은, 양육의 책임은 전혀 지지 않은 아버지에 의해 강요된 중노릇하고 있는 외삼촌과의 정략결혼이었다. 가족으로서 가졌던 최소한의 기대마저 배반당한 그녀는 결국 자립을 모색하며 도쿄로 떠난다.
20세기 초 청일전쟁의 승리와 러일전쟁 준비로 국민총동원 체제가 가속화되던 당시의 일본은, 천황제를 근간으로하는 가부장적이고 군국주의적인 사회질서 재편의 시기였고 한편 메이지유신 이후 적극적인 서구문물의 수용 과정에서 유입된 좌파 이념과 운동이 어지러이 혼재하고 있었다. 여학교 졸업 검정시험을 치르고 여자의전에 들어가기 위한 고학을 목적으로 도쿄에 온 그녀는 길거리 가판대에서 먹고 자며 신문을 파는 생활, 가루비누 가게의 점원과 행상, 가정부, 국수집 점원 등을 전전하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나 집에서 기르는 불쌍한 개를 거의 동지와 마찬가지로 여겼을 만큼 처절한 소외와 학대의 원체험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싱싱하고 혼란한 생동으로 가득찬 도시에서 서서히 자아에 눈 뜨고 세상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혹사에 대한 불평등한 보수와 강자의 약자에 대한 착취에 불평을 품고 있던 차에 사회주의자들과 만나게 된 그녀의 인생 계획은 급선회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는 기성의 가치와 결별하고 만난 사회주의자들에게서 오히려 인간에 대한 환멸과 회의를 느끼게 된다. 현실사회주의자들의 인간성에 대한 불신감은 나아가 민중에 대한 불신으로 심화되었고, 무적자로 또 여성으로 이중의 질곡 속에서 타인에 의해 좌우되는 삶에서 고통받았던 지난 날의 경험은 마침내 그녀를 오로지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이끈다. 그리고 그 즈음 그녀의 인생을 건 마지막 동반자 박열을 만나게 된다. <청년조선>이라는 잡지에 실린 박열의 시 '개새끼'를 읽고, 나는 지금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것을 이 시에서 발견한 기분이며 시에서 이상할 정도로 강력한 반역 기분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할 만큼 시에 매료된 그녀는 곧 박열과의 동거생활에 들어간다.
자아의 자유의지에 골몰했던 그녀는 운명적으로 반해버린 박열과의 동거에 몇 가지 조건을 내거는데, 첫째 "동지로서 함께 살 것", 둘째 "내가 여성이라는 관념을 반드시 제거할 것", 셋째 "둘 중 하나가 사상적으로 타락하여 권력자와 악수하는 일이 생길 경우 즉시 공동생활을 그만둘 것", 즉 "주의를 위한 운동에 상호 협력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그리고 인간사회의 약육강식관계는 아무리 사회를 변화시켜도 끝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는 선에서 멈추지 않고 우주만물을 절멸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지독한 허무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였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공동생활 공동투쟁이 시작된다. 그들은 동등한 인간으로, 인간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동지로,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으로 함께 하며 무정부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인 재경조선인으로 구성된 흑도회의 기관지 <흑도>를 발간하고 이후 <뻔뻔스러운 조선인>, <현사회> 등의 잡지 간행에 몰두한다.
박열은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나 공립보통학교에서 수학하다가 도쿄로 건너와 재경조선인학생들과 함께 혈권단, 의권단, 흑도회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의 실현불가능성에 대해 회의하며 허무주의로 이행한 후 인간성은 모두 추악할 따름이어서 그것을 신뢰하고 기다릴 수가 없다고 생각해 일본 권력계급은 말할 것도 없고 가능하다면 우주의 만물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백정이나 피차별 부락민 그리고 밑바닥 계층의 소리를 반영하고 연대하는 잡지를 편집하고 배포하는 일 등과 함께 인삼 행상 등으로 연명했고, 한편 과격한 허무주의자였던 박열은 천황제와 일제 군국주의의 허상을 까발리고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과 각계의 저항운동을 독려할 목적으로 폭탄 입수 및 투척 계획을 구상한다. 또 그들은 흑우회의 회원들이 비교적 세련된 무정부주의 사상의 소유자라고 판단해, 대중적인 투쟁을 위해 불령사라는 단체를 새로 조직해 활동을 시작한다.
