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5. 17. 21:46


감당할 수 없는 생을 앓다가 스스로 마감한 이들이 풍기는 매혹은 아득하고 아프다. 실비아 플라스 역시 그래서 무거운 이름이다. 그녀의 삶을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부러 찾아읽지는 않았는데, 얼마 전 우연히 어느 님의 댓글에서 그녀의 이름을 마주쳤다. 갑작스레 다시 불 붙은 관심과 읽어야할 것만 같은 조급함에 갸웃하면서도 좀은 주저하며 그녀의 일기보다 먼저 골라든 책이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나는 '벨자'가 주인공의 이름인 줄로 알았다. 어쩌면 내 머리 위를 유령처럼 떠도는 'bell jar'는 외면한 채, 그녀만을 그 속에 가두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내러티브보다는 묘사와 서술이 작가를 확연히 보여주는 책이었다. 그녀의 예민하고 집착적인 문장은 읽는 나마저 신경쇠약에 걸릴 듯 조마조마했다. '미치는' 게 별 거냐고 인생이 줄곧 사춘기면 그게 미치는 거지, 쉽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인간의 정신력이라는 게 얼마나 질긴 것인지를 절감하고부터는 그렇게 함부로 생각하지 않는다. 자의식으로 통제할 수 없는 '미침'은 출구 없는 지옥의 연속이라고, 정말 '미친' 사람은 도저한 정신력을 넘어선 일상과는 다른 차원을 오가며 고통 받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두다 어지럽게 치루었던 계절'이 나날의 인생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인생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건지도 모른다.
 

주인공 에스더는 충만한 삶과 죽음의 에너지에 시달리며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하고 한편 '나는 살아 있다'고 이따금 읊조린다. 삶의 배경을 장식하는 식물은 하필 꽃 피우지 않는 무화과, 맥락없이 이따금 떠오르는 이미지는 실험실의 알콜병 속에 담긴 세상빛을 보지 못한 태아. 딱히 그래야할 이유도 모른 채 필생의 임무처럼 죽음을 준비하며, 그러면서도 내 피를 보고 싶지 않아서 엄마가 올까봐 혹은 은행 잔고가 남아서와 같은 사소한 이유로 다시 무심하게 삶을 이어간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적절한 죽음을 선택하기 위해 담담하고 간단하게 살아가는 그녀의 머리속은 언제나 분주하고 활기에 넘친다. 실비아 플라스의 삶이 이 자전적 소설을 더욱 문제적으로 만든 것임은 자명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이렇게나 적나라하게 신경증적인 인물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자신의 초라함을 더욱 부각시킬 뿐인 화려한 도시에서 돌아온 에스더, 자신했던 테스트에서 제외된 낙담과 언제나 함께였던 비관에 힘 입어 그녀는 자연스레 필생의 과제인 양 자살 시도에 몰입한다. 마지막 시도의 실패로 깨어나 머물게 된 요양원에서 '자신의 뒤틀린 검은 이미지' 같은 흔쾌하지 않은 도플갱어 조앤을, 최소한의 안온함을 선사해준 소울메이트 닥터 놀란을, 알량한 우월감과 죄책감 때로 난감으로 어설픈 관계를 이어오던 버디 윌라드를 그리고 몽상 속의 첫 번째 섹스를 완성하는 상대 어윈을 만난다.
 

말하자면 고달프게 이어온 여정의 기착지인 요양원에서 그녀는 어느 정도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작정했던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 누구보다 명징한 정신으로 자신의 '미침'을 목도했던 그녀의 이야기는 요양원을 벗어나지 못한(?) 채 끝이 난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침울한 가능성 속에서, '마법의 실'과 같이 자신을 바라보며 이끄는 사람들의 눈길 속에서 내딛는 불안한 경계로의 한 걸음. 차마 억지스런 해피엔딩으로 자신의 분신을 던져놓을 수 없는 작가의 내심을 보는 것 같았다. 자전적 기록이라는 것은 함부로 거짓 희망을 부려댈 수 없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성주의에 대한 감수성이 거의 없는 내게는 주인공 에스더가 집착하는 섹슈얼리티와 순결이라는 화두보다 면역 부재의 상태로 세상에 내던져진 채로 버거운 삶을 이어가는 혼란의 소용돌이 전체가 하나의 이미지로 와닿았다.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통과의례이자 성장통인, 그래서 지난 후에는 풍성한 추억이 되기도 하고 생의 동력이 되기도 하는 경험들. 그러나 에스더에게 주어진 그 시간들은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악몽처럼 되살아나 그녀를 둘러싼 세계를 일종의 환각으로 만들어버릴 뿐이다. 그리고 그녀, 실비아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이른 나이에 가스오븐에 머리를 처박는 것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랬다.


2006-09-02 14:48, 알라딘


벨자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일반
지은이 실비아 플라스 (문예출판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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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7. 21:43


그의 마지막 기록이자 최후의 작품이 된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1986년 가을 대구교도소,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바뀌어 감옥 생활 4년을 넘기던 무렵, 기다림이 주는 힘겨움의 한 고비를 맞아 한참 헐떡이고 있을 때였다. 극한 상황에서도 어떤 수사나 허세를 스스로에게 용납하지 않는 자기 절제, 타협을 거부하는 단호함, 고통의 어떤 순간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려는 집중된 정신. 내가 감히 그를 흉내 낼 엄두는 나지 않았지만, 그가 죽음을 기다리며 쓴 글의 한 구절 한 구절은 내게 말할 수 없이 큰 용기와 위로를 주곤 했다. 특히 나는 그의 책에 적힌 마지막 구절을 좋아했다. "진실한 생활에는 관객이 없다. 종막이 오른다. 사람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사랑했다. 깨어 있어 주기를!' 그후로도 나는 오래도록 이 책을 기억했다. 그리고 만일 내가 글쓰기를 할 수 있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푸치크의 '교수대로부터의 리포트' 같은 책을 쓸 수 있었으면 하는 꿈을 지니게 되었다. 그것은 아직도 꿈에 머물러 있다.  - <당대비평> 7호, '우리, 대한민국의 야만을 잊었는가'에서 발췌
 

문부식님의 '서승의 옥중 19년' 주제 서평에 실린 글의 일부를 좀 길지만 굳이 옮겼다. 이 책을 알게 된 계기이기도 하고, 내가 독후감을 적는다한들 오랜 시간 수감생활을 했던 사람만큼 절절하게 이 글을 읽어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꽃들'의 시인으로 마음에 담고 있었던 문부식님. 내가 가지고 있는 빛 바랜 시집의 표지 안쪽에는 '93.10.24 책방정신세계' 라고 메모가 적혀있다. 당시 나는 부미방도 광주도 잘 모르던 철 없는 재수생이었고 아마 그날도 학원을 땡땡이치고 대학로에 가서 공연을 보기 전 책방에 들렀을 것이다. 당시의 정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임준철의 노래로 익숙했던 '꽃들'이 반가웠고 또 부끄럽게도 책날개 안쪽에 나온 사진 속의 시인이 너무 잘 생겨서 책을 골라들었던 기억 만큼은 생생하다. 시인으로서 문부식님의 문학적 성취는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몇 편의 시는 부러 외우고 다닐 만큼 절절하게 마음에 와닿았고, 그와 부미방에 대한 관심으로 김현장의 '빈첸시오, 살아서 증언하라'를 읽고서 까맣게 몰랐던 세상의 진실을 알게 된 듯 가슴 떨렸던 기억이 새롭다.
 

