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5. 18. 22:38


'세상엔 두 부류의 OO이 있다. OO한 OO과 OO한 OO', 류의 우스개 소리를 잊을 만하면 듣는다. 사진과 관련해서 사진 찍히기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정도로 부류를 나눈다면, 나는 사진 찍히기 '겁나게' 싫어하는 사람의 상위 몇 %쯤에 거뜬히 들어갈 것이다. 지금처럼 멀미가 날 정도로 사진을 찍고 올리고 돌리는 지경은 아니었지만(내 조카가 생기니 이해가 되기는 한다), 어린 시절 우리 부모님도 나날이 성장하는 자식의 어린 시절을 참 열심히 찍어두셨다. 커가면서는 잔뜩 멋적어하거나 노골적으로 찡그린 얼굴이 많지만, 카메라를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어렸을 적의 나는 자주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기도 하다. 
 

사진 찍는 건 꽤 좋아하는 편이라 디카가 흔해지기 전, 폴라로이드와 로모, 후지 미니인스탁트까지 구비해 이따금 떠나는 여행에서 꽤 많은 사진을 찍어 간직하고는 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처분이 곤란할 정도로 수북한 사진을 보며 혼자 흐뭇해하다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한두 장씩 끼워넣는 것도 꽤 쏠쏠한 재미였다. 사진 찍히기를 워낙 싫어하다보니 물론 언제나 나는 없다. 압권은 5주간의 배낭여행이었는데, 스무 통은 되는 사진들 속에 오로지 길과 풍경만이(그것도 꽤나 쓸쓸하고 우울한) 빼곡히 담겨있는 사진을 본 아빠는 정말 침통한 표정으로 '대체 너는 왜 그러냐?'고 씁쓸히 한 마디를 날렸다. 스핑크스도 루브르도 심지어 있느니 모래뿐인 사막에서도 투철하리만큼 집요하게 독사진을 박아내고야마는 아빠의 피를 물려받은 것 치고는, 내가 생각해도 꽤 반유전적 성향이기는 하다.

이 책, 너무나 '샘터스러운' 대책없이 고답적인 제목과 구성이지만 잔잔히 읽는 재미가 제법이다. '그리운 유년, 그리고 학창시절', '성장의 고통, 그리고 나의 가족', '내 곁에 왔던 사람과 풍경들'이라는 세 개의 장으로 나뉜 이야기들 속에 스물 아홉명 필자들의 '한 순간'과 긴 이야기들이 빼곡하게 담겨있다. 윤대녕과 조은 정도가 관심의 대상이었을 뿐, 별 기대없이 시작한 읽기여서인지 오히려 나머지 작가들의 사진과 사연 중에 마음에 와닿는 것들이 많았다. 대체로 빛 바랜, 사진이라하면 김치건 치즈건 하다못해 하나둘셋이건 약속된 구호 아래 초점을 맞추고 긴장의 순간을 잡아내던 시절의 애틋함이 담겨있다. 일종의 기념 혹은 유산으로 남겨진 오래 전 사진에 덧붙인 글에는, 어쩌면 청탁을 받고 오랜만에 꺼내본 사진 위로 울컥 덮쳐오는 새삼스런 감회에 젖었을 필자의 물기어린 그리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읽히는' 가난의 마지막 증언자가 아닐까 싶은 공선옥이 고향 들판에서 동생과 함께 찍은 일곱 살 적의 사진과 어린 날 이야기, 교복 모자를 벗어 손에 쥐고  친구의 어깨에 호기롭게 팔을 두른 열여덟의 윤대녕과 '삼류극장과 독일빵집의 시절' 이야기, 사제인 아버지가 지키던 관촌 대소원 성당을 배경으로 한 단체사진과 교회 사택에서 보낸 말썽꾸러기 소년 이만교의 고향마을 이야기, 젊은 시절의 청신함이 싱그러운 박범신의 강경집 수돗가 사진과 애처럽고 쓸쓸한 가족 이야기, 1930년대 초의 부모님 신혼시절 사진과 함께 아버지를 향한 존경과 사랑을 담은 최인호의 이야기, 생사의 기로에 선 스승 구상 선생을 향한 통절한 안타까움이 배인 이승하의 이야기... 그야말로 '내 마음속 사진첩에서 꺼낸' 사진을 보며 방울방울 솟아나는 추억을 쏟아낸 글들이 마음을 싸하게 한다.    
 

누구나 '나'와 관련한 어떤 '하나'를 선택하고 이야기하게 되면, 좀은 촌스러울만큼 구구하고 절절해지는 게 인지상정인 모양이다. 시덥잖거나 성의 없게 느껴지는 몇 개의 꼭지를 빼면, 미처 관심하지 않았던 게 괜히 아쉬울 만큼 내밀한 고백들이 새삼 정답고 따스하다. 책장을 덮고나니 자연스레 나의 '이 한 장의 사진'에까지 생각이 이른다. 스무 살 이후의 내 모습이 담긴 사진은 꽤나 희귀한데, 그 중 딱 떠오르는 사진은 2002년 9월 어느 날의 사진이다. 지난 번 지갑을 잃어버리면서 함께 잃어버린, 언젠가 쓸 일이 있어 스캔해 놓은 드물게 스스로 마음에 들어하는 흑백사진. 리뷰를 올리며 같이 올려볼까 잠깐 미친 생각을 했다가 다행히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읽은, 사람 냄새 담뿍 배인 편안한 책이다.


2006-12-31 02:57, 알라딘



이한장의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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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박완서 외 (샘터사,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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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8. 22:34


출판기획사 모던타임즈 명의의 머리말에는 '유쾌한 농담들의 야유회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라고 떡 하니 써있다. 필자에 윤대녕의 이름이 있길래 얄팍한 전작주의의 꿈으로 사들이기는 했지만, 뭔 초대씩이나. 게다가 나는 '어머니의 수저'를 읽고 다소 맥이 빠져(물론 반 이상은 매우 개인적이고 왜곡된 성향 탓이다.), 이건 또 뭔가 보자 하는 심정으로 바로 집어들었다. '새참'이란 제목이 붙었지만, 음식 이야기는 아니고 '유명 소설가들과 함께하는 유쾌한 수다, 즐거운 인생' 이라는 낯 간지러운 멘트를 표지에 박은, 이른바 '심심할 때 먹는 책' 이란다. 타이밍의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는데, 사실 나는 마음이 불퉁할 때 읽어버렸으므로 전혀 유쾌하거나 즐겁지 않았다. 
 

한참 전 이야기지만 '깊이에의 강요'를 화두 비슷하게 마음에 담고 지낼 때가 있었다. 한없이 가볍고 얄팍한 인간인 주제에, 어디서 굴러들어온 강박인지 가식이라 비난해도 할 말 없는 요상한 엄숙주의 같은 게 내 속에 있는 것이다. 특히나 책과 글에 대해서는 더욱 완고하게 가동되는데, 이는 '깊이에의 강요'를 타산지석하더라도 가끔 이건... 하는 난감함과 마주칠 때 오히려 완강하게 발동한다. 어차피 세상에 널린 게 책이고, 그렇다면 알아서 알량한 심미안(?)을 발휘해 선택하면 될 일이니 이렇게까지 물고 늘어질 일은 아닌지도 모르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이 떡하니 박혀있는 책이라면, 탐식증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로서는 꽤 난감하다. '우아하고 고상하게' 내 좋은 읽기만 제공하면 좋겠는데, 대체 어쩌자고 이런 책에까지 이름을 올리는 걸까 싶은 이기적 불만이 솟구쳐버리는 것이다.
 

열여섯 작가의 짧은 '새참'이 뭉뚱그려진 보따리는 하나하나 풀수록 못마땅함의 시너지를 더하며 점입가경이었다. 이건 꽁트집이야,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찾아봤다. 꽁트란 1.인생의 한 단면을 짧고 재치 있게 표현한 단편 소설. 장편 소설(掌篇小說) 2. 유머·풍자·기지가 넘치는 촌극을 흔히 이르는 말.이라고 네이버 대신 엠파스에서 친절히 가르쳐 주신다. 그렇다면 뭐, 나의 속절없는 기대를 배반했을 뿐, 이 책은 그럭저럭 꽁트집이다. 제목도 심심할 때 읽는 '새참'이라 붙였으니, 무슨 이야기를 꺼내건 별반 하자가 없는 것이 되겠다. 그러나 문제는 내용의 참신성과 밀도 혹은 최소한의 품격(?)이다. 출판기획사에서 원고를 청탁하며 심심할 때 읽는 책이니 그런대로 허접하게 적정선 이하의 글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지 않고서야, 어째 이렇게나 헐렁하고 실소를 자아내는 글들이 가득한 걸까. 섬광같이 빤짝하는 인생의 비의까지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이건 좀 심하다 싶은 글들이 주르르륵이다.
 

좋다는 사람도 가끔 봤지만, 예전 '정육점 여인에게서'를 읽었을 때의 당혹감이 떠올랐다. 그렇지 않았더라도 제일 먼저 찾아 읽었겠지만, 공교롭게도 그의 글 '연인'이 첫 타자로 올라와 더욱 김을 빠지게 만들었다. 한 달에 한 번 미모의 여인과 우아하고 간질한 데이트를 즐기며 의심하는 아내에게는 발뺌을 하는 남자, 그러나 아내는 저간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고 미모의 그 여인은 처제였더라는. 유머도 풍자도 기지도 없는 허술한 꽁트. 아, 정말. 윤대녕 아저씨 왜 이러세요! 나머지 열다섯 편의 글도, 대략 위와 같은 유머와 풍자와 기지의 평균치를 유지하고 있다 보면 될 것 같다. 그나마 후반부 몇 편의 글이 실소와 불쾌를 보상하는 역할을 해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정말 무책임한 기획과 무성의한 집필의 결정판이 아닐까 싶다. 