불령사라는 이름은 당시 일제가 저항적인 조선인들을 호도하며 지칭하던 '불령선인'에서 따온 것으로, '불령'은 뻔뻔스럽고 무례하다는 뜻이다. 누구 못지않은 혁명적 이상과 강인한 투쟁의지를 가졌지만 불과 스무살을 갓 넘긴 그들은 반동적 치기와 못 말리는 혈기로 권력이 가장 불온시하는 말을 새로운 조직의 이름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집에 떡하니 '불령사'라는 표찰을 다는 것은 물론 벽에는 붉은 잉크로 그린 커다란 하트 무늬 속에 '반역'이라는 글자를 큼직하게 써놓았다고 한다. 당시 요시찰조선인 갑호 대상자로 경찰의 일상적이고 삼엄한 감시 속에 놓여있던 박열, 그리고 기꺼이 운명공동체로 함께 한 가네코 후미코의 공동 투쟁은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현실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조선을 오가며 폭탄 입수를 모의하던 박열의 계획이 탄로나고, 불령사 회원 전원이 기소되기에 이른다. 정치적으로 단련되지 못한 대중결사였던 데다 각각 개인적인 오해와 긴장의 기류 속에 있었던 불령사의 회원들은, 미수에 그치고 만 박열의 폭탄입수 계획을 대역사건으로 조작하려는 일제의 음모에 대부분 넘어가고 결국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김중한 세 사람이 최종적으로 사건의 주범으로 확정된다. 한편 당시 일본은 발전소 건설현장에서의 가혹한 노동을 이기지 못하고 도주한 조선인들을 학대하고 학살한 1922년의 나카쓰가와 조선인학살사건과 1923년의 간토대진재 조선인학살사건 등으로 재일조선인 사회를 둘러싼 흉흉한 민심이 극도에 달한 상태였다.
결국 간토대진재 조선인학살사건에 대한 정치적 희생양이 필요했던 일제에 의해 그들에게는 사형이 구형되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사형을 각오하고 법정을 사상적 저항의 장으로 이용하기 시작한다. 그들을 대역사건의 주범으로 몰고 간 소위 제4차 폭탄입수계획은 사실 김중한과 박열 간에 오갔던 모의로, 가네코 후미코는 당사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만약 그때 박열이 내게 김한과의 일을 상의했더라면 과연 내가 반대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모르긴 해도 신뢰하고 맡겼을 것이라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박열과의 공동운명을 선택한다. 이는 또한 가족제도의 희생물로 고통받으며 노예처럼 살았던 그녀가, 그러한 가부장제를 통해 일본국가 시스템을 완성한 정점에는 천황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 결과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가네코 후미코는 아무리 강한 척해도 인간은 살고 싶어하는 존재라는 솔직한 심경을 토로하면서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을 때, 그 행위가 비록 육체의 파멸을 초래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생명의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라고 자서전에 적고 있다. 또한 재판정에서는 당신들이 나를 그렇게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따름입니다. 나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지금 당신들과 타협할 수 있다면 나는 사회에 있을 때 이미 타협했을 터입니다. 나는 권력 앞에 무릎을 꿇고 살아가기보다는 오히려 기꺼이 죽어 끝까지 나 자신의 내면적 요구를 따를 것입니다. 그것이 정녕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어디든 나를 데려가 주십시오. 나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의 자율을 건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그리고 일본과 조선 사회에서 큰 주목을 끈 이 사건은 사형 구형으로 귀결된다.
사형을 언도받은 후 집행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녀의 의지와 박열에 대한 동지적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부디 우리 둘을 함께 단두대에 세워달라. 박열과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박열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설령 재판관의 선고가 우리 두 사람을 나눠놓는다 해도 나는 결코 당신을 혼자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라는 절절한 고백을 남긴다. 그리고 열흘 뒤 '장난처럼' 그들에게는 천황의 이름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는 은사가 내려진다. 가네코 후미코는 이로부터 약 백일이 지난 후에 스스로 목을 매 삶을 마감한다. 그녀를 자살에 이르게 한 이유나 감형 이후 그녀의 수감 생활 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고, 죽음 직후의 정황은 모두 교도소에 의해 은폐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녀가 수감된 상태에서 1925년에 집필을 시작한 자서전이, 비록 군데군데 검열로 삭제되고 찢겨나갔지만 그나마 생생한 삶의 기록으로 이렇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저자인 사학자 야마다 쇼지는 후기에서, 이 책은 전후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걸어온 사상적 편력의 산물이라고 서두를 시작한다. 한일조약반대운동에 참가하며 얻은 반성을 발판으로 식민지배의 피해자인 조선인의 눈을 매개로 일본인의 사상을 재검토하는 학문적 연구에 몰두하던 그는 서승 서준식 형제 구원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말 가네코 후미코를 만났다고 한다. 민족적 자신감 상실증에 걸린 사학과 학생이었던 자신을 구해준 장본인이 바로 가네코 후미코였으며, 이 책은 그녀의 힘으로 쓰여졌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대상에 대한 철저한 거리두기를 통해 23년으로 마감된 가네코 후미코의 짧은 삶과 사상을 치밀하고 진중한 학자적 자세로 분석해냈다. 그들의 사랑과 투쟁, 죽음에 이르는 과정의 세부적 정황들을 사료를 바탕으로 치열하게 재현해내고, 그들과 관계된 수많은 문헌을 참조하여 입체적으로 복원해냈다.