체코 출신의 문학 평론가이자 신문 기자였던 율리우스 푸치크는 프라하의 판크라츠 게슈타포 감옥에서 자신의 처형을 기다리며 이 글을 썼다고 한다. 체코 공산당 기관지의 편집자로 활동하면서 소련을 방문하기도 했던 그는 보수주의자들의 탄압으로 여러 차례 투옥을 당하며 활동하던 중 공산주의 언론의 불법화로 은신해 지하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사십의 나이로 처형된 인물이다. '서승의 옥중 19년'을 읽으며 위의 글을 찾아 읽고, '진실한 생활에는 관객이 없다'는 말이 다분히 허영과 함께 가슴에 콱 박혔었다. 진실이니 진정성이니 하는 말에 경도된 자의식의 현혹이었을 것이다. 내가 읽은 이 책에는 다시 '현실 속에서는 관중이란 없다'로 바뀌어 번역되어 있는데, 문맥을 고려하면 후자의 번역이 더 맥락에 맞는 것 같다. 저자가 이 글을 쓸 당시는 파시스트의 광란이 극에 달한 시절, 체제를 위협하는 사상과 연루되지 않았거나 무관심한 생활인들에게 보내는 전언이라고 좁혀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파시스트나 전체주의와 같은 통치를 빙자한 적나라한 광풍만큼이나 우리의 삶을 조이며 위협하는 불안의 공기 혹은 보이지 않는 명령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들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서문에서 저자는 자신을 심문하는 게슈타포 감옥의 구금실을 누군가의 명명을 빌어 '극장'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나는 내 일생에 대한 영화를 백 번은 보았고, 세부적인 부분들은 수천 번 보았다. 이제 나는 그것을 적어나가려고 한다. 내가 글을 끝맺기 전에 교수대 밧줄이 내 목을 조른다면, 남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글의 '해피엔딩'을 써주리라 믿는다.   율리우스 푸치크 1943년 봄, 프라하 판크라츠 게슈타포 감옥에서 씀 이라고 단정하게 서문을 마무리한다. 차마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초지일관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군더더기도 절절한 감상도 없이 24시간, 죽어감, 267호, 감방, 400호, 주요 인물들과 그들에 대한 단평, 1942년 계엄령 등과 같은 소제목이 붙은 비망록을 남겼다. 자신이 체포된 순간으로부터 시작해 공산당 운동을 통해 만났던 사람들, 감옥에서 만났던 다양한 사람들 그리고 미친 시대에 대한 단상들을 여유로운 문체로 기록한 이 글을 읽다보면 마치 저자가 그 고난의 세월을 다 보내고 평화의 한 가운데 앉아 회고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사방에서 조여오는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호흡하면서도 생에 대한 미련 따위는 찾아볼 수 없고, 한 감옥 안에 수감되었다는 사실 외에 안부도 생사도 알 수 없는 아내를 향한 사랑의 기록 역시 죽음 뒤의 만남과 절망 뒤에 올 희망의 가능성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사건의 제삼자인 듯 시종일관 냉정을 유지하며 때때로 블랙유머에 위트를 잃지 않는 그의 글에 킥킥 대다가 자세를 가다듬기도 하며 읽었지만, 그의 글이 비극의 기운을 머금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또한 글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경직되지 않은 신념의 소유자였고 신념에 휘둘리지 않는 따스한 가슴 역시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현실에 얽매여 꿈을 잃지 않을 용기와 두려움에 휩싸여 양심을 버리지 않는 단호함을 지닌. 적아의 명확한 구분과 신념의 선명성이 있었던 그의 시대가 남긴 인간 정신의 강인함을, 그는 마치 단막 드라마를 보여주듯이 생생하게 기록해냈다. 호의적인 체코인 간수의 도움으로 한 장씩 숨겨 밖으로 내보내진 이 책이 지금 존재한다는 것 역시 어쩌면 그의 낙관에 힘 입은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심지어 유장한 낭만과 상큼한 쾌활마저 행간에 녹아 있는 그의 글이지만, 아무런 위협없이 침대를 구르며 읽는다는 것은 참으로 송구한 일이었다.



2006-08-31 06:15, 알라딘



교수대로부터의비망록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프랑스에세이
지은이 율리우스 푸치크 (모티브,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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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7. 21:41


국가보훈처는 8일 8.15 광복 61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313명에게 포상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이날 발표된 포상대상자에는 그동안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가 다수 포함돼 있어 주목된다.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전설적인 노동운동가 이재유, 생존해 있는 최고령 여성 독립운동가 이효정 할머니(93세)도 여기에 포함돼 있다. 이재유는 해외에서 주로 활동하던 당시의 많은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국내에서 기반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그는 이현상, 김삼룡, 정태식 등과 함께 '경성트로이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으며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을 자유자재로 뚫고 다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재유가 일제에 검거됐을 당시 언론은 '신화적 인물이 드디어 잡혔다'라며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 하략, <프레시안> 2006년 8월 11일자 기사
 

광복절을 앞 둔 어느 날 우연히 기사를 보고서 뒤늦게 이 책의 존재를 알게되었다. 소설이 어차피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실명소설'이니 '기록소설'이니 하는 쪽은 어쩐지 조작된(?) 리얼리티에 혹하는 느낌이어서 별로 손이 안 가는데,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라는 구절이 눈길을 확 사로잡았다. 그러고보니 이재유, 이현상, 김삼룡 같은 이름도 아주 낯설지는 않다. 무심코 지나친 길을 되돌아가 보물을 발견한 심정으로 책을 집어들었다. 기사에 나온 대로, 책의 제목이기도 한 '경성트로이카'는 1930년대 지하조직이었던 공산주의 혁명 결사의 이름, 오랜 동안 반편으로만 기억되고 기록되어 온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활동을 해 온 남한 공산주의 운동의 마지막 보루 '경성꼼그룹'의 전신이기도 하다.
 

이십 여 년의 노동운동 경력을 가진, '파업'이라는 소설을 집필하기도 했던, 농번기에 농사 짓고 농한기에 생계형 잡일을 하며 가끔 쑥스럽게 끄적이는 일을 계속하던 저자는 인사동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운명적으로'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라진 시간을 찾아서'라는 제목을 단 서문에서 짧지 않게 그 우연한 만남과 남북 어디에서도 대우받지 못하고 죽어 간 그들을 위해 진혼곡을 연주하리라는 내 마음의 약속에 대해 밝히고 있다. 책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인 이효정 할머니와의 조우와 그녀로부터 받은 순정한 영감, 한편 자신이 과거에 가졌던 신념으로 인한 경도의 우려와 실제 인물과 사건을 소설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빚어질 지 모르는 왜곡에 대한 부담감. 그러나 남과 북에서 공히 잊혀지거나 고의적으로 삭제된 그들의 존재를 되살려내려는 저자의 사명감으로 이 책은 완성되었다.
 

사실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내 머리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영화 '아나키스트'의 창백하고 푸른 이미지였다. '1930년대 경성 거리를 누비던 그들이 되살아온다'라는 표지의 문장도 그렇고, 사전지식 없이 '경성트로이카'라는 제목을 접했을 때 처음 받았던 지배적인 인상은 고답적인 세련미 혹은 복고풍의 낭만에 가까운 감상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책장을 넘길수록 마음 속에 부유하던 겉멋(!) 대신에 일제하 경성 젊은이들의 헌신적인 삶이 생생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경성 트로이카'를 중심으로 활동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지만, 제도교육에서 의도적으로 삭제된 일제시대 좌파 독립운동 역사 전체를 망라하고 있다. 광주학생운동과 삼일운동 그리고 신간회와 상해임시정부로 대표되었던 단어 나열식의 일제시대 역사 뒤 편에서 핏빛으로 물들었던 반쪽의 역사를, 소설은 수십 년 전 생동하던 인물들을 통해 보여준다.
 