2006-12-18 15:29, 알라딘



새참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성석제 (북스토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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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8. 22:32


윤대녕의 신작 소식을 접한 반가움은, '맛 산문집'이라는 부제로 인해 확 반감되었다. 성석제도 아니고 어인?(그러나 필자에 '윤대녕'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새참'도 함께 주문했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이 시위하는 마음이 되어 한 동안 구입을 미루다가, 뒤늦게 초판 '2쇄'를 확인하고 또 괜히 심드렁한 마음이 되어버렸다. 한참 빠져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지만, 윤대녕은 내게 차마 '2쇄' 본을 소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사람인데. 그러나 그가 나의 소아적 로망을 배반하는 '맛' 산문집을 냄으로써, 나는 '2쇄'본 소장으로 복수를 하는 것이다(미쳤군.)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암튼, 잠깐은 그 마음이 간단치가 않았다. 한 동안 침대맡에 두고 밀쳐두다가, 며칠 전 잠자리에서 책장을 펼쳤다. 뭐, 따지고보면 그의 전작들에서 '음식'이 아주 찬밥신세를 받는 오브제는 아니었다. 그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맥주와 일식집이 등장했고, 주인공은 늘 성마르고 입 짧아 보이는 사내였음에도 불구하고 꽤 많이 마시고 먹었던 것 같기는 하다.
 

'어머니의 수저'라는 안전하고 서정적인 제목과 클리셰에 가까운 정갈하게 놓인 오랜 놋수저의 흑백사진 표지, 아 이건 좀... 하며, 나는 비아냥 없이 진심으로 육아의 고달픔 혹은 밥벌이의 고육지책일까 잠시 생각하며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물론 늘 존재를 아파하고 시원으로의 회귀를 골몰했던 그 역시, 무언가 먹어가며 아파도 하고 골몰도 했을 터. 그가 '맛' 산문집을 냈다는 것 자체를 안스러워하거나 현실의 불가피한 요구로 넘겨짚을 하등의 이유는 없다. 게다가 그가 썼으니 그 다운 글들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너무나 '윤대녕스러운' 서문, 스무 살에 어머니를 떠난 뒤로 나는 온갖 곳을 떠돌았고, 남의 낯선 음식을 얻어먹으며 가까스로 연명했다. 그것은 차라리 살기 위한 몸부림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하여 흐린 날 타지의 허름한 식당에 앉아 혼자 배고품을 달랠 양이면 어쩔 수 없이 눈앞에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곤 하는 것이었다. 그 탁발의 시대에 나는 왜 어머니에게 돌아가 밥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걸까. 한번 떠나오면 돌아가지 못하는 법인가?
 

그러나 수저, 동침하는 부부 장아찌, 독 속에 은둔하는 자들 조기, 살구꽃 필 때 울면서 북상하다 봄밤에 찾아간 곳들, 청진동 낙원동 장충동과 같은 '정말 그 다운'(실은 그게 뭔지 나도 잘 모른다.) 아우라를 팍팍 풍기는 꼭지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생활'의 증명으로써의 '맛'에 관한 이야기들을 꽤 질펀하게 또 구체적으로 때론 집요하게 늘어놓고 있는데, 나로서는 살짝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누군들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인간이 아니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읽은 윤대녕'의 매혹과 한없이 현혹됐던 내 시절에의 향수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책은 '나의 윤대녕'이라는 아전인수격 기대를 빼면, 읽을 만한 글들로 채워져 있다. 이따금 음식의 어원이나 유래 혹은 요리법 등 관련된 정보를 집요하게 설명하거나 심지어 잘못 쓰이는 단어나 잘못 알려진 속설들에 대해 지적하고 캠페인성 발언을 덧붙이기도 해서 살짝 당황스럽기도 했다만, 그를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무의식의 반응이라고 치고. 본문 어딘가에서 마침내 '아저씨'가 된 것일까? 고백하듯 자문하는, 무시로 아내와의 일화를 삽입한 그를 이제는 '어엿한 생활인'으로 인정하는 '성숙한' 독자가 되어버려야 할 것 같다.


2006-12-18 01:40, 알라딘



어머니의수저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윤대녕 (웅진지식하우스,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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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8. 22:30


감동적이었다는 기억 말고는 뇌리에 남은 게 없는 '아리랑'을 읽은 지 십 년이 넘었다. 많은 평전의 주인공이 그러하지만, '아리랑의 김산'은 특히나 생의 궤적이 보이는 치열함과 비극성이 그가 목표하고 살았던 삶의 내용과 의미를 압도하는 경향이 다분하다는 느낌이 든다. 인생의 재구성이라는 관점에서, 평전은 충분히 의도적이고 절충적인 장르이기도 하다. 특히나 사료로 남은 주인공의 삶의 기록 자체가 충분하지 않을 경우, 인물의 삶은 격동의 순간을 중심으로 나머지 삶의 조각들이 원심적 재편을 거칠 수밖에 없는 것도 같다. 하지만 누구나 사람일 터, 삶의 길은 언제나 한 방향으로 움직이지도 않으며 때로 좌충우돌하고 혹은 극점을 오가기도 한다.
 

물론 님 웨일즈의 인터뷰에 의해 전해진 김산의 삶은, 인터뷰이와 인터뷰어의 이름이 공저자로 등재될 만큼의 신빙성은 갖추고 있는 것이었다. 장지락으로 태어나 장북성, 유한평, 이철부, 장명 마침내 김산까지 때때로 버리고 구해야 했던 이름 만큼이나 그의 삶은 굴곡지고 험난했으며 마침내는 허무하게 사라졌다. 격동에 격동, 오직 활발하게 조국의 해방과 세계 혁명의 승리를 향해 나아갔던 그의 짧은 삶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파란만장하다.
 

서슬 퍼런 제국주의에 신음하는 조선 땅에서 태어나 열다섯 어린 나이에 생사의 고비를 넘으며 겨울 만주를 가로질러 걸었던 소년, 민족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로 다시 공산주의자로 변신을 거듭하며 이상을 향한 현실의 멍에를 마다하지 않은 청년. 중국 공산당사의 가장 처절하고 찬란한 패배였던 광주 꼬뮨과 해륙풍 소비에트의 중심에 그가 있었고, 중국 현대사의 가장 정치적이고 절묘한 협잡이었던 국공합작의 회오리 속에서 그는 스러져갔다. 일찌기 조국을 위하여 망명을 자처하고 자신을 버린 당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채, 국적과 당적의 경계 위에 자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올려둔 결과는 오해와 불명예로 점철된 죽음이었다.
 

'혁누망운'이라는 알 듯 모를 듯한 제목을 단 음반이 있다. '우리들의 사랑법'과 '내 사랑 한반도'를 지었던 박치음이 새천년을 앞두고 내놓았던 라이브 음반이다. 혁누망운 - 혁명 누명 망명 운명,이라는 거창한 화두를 담은 동명의 노래는 그러나 미려한 목소리에 실려 가볍고 아련하게 흐른다. '그런 시대도 있었노라'는 그 노래 '혁누망운'. 온 삶을 시대와 역사에 바친 순정의 인간이 걷는 그 길은 변절과 야합이 횡행하는 시대, 장난처럼 인간을 유린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참으로 뜨겁고도 아프게 짓밟힌다. '물에 녹지 않는 소금'이 되고자 했던 그의 삶, '모든 것에 패배하고 자신에게 승리한 인생'이라 자평했던 쓸쓸한 삶. 그 애잔한 기록으로나마 복원되고 읽혀진다는 것을 다행 삼아야 하려나.
 

김산을 생각한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조국을 등지고, 공산혁명을 위해 자신을 버린 당의 조직사업에 몸 바쳤던 사람. 국제주의자이며 민족주의자였던 이상주의자이며 현실주의자였던, 그러나 기어이 일제 특무라는 의심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전선에서의 죽음으로 명예를 회복하고자 했던 마지막 바람마저 다섯 발의 총성과 맞바꾸며 스러진 사람. 그리고 또다른 金-山들을 생각한다. 누구의 기억 속에도 마땅히 자리 잡지 못한 채 식민지 조국을 향해 마지막 눈길을 향하며 죽어갔을 수많은 그들을 생각한다. 감동을 수집하듯 평전을 읽고 그 거대한 삶에 벅차오른 가슴을 어쩔 줄 모르기도 한다. ... 심장의 감동이 현실의 용기로 화하기까지, 복잡하되 무감한 현실에 한 줌 변혁의 기운을 스스로 불어넣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김산-들을 소비해야 할까. 
 

가끔 피쎄일(아직도 이런 말 쓴다고 가끔 타박을 듣는다. 하지만 선전전이라는 말도 마땅치 않고 전단을 돌린다고 말하는 것도 무언가 헐렁하다, 나는 그렇게 느낀다.)을 할 일이 있을 때, '가네코 후미코'와 '오스기 사카에'가 떠오르고는 한다. 내게 변혁은 언제나 거창하고 현실을 압도하는 무거운 것이었다. 그러나 평전의 행간에서 부활한 혁명적 삶의 주인공, 그들의 일상은 그들이 지향하고 몸바쳤던 그 무엇만큼 장엄하고 유려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몽매간에 원한 것은 혁명이었으나, 그들이 찍어내고 뿌린 것은 고작 종이 한 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죽어 빛나는 이름을 얻었으나, 그들의 삶은 실은 무척이나 비루하고 초라하며 한편 시대착오적이었을 것이다.
 

일요일 오후, 지역 선배의 부친상을 알리는 문자를 받았다. 내가 속한 지역위원회는 내년 초 시당으로의 통합을 앞두고 차기 지역임원 선거를 시작한 터였고, 아버님을 잃은 그는 지역위원장에 출마한 단독 후보다. 학생운동과 지역운동 노동운동 민중운동을 전전하며(?) 나이는 서른 여덟, 다행히 장가는 갔으나 동갑내기 아내와 여덟 살 먹은 딸래미는 멀리 춘천에, 언제나 서너 개의 대책위를 바쁘게 넘나들며 이따금 투쟁이 없는 날에는 부천역앞 노점상에서 마주친다. 아주 가끔 양복을 빼입는 날은 당 행사나 지역 행사가 있는 날, 낮도 없고 밤도 없이 투쟁 현장을 뛰어다니는 그는 며칠 전 노점상연합회의 이웃돕기 김장을 나르다가 허리를 다쳐 입원도 했었다. 가끔 오는 그의 연락은 언제나 투쟁이나 행사 일정을 담은 것이었고, 얼굴이나 보자는 전언도 그냥은 없다.
 