아, 리뷰가 너무 길다. 다른 책을 읽고 난 후처럼 까불거리며 내 기분을 적어나갈 수가 없는 책이었다. 이제 막 알게 되었지만 어쩐지 그녀의 삶에 대해 좀은 설명을 해야할 것 같은 느낌에, 그러다보니 꽤나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어서 그녀의 삶에 대한 '요약'만으로도 꽤 길어져버렸다. 혹시, 열심히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에게는 진심으로 감사를. 그리고 관심과 취향에 따라 호오가 선명히 갈릴 책이기는 하지만, 호기심이 생겼다면 한 번 꼭 읽어주시라고도 권하고 싶다. 책에 관련된 검색을 하다가, 이 책을 낸 편집인인가의 인터뷰를 읽은 기억이 난다. 판매량은 형편 없어 기운이 빠졌지만, 권정생 선생님 등 많은 사람들이 꼭 나와야할 책이라고 격려를 해줘서 힘이 났다고. 아니, 격려를 해줘서 힘이 났지만 판매량 때문에 기운이 빠졌다 였던가. 아무려나.
오롯이 자신으로 살기 위해 죽음도 마지 않았던 그녀의 삶을 읽으며 이상한 감정이입과 공감에 많이 시달렸던 것 같다. 책장을 덮은 새벽녘에는 내 방 어딘가에서 그녀의 못다한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은 이상한 공포에 사로잡혀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비롯된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결국 그 근원으로 거슬러올라가 누구도 쉽게 대적하지 못하던 천황제에 맞선 비범한 인물이었지만 그것은 결코 대의나 명분과 관련되는 게 아니라고 나는 느꼈다. "대단히 반항적이고 열광적이며 쉽게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들 뿐만 아니라 종종 히스테리 상태마저 보이는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그녀, 그러나 "내가 만약 생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면..."이라고도 적었다는 그녀 자신의 문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끝끝내 양보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모든 인간에게 있고, 그녀는 하필 그런 시기에 그런 조건에서 태어났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나는, 하필 그런 때에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죽어가야했던 그녀에게서 민망하게도 아직은 생을 긍정할 수 없지만 당신같은 삶이 있어서 그래도 살아간다고, 중얼거린다. 그녀와 운명을 함께 할, 것만 같았던 박열은 1935년에 옥중에서 전향해 출옥했고 이후 그는 좀은 보수적으로 활동하며 후에 '민단'이라 칭해지는 단체의 단장으로 취임했고, 1974년에 북한에서 죽었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어느 여인을 만나 결혼도 했으며 그러나 가네코 후미코의 기일에는 종일 묵상을 했다고 한다. 삶과 죽음은, 사람과 사랑과 인연을 갈라놓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나는 그들의 최후를 비교하거나 대비할 마음은 없다. 박열의 이후 삶의 행적에 대해 감히 비난하거나 동정할 수도 없다. 단, 그들에게 그렇게 빛나는 한 때가 있었다는 것과 그리고 그들의 삶은 후대에 읽혀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선택한 것이라는 당연한 수긍이다. 조금 쓸쓸한 기분이기는 하지만.
나는 평전이나 사람의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문득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를 생각해본다. 서경식 선생님은, 자신의 재일조선인 이야기가 우리들에게 '스스로를 돌아보는 거울'로 여겨졌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었다. 그리고 '잘 되고 있는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고. 종종 느끼는 거지만 나는 삶을 너무나 거창한 것으로 오해하거나 매도하는 경향이 다분한 것 같다. 어차피 누구나 자신의 삶을 살아갈 뿐이고, 그 삶이 크고 빛나게 보이는 것은 내 눈에 포착된 무언가가 마음의 공명을 일으켰기 때문일 뿐일텐데. 가네코 후미코가 내게 선사한 공명은 무엇일까. 오랜만에 많이 찡했고 짠했고, 소름이 돋았다. 삶에 대해 그다지 긍정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자신을 모든 것의 표준으로 삼았던 삶, 그리고 죽어간 삶. 이렇게 죽음에 빚지는 게 참 미안하지만, 저자의 생각이 맞다면 '훗날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기를 기대'하며 고난으로 가득 찬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물으면서 죽음과 마주한 채 자서전을 집필했단다. 그녀, 좀은 반가워할까.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 어딘가에 그녀의 묘소가 있다고 한다.
2006-10-11 03:32,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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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후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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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 역사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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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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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다 쇼지 (산처럼,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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