광주학생운동으로 고무되어 수업거부와 동맹휴업을 주도한 동덕여고생 박진홍, 이순금, 이효정 등의 여성 혁명가들,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후에 가장 신실한 혁명가로 변신하는 동덕여고 교사 이관술 그리고 탁월한 혁명가로 국내파 공산주의 혁명 결사 '경성 트로이카'를 조직한 개마고원의 아들 이재유. 혁명과 관계 없으면 농담조차 하지 않았다는 후에 남부군 최후의 총대장으로 죽어간 이현상, 해방 후 남과 북 모두에서 버려진 남로당의 처지를 '허무한 일이요'라며 피끓는 심사로 토해내고 모진 고문과 총살로 죽어간 김삼룡과 이주하, 일본인 교수 신분으로 남한 공산주의 운동의 든든한 동반자였던 미야케 그리고 '조선소설사'로 잘 알려진 경성제대 교수 출신의 김태준. 그밖에도 후대에는 이름을 전하지 못한 수많은 혁명가들이 등장한다. 
 

구체제의 봉건성을 벗어나지 못한 생활 세계와 일제의 식민통치 그리고 혁명적 공산주의와 갖은 서구 신문물의 유입이 뒤섞인 혼란스럽고도 싱그러운 근대의 풍경 속에서 그들은 오직 노동자들의 파업을 조직하고 조국의 해방을 모색하는 일에 청춘을 바친다. 민족과 조국을 내건 독립운동의 명망가들이 국외로 떠나 일신의 안락과 함께 지도부를 자처하고 있던 시절에도 그들은 하나뿐인 목숨을 내걸고 구속과 고문의 일상적인 위협을 실천으로 돌파하며 새로운 세상을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한반도 전체가 병참기지화되면서 일제의 악랄한 탄압 속에 거의 모든 운동세력의 명맥이 끊어졌을 때조차 그들은 눈앞에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를 물리치며 버텨내고 마침내 해방을 맞는다.
 

그러나 승리의 확신도 장밋빛 미래도 오로지 자신에게서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핍진한 현실 속에서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일으켜세운 그들의 강인한 정신과 생명력은, 해방된 조국에서 무참히 짓밟혀버리고 만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공산당 탄압 속에 많은 사람들이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을 받고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경성 트로이카'의 구심이었던 이재유는 해방을 한 해 앞두고 감옥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경성꼼그룹'을 재건한 이관술은 정판사 위폐사건으로 처형을 당한다. 결혼과 함께 운동을 떠났던 이효정 할머니만이 오늘 날까지 살아남아 역사의 산증인으로, '경성 트로이카'를 복원하는 산파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 거대한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책의 앞 장에는 이효정 할머니의 다음과 같은 시가 실려 있다.
 

내 영혼 떠나버린 빈 껍질 
활활 불태워 
한 점 재라도 남기기 싫은 심정이지만 
이 세상 어디에라도 
쓰일 데가 있다면 
꼭 쓰일 데가 있다면 
주저없이 바치리라 
먼 젊음이 이미 다짐해둔 
마음의 약속이었느니 

- 이효정 '약속'
 

물론 저자의 윤색을 거친 소설이기는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땅에서 멀지 않은 과거에 일어난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지금의 현실이 그들의 삶에 빚지고 있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라는 생각에 읽으면서 내내 가슴이 뛰었다. 그것은 현실이 되자마자 변질되거나 끝내 성취되지 못한 채 금단으로 무화되어버린 여럿이 꾸던 꿈의 매혹이기도 하면서, 여전히 저 멀리 있는 어쩌면 우리가 이어가야하는 피할 수 없는 과제라는 거창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분명 어느 정도 미화된 부분이 있을 것이고 이르게 폐기된 자료를 구하는 일 역시 꽤나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므로 100% 역사의 진실로 받아들이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역사라도 결국 기록하는 자의 선택임을 생각하면, 군내 나는 이야기 속에 담긴 그들의 삶과 죽음에 무참한 마음이 되는 걸 어찌할 수가 없다. 그리고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스러져 간 그들을 향한 너무 늦은 진혼에, 나 역시 작은 마음 하나를 보탤 수 있다면 좋겠다.


2006-08-31 04:46, 알라딘



경성트로이카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역사/대하소설
지은이 안재성 (사회평론,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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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7. 21:39


전작주의라고까지 거창하게 말할 건 없지만, 김영하는 신작이 나오면 '초판 1쇄' 탐증을 불러내는 몇 안 되는 작가 중 하나다. 야심 어린 긴 호흡을 선보인 '검은 꽃'도 제목도 상큼발랄한 '랄랄라하우스'도 별 감흥이 없기는 했지만, 조건반사처럼 나는 그의 신간을 사들였고 받아들자마자 단숨에 읽었다. 이야기는 단숨에 달려들어 읽을 만큼 예의 빠른 호흡을 자랑하고 있었고, 예전만큼의 몰입이나 떨림 같은 건 없었지만 읽는 내내 신경줄이 늘어지지 않을 만큼 흥미로왔다. 네 시간 가량 읽었을까, 새벽이었고 침대맡에 책을 밀쳐두고 바로 잠이 들었다. 며칠 동안은 읽었다는 것도 까먹고 지내다가 여기저기서 마주치면서 다시 갸우뚱해졌다.
 

책이 나온 지는 보름쯤, 읽은 지는 일주일쯤이 되었다. 간혹 새로 문을 연 그의 홈피와 알라딘에서 독후감을 찾아 흘깃거렸다. 무언가를 읽고 반드시 판단(?)을 해야하는 건 아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석연찮은 느낌이 진하게 남은 게 나만 그런 건지 뭔지 궁금했다. '호출'이나 '엘리베이터..'를 읽었을 때의 가벼운 전율, 부담스럽지 않은 충격과 자극 같은 것, 그 때가 너무 멀다면 '오빠가 돌아왔다'에서도 충분히 그랬다. 근데 뭐지, 이런 지지부진한 감상은? 작가의 변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보수성일까, 소설을 소설로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산만함일까, 혹은 김영하라는 이름에 걸고 있는 기대가 여전히 너무 높은 것일까.
 

인생의 절반을 북한에서 보내고 남파된 공작원, 남은 절반의 절반을 끈 떨어진 채 부유하며 불안한 안정을 구가하던 그에게 24시간 내 귀환명령이 떨어진다. 그리고 남은 24시간, 책의 띠지에 적힌 대로 '단 하루 동안 인생을 통째로 다시 산 한 남자 이야기'가 펼쳐진다. 김기영과 아내 장마리와 외동딸 김현미 그리고 그들 세 사람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이, 현상 이면에 감추어진 비밀스런 세상의 진실 비슷한 것을 공히 연상시키며 중첩되어 있다. 
 

엄청난 자료 조사를 짐작케하는 박진감 넘치는 묘사와 진부하지 않게 잘 짜여진 구성, 예전 단편들 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녹록지 않은 필력을 보여주는 재기 어린 문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가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뭘까에 너무 집착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작가세계' 가을호에 기고했다는 작가의 글을 살짝 엿봤는데, 그는 이 소설이 여태껏 자신이 쓴 작품 중 가장 현대적이고 모험적인 작품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부연을 짧지 않게 덧붙였는데, 그의 홈피 게시물에서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 소설은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없다. 아니 있지만 계속해서 그것을 지워나간다. 마치 에셔의 판화 같은 구석이 있다. <검은 꽃>을 쓸 당시 나는 이런 고민을 했었다. 과연 인간들이 먼 곳에서 허망하게 사라진다는 것, 그래서 완전히 잊혀진다는 것, 그 허무함을 지문이나 대사로서가 아닌, 형식으로 보여줄 수는 없을까? <검은 꽃>은 1부가 2부보다, 2부가 3부보다 짧다. 특히 3부는 극단적으로 짧다. 그런 기우뚱함, 불균형, 뭔가 더 얘기되어야할 것들이 되지 않은 듯한 느낌은 어떤 면에서 그런 고민의 산물이었다. <빛의 제국> 역시 주인공의 의도와 의지, 그의 소통은 보이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차원, 즉 주인공이 의식할 수 없는, 그에게는 4차원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주인공의 외부에 위치한 소설의 구성과 형식을 통해 서서히 허물어져나간다. 소설적 현대성에 대한 이런 지향이 제대로 실현됐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 소설을 읽음에 있어 ‘이야기’에만 집중하지는 말았으면 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바람이다. 물론 이 소설은 ‘잘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만약 이 소설이 잘 읽힌다면, 그 순간 당신은 이 소설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음... 이 소설에 대해 남파간첩의 이야기다, 운동권 얘기다 라며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사실 작가의 위와 같은 글은 내게 좀 낭패스러웠다. 그는 예전에 꽤 잘 나가는 컬트 홈페이지의 얼리어답터 주인장으로 마니아들과의 평등한 소통을 일삼던 신세대 작가였고, 영화와 방송 등 다방면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면서도 전혀 경박스럽지 않게 어쩌면 그야말로 우아하게 존재감을 발하는 선택 받은 재간꾼이다. 물론 작가로서의 본분 역시 잃지 않고, 갈수록 긴 호흡의 이야기를 시도하면서도 당장 이 책이 읽힐까가 아니라 스스로 말하는 바와 같이 독자에게 일종의 실험을 제안할 만한 주도권을 가진 몇 안 되는 소설가이기도 하다.
 