애틋한 마음이 되어 찾아간 문상에서 돌아오는 길, 너무 울어 눈이 빨개진 채 배웅을 나온 그의 한 마디는 어이없게도 "투표했니?"였다. 징한 빨갱이라고 생각하고 말았지만 다시 '김산 평전'을 뒤적이다보니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영웅의 시대는 저물어 가고 망각의 거처로 둥지 트노라 세상의 밖에서 문득컨대 동지들 참으로 아름다웠소 수많은 전설들 수많은 신화들 수많았던 무용담들 ... 혁명과 투쟁과 사랑과 노래 꿈으로 추억으로 기억 너머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운명으로 살아가겠노라', 씁쓸하고 기운 빠지는 '혁누망운'의 노랫말이다. 그리고 김산과 아리랑을 기념하는 사이트를 서성대다가 우연히 마주친 예전 기사가 내내 맴돈다. 항일독립투쟁가들의 후손인 재중동포들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라도 불법체류자 사면과 취업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소위 '조선족' 학자의 쓴소리. ... 문득 현실이 역사보다 무겁고, 생각이 많아진다.


2006-12-12 23:48, 알라딘



김산평전
카테고리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 역사인물
지은이 이원규 (실천문학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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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8. 22:06


오에 겐자부로라는 이름의 존재감만을 감지하고 있었을 뿐, 그의 책을 읽은 건 처음이었다. 책장을 펼치면 소설이 시작되기 전 '나에게 일어난 일을 상상에 의해 심화하다'라는 흡사 고문헌의 번역 같은 <체인지링>을 위한 서문을 만나게 된다. 일흔을 넘긴 노작가가 집필한 최후의 삼부작 중 첫번째라는 수식은, 그의 모든 저작을 미답지로 남겨둔 초보 독자에게 사실 만만한 것이 아니다. 언제부터 우리가 소설가에게 경의씩이나 가지기 시작했냐고 묻는다면 할 말 없지만, 칠십 년 인생의 결산을 들춰보는 심정은 아무려나 그런 것이었다. 공감을 위한 준비 부족으로 인한 주눅 혹은 공감 부득의 안타까움을 나의 무지 탓으로 돌리는 반성의 독서. 때로 권위(?)란, 판단불능의 요상한 독서 경험을 안겨주기도 하는 것이다.
 

작가의 처형이자 어린 시절의 지우(라고만 하기에는 인생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주고 받았던)인  '담뽀뽀'의 감독 이타미 주조의 자살을 모티브로 소설은 쓰여졌다고 한다. 작가의 분신인 '고기토'와 그의 아내 치카시, 장애를 가진 아들 아카리 그리고 사후에도 '물장군'을 통해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대화를 주고받는 고로. 네 사람의 삶의 반경에 포진된 다양한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시공을 종횡하며 전개된다. 재생지 질감의 두툼한 책장 속에 녹아있는 이야기는, 오래 되어 빛 바랜 일기장처럼 회고적이고 깊숙이 두어 습기찬 종이처럼 눅눅하다.
 

무지한 중에도 외면할 수 없는 어떤 밀도로 가득 찬 이야기들은, 이를테면... 무시할 수 없는 공력과 연륜을 지닌 '어른의 말씀'에 사소한 반론이라도 감히 입밖에 내지 못하고 저린 다리를 꾹꾹 눌러가며 무릎 꿇고 앉아 듣고 있는 느낌이기도 했다. 물론 가끔은 이야기 속에 빠져 잠시 잊기도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지루해져 딴 생각을 하다보면 급격한 통증처럼 다리 저림을 자각하게 되는 뭐 그런. 장구한 인생의 빛나는 순간들, 그야말로 역사로 화한 자전적 삶이 한 편의 대하 드라마처럼 유장하게 펼쳐질 때, 어지간한 재기가 아니라면 사실 화자와 청자의 마음의 거리는 다소 민망한 것이 되기도 한다.
 

이른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하여 일관되게 일본 사회의 우경화를 경계하며 실천적 좌파 지식인으로 살아왔다는 소개 덕분에 그나마 집중의 노력을 할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 스스로 엄청난 당위성을 부여하며 모티브로 차용한 '체인지링'이라는 것이 억지스럽게도 느껴졌고 일관되게 영탄조의 찬양일변도로 묘사되는 고로라는 인물에 대한 수긍도 참으로 어려웠다. 희망과 절망, 감동을 들먹이는 책 표지의 카피는 분명, 실존인물의 자전적 이야기여서 더 빛을 발할 수 있을 거란 계산이었겠지만 그렇게 안전한 감동을 전제할 만큼 과연 오에 겐자부로의 일생과 작품이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작가 개인으로서는 한없이 빛나는 아름다운 나날을 급습한 충격적인 '그것'이, 이후 일본의 문화계에 거대란 족적을 남긴 두 거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관계 짓고 미래의 희망까지를 불러들일 만큼 상징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도 물론 있겠다. 그러나 '소설' 안에서 '그것'은 적어도 일개 독자인 내가 읽기에는 너무나 김 빠지고 극대화된 느낌이어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무엇으로 삼기에 너무나 조야하다는 허탈감이 더욱 강렬했다. 마치 필생의 비밀처럼, 차마 직접 거론할 수도 없을만큼 위험천만한 비밀로 무장한 채 동어반복되던 '그것'의 실체를 읽을 때의 허망함이란. 정말 죄송하지만 뭡니까, 애비는 종이었습니까? 속으로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차라리 실존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진실은 나만이 알고 있다는 듯 맥락을 종잡을 수 없는 '주장 같은 묘사'가 반복되는 느낌이어서 심지어 이것이 노장의 특권일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어버렸던 것이다. 물론 어찌됐건 '소설'이라는 픽션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작품에 대해 '자전' 소설이라는 이유로 굳이 실존인물들을 시시때때로 등장인물에 종이옷 입히듯 맞춰 상상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이 소설은 '자전'이 중심에 놓여있는 작품이었고 하필 나는 소설이건 무엇이건 작가와 작품을 동일시해버리는 단순한 독자였던 것이다.
 

물론 이름이나 겨우 주워섬겼던 무지한 독자의 막무가내 기대가 스스로를 배반한 독후감일 수도 있다. 다소 산만하게 전개되기는 하지만, 저자가 오랫동안 경험한 일본사회 좌우의 대립과 내밀하고 개인적인 차원의 혼란상이 그리고 고로의 자살을 둘러싼 도를 넘은 미디어의 횡포와 무례가 단지 저열한 옐로우 저널리즘의 소산이 아니라 전후 일본 사회가 축적한 사상적 불균형의 집약임이 이야기 속에 잘 녹아있다. 또한 작가 역시 그러한 과거와 현재의 피해자라면 피해자일 수 있겠지만 결국 미래는 또 다른 희망을 품고 있다는 화해적 결말을 끌어냄으로써 인간과 사회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것이라고도 인정할 수 있겠다. 그러나 끝까지 맴도는 의심은, 무구한 환상으로 어정쩡한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 과연 정리모드에 들어선 '어른의 숙제'일까 하는 짧고 불퉁한 생각. 난 겁나게 무지하지만, 아직 시퍼렇게 젊은 것인가.
 

소심하게 덧붙이자면, 제목으로 뽑은 구절처럼 군데군데 인상적인 표현들은 차고 넘쳤다. 솔직히 소설이 자꾸만 무언가를 변명하는 느낌이어서 초반부터 묘한 저항감이 찰랑거린 탓에 몰입하기가 어려웠는데, 그건 뭐 독자의 소양 때문이라 치고. 하루가 다르게 질주하는 세상에서, 이렇게나 느리게 '인생에서 만난 모든 것을 주머니에 넣고' 줄줄이 자기 얘기를 풀어내는 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가 아직까지 있다는 것에 약간의 안도감이 들기도 하고. 또 여전히 그의 독자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을테니 혹시나 이런 의고적 권위의 힘이 세계 한 부분의 속도를 조금이나마 늦추는 데에 기여하지 않을까 작품과 무관한 상상을 해본다. 


2006-11-10 01:57, 알라딘



체인지링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 일본소설문학선
지은이 오에 겐자부로 (청어람미디어,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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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8. 21:59


내가 가진 폭력이나 무력과 짝지어 다니는 사람에 대한 편견은 군인이나 경찰 혹은 조폭처럼, 자의건 타의건 물리력과 밀착된 일상의 주인공들에게 느끼는 위화감만큼이나 견고하다. 그래서인지 체 게바라나 마르코스처럼 '대중적 열광'(?)에 의해 신비화된 인물이 아닌 경우, 무엇을 위한 것이었건 무장 투쟁을 일삼은 사람에게는 선입견 다분한 거리감이 따라붙는다. 폭력이란 끝내 사용하지 말아야 할, 마지못해 용납이 되더라도 대항적으로 사용될 때만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금단의 영역이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세계와 일상은 구조적으로 또 직접적으로 꽤나 폭력적임에도 말이다. 
 

소설가인 저자는 십여 차례에 걸친 현지 답사와 최대한의 자료 수집으로, 잊혀져 간 혁명가의 삶을 사실에 기반하여 재구성하려 노력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자제하며 비교적 담백하게 서술하고는 있지만, 마음 깊이 주인공에 매료된 저자는 시종일관 '영웅 김약산'을 재현하는 데에 매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갈라진 조국에 덧칠된 이데올로기의 균열 속에서 잊혀진 혁명가를 되살리는 작업의 지난함을 감히 헤아려 보지만, 박제가 되어버린 위인의 삶을 보는 듯한 전형적이고 구태의연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아쉽기도 하다. 약산의 한 생을 충실히 서술하려는 저자의 노력은, 이미 감동을 전제한 평면적이고 기계적인 영웅적 인물 묘사로 인해 반감되는 면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책장을 덮고 사진 속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어쩐지 단 한 번도 웃지 않았을 것만 같은 선이 굵고 강직한 얼굴을. 그의 삶은 비극적 시대의 무게에 짓눌린 진지하고 또 진지한 그야말로 재미없는 것이었다. 그의 삶은 마치 개인적 욕망은 일찌감치 거세당한 채 프로그램된 인간인 양 오직 조국의 독립과 새로운 국가 건설에의 복무에 맞춰져 있다. 구한말의 조선에서 태어나 굴종과 반역의 역사를 온 몸으로 짊어지고 살았던 약산 김원봉. 교과서 접은 지가 오래라 제도 역사교육에서 '의열단'을 어찌 다루고 있는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찌됐건 그는 일제하 무장독립투쟁의 총아이자 풀 죽은 식민지 백성들의 무력감을 단 번에 날려버리는 '테러'로나마 민족의 자존심을 부지했던 '의열단'을 이끈 영웅적 인물이었다. 
 

