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할 수 없는 생을 앓다가 스스로 마감한 이들이 풍기는 매혹은 아득하고 아프다. 실비아 플라스 역시 그래서 무거운 이름이다. 그녀의 삶을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부러 찾아읽지는 않았는데, 얼마 전 우연히 어느 님의 댓글에서 그녀의 이름을 마주쳤다. 갑작스레 다시 불 붙은 관심과 읽어야할 것만 같은 조급함에 갸웃하면서도 좀은 주저하며 그녀의 일기보다 먼저 골라든 책이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나는 '벨자'가 주인공의 이름인 줄로 알았다. 어쩌면 내 머리 위를 유령처럼 떠도는 'bell jar'는 외면한 채, 그녀만을 그 속에 가두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내러티브보다는 묘사와 서술이 작가를 확연히 보여주는 책이었다. 그녀의 예민하고 집착적인 문장은 읽는 나마저 신경쇠약에 걸릴 듯 조마조마했다. '미치는' 게 별 거냐고 인생이 줄곧 사춘기면 그게 미치는 거지, 쉽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인간의 정신력이라는 게 얼마나 질긴 것인지를 절감하고부터는 그렇게 함부로 생각하지 않는다. 자의식으로 통제할 수 없는 '미침'은 출구 없는 지옥의 연속이라고, 정말 '미친' 사람은 도저한 정신력을 넘어선 일상과는 다른 차원을 오가며 고통 받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두다 어지럽게 치루었던 계절'이 나날의 인생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인생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건지도 모른다.
주인공 에스더는 충만한 삶과 죽음의 에너지에 시달리며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하고 한편 '나는 살아 있다'고 이따금 읊조린다. 삶의 배경을 장식하는 식물은 하필 꽃 피우지 않는 무화과, 맥락없이 이따금 떠오르는 이미지는 실험실의 알콜병 속에 담긴 세상빛을 보지 못한 태아. 딱히 그래야할 이유도 모른 채 필생의 임무처럼 죽음을 준비하며, 그러면서도 내 피를 보고 싶지 않아서 엄마가 올까봐 혹은 은행 잔고가 남아서와 같은 사소한 이유로 다시 무심하게 삶을 이어간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적절한 죽음을 선택하기 위해 담담하고 간단하게 살아가는 그녀의 머리속은 언제나 분주하고 활기에 넘친다. 실비아 플라스의 삶이 이 자전적 소설을 더욱 문제적으로 만든 것임은 자명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이렇게나 적나라하게 신경증적인 인물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자신의 초라함을 더욱 부각시킬 뿐인 화려한 도시에서 돌아온 에스더, 자신했던 테스트에서 제외된 낙담과 언제나 함께였던 비관에 힘 입어 그녀는 자연스레 필생의 과제인 양 자살 시도에 몰입한다. 마지막 시도의 실패로 깨어나 머물게 된 요양원에서 '자신의 뒤틀린 검은 이미지' 같은 흔쾌하지 않은 도플갱어 조앤을, 최소한의 안온함을 선사해준 소울메이트 닥터 놀란을, 알량한 우월감과 죄책감 때로 난감으로 어설픈 관계를 이어오던 버디 윌라드를 그리고 몽상 속의 첫 번째 섹스를 완성하는 상대 어윈을 만난다.
말하자면 고달프게 이어온 여정의 기착지인 요양원에서 그녀는 어느 정도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작정했던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 누구보다 명징한 정신으로 자신의 '미침'을 목도했던 그녀의 이야기는 요양원을 벗어나지 못한(?) 채 끝이 난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침울한 가능성 속에서, '마법의 실'과 같이 자신을 바라보며 이끄는 사람들의 눈길 속에서 내딛는 불안한 경계로의 한 걸음. 차마 억지스런 해피엔딩으로 자신의 분신을 던져놓을 수 없는 작가의 내심을 보는 것 같았다. 자전적 기록이라는 것은 함부로 거짓 희망을 부려댈 수 없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성주의에 대한 감수성이 거의 없는 내게는 주인공 에스더가 집착하는 섹슈얼리티와 순결이라는 화두보다 면역 부재의 상태로 세상에 내던져진 채로 버거운 삶을 이어가는 혼란의 소용돌이 전체가 하나의 이미지로 와닿았다.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통과의례이자 성장통인, 그래서 지난 후에는 풍성한 추억이 되기도 하고 생의 동력이 되기도 하는 경험들. 그러나 에스더에게 주어진 그 시간들은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악몽처럼 되살아나 그녀를 둘러싼 세계를 일종의 환각으로 만들어버릴 뿐이다. 그리고 그녀, 실비아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이른 나이에 가스오븐에 머리를 처박는 것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랬다.
2006-09-02 14:48, 알라딘
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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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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