뜬금없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나의 무감흥의 이유가 짐작됐다. 미끈하고 세련된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모두 고뇌한다. 24시간 이내 귀환 명령을 받은 김기영은 자신이 어느 정도나 노출되어 있는지를 알기 위해 십 수년 전의 동물적 감각을 되살려내며 서울 바닥을 종횡무진 뛰어다닌다. 한참 어린 잘난 애인과의 사랑(?)으로 일상의 권태를 억누르면서도 자신의 삶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돌아보며 억울해하는 장마리 역시 나름대로는 간절하다. 겉보기에는 멀끔한 부모의 외동딸인 현미는 그 또릿한 영민함에도 불구하고 왕따인 친구를 단짝 삼고 존재하지도 않는 철이를 향한 관심을 저버리지 않는다.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은 좀 과장하자면 모두 참 간절하고도 간절하다.
 

그리고 작가는 이야기에만 집중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너무 고전적인 독자의 자세지만, 혹은 진부한 드라마 시청자의 자세일런지도 모르지만, 나는 주도권을 가진 명민한 작가가 휘두르는 전지적 권능이 솔직히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기분대로 말하자면 약간 불쾌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모든 소설가들이 천편일률, 이야기 속으로 돌진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간절한 주인공들을 세상에 내보냈다고 작가 역시 울며불며 그들 뒤치다꺼리에만 골몰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기실 김영하와 그런 것은 어울리지도 않는다. 그럼 어쩌라고? 실은 나도 모르겠다. 다분히 내 기분일 수도 있지만, 행간에서 느껴지는 어떤 냉랭한 거리감 같은 것. 촌스러운 독자의 티를 벗지 못하는 내게는 답도 없이 그게 아쉬웠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두 장면은, 소지와 김기영 그리고 장마리와 김기영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뭔가 시대를 잘못 타고난 듯한 사내에게 끌렸던 젊은 시절의 마음이 분명 아주 없지는 않은, 술에 취하고 추억에 취한 채로는 당신을 따라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역시 아주 없지는 않은, 그러나 소지와 김기영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다. 소지는 그것을 통해 조용히 자신의 결심을 알리고 있었다. 기영은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 더는 개입하지 않기로, 그런 위험한 모험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음을 직감했다. 그는 화제를 돌렸다. 마지막에라도 좀 현명해질 필요가 있었다. "아, 아니다. 내가 괜한 소리를 할 뻔했네. 그래, 그럼 잘 있어." "그래요. 나도 그만 자야 될 것 같아요. 내일 다시 통화해요."  "이 전화는 곧 버릴 거야. 아마 오래 통화 안 될 거다. 좋은 작품 써라."  "...... 형도 몸조심하세요."
 

그리고 장마리와의 마지막 장면은 좀더 극적이고 끔찍하다. "돌아가라구. 그게 답이야. 미안해. 난 지금이 좋아. 당신이 안 가면 북에서 누군가가 내려올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난, 당신은 서운해하겠지만, 이제 와서 이름도 바꾸고 처음 보는 동네에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 생각이, 나는 없어."  "믿든 안 믿든 당신 자유야.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오늘 아침에 당신이 만난 그 여자가 아니야. 난 배웠어. 인생에선 노, 라고 말해야 할 순간이 있는 거야. 지금이 바로 그때야."  "신고할 거야. 112에 신고할 거야. 농담 아니야. 내 앞에서 당장 꺼져." 대여섯 쪽에 걸쳐,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고, 하루 종일 갈등한 문제에 대해 이해를 구하고, 실은 자신을 잡아주기를 바라는 김기영과 그에 대응하는 장마리의 대화는 읽다보면 심지어 '거울에 대한 명상'의 우울하고 잔혹한 이미지마저 떠올리게 만든다.
 

'빛의 제국'을 어떤 소설이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작가의 말을 들으니 더욱 그건 별 의미가 없는 일인 것도 같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에서 제목을 따왔다고 하는데, 솔직히 나는 공들인 표지와 작가가 말하는 운명적일만큼 그럴싸한 제목 선정에 대해 크게 공감을 하지는 못했다. 세상의 수많은 색깔이 빛으로 섞이면 검게 혹은 희게 수렴되듯이, 혹시나 그도 남과 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실재와 부재 같은 모순된 것들의 일치 혹은 무별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롭게 이야기를 따라가 책장을 덮고 그나마 내가 얻은 감상은, 아귀같은 현실에 사로잡힌 채 발버둥치면서도 결국 그로부터 떠날 수 없는 불가항의 존재 양식 같은 거였다.
 

결국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그저 상황에 휘둘리고마는 인간의 적나라함 같은 것. 그리고 간절한 그들을 조종하는, 독자의 시선마저도 장악하고자 하는 작가의 유연한 능수능란함 같은 것. 하지만 이제는 사는 일만도 너무 피곤하여 책 한 권을 읽으며 행간의 미로를 따라 작위의 열광을 만들어내는 일 같은 건 내게 너무 도저하다. 다시 한 번 마음을 열고 읽어본다면 미처 느끼지 못한 또다른 감상이 덧붙여질런지 모르지만, 아마 그럴 리도 그리고 내가 원하는 '시대착오적 절실함'을 이 책에서 찾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을까 싶다. 난 이제 그에게 흡족한 독자는 아니게 된 모양인지도 모르겠다.


2006-08-23 00:46, 알라딘



빛의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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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영하 (문학동네,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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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7. 21:36


세 시간의 비행, 그들 가족을 반기는 낯선 사람들 그리고 넘실거리는 바다. 마침내 당도한 남쪽, 오키나와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다. 꿈결과 같은 하루를 보내고 그들은 새로운 터전 이리오모테섬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지 하나도 모르겠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지로를 위로하듯, 아버지는 도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성실함 그 자체로 돌변한다. 집을 수리하고 텃밭을 가꾸고 비록 여전히 아이들의 등교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이사한 첫 날부터 새로이 둥지를 튼 이주가족을 오랜 이웃처럼 살뜰히 챙기는 정다운 이웃들 속에서 아버지는 더이상 지로에게 잿빛 마음을 선사하던 그 사람이 아니다. 어머니 역시 아무런 위협 없는 자연과 사람들 속에서 타고난 본성인 양 자연스레 새 생활에 묻어간다.
 