20세기를 목전에 두고 충절 지사의 땅 밀양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시절 적을 두었던 동화학교가 일제에 의해 폐교 당하는 경험을 통해 식민지 백성의 운명을 직접 체험한다. 이후 김약산에게는 기대를 품었던 경성 중앙학교로의 편입 기회가 오지만, 친일 반역자 등의 고관대작들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이모할머니의 바라지로 가능한 것이란 걸 알고는 바로 귀향한다. 고향에서 왜란때 승병들을 양성하던 사명대사의 기개가 서린 표충사에 머물며 병법을 익히고 수도를 하던 그는 이 년 후 다시 경성으로, 그리고 마침내 독립운동의 열정을 불태우며 중국으로 향한다. 중국 대륙 곳곳을 떠돌면서도, 혈기왕성한 김약산의 뇌리를 가득 채우는 것은 오로지 조국의 독립. 궁극적으로는 힘 있는 군대를 만들어 독립을 쟁취한다는 목표였다. 남경의 금릉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영어 공부에 매진하던 약산은, 신흥무관학교를 거쳐 22세에 길림에서 뜻을 함께 한 동지들과 '의열단'을 창단한다.
 

의열단의 활동은 초기의 실패와 시련에도 불구하고, 금세 한계를 드러낸 3.1 만세 운동 등의 비폭력 독립운동과 해외기지 중심의 원격 투쟁 등 지지부진하던 독립운동사에 쾌거로 남은 빛나는 것이었다. 물론 의열단은 한편 요인의 암살과 집중 폭격이라는 극단적인 방법론을 원칙으로 하는 테러집단이기도 했으며, 그를 위한 훈련 역시 비인간적이고 냉철한 인간 병기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많은 단원들이 자신의 운명을 자살폭탄테러라는 극렬한 선택으로 몰고가는 처절한 것이기도 했다. 단원들을 죽음의 길로 내모는(?) 의백 김약산의 삶 역시, 이십 대의 젊은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진중하고 무거운 또한 음울할 정도로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잔뜩 주눅이 든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려는 그들의 파격적인 활동에 자극을 받아 많은 젊은이들이 의열단원이 되고자 희망했고, 실제로 무장투쟁과는 거리가 먼 듯 보이는 지식인들 역시 초개같이 목숨을 버리며 역사의 뒤안으로 개인을 묻어갔다.
 

십 년에 이르는 의열단 활동 속에서 죽어간 단원들의 마지막 염원은 오직, 독립된 조국 땅에서 자신의 이름을 한 번 불러달라는 그야말로 사소하고도 장렬한 것이었다.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운명의 길을 영도했던 의백 김약산은, 죽어간 의열단 동지들의 숙원을 가슴에 담고 마치 죽은 듯이 묵묵히 한 길을 간다. 그리고 1925년 의열단은 '결사적인 항일 군대 조직'으로의 전환을, 군자금 확보와 공동의 적 일본과 맞서기 위한 중국과의 연합을 위해 약산은 황포군관학교 입학을 선택한다. 전략적이었건 불가피했건, 조선 반도로는 들어갈 수 없었던 무장투쟁세력은 급변하는 중국의 정세 속에서 독립투쟁을 위해 감내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들이 거점으로 삼은 곳은 중국땅이었고, 제국주의 야욕을 숨김없이 드러내기 시작한 일본에 대항하려는 식민지 조선의 혁명가들은 안타깝게도 그 너른 땅의 그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후 의열단은 정치군사조직으로 재정비하여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황포군관학교를 통해 중국과의 강고한 연합 전선을 구축한 약산은 조선혁명간부학교를 개교한다. 그리고 의열단과 한국독립당 등의 5개 단체를 묶어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한다. 한낱 테러리스트의 조직으로 폄훼할 수 없는 인지도와 활동상을 보였던 의열단과 그를 이끈 김약산의 염원은, 당시 해외에서 난립하던 각종의 독립운동단체들과의 단일전선체 건설을 통해 제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조선혁명간부학교의 교육을 통해 인력을 양성하고, 이후 조선민족전선연맹과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였으며 이러한 활동은 종이호랑이처럼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임정에 비하면 가히 해외독립운동의 근간을 이루는 것과 같았다. 비록 제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했지만, 임박한 해방의 기운을 감지한 후 임정에 참여하고 새로운 조국의 건설을 위해 분투한 그의 행적은 묵묵하고도 눈물 겨운 것이었다. 
 

문학을 사랑하고 시를 즐겨 읽었지만, 그에게 독서는 학습 혹은 유일한 휴식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일생 두 번의 결혼을 했지만, 서른 두 살 첫 사랑으로 찾아온 생명의 은인 박차정과의 초혼은 독립투쟁에 목숨을 건 혁명 동지로서의 결합이었고 조선의용대의 전선 시찰에서 입은 총상 후유증으로 그녀가 죽은 후의 재혼은 곁에서 그를 보좌하던 비서 최동선의 목숨을 건 짝사랑의 결과였다. 인생사의 소소한 재미라고는 몰랐을 것만 같은 그의 삶은 무서우리만큼 집요하게 역사와 그 결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재미 없는 그러나 의미로 가득한, 어쩌면 그 시절은 생활의 재미랄 것을 찾을 수 없는 때여서 그리 간절히 역사와 개인을 동일시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일까. 점점 재미 있는 것이 차고 넘치는 시절, 목숨마저 버리고 역사의 소명을 따랐던 사람들이 사후에도 역사의 구천을 떠도는 현실이 더욱 의미 보다는 재미를 좇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김약산과 의열단. 역사 위의 그들은 때로 한 공간에서 한 뜻을 품었던 이육사와 김산과도, 때로 긴장하고 반목했지만 한 곳을 바라보았던 안창호와 김구와도, 심지어 해방정국 비명에 간 여운형과도 너무나 동떨어진 곳에 놓여있는 게 아닐까 싶다. 중앙학교 시절과 의열단 활동 초창기에 등장하는 나혜석과의 조우가 너무나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같은 시대, 같은 뜻을 품고 다르지 않은 최후를 맞았던 윤봉길과 이봉창 그리고 스러져간 의열단원 김상옥과 김지섭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너무나도 극명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저자의 잠재의식의 발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에 따르면 그는 이데올로그는 아니었던 것도 같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을 때 좌우가 아닌 정의가 있는 편을 택했던, 그 묵묵함으로 한 길을 갔던 까닭이라면... 나 역시 '그런' 삶에 너무 큰 빚을 지고 있는 건 아닐까.  


2006-11-06 00:56, 알라딘



약산김원봉
카테고리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 역사인물
지은이 이원규 (실천문학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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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8. 21:57


누군들 좋아하랴만 나 역시 염치 없는 인간을 매우 혐오한다. 그러나 염치 따위는 내던져버렸기에 한없이 자유롭고 매력적인 인간에게 혹할 때가 있다. 바로 그 순간 연달아 떠올리는 것은 그로 인해 누군가 받았을 상처 혹은 아픔 등속이지만 그건 내가 낯 모르는 타인의 아픔마저 생각하는 인류애의 소유자여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모르는 새에 훈련된 어떤 '윤리'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된 의식은 대체로 내면화로 이어지는 까닭에, 알면서도 그 도의적 연상을 멈추지 못한다. 일종의 자신을 위한 윤리적 알리바이다. 너무나 매력적인 몰염치의 인간을 향한 현혹과, 그를 향한 도덕적 판단을 동시에 떠올림으로써 스스로에게 기댈 언덕을 마련하는 방어기제일지도 모르겠다. 무의식은 무섭다. 그리고 그런 사정 앞에서 강구하는 적절한 타협책은, 바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설명을 하는 것이다. 
 

책장을 덮고 마음이 꽤 무거워지기는 했지만 '가네코 후미코'에서, 제국주의로 치닫는 삭막한 국가 재편의 시기에 저항으로 넘실거렸던 근대 일본의 싱그럽고도 핍진한 풍경에 매료되어 집어들게 된 책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몰염치의 매력덩어리가 바로 오스기 사카에다. 내게 실천문학사의 역사인물찾기 시리즈는 양장본의 묵직함과 만만치 않은 두께, 무엇보다 그 속에 담긴 '사람'의 존재감 때문에 무척 선호하면서도 한편 부담스러운 대상이다. 한결같이 읽고 나면 후유증이 꽤 커서 나로서는 아무때나 선뜻 집어들게 되지는 않는다. 사람과 글이 모두 좋으면 한참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잠겨있거나 사람은 훌륭한데 글이 아쉬우면 그에 대한 다른 자료들이 없나 기웃거리게 된다. 이 책은 드물게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음에도 뭔가 다른 기록이 없을까 궁금해지는 경우였다. 아쉽게도 오스기 사카에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읽을거리를 거의 찾을 수 없었다. 
 