청경우독, 날씨 좋은 날에는 논밭을 갈고 비오는 날에는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본디 인간이 지녀야 할 모습이라며, 만족스럽게 생활에 적응한 가족들, 아니 아버지와 어머니. 유유자적 섬생활의 여유를 누리는 부모와 달리,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만 굴뚝 같던 지로와 모모코도 다행히 오래 안달하지 않고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천국과도 같은 다정한 학교에를 다니게 된다. 학교에서 새로 사귄 몇몇 친구들, 캠프장에서 먹고 자는 캐나다인 베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섬에 어울리는 마냥 선량한 경찰관, 동네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학교앞 가게 아주머니. 다 꼽아도 손가락이 모자라지 않는 이웃들과 더불어 지로와 모모코에게도 점점 섬생활이 마음에 드는 것이 되어간다. 더구나 도쿄에 남았던 누나마저 어느 날 홀연히 돌아와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좀은 그렇게 팔자를 타고난 사람들답게, 천혜의 아름다움을 가진 그들이 이주한 이리오모테섬은 리조트 개발을 앞두고 지역내 갈등을 안고 있는 상태였다. 돌아온 전설속의 과격전사는 운명처럼, 리조트 개발 반대운동을 빌미삼은 '자아찾기' 집단과 리조트 개발이 고립된 섬사람들의 오랜 소망이라는 미명 하에 자기 배를 채우는 섬 출신의 건설업자 그리고 나아가 리조트 개발을 담당하는 거대자본과 조우한다. 왕년의 그 무엇도, 좌익도 우익도 이미 넘어선 단독으로 행동하는 인간 이치로는 여전히 '나는 국가와 자본가의 뜻대로 움직이지는 않겠다, 단지 그것뿐이오.' 라고 말할 뿐이다.
 

그리고 마치 헛소동과 같은 스펙타클의 집 지키기 투쟁, 자신이 어떻게 이용될런지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되는 이치로의 과격함은 예외없이 되살아나고, 매스컴의 집중과 호들갑으로 마침내 전국적인 유명인사로 떠오르기에 이른다. 너나없이 같은 짓을 반복하는 선정적인 매스컴, 호기심으로 가득한 관광객들의 줄이은 방문, 사태의 곁다리를 잡고 부채질하는 아버지를 둘러싼 많은 것들. 아버지는 흥밋거리가 되었고, 뭍의 반응을 살피려 친구에게 연락을 넣으니 무카이는 예의 아이답지 않은 결론을 내린다. "내가 생각건대, 너희 아버지는 그림이 돼. 키 크지 눈썹 굵직하지. 게다가 웃으면 묘하게 애교도 있어. 그러니 매스컴이 가만히 놔두지 않는 거야."  
 

"원래부터 여기는 누구의 땅도 아녀. 그러니까 거래를 하는 쪽이 이상한 거야."라며 자연의 섭리를 믿는 순박한 섬의 사람들, "그 자들이 우타키를 부순다면 나는 그 답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불을 질러주지. 일이 그렇게 된다면 죄다 케이티 책임이오. 그만큼 우타키는 우리 야에야마 사람들의 정신적인 뿌리 같은 것이야!"라며 기세등등하던 아버지. 그러나 현실은 힘 있는 쪽의 뜻대로 돌아간다. 모든 것을 걸고 끝까지 저항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비극적 최후의 주인공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캐나다인 방랑자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베니였다. 하지만 진짜 최후는 그 다음에... 한 밤의 헛소동, 우중의 불꽃놀이가 끝난 후, 아이들은 파이파티로마로 떠난 이치로와 사쿠라를 생각한다.
 

"아니, 국가 같은 게 아니라니까. 그냥 커뮤니티야. 사람들의 모임. 어느 나라의 영토에도 속하지 않으려고 지도에 실리는 것도 거부한 거야."   "혼자 살더라도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들면 정치경제가 발생해.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걸 생각하지 않으면 정치가도 자본가도 필요 없는 거야. 돈이 없어도 모두가 콘스턴트하게 가난을 즐기면 얼마든지 행복하지 않을까?"   "나는 낙원을 추구해. 단지 그것뿐이야." ... 현실에서는 그저 꿈같은 이야기들이 소설에서는 현실이 된다. 세계의 변화를 생각하며 미간을 좁혀 진지한 질문을 쏟아낼 필요는 없겠지만, 답답한 세상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통쾌함 그리고 어지러운 세상에 빗댈만한 은유들이 곳곳에 묻어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이치로의 이 말이 좋았다.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철저히 싸워. 져도 좋으니까 싸워. 남과 달라도 괜찮아. 고독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해해주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기도 하고 곧잘 거대담론과 연결되는 것들이기도 했지만, 결국 세상일 모두가 내 하는 일 모두가 어쩌면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한 건 아닐까. 엄마는 자신은 감화당하기 쉬운 사람이니까 당분간 아버지 말고는 아무도 믿지 않겠다면서 활동을 그만뒀어. 내 생각인데, 엄마는 내내 아버지의 열광적인 팬이었던 거 같아.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하고 살겠니? 완전히 상식과는 담을 쌓은 사람인데. 그리고 이 말, 책장을 덮고 나서는 혼자서 감히 생각했다. 나, 사쿠라랑 좀 비슷한 것 같애. 역시, 소설은 사람을 꿈꾸게 한다. 허무맹랑하게도.


2006-08-22 15:15,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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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오쿠다 히데오 (은행나무,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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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7. 21:34


신간 묶음 판매의 내막은 알 수 없지만, '공중그네'와 '인더풀'을 재미있게 읽었고 한 권 값으로 두 권을 챙길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일단 사놓고 봤다. '레디앙'에 실린 기사를 보고 혹해서 집어들어 단숨에 읽었는데, 재미있었다고 책 얘기를 꺼내니 프레시안에 김민웅 선생님도 글을 썼더라며 친구가 귀띔을 해줬다. 고작 두 권을 읽었지만 작가의 전작에 비하면, 운동권 가족 이야기를 다룬 두툼한 장편 소설이라는 변별점 외에 크게 의미부여를 할 건 없을 것도 같은데, 혼자 생각에 이 책에 대한 빨간 미디어의 반김이 좀은 이례적이다 싶어 이유가 궁금해진다.
 

열두 살 생일을 몇 달 앞 둔 사춘기 소년 지로의 눈과 작가의 전지적 시점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도쿄의 기찻길 옆 허름한 이층집에 사는 주인공은 커다란 덩치와 목소리에 맞지 않게 주로 집구석에서 뒹구는 아버지와 작은 찻집을 운영하며 가족을 먹여살리는 어머니, 단지 수면공간으로 집을 이용하며 가족에 속한다는 것을 과히 반가워하지 않는 나이 차 많은 누나 그리고 두 살 터울의 남매다. 유난스러울 것 없는 사춘기 소년의 성장 과정을 밟고 있는 지로는, 어려서부터 가장 노릇을 일찌감치 내려놓은 아버지 덕에 좀 일찍 철이 든 편이고 아이답지 않은 고도의 냉소를 늘 품고 있다. 읽다보면 툭툭 튀어나오는 조숙과 위악에 '새의 선물'의 주인공이 떠오르기도 하고, 소위 '정상적인 가정'의 바깥에 놓인 아이들 특유의 자조스런 사색이 좀은 짠하다. 
 

전설적인 운동권 과격파였던 아버지 이치로. 그러나 국가와 자본의 개가 될 수 없다며 도쿄의 집구석에 들어앉아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신문을 뒤적거리며 코딱지를 파며 데굴데굴 구르는 것, 물론 곧 작가가 될 예정이라며 무언가 쓰는 것도 같지만 어찌 될런지는 알 수 없다. 가끔 못마땅한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심란한 현실로 인해 존재론적 갈등에 휩싸인 아들 지로가 던지는 질문에 허망한 대꾸를 내뱉으며 프로레슬링이나 권하는 형편이다. 이벤트라면 국민연금 가입이나 가정방문 등의 용무로 찾아오는 공무원과 선생님을 향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민망한 연설을 늘어놓는 것이며, 불량한 중학생에게 위협받고 있는 아들의 위기상황에도 혈친적 우려보다는 세계관에 입각한 격려로 투지를 북돋우는 나름의 일관성을 보이는 인물이다.
 

도저히 아버지와 왜 결혼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어머니 사쿠라는, 집이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찻집을 운영하며 살림을 챙긴다. 아버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좀처럼 화 내는 일도 없는 마냥 좋기만 한 엄마, 알고 보니 그녀도 한 때 잔다르크라 불릴 만큼 열성인 운동권이었으며 나름의 상처를 안고 자신을 '받아준 ' 남편을 따라 부잣집 친정을 야반도주한 보통은 아닌 여성이다.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상류층 외가집의 존재가 잠시 지로와 모모코를 들뜨게도 혼란스럽게도 하지만, 권유와 간청보다 진한 피의 힘 덕분에 그들 역시 그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으로 남겨질 뿐이다.
 

도쿄에서의 생활을 다룬 1권은, 사춘기 지로의 일상을 따라 흘러간다. 그리고 지로를 괴롭히는 불량 중학생 가쓰와 아버지 중 하나 만이었다면... 이라고 되뇌일만큼 불감당인 문제적 인간 이치로의 행태가 지로의 관찰을 통해 묘사된다. 그 외 크게 축을 이루는 이야기라면,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아버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남자어른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며 지로와 모모코를 사로잡았다가 테러의 주범으로 유치장에 갇혀버린 아키라 아저씨, 가정방문으로 독특한 연을 맺게 되었지만 계속된 아버지의 투서와 난감한 행각으로 결국 지로의 마음에 무거운 상처를 남겨준 미나미 선생님, 지로와 일상을 함께하는 친구들 준, 무카이, 린조와 만들어가는 자질구레한 사건들과 가쓰의 괴로운 심복 구로키와의 애증어린 우정 정도가 되겠다.
 

그러나 장난처럼 어느 날 문득, 찻집을 정리하고 가재도구를 처분하고 가족은 도쿄의 저 남쪽으로 떠나게 된다. 물론 외할머니의 등장으로 그토록 싫어하던 아버지의 피가 한층 묽어졌다고 안도한 누나는 홀로 도쿄에 남았지만, 이제 겨우 열두 살. 더구나 인터넷 검색으로 경찰 싸이트에 버젓이 이름이 오르내리는 운동권 과격파 아버지의 과거를 알게 된, 자신은 이미 보통 집안의 아이가 아니란 걸 깨달아버린 지로는 자포자기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순순히 따라나선다. 앞으로 그들의 이야기가 펼쳐질 무대는 오키나와에서도 남쪽으로 더 내려간 작은 섬, 이리오모테. 믿었던 엄마마저 아빠와 한통속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정신적 소년가장인 지로는 꽤 심란하지만 이제 곧 열두 살. 하루하루 몸이 변해가는 걸 느끼는, 인생 최초의 문이 열리는 것 같은 실감에 사로잡힌 소년은 담담히 새로운 세계로 걸음을 내딛는다.


2006-08-22 15:00,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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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오쿠다 히데오 (은행나무,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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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7. 21:33


say bon voyage ... 좋은 여행이 되라고 말해줘, 라는 뜻이란다. 모조리 유명인사(?)인 그의 가족 홈페이지 도메인 이름이기도 하다. 그의 만화를 처음 접한 건 소설가 김영하와 함께 작업한 '영화이야기' 였다. 만화에는 영 문외한인 관계로, 나는 책에 곁들여진(?) 그의 만화들에 큰 인상을 받지는 않았다. 못했다,가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만화맹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만화에는 친화력이 없는 내가,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건 순전히 김영하의 지인이며 1년 간의 신혼여행을 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다 만나게 된 '옥수수빵파랑'을 읽으며, 나는 뒤늦게 그와 가족들이 가진 뭉근한 매력과 자유로운 행보에 선망어린 친근감을 가지게 된 것 같다. 백 권 가까이 되는 책에 이름을 올리며 엄청나게 만화와 일러스트 작업을 하고 있는 그에게는 좀 실례되는 관심이지만, 암튼 그렇다.
 

돈이건 다른 무엇이건 발목을 잡는 현실 때문에 그들처럼 훌쩍 떠날 수 없는 내가 처음 책을 집어들 때의 마음은 사실 좀 심퉁맞았다. 진짜 팔자도 좋아, 1년이나 신혼여행 하고 와서 이번엔 멕시코에 쿠바라니. 귀 얇다는 이우일이 범죄영화를 무색케하는 남미의 치안상태를 전해듣고 여행을 갈등하는 초반부까지도 나는 부러움과 질투에 몸서리를 치며 책장을 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가족은 참 복도 많은 것이, 물론 지면으로만 접하는 것이지만 앤간해선 미워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인형을 빼닮은 귀여운 딸 은서도, 곧 학부형이 될 거라고 믿을 수 없을만치 젊고 아리따운 아내도, 심하다 싶을 만치의 소비벽(주로 피규어나 싸구려 장난감 따위)을 가진 이우일도, 그저 남다르게 타고난 자신들의 인생에 충실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대다수에게 아직은 미지의 땅인 그곳에서 전하는 그들의 이야기 역시 가르치려 들거나 은근히라도 과시하는 느낌이 없어 전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는, 이래서 가족이 좋다는 거구나~ 하는 애초에 포기한 가족로망까지 은근히 불러일으킨다.
 

일별할 수도 없이 많은 여행기가 쏟아져나오고, 때로는 미지에의 선답자라는 과도한 책임감으로 과열된 정보 전달에 열을 올리거나 내면의 희열을 오롯이 전하고자 하는 의지를 저버리지 못해 불감당의 공감을 뒤집어씌우고자 하는 저자를 만나게도 된다. 궁금은 했지만 이건 아니었어, 류의 씁쓸한 감상 혹은 뭐 어쩌라고? 하는 불쾌감(다분히 질투어린)으로 책장을 덮게 만드는 여행기들에 비하면, 이우일 가족의 여행 기록은 참 착하고 다분다분하다. 어찌 보면 별 것 없기도 하지만, 애어른 할 것 없이 천진난만스럽고 좌충우돌하면서 독특한 아우라를 발산하는 그들 가족의 이야기를 엿보는 즐거움이 글 읽는 재미를 배가해주는 것 같다. 그들의 글과 그림에는 오히려 별건 아닌데... 라며 말끝을 흐리는 이야기를 채근해서 더 듣고 싶게 만드는 묘한 재주와 매력이 있다. 솔직히 읽은 지 보름 넘게 지나고 보니, 선명히 떠오르는 건 티나 모도티와 워리 달 뿐이지만 그래도 아련하게 작렬하는 태양 아래 더운 기를 가득 머금은 쿠바의 땅을 잠시나마 기웃거린 느낌이다.
 

유유자적, 좋은 건 다 곁에 두고 즐기며 즐기며 살아가는 인생들 같아 여전히 부러움을 금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허물어져가는 건물들에 모자란 전기로 밤이면 온통 깜깜해지는 가난한 나라를 궁금해하는 어린 딸에게, 공산주의는 다 같이 잘 사는 거라고 이야기해주는 그들의 선량함이 어쩐지 짠하고 고맙다. 아직은 꿈으로만 만족할 수밖에 없는 여행, 조만간 나도! 하는 미션임파서블에 불타게 만들지 않는 그들의 여행기에 침착한 호감을 담아 침대맡에 둔다. 답답할 때마다 뒤적이다보면, 실은 보이지 않는 치열함(?)의 산물일 그들의 그림과 만화에도 언젠가 내 눈이 열리지 않을까. 진지한 의도로 진행된 이벤트에 직관적 찍기로 일관했음에도 뻔뻔하게 선물로 받아 즐겁게 읽었다. 마립간님께도 감사.