1885년 군국주의로 치닫던 일본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1923년 간동대진재의 혼란 속에서 테러로 숨을 거둔 오스기 사카에는, 일본의 전설적인 아나키스트 사상가이며 문필가다. 한두 줄로 요약되는 그의 삶은, 혼란한 시기 저항운동에 뛰어든 많은 혁명가들과 별 다름 없는, 거대하고 숙연한 역사적 생애다. 그는 군국소년으로 키워지던 시절의,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억압의 실체를 깨닫고 자유를 갈망하며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서구의 아나키즘 저작을 번역 출간하고 혁명 이후 러시아 공산당의 반민중성을 알리는 작업에 몰두하며 무정부주의자의 국제 연대를 위한 모색으로 중국과 유럽 등지를 오가면서 치열하게 활동했다. 집약된 삶의 줄거리는 위대한 삶의 전형으로 서술되기에 충분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잡지 '개조'의 연재를 위해 집필한 '자서전'과 국제무정부주의자대회 참석을 위해 잠입한 프랑스에서의 경험을 담은 '일본탈출기'를 통해 보여지는 인간 오스기 사카에의 면모는, 그가 역사 속에서 명멸해 간 수많은 혁명가들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인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평전이 아니라 자서전이어서 더 노골적으로 신랄하게 돋보이는 부분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분명 '보통' 인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군인의 자식으로 태어나 병영 가까이에서 성장한 그의 유년 시절은, 이렇게 커서 뭐가 될까 싶을만치 걱정스러운 악동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선천적인 말더듬으로 내성적인 성격 역시 없지 않았지만, 남다른 호기심과 과단성(?)으로 불과 열 살에 성에 눈을 떠버린다거나 마음에 가는 소녀를 향해 과격하고 무모한 위악의 표현도 해가며 각종의 사건사고의 주인공으로 소년은 성장한다. 타고난 문학적 감수성과 섬세한 성정을 자각하기 이전 좌충우돌 못 말리는 청소년기의 에너지를 주로는 폭력적이고 파탄적인 방식으로 해소하며, 그는 스스로를 서슴없이 불량소년이라 칭할 만한 성장기를 보낸다. 어린 시절 동네 서점의 단골로 독서에 몰두하며 장래를 꿈꾸는 모습과 또래들 사이에서 단독으로 입수해 탐독하던 잡지의 글을 베껴내는 식으로 독서회의 지존을 구가하는 영악한 모습은 대의명분의 도덕률이나 사소하더라도 윤리적 가치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이후의 행보와도 일관성을 보인다. 그는 자신이 택한 사상을 가치가 아닌 삶으로 내면화한 인간이며, 무엇에도 얽매임 없이 자유를 갈망하는 타고난 성향으로 더욱 조화로울 수 있었던 것 같다.
 

고향을 떠나 유년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그는 폐쇄적인 집단주의 속에서 동료들과 함께 아슬아슬한 일탈을 일삼으며 나날을 보낸다. 충동적이고 격정적인 사춘기의 소년들이 떼로 모인 그곳에서는, 억압된 욕망이 다양한 부작용을 낳으며 은밀히 해소되었고 그 역시 그 속에서 비정상적인 군국열을 주입하는 교육과 폭력적이고 파국적인 욕망의 분출 사이에서 유희하고 방황한다. 제국주의 교육의 폐해가 고스란히 답습되는 학교에서 철부지로 방황하던 그는 마침내 동기생 간 칼부림의 당사자로 퇴학을 당하고 이 사건이, 속에서 내밀하게 피어오르던 자의식을 감지하는 계기가 된다. 퇴학으로 귀향한 이후 열병과 같은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살짝 거듭난 그가 선택한 길은 문학이었고, 물론 여전히 철부지 안하무인의 피는 이따금 솟아올랐지만 그는 대체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노력하기 시작한다. 오로지 무사의 꿈, 무사의 죽음에 경도되었던 방자한 지난 날을 뒤로 하고 그가 거듭나기 시작한 것은 동경에서의 새로운 삶과 함께 였다. 그는 제국을 열망하며 들끓는 도시에서, 새로운 정신 새로운 가치와 만나고 거리낌없는 가학의 시간 속에서도 끊임없이 갈구했던 자신의 열망을 향해 매진하기 시작한다.
 

소위 위험인물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몇 번의 감옥행과 혁명을 위한 활동을 하면서 그는, 역시 남다른 자유로운 면모를 잃지 않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책에서도 따로 지면을 할애해 해명(혹은 변명)하고 있는 '하야마 사건'이다. 이미 아내가 있었던 그를 구설에 오르고 죽음의 위험에도 직면하게 만든 사건은, 그의 두번째 아내이자 간동대진재의 혼란 속에 함께 죽음을 맞은 이토와 그와 또다른 연정을 나눈 여기자 가미치카와의 삼각관계가 빚어낸 참극이자 희비극이었다. 연애와 인간 관계에서도 서로에 대한 구속이나 권력 관계를 떠난 완전한 자유를 원했던 그는 가미치카와의 연애에 휘말린 동시에 이토 노에를 사랑하게 된다. 마침 자신이 주력하던 잡지의 폐간 등으로 좌절하고 함께하던 동지들마저 잃어 잔뜩 의기소침해 있던 그에게 다가온 두 여인과의 사랑은, 이러저러한 구구한 사정 속에서 오해와 실망과 반목을 만들고 상황은 복잡하게 꼬여만 간다. 그러던 중 집필을 위해 내려간 하야마에서, 질투와 복수심에 사로잡혀 이토와의 동행을 의심하며 '침입'한 가미치카에게 그는 목에 단검을 맞는다. 한편의 치정극이라고 할 만한 충격적인 사건의 내막은, 자서전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며 오로지 오스기 사카에의 입장에서 서술되고 해명되고 있다. 구체적인 정황과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있지만, 아무래도 자기방어적인 어조가 다분한데 그럼에도 절절하게 와닿는 것은 그가 참 이례적으로 자유로운 인간이며 한편 매우 관조적인 다혈질의 인간인 것 같다는 느낌이다.
 

1부와 2부 사이에는 다른 책에선 볼 수 없었던 강렬한 핏빛의 간지 두 장이 삽입되어 있다. 그의 삶을 시각적으로 단순히 재현하면 이런 빛깔이 아닐까 싶어 그것조차 마음에 들었다. '일본탈출기'라는 제목이 붙은 2부는 그가 유럽에서 열리기로 예정된 국제무정부주의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을 떠나 유랑하며 보고 느낀 소회를 기록한 일종의 견문록 모음이다. 자서전과 마찬가지로 능청스럽고 재기발랄한 문체와 유쾌하고 거칠 것 없는 솔직함에다, 서구의 문물과 혁명운동을 바라보는 동양 이방인의 예리하고 분석적인 시선이 돋보이는 글들이 묶여 있다. 1920년대 초반의 유럽은 러시아 혁명의 여파와 프랑스 반동주의의 기운으로 복잡한 정세의 한 가운데에 있었고, 그는 그 거시적 변화의 현장을 실체적으로 느끼고자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러나 대체로 여유만만하고 묘하게 낙관적인 그는 일상적인 검속과 감시가 따라붙고 예정된 대회는 기약없이 연기되는 상황에서도, 자기 속의 욕망에 솔직하게 반응하며 여자도 만나고 못 먹는 와인의 맛도 알아가며 마치 위험한 배낭여행처럼 외유를 즐긴다. 그러던 중 메이데이가 다가오고, 조금은 김 빠진 수세적인 집회에서 자청한 연설로 프랑스 경찰에 연행되고 결국 정체가 탄로 나 이국의 감옥에 갇혀 매우 태평스럽고 자족적인 몇 달을 보내게 된다.  
 

나는 마코에게 전보를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테이블에 앉아 이것저것 간단한 문구를 끼적거려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싸게 먹힐 전보문은 완성되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가지 적어보던 중에 다음처럼 이상한 것이 완성되었다.
 

마코야, 마코 / 아빠는 지금 / 세계에서도 유명한 / 파리의 감옥 라 상테에. // 그러나 마코야, 걱정하지 마 / 맛있는 서양요리 먹고 / 초콜릿도 먹고 / 담배도 뻑뻑 소파 위에서. // 그리고 이 / 감옥 덕분에 / 기뻐해라, 마코야 / 아빠는 곧 돌아간다. // 선물은 듬뿍, / 과자에 옷에 키스에 키스 / 춤추며 기다려라 / 기다려, 마코, 마코.
 

그리고 나는 그날 하루 종일 방안을 왔다 갔다 하며 이 노랫가락 같은 문장을 커다란 목소리로 노래하며 지냈다. 그런데 묘한 건, 조금도 슬플 일이 없었음에도 그렇게 노래를 하고 있으려니 소리 없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목소리가 떨리면서 한없이 눈물이 흘렀다.
 

부분을 뚝 떼어내 옮기자니 그의 글 전반에 감도는 기운을 전하기는 어렵지만, 할 일 없는 감옥에서 빈둥거리다 문득 큰 딸아이가 생각나 전보를 친 이야기를 적은 부분을 옮겨봤다. 나는 이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데, 적어도 팔할은 그의 글솜씨 덕이라고 생각된다. 구어체와 입말을 그대로 살린 그의 문체가 주는 생동감과 박진감 그리고 간결하되 적확한 묘사와 천연덕스럽게 구사하는 유머는,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좀 당황스럽기까지 했었다. 양장본의 자서전, 이라는 형식과 내용의 무게에 미리 압도된 나로서는 쿨하고 능청스러운 어투에 수시로 행간의 반역을 구사하는 그의 이야기가 조금 놀랍고 생경했던 것 같다. 말미에 붙은 역자의 해설은 이러한 그의 문체에 대해 아나키즘적 민중예술론을 실현한 결과물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그런 학술적 가치 유무와 무관하게 그야말로 읽는 재미를 선사하는 글이어서 금세 빠져들어 낄낄대며 읽었다. 어떤 당위나 권력에도 구속되지 않으려 애쓰며 윤리를 넘어선 자유로움으로 운동 자체의 삶을 살았던 사람. 그가 살았던 시대의 조건은 물론 척박하고 혼란스러웠겠지만, 그 무엇에도 속박됨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인간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유쾌하고 뭉클했다.
 

아쉬운 점은, 그의 이름 앞에 붙는 갖가지 수식어와 그의 생애를 해설하는데 덧붙여진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위상에 대한 실감을 그다지 할 수 없었다는 점 정도. 비명에 떠난 자가, 죽음과 무관하게 자신의 삶을 회고한 명랑한 글이어서도 그랬겠고 '자서전'의 경우 그의 사상적 성장과 성취에 전혀 초점이 맞춰지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미 넘치는 혁명가의 삶을 부분적으로나마 엿보는 일의 즐거움과 깨달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감동을 주는 인간도, 상처를 주는 인간도 결국 모두 평범하다는 사실. 그들 모두 두려움에 휩싸이고 절망에 허덕이며 살아갈 뿐이라는 것, 어차피 해석과 조명은 타인의 몫이고 어떤 렌즈를 들이댈 것이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쩌면 그 삶의 과정에서 누구나 길을 잃고 헤매이지만, 결국 어떤 죽음을 맞느냐 거기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생을 어떻게 끌어가느냐 하는 것이 타인의 마음에 공명을 일으키는 관건인지도 모르겠다. 전단지를 돌리고 시위에 참여하고 끊임없이 글을 쓰고 또 말하고... 그들의 활동은 그렇게 일상적인 실천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때로는 총을 들고 결사하고 감옥에도 끌려가지만 말이다. 인간미 넘치는 혁명가의 스스로를 까발린 이야기, '깊이에의 강요'로 스스로를 옥죄며 괴로워하는 내게는 참 고마운 책이었다. 누군가에 의해 재구성된다는 것 역시, 자필만큼이나 선택적이고 자의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평전이 기다려지는 책이다.