2006-08-19 12:55, 알라딘

 



이우일카리브해에누워데낄라를마시다
카테고리 여행/기행 > 기행(나라별) > 북/남미아메리카기행
지은이 이우일 (예담,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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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7. 21:31


산을 오르며 글을 쓰는 엄마와 두 딸이 열흘 간의 국도 여행을 떠났다. 철이 들락말락한 사춘기를 지나는 큰 딸 마로와 식물학자를 꿈꾸는 감수성 풍부한 어린이 한바라, '아이들은 길 위에서 자란다'고 제목을 붙였지만 말미에 고백하듯 이 여행은 좀은 소심하고 걱정 많은 엄마의 도전이기도 하다. 집 앞 곤지암에서부터 이어진 3번 국도를 따라 문경, 상주, 거창, 산청, 진주를 지나 남해까지 여정은 이어진다. 그리고 나머지는 남편과 합류한 고흥에서부터 제주도와 마라도를 잇는 일주일 간의 가족여행 기록으로 채워져 있다.
 

사람을 꿈꾸게 하는 많은 것들 중 가장 힘이 센 건 단연 길이 아닐까. 끝없이 이어진 길의 유혹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아이다호'나 '길버트 그레이프' 혹은 '길' 같은 영화들이 먼저 떠오르고,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따라가다보면 '로드무비'라는 장르가 괜히 있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멈춰섰을 때는 이미 의미가 퇴색되기 시작하는 정처없음의 길, 목적한 방향이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길은 언제나 걸음을 불러오고 그 속에서 일상에 밀려 잊혀졌던 성찰을 이끌어낸다.
 

일찌감치 터전을 산속으로 옮겨 유난스럽지는 않은 생태적 일상을 실천하며 글을 써온 저자는, 평범한 독자가 받아들이기에 부담없는 부드러운 사유와 감성적이면서도 정갈한 문장으로 한 권의 책을 완성했다. 중간중간 두 딸의 천진하고 비밀스런 기록이 함께 하고, 길지 않은 여행이 아이들에게 어떤 경험과 기억으로 남겨질런지 엿보는 재미도 녹녹하다. 사람을 꿈꾸게 하고 한편 주눅들게도 하는 길, 길 위의 인생이라는 낭만의 수사는 자신을 보호할 안전한 집이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우리 모두에게 펼쳐진 인생길 역시 별로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크게 호흡을 가다듬고 고생스런 떠남을 감행한 세 모녀의 여행 속에도 인생길과 비슷한 여럿의 표정이 들어있다. 지인을 만나는 기쁨, 미처 몰랐던 땅에서 보물을 발견하는 경이, 돌아보면 아찔한 난관의 순간, 피해갈 수 없는 험한 세상의 공포 그리고 함께 있을 때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가족의 소중함까지. 결국 돌아오기 위해 떠난 길에서 그들은 안온한 집안에서는 잊고 지냈던 많은 것들을 새롭게 끌어안고 마음의 키를 한 뼘쯤은 키운 것 같다. 내가 사는 집으로부터 뻗어나간 길에서 시작되는 여행, 나도 언젠가 그렇게 떠나 수평선과 지평선이 맞닿은 마라도의 노을을 만나는 날이 오면 좋겠다.  


2006-08-19 11:09, 알라딘


아이들은길위에서자란다
카테고리 여행/기행 > 기행(나라별) > 한국기행
지은이 김선미 (마고북스,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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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7. 21:20


국민을 보호하는 존재라고 당연히 믿고 살아왔던 경찰의 폭력에 몸과 마음의 상처를 얻고, 국민의 권리를 지켜준다던 법에 의해 유린당하며 평생 나랑 상관없을 것만 같았던 경찰서 유치장에서 밤을 지새우는 것... 백일 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세상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KTX의 꿈은 '꿈의 속도'로 추락했다, 윤선옥 . 17쪽
 

우리가 겪어보기 전에는 내가 속해 있는 이 사회에 우리와 같은 투쟁을 하는 이가 넘쳐난다는 사실을 몰랐다. 우리가 뭉쳐 외치기 시작하면,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생기면서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스물여섯 번째 생일, 정미정 . 46쪽
 

사회에 첫발을 들여 꿈에 부풀어 있던 나는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꿈에서 서서히 깨어났고, 각박하다고 말하는 세상의, 그 적나라한 현실을 몸소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던 중에 파업의 '파'자도 몰랐던 내가 파업이란 것을 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낄 수 없었던, 극한의 고통과 분노, 공포와 긴장감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낸 날이 어느덧 백일에 가까워온다. 어제는 지나가는 KTX 열차를 보고 눈물이 났다, 유나영 . 57쪽
 

집을 떠나 파업이라는 것을 시작한 지 벌써 백일이 다 되어갑니다. 처음엔 2년 동안 당한 일들이 너무 억울해서 시작했고, 그 다음엔 정당한 것을 그렇지 않다고 억지 부리는 그들이 너무 미워서... 그리고 이제는 법과 공권력까지 동원해 우리를 회유하고, 협박하는 그들에게 공정하라고 소리치고 일깨워주기 위해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가 도착하기 전, 이 여행이 끝나길 바라며, 남소영. 63쪽
 

그동안 참 많은 것들이 변했습니다. 이렇게 제가 변한 이유는 비겁하지 않은 삶을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많은 저이기에 후에 저 자신에게 떳떳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것을 정당한 것이라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부모님이 보고파 울지 않습니다, 홍수진 . 72쪽
 

이 투쟁이 시작되기 전에는 비정규직이 무엇인지 알려고 들지 않았던, 아니,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단정지어버렸는데 마치 이전의 나를 비웃듯 나의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지금 내가 닥친 현실을 비난하진 않는다. 파업을 통해서 사회를 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들은 무심히 지나쳐버렸던 무심하고 적당주의자였던 내가 이제는 정당한 일에 대해서는 소리 내어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KTX 승무원이 아닌 해고자다, 최소영 . 78쪽
 

언제부터 일하는 사람을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로 구분하였던가! 이 모든 과정이 힘 있는 사람들의 장난이라고 생각하니 너무나 서글프고 치가 떨린다. 이것이 내가 이 싸움을 절대 포기 못하고 끝까지 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어두운 터널을 우리들은 걸어왔다, 박지예 . 84쪽
 

가슴에 못이 천 개는 박힌 듯한 느낌이 든다. 노동부, 법, 대통령, 이철 사장, 정치인들이 내게 남긴 상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TV에서 파업하는 장면을 보면 왜 저렇게 파업을 하지? 그냥 대충 잘 다니면 되지, 이런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번 파업을 통해서, 세상일이 당사자가 아니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힘들지만, 우리가 옳기에, 이 파업이 정당하기에 동지들과 끝까지 함께 하고 싶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 김경미 . 89쪽
 

이번 파업으로 난 철부지 20대 여성에서 진정한 노동자로 거듭났고, 이제껏 보아오지 못했던 세상의 이면들을 보며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 배움과 깨달음만으로도 난 이번 파업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는 생각이 든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다. 난 이 상황을 피할 수 없고, 내가 물러서면 안 될 현실이기에 지금 이 상황을 즐기며 최선을 다하련다. 그리고 반드시 승리하겠다. 나를 떠난 그 동지들에게 먼저 손 내밀어 내가 먼저 그들을 용서할 수 있기 위해... 너무나도 서럽고 가슴 아팠다, 이혜정. 98쪽
 

시간이 만들어 내는 초조함에 져서 내 길을 바꾸고 싶진 않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단지 '철도공사의 정규직 승무원'이란 단순화된, 대표화된 요구만은 아니다. 해준 약속을 지켜주고, 한 만큼 알아주고, 되돌려주며 사랑과 책임감 있는 삶을 누리게끔 해달라는 것이다. 우리의 이 소박하고 당연한 바람이 거절당해도 죽지는 않는다. 다만 오래도록 상처가 남아 딱지가 앉을 것이다. 바르게 살아도, 간절히 바래도 상처만 받고 끌날 수 있다는 것에... 기다림만큼 완벽한 것은 없다, 김지원 . 107쪽

 
 

투쟁 100일을 훌쩍 넘긴 KTX 승무원들의 글이 문집으로 엮여져 나왔다. 총리 면담을 위한 국회 농성, 강금실 후보 사무실 점거 농성, 대량 문자 해고, 지도부의 단식 등으로 KTX 승무원들의 투쟁은 잠깐씩이나마 이슈가 되어왔다. 커다란 충돌이나 선정적인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투쟁이 대체로 그들만의 필사적인 싸움에 그치고 마는 것을 생각하면, 그래도 많이 알려지고 언론에서도 다루어진 것 같아 다행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오랫동안 싸우고 있는 그녀들에 대한 일부의 호의적인 시선과 별개로, 문제의 해결이 쉽지는 않을 거란 느낌도 들어 안쓰럽기도 하다. KTX 승무원들의 투쟁은 비정규직 문제와 불법파견 문제의 핵심을 정조준하고 있다. 소관이 아니라고 외면하는 철도공사와 이제는 사라져버린 한국철도유통 그리고 새로운 위탁업체로 전원 해고를 통보한 KTX관광레저 사이에서 절규하던 그녀들은 이제 노동부와 국가인권위를 압박하고 있다. 
 