2006-10-21 05:24, 알라딘



오스기사카에자서전
카테고리 시/에세이 > 시/에세이문고 > 시/에세이문고 일반
지은이 오스기 사카에 (실천문학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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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7. 22:02


지난 여름 어느 프로그램에서 그녀를 다룬 방송을 했다는데, 덕분에 뒤늦게 알게 된 이름이다. 적국이었던 일본 여성이지만, 조선의 아나키스트 박열과의 사랑과 공동투쟁 그로 인해 맞게 된 이른 죽음으로 인해 그녀는 2006년 대한민국의 '광복'을 기념해 공중파로 되살아난 모양이다.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 라는 강렬한 부제의 주인공 가네코 후미코. 아나키스트니 무슨무슨 주의자니 하는 말은 혁명적으로 살다간 인간의 삶을 지칭할 때 자주 사용되는 말이지만, 그녀에게 쓰일 때 역시 '통칭'의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다.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살과 뼈와 피를 가진 한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법적으로 '무적자'였던 그녀는, 태어난 땅에서 또 어린 나이에 거의 식모로 보내진 조선땅에서 학대로 점철된 성장기를 보낸다. 충청도 어느 마을에서 '식민자'로 그러나 버려진 자로 생활하는 7년 동안, 혈육의 정이나 친구와의 우정 같은 것과는 무관한 소녀의 삶 속에서 때로는 자살을 꿈꾸고 또 때로는 기성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성공하여 자신의 삶을 일으켜세우는 꿈을 꾸기도 하면서 지옥같은 고통의 나날을 버텨낸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를 기다린 것은, 양육의 책임은 전혀 지지 않은 아버지에 의해 강요된 중노릇하고 있는 외삼촌과의 정략결혼이었다. 가족으로서 가졌던 최소한의 기대마저 배반당한 그녀는 결국 자립을 모색하며 도쿄로 떠난다.
 

20세기 초 청일전쟁의 승리와 러일전쟁 준비로 국민총동원 체제가 가속화되던 당시의 일본은, 천황제를 근간으로하는 가부장적이고 군국주의적인 사회질서 재편의 시기였고 한편 메이지유신 이후 적극적인 서구문물의 수용 과정에서 유입된 좌파 이념과 운동이 어지러이 혼재하고 있었다. 여학교 졸업 검정시험을 치르고 여자의전에 들어가기 위한 고학을 목적으로 도쿄에 온 그녀는 길거리 가판대에서 먹고 자며 신문을 파는 생활, 가루비누 가게의 점원과 행상, 가정부, 국수집 점원 등을 전전하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나 집에서 기르는 불쌍한 개를 거의 동지와 마찬가지로 여겼을 만큼 처절한 소외와 학대의 원체험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싱싱하고 혼란한 생동으로 가득찬 도시에서 서서히 자아에 눈 뜨고 세상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혹사에 대한 불평등한 보수와 강자의 약자에 대한 착취에 불평을 품고 있던 차에 사회주의자들과 만나게 된 그녀의 인생 계획은 급선회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는 기성의 가치와 결별하고 만난 사회주의자들에게서 오히려 인간에 대한 환멸과 회의를 느끼게 된다. 현실사회주의자들의 인간성에 대한 불신감은 나아가 민중에 대한 불신으로 심화되었고, 무적자로 또 여성으로 이중의 질곡 속에서 타인에 의해 좌우되는 삶에서 고통받았던 지난 날의 경험은 마침내 그녀를 오로지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이끈다. 그리고 그 즈음 그녀의 인생을 건 마지막 동반자 박열을 만나게 된다. <청년조선>이라는 잡지에 실린 박열의 시 '개새끼'를 읽고, 나는 지금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것을 이 시에서 발견한 기분이며 시에서 이상할 정도로 강력한 반역 기분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할 만큼 시에 매료된 그녀는 곧 박열과의 동거생활에 들어간다.
 

자아의 자유의지에 골몰했던 그녀는 운명적으로 반해버린 박열과의 동거에 몇 가지 조건을 내거는데, 첫째 "동지로서 함께 살 것", 둘째 "내가 여성이라는 관념을 반드시 제거할 것", 셋째 "둘 중 하나가 사상적으로 타락하여 권력자와 악수하는 일이 생길 경우 즉시 공동생활을 그만둘 것", 즉 "주의를 위한 운동에 상호 협력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그리고 인간사회의 약육강식관계는 아무리 사회를 변화시켜도 끝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는 선에서 멈추지 않고 우주만물을 절멸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지독한 허무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였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공동생활 공동투쟁이 시작된다. 그들은 동등한 인간으로, 인간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동지로,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으로 함께 하며 무정부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인 재경조선인으로 구성된 흑도회의 기관지 <흑도>를 발간하고 이후 <뻔뻔스러운 조선인>, <현사회> 등의 잡지 간행에 몰두한다.
 

박열은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나 공립보통학교에서 수학하다가 도쿄로 건너와 재경조선인학생들과 함께 혈권단, 의권단, 흑도회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의 실현불가능성에 대해 회의하며 허무주의로 이행한 후 인간성은 모두 추악할 따름이어서 그것을 신뢰하고 기다릴 수가 없다고 생각해 일본 권력계급은 말할 것도 없고 가능하다면 우주의 만물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백정이나 피차별 부락민 그리고 밑바닥 계층의 소리를 반영하고 연대하는 잡지를 편집하고 배포하는 일 등과 함께 인삼 행상 등으로 연명했고, 한편 과격한 허무주의자였던 박열은 천황제와 일제 군국주의의 허상을 까발리고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과 각계의 저항운동을 독려할 목적으로 폭탄 입수 및 투척 계획을 구상한다. 또 그들은 흑우회의 회원들이 비교적 세련된 무정부주의 사상의 소유자라고 판단해, 대중적인 투쟁을 위해 불령사라는 단체를 새로 조직해 활동을 시작한다.
 

불령사라는 이름은 당시 일제가 저항적인 조선인들을 호도하며 지칭하던 '불령선인'에서 따온 것으로, '불령'은 뻔뻔스럽고 무례하다는 뜻이다. 누구 못지않은 혁명적 이상과 강인한 투쟁의지를 가졌지만 불과 스무살을 갓 넘긴 그들은 반동적 치기와 못 말리는 혈기로 권력이 가장 불온시하는 말을 새로운 조직의 이름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집에 떡하니 '불령사'라는 표찰을 다는 것은 물론 벽에는 붉은 잉크로 그린 커다란 하트 무늬 속에 '반역'이라는 글자를 큼직하게 써놓았다고 한다. 당시 요시찰조선인 갑호 대상자로 경찰의 일상적이고 삼엄한 감시 속에 놓여있던 박열, 그리고 기꺼이 운명공동체로 함께 한 가네코 후미코의 공동 투쟁은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현실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조선을 오가며 폭탄 입수를 모의하던 박열의 계획이 탄로나고, 불령사 회원 전원이 기소되기에 이른다. 정치적으로 단련되지 못한 대중결사였던 데다 각각 개인적인 오해와 긴장의 기류 속에 있었던 불령사의 회원들은, 미수에 그치고 만 박열의 폭탄입수 계획을 대역사건으로 조작하려는 일제의 음모에 대부분 넘어가고 결국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김중한 세 사람이 최종적으로 사건의 주범으로 확정된다. 한편 당시 일본은 발전소 건설현장에서의 가혹한 노동을 이기지 못하고 도주한 조선인들을 학대하고 학살한 1922년의 나카쓰가와 조선인학살사건과 1923년의 간토대진재 조선인학살사건 등으로 재일조선인 사회를 둘러싼 흉흉한 민심이 극도에 달한 상태였다.  
 

결국 간토대진재 조선인학살사건에 대한 정치적 희생양이 필요했던 일제에 의해 그들에게는 사형이 구형되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사형을 각오하고 법정을 사상적 저항의 장으로 이용하기 시작한다. 그들을 대역사건의 주범으로 몰고 간 소위 제4차 폭탄입수계획은 사실 김중한과 박열 간에 오갔던 모의로, 가네코 후미코는 당사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만약 그때 박열이 내게 김한과의 일을 상의했더라면 과연 내가 반대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모르긴 해도 신뢰하고 맡겼을 것이라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박열과의 공동운명을 선택한다. 이는 또한 가족제도의 희생물로 고통받으며 노예처럼 살았던 그녀가, 그러한 가부장제를 통해 일본국가 시스템을 완성한 정점에는 천황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 결과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가네코 후미코는 아무리 강한 척해도 인간은 살고 싶어하는 존재라는 솔직한 심경을 토로하면서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을 때, 그 행위가 비록 육체의 파멸을 초래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생명의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라고 자서전에 적고 있다. 또한 재판정에서는 당신들이 나를 그렇게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따름입니다. 나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지금 당신들과 타협할 수 있다면 나는 사회에 있을 때 이미 타협했을 터입니다. 나는 권력 앞에 무릎을 꿇고 살아가기보다는 오히려 기꺼이 죽어 끝까지 나 자신의 내면적 요구를 따를 것입니다. 그것이 정녕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어디든 나를 데려가 주십시오. 나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의 자율을 건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그리고 일본과 조선 사회에서 큰 주목을 끈 이 사건은 사형 구형으로 귀결된다.
 

사형을 언도받은 후 집행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녀의 의지와 박열에 대한 동지적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부디 우리 둘을 함께 단두대에 세워달라. 박열과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박열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설령 재판관의 선고가 우리 두 사람을 나눠놓는다 해도 나는 결코 당신을 혼자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라는 절절한 고백을 남긴다. 그리고 열흘 뒤 '장난처럼' 그들에게는 천황의 이름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는 은사가 내려진다. 가네코 후미코는 이로부터 약 백일이 지난 후에 스스로 목을 매 삶을 마감한다. 그녀를 자살에 이르게 한 이유나 감형 이후 그녀의 수감 생활 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고, 죽음 직후의 정황은 모두 교도소에 의해 은폐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녀가 수감된 상태에서 1925년에 집필을 시작한 자서전이, 비록 군데군데 검열로 삭제되고 찢겨나갔지만 그나마 생생한 삶의 기록으로 이렇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저자인 사학자 야마다 쇼지는 후기에서, 이 책은 전후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걸어온 사상적 편력의 산물이라고 서두를 시작한다. 한일조약반대운동에 참가하며 얻은 반성을 발판으로 식민지배의 피해자인 조선인의 눈을 매개로 일본인의 사상을 재검토하는 학문적 연구에 몰두하던 그는 서승 서준식 형제 구원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말 가네코 후미코를 만났다고 한다. 민족적 자신감 상실증에 걸린 사학과 학생이었던 자신을 구해준 장본인이 바로 가네코 후미코였으며, 이 책은 그녀의 힘으로 쓰여졌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대상에 대한 철저한 거리두기를 통해 23년으로 마감된 가네코 후미코의 짧은 삶과 사상을 치밀하고 진중한 학자적 자세로 분석해냈다. 그들의 사랑과 투쟁, 죽음에 이르는 과정의 세부적 정황들을 사료를 바탕으로 치열하게 재현해내고, 그들과 관계된 수많은 문헌을 참조하여 입체적으로 복원해냈다. 

 
 

아, 리뷰가 너무 길다. 다른 책을 읽고 난 후처럼 까불거리며 내 기분을 적어나갈 수가 없는 책이었다. 이제 막 알게 되었지만 어쩐지 그녀의 삶에 대해 좀은 설명을 해야할 것 같은 느낌에, 그러다보니 꽤나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어서 그녀의 삶에 대한 '요약'만으로도 꽤 길어져버렸다. 혹시, 열심히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에게는 진심으로 감사를. 그리고 관심과 취향에 따라 호오가 선명히 갈릴 책이기는 하지만, 호기심이 생겼다면 한 번 꼭 읽어주시라고도 권하고 싶다. 책에 관련된 검색을 하다가, 이 책을 낸 편집인인가의 인터뷰를 읽은 기억이 난다. 판매량은 형편 없어 기운이 빠졌지만, 권정생 선생님 등 많은 사람들이 꼭 나와야할 책이라고 격려를 해줘서 힘이 났다고. 아니, 격려를 해줘서 힘이 났지만 판매량 때문에 기운이 빠졌다 였던가. 아무려나.
 

오롯이 자신으로 살기 위해 죽음도 마지 않았던 그녀의 삶을 읽으며 이상한 감정이입과 공감에 많이 시달렸던 것 같다. 책장을 덮은 새벽녘에는 내 방 어딘가에서 그녀의 못다한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은 이상한 공포에 사로잡혀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비롯된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결국 그 근원으로 거슬러올라가 누구도 쉽게 대적하지 못하던 천황제에 맞선 비범한 인물이었지만 그것은 결코 대의나 명분과 관련되는 게 아니라고 나는 느꼈다. "대단히 반항적이고 열광적이며 쉽게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들 뿐만 아니라 종종 히스테리 상태마저 보이는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그녀, 그러나 "내가 만약 생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면..."이라고도 적었다는 그녀 자신의 문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끝끝내 양보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모든 인간에게 있고, 그녀는 하필 그런 시기에 그런 조건에서 태어났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나는, 하필 그런 때에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죽어가야했던 그녀에게서 민망하게도 아직은 생을 긍정할 수 없지만 당신같은 삶이 있어서 그래도 살아간다고, 중얼거린다. 그녀와 운명을 함께 할, 것만 같았던 박열은 1935년에 옥중에서 전향해 출옥했고 이후 그는 좀은 보수적으로 활동하며 후에 '민단'이라 칭해지는 단체의 단장으로 취임했고, 1974년에 북한에서 죽었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어느 여인을 만나 결혼도 했으며 그러나 가네코 후미코의 기일에는 종일 묵상을 했다고 한다. 삶과 죽음은, 사람과 사랑과 인연을 갈라놓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나는 그들의 최후를 비교하거나 대비할 마음은 없다. 박열의 이후 삶의 행적에 대해 감히 비난하거나 동정할 수도 없다. 단, 그들에게 그렇게 빛나는 한 때가 있었다는 것과 그리고 그들의 삶은 후대에 읽혀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선택한 것이라는 당연한 수긍이다. 조금 쓸쓸한 기분이기는 하지만.
 

나는 평전이나 사람의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문득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를 생각해본다. 서경식 선생님은, 자신의 재일조선인 이야기가 우리들에게 '스스로를 돌아보는 거울'로 여겨졌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었다. 그리고 '잘 되고 있는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고. 종종 느끼는 거지만 나는 삶을 너무나 거창한 것으로 오해하거나 매도하는 경향이 다분한 것 같다. 어차피 누구나 자신의 삶을 살아갈 뿐이고, 그 삶이 크고 빛나게 보이는 것은 내 눈에 포착된 무언가가 마음의 공명을 일으켰기 때문일 뿐일텐데. 가네코 후미코가 내게 선사한 공명은 무엇일까. 오랜만에 많이 찡했고 짠했고, 소름이 돋았다. 삶에 대해 그다지 긍정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자신을 모든 것의 표준으로 삼았던 삶, 그리고 죽어간 삶. 이렇게 죽음에 빚지는 게 참 미안하지만, 저자의 생각이 맞다면 '훗날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기를 기대'하며 고난으로 가득 찬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물으면서 죽음과 마주한 채 자서전을 집필했단다. 그녀, 좀은 반가워할까.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 어딘가에 그녀의 묘소가 있다고 한다.


2006-10-11 03:32, 알라딘



가네코후미코
카테고리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 역사인물
지은이 야마다 쇼지 (산처럼,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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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7. 21:59


참고로 미리 말해두자면, '한낱' 묘사의 힘에 나는 쉽게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리는 독자다. 습성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어서, 국민학교 시절 애독서였던 '5학년 3반의 청개구리들'의 주인공 고푸름군과 '들장미 소녀 캔디'의 테리우스로부터 중학교 시절 '지와 사랑'의 나르찌스니 '수레바퀴 밑에서'의 헤르만 하이르너 등을 거쳐 이후 수도 없는 가상 인물에 이르는 열광이 있었다. 단지 소설속 주인공에도 이런 판이니, 위인전 혹은 평전에 이르면 그 열광은 자못 존경과 사모의 마음으로 심화되는 것은 당연하다. 어린 시절 나는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을 사랑했고, 단지 인명사전에서 본 얼굴이 잘 생겼다는 이유로 넬슨 제독과 바이런을 흠모했으며, 이후 내가 읽은 평전의 거의 모든 주인공들을... 그렇다, 살짝 변태스럽기는 하지만 나는 일단 잘 생기고, 게다가 정의롭거나 충절스러우면 환장을 했다. 사춘기를 지나며 발현된 반골기질은 빨강에 가산점을 부여하기 시작했고, 유난히 평전류의 기록을 좋아하는 나의 열광은 지금도 딱 그 수준이다.
 

리뷰에 앞서 너무 방어적인 장광설을 달아 민망하기는 하지만... 제목 못지않게 '한국의 마타하리, 여간첩 김수임'이라는 부제 역시 민망하다. '경성 트로이카'를 읽고 이래저래 검색을 하다가 알게 된 이 책, 이강국과 김수임의 이야기는 어디선가 접했던 기억이 있지만 본격적인 기록이 있는 줄은 뒤늦게 알았다. 드라마로 방송중인 '서울1945'의 모티브가 된 책이라고 리뷰에서 읽었는데, 드라마는 본 일이 없어 잘 모르겠다.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일제시대와 해방공간을 살았던 혁명가들의 이야기는 사실 어떤 것이건 흥미롭다. 특히나 공산당 활동을 했던 이들에 대한 기록은, 동시대의 풍경이라고 받아들이기 힘들만큼 문학계의 분위기를 다룬 글들과 판이한 충동질과 안타까움 심지어 현재적 반성까지 선사해 준다. 미군정과 이승만의 박멸과 북한의 왜곡(?)으로 보존되지 못한 좌파 운동의 기록들이 얼마나 많을까를 생각하면 주제 넘게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강국과 김수임의 이야기 역시 그 한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실명소설의 형식을 취해 쓰여진 이 기록은, 김수임의 삶을 증언할 마지막 인물로 지목된 저자 개인의 해석과 상상력에 힘 입은 것이라고 서문에 밝히고 있으며 수임언니와 나는 신앙인일 뿐 이념이나 사상에 대해서는 크게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쪽도 저쪽도 한민족일 뿐, 정치와 이를 다스리는 법에는 문외한들이었다는 고백에서도 이 책의 서술이 곧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말미에 덧붙여진 임헌영의 해설 역시,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이강국과 김수임에 대한 기존의 기록과는 상당히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 그리고 김수임의 동거남 베어드 사령관을 고려하여 적절한 수준에서 정리한 글이라는 점 등을 밝히고 있다. 게다가 문학평론가 임헌영과 소설가 김주영의 해설이 기록의 무게감을 더하고는 있지만, 실록으로 보기에는 사실 관계의 해명에 난점이 있고 소설로만 보기에는 너무나 통속적이고 고답적인 평이함에 머무르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밤새 책을 읽고 리뷰까지 쓰게 만든 힘은, 결정적 진실은 여전히 미궁이지만 실존했던 두 인물(솔직히 말하면 이강국)의 매력과 오늘을 있게 한 해방공간 분단정국의 분위기에 대한 동요 그리고 미완의 기록을 통해 더해진 궁금증 같은 것들이 아닐까 싶다. 빈농의 딸로 태어나 11살에 민며느리로 보내졌으나 배움에 대한 열망과 종교의 힘, 타고난 재색과 지성으로 입지전적 성공을 거둔 여성 김수임.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최고 학부에서 수학하며 원산의 노동자 파업에 관여하다 투옥되고 졸업 후에는 베를린 대학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활동, 수배, 투옥을 반복했던 공산주의자 이강국. 당시 권력자들의 사교장이었던 반도호텔에서 일하며 미군정 하 최고 실력자 중 하나였던 베어드 중장과의 동거로 세간의 이목을 한 몸에 받았던 김수임과 남북의 분단을 막기 위해 동가식서가숙하며 자청한 고난의 길을 마다않았던 철저한 혁명가 이강국의 그야말로 운명적인 사랑과 비극적인 최후는 가슴이 서늘하도록 감동적이다.
 