처음엔 그저 난생 처음 겪는 차별과 부당함에 대한 억울함으로 시작된 투쟁이 이제는 우리 시대 노동 문제의 본질을 부각시키며 그녀들을 투사로 둔갑시켰다. 극도의 취업난 속에 100:1이 넘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지상의 스튜어디스'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던 그녀들, 어쩌면 감히 '온실 속의 화초'라 말해도 틀리지 않았을 그녀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끈질긴 투쟁 속에서 동료가 아닌 동지로 서로를 바라보고 설령 이 투쟁이 패배한다해도 바른 길을 가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한 명의 노동자로 거듭나고 있음을, 그녀들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아리방에 굴러다니는, 이제 막 분노를 알게 된 새내기가 적은 날적이글을 보는 것 같은 느낌에 안쓰럽고 마음이 아프면서도 조금은 반갑고 손을 건네고 싶은 마음이다. 내 일이 아니라고 짐짓 외면했던 문제의 당사자로 거듭난 그녀들은 껍데기를 벗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세련된 화장과 단정한 제복 차림으로 고객님을 향해 환한 미소를 날리며, 한편 착취와 억압 속에 온갖 궂은 일과 부당한 처우를 감내해왔다는 그녀들. 하지만 더 이상 인형이기를 거부한 그녀들은 이제 노동자인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훗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어쩌면(!) 패배할지도 모르는 이 투쟁에 목숨을 걸었다고 한다. 
 

대충 적당히만(?) 했어도 결코 길거리로, 대합실 찬 바닥으로 나올 일 없었을 그녀들을 모진 투쟁으로 내몰고야 만 현실은, 우리 사회가 모순의 정점에 있음을 반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철도노동자들의 성금으로 제작되었다는 이 책, '저 별빛'이라는 제목이 붙은 제4부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 문인들의 기고글이 실려있다. 소박하고 어설픈 이 책은 이제 동지와 투쟁을  알게 된 KTX 승무원들에게 눈물 겨운 연대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백무산 시인의 시,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아 기억하자, 노동자는 언제나 깨어져서야 승리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정말로 'KTX 승무원' 그녀들의 이름이, 이 땅의 비정규직 불법파견 노동자 문제 해결에 물꼬를 트는 희망의 이름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2006-08-02 01:4, 알라딘

 


그대들을희망의이름으로기억하리라KTX여승무원문집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철도노조KTX열차승무원지부 (갈무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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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11. 5. 17. 21:17


대학로에 '세속도시의 즐거움'이 있던 시절, 같은 골목에는 나무 창문과 나무 문이 있는 '나팔소리'라는 까페가 있었다. '나팔소리'에 처음 들어섰던 낮 시간, 주인 언니는 아무도 없는 카운터에 앉아 책을 읽으며 이따금 담배를 피웠다. 그 무렵 부러 찾아가 본 광화문의 '봄, 여름, 가을, 겨울' 들은 어쩐지 좀 이물스러웠고, 오히려 내게 더 윤대녕의 소설을 연상시키는 공간이 '나팔소리'였다. 대학로 길거리에서 마주 치면 서로 누군지 떠올리지 못하는 채 반가운 안면의 기억으로 인사를 주고받곤 했던 주인장 아저씨가 있는 '세속도시의 즐거움'이 어느 날 피난가듯 문을 닫아버린 후 그 정겨운 골목에서는 '나팔소리'만 조용히 불을 밝혔다. '나팔소리'를 마지막으로 갔던 날은, 역시 이제는 사라진 '리버피닉스의 아이다호' 까페의 처음이자 마지막 모임이었다. 이따금 어디선가 '모데라토 칸타빌레'와 마주칠 때마다, 늘 연달아 동시에 떠오르는 기억들이다.
 

 세속도시의 즐거움, 나팔소리, 리버피닉스의 아이다호 그리고 이제는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불과 오 년 남짓 지났을 뿐인데도, 사라진 실물의 괴리를 메우는 망각은 무서운 것이어서... 나는 벌써 그 시절의 내가, 지금은 몹시 낯설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낯섦에 따라붙은 뒤라스의 책. 이런 느낌은 싫어하지 않지만 이런 문체는 좋아하지 않는 탓에, 감당할 수 없는 열정에 저항하듯 아들을 동반하고 떠다니는 안 데바레드와 희멀건 회색빛 항구에 면한 쓸쓸한 라 메르 가의 느낌 정도만 기시감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이 책을 다시 끄집어낸 건 순전히 작고 가볍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비오는 날 거리로 나가는 길, 어쩐지 이제 이런 느낌은 내게서 좀 떼어내고 싶다는 욕심에 차라리 젖어버려라 하는 치기 어린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기갈이 들린 듯' 집 반대편의 까페로 '산책'을 나서는 안 데바레드는, 자기 속의 욕망을 충동질한 치정의 살인사건을 목격하기 전에도 결코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살아본 적이 없는 여자다. 주어진 일상의 존재 범위를 결코 넘어서 본 일이 없는 그녀가 몽환적인 대사들을 주고 받으며 아슬하게 경계를 걷는 일 역시 전혀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할 수 없는 것이다. 적막할 만큼 고요한 대화가 오고 가는 중에도 뇌수를 찌르는 듯한 긴장과 초조가 행간을 팽팽히 조여오는 느낌, 이런 기분 모르지 않아 라고 책장 속 그들에게 고백하고 싶을 만큼 아찔하고 한편 매혹적이다. 퇴폐적이고 황량한 마음을 부려놓을 데 없어 속수무책으로 누군가를 갈망하고 제 풀에 기진맥진해버리는 여자의 모습을 보는 건, 어떨 때는 쉬운 일이 아니다. 빠져들기 시작하면 한이 없고, 고개 돌리기 시작하면 또 아무 것도 아닌... 뭐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몇 년 만에 다시 꺼내든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긴 후 내가 향한 곳은 <지울 수 없는 역사 - 일본군 '위안부'>라는 제목의 강연장이었다. 열변과 울분에 목이 메이고 말을 잇지 못하는 강연자의 절절한 이야기는, 그래도 대략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오만을 고개 숙이게 했다. 하지만 비 오는 날에만 가방 안에 넣어다녔음에도 책은 비에 젖지 않았고, 오 년 만에 다시 만난 안 데바레드의 불안과 간구 역시 여전히 마음벽을 긁어댄다. 빗물 따위로 잠재울 수 있는 거라면 그렇게까지 부유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마음마저 재단하려는 어설픈 욕심의 어리석음을 다시 확인했을 뿐. 시간이 흘러 낯설어진 것이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제 담담히 받아들이는 게 좋겠다.


2006-07-22 01:40, 알라딘
 



모데라토칸타빌레((문지스펙트럼:외국문학선19)
카테고리 소설 > 프랑스소설
지은이 마르그리트 뒤라스 (문학과지성사,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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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