두 사람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기는 했지만, 저자 역시 동세대로서 경험했을 당시 상황과 풍속에 대한 서술과 급변하는 정세에 대한 간략한 설명도 나쁘지 않다. 한편 저자가 알고 있는 한에서의 '인간 김수임'을 그리겠다는 의도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가치판단을 배제한 서술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정기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기의 혼란한 상황과 당시 남북 분단을 막기 위해 고투했던 세력의 도덕성 같은 것이 행간으로 전해져 가슴이 짠해지기도 했다. 또 김수임과 절친한 관계에 있었던 모윤숙의 행적에 대한 서술과 후반부에 삽입된 모윤숙의 일기에서 발췌한 '옥중기'는, 타협적인 현실주의자의 자기모순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어서 꽤나 씁쓸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대한민국의 수립 자체가 정통성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역사의 아이러니였다는 확인은 이 책에서도 비껴갈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대한 기록을 읽을 때마다 감출 수 없는 안타까움은, 남과 북에서 모두 용도 폐기되어 버린 듯한 인물과 그들의 활동에 대해 사료에 근거한 진실을 알 수 없는 갑갑함이다. 이 책 역시 저자의 용기와 노력과는 별개로, 총체적인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단선적 시선의 접근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들'에 대해 알 수 있는 현재적으로 유일한 책이라는 점 그리고 미미하나마 가려진 역사의 부분을 파고드는 기록들이 하나둘 세상에 나오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언젠가 내막이 밝혀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검색을 해보니 '이강국 연구'라는 책이 근자에 나왔는데 학문적 접근의 결과물인 듯 해서, 내가 열광하는 인물 묘사 따위는 기대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반갑다.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서 혹시 우리나라 터가 안 좋은 걸까 낙심하다가도, 수십 년 전 목숨을 바치고 사랑을 던지며 혁명(!)에 투신했던 눈물 겹게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 둘 접하다보면 감동으로 마음이 환해진다.  


2006-10-08 07:06, 알라딘



사랑이그녀를쏘았다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대표소설
지은이 전숙희 (정우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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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7. 21:47


책을 읽을 때만 해도, 이렇게나 지난한 싸움이 되리라고는 차마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부모 형제를 묻은 땅에서 봉분도 수습하지 못한 채 쫓겨나고 새로이 농사 지을 논을 일군다고 수로에 자식 빠져 죽는 줄도 모르고 일하며 땅을 지켜온 사람들, 그들의 터전이 이렇게도 짓밟힐 수 있을 거라고는 차마 상상하지 못했다. 무지렁이처럼 나는 돌멩이로 만들어진 사람이라며 지난한 삶의 이야기를 펼쳐놓는 노인들은 하나같이 깊게 패인 주름에 검게 그을린 얼굴을 하고 있다. 그저 땅만 일구며 살기도 어려워 농사꾼들 다 떠나는 시골에서, 그것만이라도 하며 살다가 죽게 해달라고 칠순 팔순의 어르신들이 2년이 넘도록 날마다 촛불을 들고 때때로 새벽밥 지어먹고 데모길을 나서며 그도 모자라 마을이 무너질까 잠 못 이루는 땅이 같은 하늘 아래 있다.
 

이 책은 문정현 신부님이 단장으로 있는 평화유랑단 '평화바람' 활동가들이 2005년 봄부터 가을까지 주민분들을 만나 나눈 이야기들을 기록한 책이다. 이미 낡은(?) 이슈가 되었다고 느낄 만큼 유명해진 평택이지만, 인터뷰가 진행될 때만 해도 외롭게 싸우던 주민들은 지킴이들의 접근을 그다지 환영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일부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오랫동안 당해만 왔던 사람들 특유의 피해의식과 외부 개입에 대한 거부감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한이 너무 깊어 한 번 풀어놓으면 심란함을 수습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가슴에 묻고 죽자고 다짐했던 아픈 이야기들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고백하고 만다. 피땀 흘려 일군 땅을 떠날 수 없는 절박한 마음, 소박한 바람에 송구함을 감출 수 없다. 
 

무려 세 번째 강제 이주라는 기가 막힌 현실과 마주친 마을 최고 연장자 조선례 할머니는 그저 일찍 죽지 못한 게 억울할 뿐이라 하신다. 삼대째 팽성을 지키며 살고 있는 김석경 할아버지는 떠나온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구대추리땅을 지도로 불러낼 만큼 가슴속 깊이 간직한 채 살아왔다. 그렇게 가슴에 묻은 땅의 한이 아직도 가득한데, 떠나와 터 잡은 땅을 지키겠다는 싸움에 앞장 선 자식이 평택구치소에 수감된 김지태 이장님이다. 머슴살이 십 년이면 장가를 못 든다는 말에 8년 만에 정리하고 대추리에서부터 새 삶을 꾸린 이민강 할아버지는 농사일로는 자식 키우며 살기가 불감당이라 새벽 청소부를 하며 흥얼거리던 노랫자락으로 이제 유명인사가 되었다.
 

쑥스러워서, 속상해서, 더 할 말이 없어서, 못미더워서... 갖가지 이유로 손사래를 치다가 결국 인터뷰에 응한 수십 명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평택은, 어쩌면 원래 그런 데 였다. 당한 놈이 또 당하고 쫓겨난 놈이 또 쫓겨난다고,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었던 사람들이 인생을 묻고 피눈물을 뿌려가며 일군 땅에서 이제 좀 살만 하다 싶어 집도 새로 짓고 했더니만 또 어디선가 뒤통수를 치는 것이다. 주민분들은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지만 그 때문에 더욱 남은 목숨을 걸고 싸워서 지켜내고자 하고 있었다. 고속 성장의 사회, 모든 게 급변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세상에 살고 있는 탓에 그분들이 불과 수십 년 전에 겪었던 일들이 까마득하게도 느껴졌지만... 따지고보면 내 부모와 같은 세대이다. 우리 엄마 아빠가 평택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상관없다고 느끼기에는, 그분들의 삶이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억울하고 눈물 겹다. 
 

비행장을 만든다고 일제시대에, 미군기지 짓는다고 미군정기에, 세간살이조차 챙기지 못하고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으로 쫓겨난 그들이 서로를 도와가며 움막 지어 겨울 나고 뻘을 매워 논을 만들며 일궈온 그야말로 마을 공동체를, 이제는 미군기지 한 곳에 모으겠다고 송두리째 내어놓으라고 한다. 일제 총독부와 미군정과 다를 바 없는 야만을 자행하는 자국의 정부가 들이미는 카드는 소위 '행정대집행'이라는 제도의 폭력일 뿐, 오십 여 년 전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멀쩡히 사람이 살고 농사 짓는 마을을 군사보호시설로 지정해 철조망을 두르고 진입로를 봉쇄해 지상의 섬을 만드는가 하면, 하늘에는 무시로 헬기가 날고 들녘에는 군인 경찰이 깔렸다. 
 

그저 땅을 지키겠다는 신념, 고향에서 죽겠다는 바람 말고는 여느 촌로들과 다를 것 없던 순박한 주민들, 그래도 먹고 살게끔 해준 박통에 대한 향수와 빨갱이에 대한 자연스레 훈련된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책 속의 그들은, 그러나 이제 달라진 것 같다. 2006년 5월의 대추초등학교 침탈과 9월의 빈집 철거 등을 온몸으로 경험하며, 그들은 원했건 원치 않았건 누구보다도 정권의 본질을 꿰뚫게 되었고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저항의 의지를 저녁마다 촛불로 밝히고 있다. 그렇게 일상이 되어버린 촛불집회는 어느덧 800회가 머지 않았고 '질긴 놈이 이긴다'는 그들의 구호가 현실이 될 날 역시 머지 않았음 싶다. 
 

사실 나는 평택에 대해 혼자서 원죄라 생각하는 게 있다. 2003년엔가 잔뜩 움츠려 세상에 의기소침해 있던 때 어디선가 평택역에서 평화 한마당이라는 집회를 크게 한다는 소식을 접했었다. 그리고 지인을 통해 같이 가자는 연락을 받았던 것 같고, 하지만 속으로 '또 뭐야 평택은 원래 그런 데 아냐' 하고 뇌리에서 지워버렸었다. 이래저래 들리는 소식들에 마음 상하고 상처 받는 일이 겁나기도 했고, 그러다보면 어렵사리 찾은 일상의 평온이 또다시 깨져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도 있었다. 외면한다고 세상 저 편의 일이 없어지는 게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나 하나의 힘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만약 그때부터 관심을 갖고 무언가 함께 하려 했다면, 그렇게 한 사람이 두 사람으로, 세 사람으로... 물론 난 별로 낙관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결국 세상이 바뀐다면 그런 식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아무리 가슴 아파하고 돕고 싶어도 결국 당사자가 아닌 고통에 대해, 얼마 전에 읽었던 대담의 한 구절이 어느 정도는 답을 주는 느낌이었다. 목격자는 방관자가 아닌 증언자여야 한다는, 물론 그 글에서는 저항의 역사에서 시인이나 철학자의 역할에 대해 논하고 있었지만. 시련과 고통 속에서 목숨을 걸고 삶을 거는 사람들이 있는데, "살려주세요!" 라고 말하고 있는데... 최소한 증언자라도 되어야하지 않을까.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조금은 시대의 아픔에 신음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는 일이었으면 좋겠다. 


2006-10-08 01:53, 알라딘



들이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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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평화유랑단 평화바람 (리북,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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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